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978화
군림천하 (978)
진산월이나 전흠이 일부러 시간을 늦추거나 지체했을 리는 없으니, 조여홍으로서는 그저 모든 일이 하늘의 심술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 녀석은 첫째로 태어났으니 원래라면 석가장을 물려받았어야 했다. 어려서부터 누구보다 영민했고, 맏이답게 책임감도 강해서 동생을 잘 보살펴 주기도 했지. 좋은 아들이었고, 착한 형이었으며, 가문의 훌륭한 후계자가 될 수 있는 아이였다.”
그녀의 음성은 나직했으나, 그 안에는 말로 형용 못 할 비통함과 애절함이 담겨 있었다.
“아마 그 일만 없었어도 그렇게 되었겠지. 그랬다면 남의 손에 그토록 허무하게 쓰러지는 일도 없었을 거야. 아암, 적어도 이 늙은 애미를 홀로 두고 먼저 가는 일은 없었겠지.”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무심해 보였으나, 목소리는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모든 게 다 그날 벌어진 일 때문이었다. 조익현과 석동이 내 앞에서 미친 듯이 싸우고 집안을 풍비박산으로 만든 채 뛰쳐나가 버리던 그날, 그날 이후 정말 많은 게 변해 버렸지.”
“그들에게 두 번 다시 휘둘리지 않기 위해 신목령을 만들어 그 녀석에게 맡겼는데, 그 후로 그 녀석은 단 한 번도 마음 편히 쉬지 못하고 홀로 힘들고 먼 길을 헤쳐 가야만 했지. 그런데 결국 이런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으니, 어미로서 그 녀석을 볼 낯이 없구나.”
진산월은 묵묵히 그녀의 한탄을 듣고만 있었다.
석호에 대해서는 진산월도 몇 번인가 들은 적이 있었다.
손검당은 그가 전대 가주인 석담의 형으로, 무공에 재질이 뛰어나서 결국 그 때문에 가주가 되지 못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남편인 석동이 무공에 미쳐 집을 나간 것에 분노한 조여홍이 아들인 석호가 무공에 소질이 있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다는 것이 그의 의견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말을 들어 보면 그녀는 조익현과 석동에 맞서기 위해 신목령이란 조직을 만들고 무공 습득이 탁월한 석호를 그 수장에 앉혔던 것이 분명했다.
그녀로서는 석호 외에 다른 사람을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가장 믿을 수 있고, 무공에 대한 자질이 뛰어난 석호만이 그녀가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 후로 석호는 석가장의 후계자라는 자리에서 벗어나 신분을 숨긴 채 신목령주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것이다. 석호가 그러한 자신의 삶을 좋아했을지 아닐지는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한동안 조여홍은 밀려오는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아무런 말이 없었다.
백 년을 넘게 살아오면서 이제는 오욕칠정 같은 것에 무뎌질 대로 무뎌졌다고 생각했건만, 한번 터진 격한 감정의 봇물은 멈출 줄을 몰랐다.
그녀의 뇌리에는 처음 검을 들고 활짝 웃으며 자신을 향해 미소 짓고 있던 어린 시절의 석호의 모습이 선연하게 떠올랐다. 그때의 석호는 그렇게 밝게 빛나고 있었건만, 신목령을 맡은 후 그는 그런 표정을 지은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조여홍은 다시 한 번 되짚어 보고 나서야 자신이 지난 수십 년간 단 한 번도 석호의 웃는 얼굴을 본 기억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호아야. 너는 어떤 삶을 살았던 거니? 분명히 우리도 한때는 행복했었는데……………?
그녀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한참 후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주위가 이미 컴컴해진 늦은 밤이었다.
그녀는 그때까지도 자신의 옆에 조용히 서 있는 진산월을 보고는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기다려 주어 고맙군. 못난 꼴을 보이고 말았어.”
“아닙니다. 령주의 죽음은 저도 애도하고 있습니다.”
“비록 조익현과 사이가 좋지 못하긴 했지만, 그가 이토록 노골적으로 나를 향해 이빨을 드러낼 줄은 미처 몰랐다. 결국 나는 아직도 세속의 정을 끊지 못하고 핏줄에 연연해 있었던 거지. 그에 비해 조익현은 혈연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해치우기로 결심했던 거야.”
듣고 보니 신목령주 석호는 조익현의 조카였다. 쾌의당주 감종간이 조익현의 제자임을 생각해 본다면 결국 삼촌이 제자를 보내 조카를 살해한 셈이었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겠느냐?”
조여홍이 진산월을 향해 묻자 진산월은 차분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이제는 남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고 확신한 거겠지요.”
“그래, 나나 석동, 아니 세상의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자신이 있기에 그런 짓을 행한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겠느냐?”
“세 개의 취와미인상을 모두 얻었기 때문이겠지요.”
“맞다. 취와미인상을 모두 확보하고 그 안의 절학들을 완성했기에 비로소 자신의 야욕을 마음껏 드러내어도 된다고 판단한 것이지. 그럼 그의 다음 행보가 무엇일지 짐작할 수 있겠느냐?”
진산월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을 깨끗하게 마무리 지으려 하지 않겠습니까?”
조여홍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내걸렸다.
“원래대로라면 그러했겠지.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진산월은 그녀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원래라면 그는 나를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낙양으로 달려왔을 것이다. 어쩌면 이미 낙양에 와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왜 그렇습니까?”
조여홍은 진산월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여전히 무심한 듯한 시선이었으나, 그 안에는 한 줌의 열기가 담겨 있었다.
“너 때문이다.”
“저 때문이라고요?”
“그렇다. 네가 공가장에서 벌인 일 때문에 그는 쉽게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진산월은 공가장에서 쾌의당주를 비롯한 세 명의 용왕을 모두 쓰러뜨렸다. 그것은 조익현이라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을 것이다.
“조익현은 신중하기 이를 데 없는 인물이다. 자신이 아끼는 쾌의당주와 용왕들이 모두 너의 손에 쓰러진 이상, 그는 너를 경계해 자신의 행보를 바꾸려 할 것이다.”
조익현이 신중한 성격이라는 것은 진산월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몸을 회복한 후 구궁보에 들어가 가짜 모용단죽 행세를 하며 시간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며, 자신에 맞서 오는 신목령과 천봉궁을 몇 년 동안이나 가만히 보고만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석동을 노릴 것 같지는 않군요.”
조여홍의 입가에 의미를 알기 힘든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석동이 어디에 있는지 조익현이 모르지 않습니까?”
“왜 모른다고 생각하지?”
진산월은 그녀의 말에 머리를 망치로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조익현이 석동의 행방을 알고 있습니까?”
“그렇다. 조익현도 알고, 나도 알고 있지.”
“그런데 왜…….”
“그런데 왜 조익현이 진즉에 석동을 찾아가지 않았느냐는 것이지?”
진산월은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모용단죽의 입으로 직접 조익현을 피해 구궁보를 나왔다고 들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당연히 조익현이 석동을 찾아 구궁보를 장악하고 있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조익현이 진정으로 석동을 찾을 의중이었으면 구궁보는 오히려 피해야 할 장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익현이 구궁보에 있는 한 석동이 제 발로 구궁보에 나타날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조여홍은 진산월을 똑바로 응시하며 낮고 서늘한 음성으로 물었다.
“너는 석동이 누구와 있다고 생각하느냐?”
조여홍의 질문은 조금 이상한 것이었다.
그녀는 석동이 어디에 있는지 묻지 않고 누구와 있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그 질문에 담긴 의미를 생각하던 진산월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석동은 천봉궁에 있군요. 그가 백모란과 함께 있기 때문에 조익현은 그를 찾아가지 못했던 겁니다. 두 사람을 한꺼번에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말이지요.”
조여홍은 차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들은 한 쌍의 원앙처럼 늘 붙어 있지.”
진산월은 머릿속으로 온갖 상념들이 떠올랐으나,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 어떤 말을 해도 조여홍에게 상처를 주는 것일지 몰랐다.
조여홍은 그의 의중을 짐작한 듯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내가 석동에게 아직도 부부의 정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내게 그는 진즉에 떨쳐 버려야 했을 과거의 잔재일 뿐이다.”
진산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인간의 정(情)이 어찌 자신의 마음대로 맺고 끊을 수 있겠는가? 조금 전에도 그녀는 스스로의 입으로 아직 세속의 정을 끊지 못했다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석동은 과거 조익현과의 싸움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그 부상은 치명적인 것이어서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고칠 수가 없었다. 있다면 오직 한 가지, 천하에서 가장 극음의 진기를 주입받는 방법뿐이었다.”
조여홍의 말에 진산월은 내심 탄식이 흘러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천하에서 가장 극음의 진기로 내상에 최고의 효과를 지닌 것은 칠음진기와 그에게서 파생된 현음진기뿐이었다.
그리고 당금 강호에서 그 신공을 익힌 사람은 오직 둘뿐이다.
백모란과 조여홍.
과거의 연인과 부인 중 석동이 택한 사람은 바로 과거의 연인이었다.
진산월은 조여홍이 왜 석동이라는 이름을 꺼낼 때마다 그토록 차갑고 냉랭했는지 이제야 비로소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왜 석동을 과거의 잔재라고 표현했는지 그 심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조여홍은 뼛골이 시릴 듯 냉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석동은 열흘에 한 번은 무조건 칠음진기의 치료를 받아야만 연명할 수 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니 영원히 그녀의 품속에서 벗어날 수가 없겠지. 그에게 아주 어울리는 결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천하의 기재이며 조익현과 오랫동안 강호 무림을 놓고 치열한 싸움을 벌여 온 석동이 한낱 여인의 품속을 전전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조여홍은 조익현이 석동을 찾아가지 못하는 이유를 말해 주었다.
조여홍도 아니고 석동도 아니라면 조익현의 다음 목표는 과연 누구일까?
진산월은 이내 한 사람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는 야율척을 제거하려 하겠군요.”
조여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는 우선 야율척을 쓰러뜨려 서장 무림의 패권을 다시 되찾으려 할 것이다. 언제고 네가 낙양을 떠나면 나를 제거하고, 뒤이어 너를 없애려 하겠지. 그 후에 석동과 최후의 승부를 보려는 게 그의 계획일 것이다.”
진산월은 그녀의 말에 상당한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조익현이라도 그런 식의 행사를 하려 할 것이다.
취와미인상의 삼대절학을 완성한 이상 조익현은 일대일로는 천하의 누구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그 상대가 그가 오랫동안 경계해 오던 야율척이라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이번 기회에 목 안의 가시 같았던 야율척을 제거하여 오랜 심복우환을 없애려 할 게 분명했다.
야율척이 과연 이백 년 전의 최고 고수였던 검선 매종도의 삼대절학을 모두 익힌 조익현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인가?
조여홍은 조익현의 절대적인 우세를 점쳤다.
“조익현으로서는 야율척이 삼대절학에 접근하기 전에 그를 먼저 해치우려 할 것이다. 그러니 너는 그가 야율척을 쓰러뜨리고 너를 찾아오기 전에 한 가지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게 무엇입니까?”
조여홍은 어느 때보다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잊힌 종남파의 신공 하나를 복원해야 한다.”
진산월은 퍼뜩 고개를 들어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신공이라면…….?
조여홍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그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한 자 한 자 분명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육합귀진신공. 너는 조익현이 너를 찾아오기 전에 그 신공을 완성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