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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에 떨어져도 출근을 해야 하는구나 97화


현관에서 구두를 발견했을 때, 처음에는 백사헌 이 자식이 드디어 사택으로 퇴근했구나 싶었다.

‘며칠 만에 용기가 생겼나.’

아니면 내가 오늘 괴담에서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카더라를 입수하고 얼른 들어왔나 했다.

‘하지만 난 지금 퇴근했지.’

그래서 지금 방에 있을 녀석에게 어떻게 대응할까 고민하던 찰나였다.

-이런, 노루 씨. 당신의 이야기를 듣자니, 약간의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만!

오해?

-그 구두는 저녁마다 항상 같은 자리에 있었답니다, 친구.

“……!”

뭐라고?

아니다. 분명 첫날에 나갈 때도 이 현관에는 아무것도…….

‘…잠깐만.’

나는 문득, 백사헌을 마지막으로 봤던 때를 떠올렸다.

세광공업고등학교.

대치 중이던 재난관리국과 현장탐사팀 사이에서 혼란을 일으키고 아이템을 들고 도망가던 모습.

그리고 그 녀석이 들고 있던 만년필 모양 아이템의 효력은….

‘세뇌.’

“…….”

나는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은반지.

내가 오늘 구매한 정신 방어용 아이템.

‘…아하.’

그랬던 거였나.

백사헌은 그간 나보다 먼저 나가고 나중에 들어오거나, 아예 다른 곳에서 출퇴근하던 게 아니었다.

녀석은 계속 사택에 귀가했었다.

단지, 나에게 암시를 걸어두었던 것이다.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하지만 지금 나한테는 안 통한 거지.’

나는 정신을 방어해 주는 은반지 덕에 며칠 만에 처음으로 백사헌의 구두를 ‘목격’한 것이다.

“…하.”

나 원 참.

안 그래도 몸도 안 좋고 힘들어 죽겠는데, 집에서 이딴 것까지 신경을 써야 한다니…….

-아, 퍼즐처럼 완벽하고 기분 좋게 들어맞는 추리였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속이려고 든 자는, 대가를 치르는 것이 전통적이고 교훈적인 플롯이지 않습니까?

브라운의 목소리에 음흉한 즐거움이 깃든다.

원래라면 기겁했겠지만….

음.

‘브라운.’

-왜 그러지요, 친구?

‘지금부터 재밌는 일을 하나 해볼까 하는데, 어때.’

나는 두통이 이는 머리로도 씩 웃었다.

‘네 취향일 거야.’

-…!!

* * *

‘휴.’

백사헌은 현관의 소음이 가시자마자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저 새끼는 빨리 자기 방에 안 들어가고 대체 뭘 한 거야.’

세광고등학교에서 나온 지도 벌써 며칠째. 그는 더없이 조용히 사택에서 은둔생활을 하고 있었다.

김솔음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

‘…처음엔 그냥 X 됐다고 생각해서 쓴 건데.’

아침에 눈 뜬 순간, 옆방에 사이코패스가 자신에게 앙심을 품고 기다리고 있는 상황을 생각해 봐라!

김솔음을 마주하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자신의 흔적이나 기척을 인지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었다.

‘진짜 괜찮은 아이템 맞았잖아.’

저 사이코패스가 전혀 눈치를 못 챘으니 말이다!

그러면서도 혹시라도 암시가 풀릴까 봐 사택 내에서 필사적으로 피해 다니고, 방 안에서도 쓸데없는 기척은 내지 않았다.

좀 더 강한 세뇌나 암시를 걸어볼까도 생각했지만, 혹시 실패했을 때의 결과가 공포스러워 못 했다….

그래도 말이다.

‘…슬슬 좀 더 강한 것도 걸어볼 수 있지 않나?’

며칠째 암시가 성공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이 정도면 모험을 해봐도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슬그머니 올라오고 있었다.

뭐, 회사에서 여차하면 몸 날려서 자신을 구하게 만든다든가. 좋은 아이템을 구해오면 자신에게 넘기고선 잃어버렸다고 착각하게 한다든가….

‘흠.’

게다가, 듣자 하니 이번에 김솔음이 들어간 어둠은 이런저런 장비와 아이템을 구할 수 있는 골목이라고 했다.

같은 조에 장허운에게 들은 소식이었다.

‘…부럽다.’

백사헌은 자신의 조에 온 마무리팀이었던 동기를 떠올리며 짧게 주먹을 쥐었다.

자신에게도 아이템을 구할 기회가 필요했다. 더 많은 기회가…!

회사 동기들에게 암시를 걸어서 그 자식들 아이템을 살살 빼돌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지금은 그게 안 되잖아!’

만년필로는 한 번에 한 명 밖에 암시를 걸 수 없었다. 김솔음에게 전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상 다른 이에게는 사용이 요원한 것이다.

좀이 쑤셨다.

‘역시 김솔음한테서 뭘 좀 더 뜯어내야 해.’

지금이 딱 그 타이밍이었다.

‘계획을 세워보자.’

일단 오늘 김솔음이 잠들면, 만년필을 사용해서….

그는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물을 마시기 위해 문을 열었다.

그리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

어두운 주방에 김솔음이 있었다.

그는 식탁에 앉아서, 뭔지 모를 과자 같은 것들을 늘어놓고 포장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식탁 중앙에는 방석에 놓인 복슬복슬한 봉제 인형이 있었다.

‘브라운’이라고 김솔음이 부르며 매번 끼고 다니는, 그 소름 끼치는 토끼 모양 인형이.

“뭐? 싸구려 같다고?”

움찔.

“맞아. 어느 정도는 그런 컨셉의 과자겠지. 문방구였으니까.”

‘저 미친 새끼.’

또 인형이랑 대화를 나누고 있다.

‘왜 자기 방에 안 들어가고 아직도 여기 나와서 저 지랄이냐고…!’

백사헌은 진저리를 치며 다시 자기 방에 들어가려고 했으나… 멈칫했다.

자연스럽게 마주친 건 차라리 기회 아닐까?

따로 시도할 것 없이, 암시를 강화하기 딱 좋은 타이밍 같았다.

“…….”

백사헌은 결심하고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조용히 발을 옮겼다.

“그래. 하지만 이런 아이템에도 나름대로 효력이 있어.”

김솔음의 등으로.

혼자 떠들고 있는 그 사이코패스의 바로 뒤로 가서, 만년필을…….

“지금 내 뒤에서 지나가는 룸메이트의 만년필처럼 말이지.”

“…….”

아.

백사헌은 피가 식는 기분으로 얼어붙었다.

“브라운, 그거 알아? 내 룸메이트는 날 세뇌해서 조종하려고 했다니까.”

“…….”

“그래. 나는 빚을 갚으려고 선물까지 준비해 왔는데 말이지….”

김솔음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빠르게 말하면 다시 피를 토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지만, 작열통과 피로 때문에 낮아진 목소리에 피비린내까지 더해지며….

그 모든 게 더 위협적이고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예의가 아니지 않나?”

김솔음이 과자를 식탁에 내려놓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예의가 없는 사람은… 룸메이트가 될 자격이 없는 것 아닐까.”

“…!!”

눈이 마주쳤다.

‘X발 X발 X발…!’

들켰다.

어떻게 안 거지? 아니 그건 지금 중요하지 않았다. 이건 들켰다. 무조건, 무조건, 무조건!

“나, 나갈게요!”

백사헌은 머리도 거치지 않고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주임님! 저한테 자격 없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바로 나가겠습니다! 당장 나가서 다신 안 들어올게요!”

김솔음은 인상을 찌푸렸다.

“머리 울리잖아. 에티켓 몰라? 야밤에 공동주택에서 소리를 왜 질러.”

X발…!

백사헌은 온갖 쌍욕을 속으로 주워섬기면서도 자동으로 입을 다무는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브라운.”

그 와중에 김솔음은 또 토끼 인형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시끄럽지만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들으니까… 여기서 살 자격이 없어도 기회는 한 번 줘야 할 것 같아.”

뭐?!

“필요 없….”

“필요 없다고?”

김솔음이 휙 고개를 돌렸다.

“여기서 살 기회가, 필요 없다고?”

“…….”

왜 저게 ‘여기서 살아남을 기회가 필요 없다고’로 들리는 건데…?

백사헌은 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필요합니다.”

“그렇지?”

“예….”

“좋아. 그럼 아이템 넘겨.”

“……!”

“네가 쓰던 만년필. 포스트잇에 문구를 적어서 붙이면 그 문구 그대로 암시가 되는 아이템.”

“…….”

“네가 또 이상한 짓을 할지도 모르니까, 한동안은 다른 곳에 둬야겠어.”

대체 그걸 어떻게 아는 건데.

백사헌은 뒷목을 타고 오르는 공포 속에도 이를 악물었다.

“못… 줘요.”

“…….”

“새, 생각해 보세요. 주임님. 솔직히, 내가 한 행동이 주임님한테 폐를 끼친 건 없잖아요.”

그가 다급하고 절박하게 말했다.

“필요한 물건입니다. 도저히 누굴 줄 수가 없어요. 김 주임님한테 다신 안 쓸 테니까, 좀…….”

“음.”

김솔음이 무표정으로 대꾸했다.

“왜 내가 그 말을 믿을 거라고 생각해?”

“…!”

“좀… 스스로 돌아봐.”

김솔음이 백사헌을 가리켰다.

“난 네가 아이템을 얻은 그 세광공업고등학교로 확정 진입 방법을 알려줬지, 그 안에서 날 죽이려고 들었어도 화도 안 냈지….”

담백한 사실이었다.

“근데 돌아온 게 세뇌잖아? 널 믿을 이유가 없어.”

“…….”

그건, 그건…….

맞는… 말일지도 몰랐다.

눈앞의 주임은 미친 새끼일지 몰라도 아주 유능했고, 이렇게까지 척지는 건… 오히려 내가 미친 짓을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뭐지? 뭐지?’

난 잘못된 선택을 한 건가?

백사헌의 머릿속이 팽팽 돌아가고, 미약한 죄책감과 자괴감, 강력한 공포가 합리의 이름으로 뒤섞이며 치열히 공방했다….

그리고 그때.

“하지만 어쨌든 네가 챙긴 아이템은 맞으니까, 음… 보상을 하나 걸까.”

어?

김솔음이 주방 식탁 의자에 올려두었던 무언가를 꺼냈다.

투명하게 포장되어 있는 그것은….

“왼쪽 눈이야.”

이런 X발!!

백사헌은 보랏빛 홍채를 이리저리 움직이는 검은 동그라미를 보고 비명을 참았다.

하지만….

“이건 그냥 눈이 아니야. 생체 장비지.”

“…!”

“어떤 능력을 가진 장비냐면….”

김솔음이 ‘눈’의 능력을 설명했다.

뒷말이 이어질수록 백사헌의 표정이 점차 변했다.

“…….”

“필요해?”

백사헌은 이를 악물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았지만.

“…예.”

그는 자진해서 만년필을 반납했다.

그리고 기대와 혼란으로 떨리는 손으로, 김솔음이 내미는 생체 장비를 받았다.

* * *

‘휴우.’

진땀이 다 나네.

나는 마침내 백사헌과의 대화를 끝낸 후, 두통과 각혈로 고통받으면서 내 방 침대에 앉았다.

아픈 티 안 내고 참은 게 용했다.

‘그래도 기세에서 안 밀린 거 맞지?’

와, 중간에 눈 까뒤집고 달려드는데 움찔할 뻔했다. 몸도 아픈데 왜 이러고 있어야 하나 현타도 오고 말이다….

하지만 당장 제대로 짚어야 했다.

세뇌 아이템을 가진 소시오패스를 사흘 간 아플 내 주변에 방치할 수는 없었다.

‘당근과 채찍을 잘 쓴 것 같다.’

나는 내 손을 떠난 보라색 눈을 떠올렸다.

나한테는 위협적이지 않지만 백사헌에겐 도움이 될 기능이 붙은 물건이었다.

뭐, 마침 왼눈이라서 저쪽은 적출 안 해도 쓸 수 있기도 했고.

아무튼 하필 저 자식이랑 룸메이트 엮여서… 아니, 생각해 보니까 고영은 씨나 장허운 씨가 특수 케이스고 백사헌은 그냥 회사 평균 인성 같기도 했다.

이 동네엔 소시오패스가 무슨 발에 차이도록 많더라고!

‘이런 건 생각할수록 우울해지니, 그냥 좋은 걸 떠올리자….’

가령… 앞으로 있을 선물 증정식 같은 거 말이다.

“브라운.”

나는 몸을 일으켜서, 문신 속에 잘 보관해 두었던 물건을 꺼냈다.

바로 부티크에서 거스름돈 대신 화끈하게 구매했던 리본 머리끈을.

“선물이야.”

-…!

“괜찮아? 사실 미리 짐작했을 것 같긴 했는데.”

미학적 관점에 안 맞으면 이제 식은땀 줄줄 흘리면서 다른 공물을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브라운에게서 나온 건 기쁜 목소리였다.

-아, 너무나 심증이 확실한 상황이었긴 하지요!

-짐작하지 못했다면 그것도 쇼 호스트로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만… 다 눈치챘다는 티를 내는 것도 엔터테이너로서 하면 안 되는 일이니까요.

-자, 그러면 이 솜 든 몸에도 드디어 용모를 단정히 갖출 수 있겠군요.

드물게도 약간 기대감으로 떨리는 말투였다.

‘다행이다.’

나는 웃으며 봉투에서 꺼낸 머리끈을 잘 조절한 후, 복슬복슬한 토끼 인형에게 나름대로 맵시 있게 잘 매줬다.

“지금까지 고마웠어, 브라운.”

동그란 단추 같은 토끼의 눈이 허공을 보다가, 내가 시선을 떼는 순간 유쾌한 사회자의 응답을 돌려준다.

친구로서 당연한 일을 한 것이지요, 노루 씨.

어쩌면 그 리본 머리끈은 아주 고급스럽고 그럴싸해 보인다는 것 외에는 효과가 없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보타이를 목에 건 브라운의 목소리에서는 기쁨이 넘쳤다.

-용모단정 역시 관객들 앞에 서는 자의 필수 교양 아니겠습니까?

브라운은 내가 몇 번이고 정확한 각도를 찾아 보타이를 고쳐주는 것을 매우 기껍고 즐겁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동시에 취침을 재촉하기도 했다.

-노루 씨, 컨디션 유지는 프로의 기본 소양이지요. 휴식도 중요한 일이니, 오늘은 얼른 꿈나라로 가는 편이 좋겠군요!

“그래.”

착한 친구에게 선물 증정식. 이 정도면 그래도 오늘 일어난 일 중에 보람 있는 일이다….

원래라면 위키를 한 번 더 일독하겠지만, 아픈 나도 고장 난 스마트폰도 그럴 기력이 없을 듯했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새 폰을 사든 수리를 하든 하지 뭐….’

어차피 메모리얼 그립톡만 멀쩡하면 폰은 갈아 끼워도 위키 보는 것에는 아무 지장 없다.

나는 침대에 편안하게 누웠다.

그리고 일단 고장 난 스마트폰에서 그립톡을 분리…….

“…….”

친구?

나는 황급히 스마트폰을 뒤집었다.

그립톡에, 금이 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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