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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1016화


그림천하 (1016)

‘더 늦기 전에 가야 한다.’

유소응은 마침내 마음을 결정하고 방문 앞으로 다가섰다.

한 번 더 호흡을 가다듬은 다음 비로소 문을 살짝 두드렸다.

“사고. 소응입니다.”

안에서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들려왔다.

“들어오너라.”

유소응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상당히 더운 날임에도 방안은 왠지 바깥과는 달리 서늘한 것 같았다. 단순한 착각이 아니라 실제로 공기가 차갑다는 것을 이내 알 수 있었다.

한기는 방의 한쪽에 있는 침상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그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창백한 안색의 여인을 보는 순간, 유소응은 참지 못하고 그녀를 향해 넙죽 엎드리고 말았다.

“사고…….”

무어라 말하려고 했지만, 입을 열면 무언가 이상한 것이 대신 터져 나올 것만 같아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당산을 떠나자마자 벌어진 갑작스러운 습격으로 사고와 헤어진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 사고의 안색은 백지장보다 더욱 창백했고 몸에서는 끊임없이 한기가 흘러나오고 있어 살아 있는 사람 같지 않았다.

그녀를 지켜 주지 못했다는 잘못을 빌기 위해 어렵게 용기를 내어 찾아왔건만, 막상 사고의 모습을 직접 보니 유소응은 용서를 바란다는 말조차 내뱉을 수가 없었다.

환상적인 검무와도 같은 현란하고 아름다운 동작으로 그 무서운 형산파의 비성흔을 꺾을 때의 그녀는 정말 하늘에서 내려온 신녀(神女) 같았는데, 지금의 모습은 도저히 같은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낯선 것이었다.

조사전에서 제례를 올릴 때는 거리도 떨어져 있고 많은 사람들에 가려져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가까이에서 본 그녀의 몸 상태는 듣던 것보다 훨씬 더 나쁜 게 분명했다.

아직 나이가 어리고 세상의 경험이 많지 않은 유소응은 이런 그녀를 앞에 두고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다만 작은 가슴이 너무도 답답하고 목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를 것만 같아 이를 악문 채 고개만 떨구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그녀의 나직하면서도 영롱한 음성이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보겠니?”

유소은 간신히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핏기 한 점 없는 창백한 얼굴의 그녀를 보자 다시 가슴이 미어져 왔으나, 그를 보는

그녀의 두 눈은 오히려 여느 때보다 더욱 부드럽고 따스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왜 그런 얼굴로 나를 보는 거니?”

“제・・・・・・ 제가 사고를 제대로 지켜 주지 못해서…….”

얼핏 그녀의 핼쑥한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니다. 너는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나를 지켜 주었다. 그때 악적들 앞을 막아서던 너와 손풍의 모습이 얼마나 의젓하고 멋있었는지 지금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지.”

유소응의 작은 얼굴이 가늘게 떨렸다.

무어라고 말하려 했으나, 목에 무언가가 걸린 듯 입 밖으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임영옥은 온화한 눈으로 그를 보며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너는 최선을 다해 나를 지켜 주었다. 그 이상을 바란다면 그건 무모한 욕심인 거야. 나는 오히려 너희 두 사람이 모두 무사한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너를 만나면 고맙다는 말을 꼭 해 주고 싶었는데. 네가 먼저 나를 찾아왔구나.

“고마웠다, 소응. 고생 많았다.”

유소응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외할아버지인 부쿠 메르겐이 죽은 후로 자신에게 더 이상 눈물을 흘리는 일 따위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남에게 채찍을 맞고 친할아버지에게조차 험한 꼴을 당해도 굳건하던 마음이 부초처럼 흔들리며 두 눈을 조금씩 뜨겁게 만들고 있었다.

“너는 본 파의 훌륭한 제자가 될 거야. 나는 이미 널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걸 알고 있었지. 그러니 이제 자책 같은 건 하지 말고 어깨를 펴고 일어나렴. 신검무적의 제자는 언제나 당당한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유소응은 한 차례 숨을 삼킨 후, 목소리가 떨려 나오지 않도록 조심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사고.”

“고개를 들렴.”

유소응은 최대한 어깨를 펴고 고개를 쳐들었다. 적어도 사고 앞에서 나약하고 형편없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임영옥은 가슴을 내밀고 우뚝 서 있는 유소응의 모습을 보고는 활짝 미소 지었다.

“그래. 늘 그런 모습을 유지하려무나. 네 사부가 네게 준 검이 견정검이라고 했지?”

“예.”

“그 검명의 의미를 알고 있니?”

“처음 정한 마음을 결코 잃지 말라며 붙여 주신 이름입니다.”

“그래. 네가 한번 뜻을 세우면 하늘조차 떨게 하는 검객이 되길 기대하마.”

그녀의 말에 유소응은 그 어느 때보다 다부지고 힘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고의 말씀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이날 시작된 것이었다. 훗날, 강호를 석권하며 종남파의 최고 성세를 이끌었던 종남칠걸(終南七傑)의 우두머리인 진천검(振天劍) 유소응의 ‘일견진천(堅振)’ 신화는

유소응이 임영옥의 방을 막 나왔을 때, 한 사람이 방문 근처에서 서성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유소응은 황급히 그에게 다가가 머리를 조아렸다.

“사부님. 언제 오셨습니까?”

진산월은 담담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에 왔다.”

유소응은 항상 냉정하리만치 침착한 아이였으나, 이때만큼은 난처하고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것도 모르고 사부님을 밖에서 기다리게 했으니 제 죄가 큽니다.”

“아니다. 잠시 생각할 것이 있어서 주위를 배회하던 것이니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하나 아무리 어린 유소응이라도 진산월이 자신과 임영옥의 대화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밖에서 기다려 주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유소응은 하늘 같은 사부를 문밖에서 기다리게 했다는 게 너무 죄송하고 송구스러워서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그때 진산월이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얼핏 듣기로는 사고가 너에게 앞으로는 어디서도 당당한 자세를 유지하라고 했던 것 같은데, 벌써부터 사고의 말을 어길 셈이냐?”

유소응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몸을 똑바로 했다.

“아닙니다. 제가 어찌 사고의 말씀을 어길 수 있겠습니까?”

진산월은 우뚝 선 자세를 취하고 있는 유소응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그래, 지금의 자세를 잊지 마라.”

“명심하겠습니다.”

진산월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임영옥의 방으로 향했다.

방문을 열고 들어오자, 침상 위에 앉아 있던 임영옥이 그를 향해 미소 지었다.

“아까 왔으면서 왜 안 들어오고 밖에서 서성이고 있었어요?”

진산월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두 사람이 제법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기에 들어올 수가 있어야지.”

“호호. 아무튼 사형 덕분에 소응의 귀엽고도 멋진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그 아이가 제대로 자세를 잡으니 무척 준수하더군요.”

“몸의 유연성이 좋아서 그래. 그래서 예전부터 어려운 동작도 곧잘 따라 했지.”

“그 아이의 진경은 어느 정도인가요?”

“태을신공은 삼성을 조금 넘어서서 이제 제대로 틀이 잡혔어. 장괘장권구식은 모두 익혔고, 천하삼십육검은 전반부의 열두 초식을 거쳐서 지금은 중반의 초식들을 배우고 있지.” 

임영옥의 아름다운 눈이 크게 뜨여졌다.

“진도가 정말 빠르군요. 벌써 찬하삼십육검의 중반에 들어섰다니.”

“검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좋고, 동작이 유연해서 검법을 습득하는 게 무척 빨라. 본인도 권장(拳掌)보다는 검을 더 좋아하는 것 같더군. 저 녀석은 천상 검객이 될 거야.”

임영옥은 진산월을 빤히 바라보았다.

“누구처럼 말이지요?”

“그럴지도.”

진산월이 부인하지 않자, 임영옥은 하얀 이를 살짝 드러내며 살포시 웃었다.

“그 사부에 그 제자라니 정말 장래가 기대되는군요. 그런데 태을신공만 익히기에는 조금 아쉽지 않아요?”

태을신공은 체질을 개선하고 무공의 기초를 닦기에는 더할 수 없이 효과적인 신공이었다. 하나 너무 수비적인 면이 강해서 제대로 된 고수의 바탕이 되기에는 아쉬운 면이 적지 않았다.

진산월이 본격적으로 절정의 검객에 이르게 된 것도 태진강기를 익힌 다음부터였다. 물론 태을신공으로 기초를 닦은 것이 커다란 보탬이 되기는 했으나, 결정적인 요인은 패도적인 태진강기를 습득했기 때문이라는 건 진산월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기초가 닦였으니 이제 슬슬 다른 신공을 가르쳐 볼 생각이야.”

“어떤 신공인가요? 사형이 익혔던 태진강기?”

태을신공에 이어 태진강기를 배운다면 진산월이 밟았던 길을 그대로 따라가게 되는 것이다.

신검무적의 길을 따르는 것은 검을 배우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꿈과도 같은 선망 어린 일이 될 게 분명했다. 그의 제자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하나 진산월은 고개를 저으며 전혀 다른 이름을 내뱉었다.

“구양신공.”

임영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아직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사형도 완벽하게 익힌 상태가 아니지 않아요?”

“요새 계속 구양신공을 연구하고 있는데, 파면 팔수록 구양신공이야말로 본 파의 여러 가지 신공들 중 가장 뛰어난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특히 검법을 익히는 자에게는 제일 효과적인 신공일 거야.”

구양신공은 원래 태을검선 매종도가 주력으로 익혔던 신공으로, 그의 사후 누구도 완벽히 익히지 못하고 사라진 종남파 최고의 내공절학이었다.

조익현과 조여홍 남매에게 전해졌다. 매종도는 구양신공만으로 육합귀진신공을 이룰 수 있는 길을 모색하다가 천양신공을 만들어 그걸 후세에 남겨 놓았고, 천양신공은 조일화를 거쳐

조익현은 비선 조심향이 창안한 현음진기를 익히고 있었기에 그 비결은 결국 조여홍의 손을 거쳐 석동에게 전해졌다. 석동은 천양신공을 익혀 최고의 고수가 되었지만, 천양신공 특유의 부작용에 오랫동안 시달려야만 했다.

그는 그 부작용을 없애기 위해 천양신공을 파해하여 그 원류인 구양신공으로 되돌리려 했고, 수십 년의 세월 끝에 결국은 구양신공을 완벽하게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구양신공은 석동의 제자인 모용단죽을 거쳐 진산월의 손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참으로 파란만장한 흐름이었으나, 매종도의 사후 끊어진 구양신공의 비결이 이백 년의 시공을 초월하여 다시 종남파 장문인의 손에 돌아오게 된 것은 운명과도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확신이 들었다. 구양신공을 얻은 후 진산월은 틈틈이 그 비결을 연구해 왔는데, 익히면 익힐수록 무공 자체의 위력은 구양신공이 다른 어떤 신공보다 뛰어나다는

특히 남자들에게는 더할 수 없이 효과적인 신공이었다.

남자라면 누구나가 갖고 있는 체내의 양기(陽氣)를 북돋아 최고의 진기로 바꾸는 효능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신공 자체의 효용성 또한 놀라워서 두뇌를 맑게 하고, 진기의 흐름을 매끄럽게 하며, 인체의 근육과 신경조직도 강화시키는 그야말로 무인에게 꼭 필요한 요소들을 두루 가지고 있었다.

이백 년 전에 정립병이 끝내 매종도를 넘지 못한 것은 두 사람의 본질적인 자질도 차이가 있지만, 구양신공과 태진강기라는 두 신공절학도 하나의 요인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진산월의 조심스러운 추측이었다.

그 정도로 구양신공은 가히 놀라운 신공절학이었다.

진산월이 구양신공을 유일한 제자인 유소응에게 전하려 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이왕이면 아끼는 제자에게 최고의 신공을 가르치려는 것은 사부로서의 자연스러운 욕망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유소응에게 구양신공을 가르치면서 좀 더 자세하게 구양신공의 비결을 파해하고 분석해 보고자 하는 생각도 있었다.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말처럼 그러한 행동 자체가 진산월에게는 최고의 수련이 될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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