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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989화


이렇게 공개된 자리에서 이런 식으로 종남파에 도전해 오는 간 큰 작자가 있으리라고는 노해광도 미처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아직도 본 파에 이런 수작을 걸어오는 놈이 있군.’

노해광은 어디 어떤 수작을 부리는지 보자는 심정으로 빙그레 미소 지었다. 마치 먹이를 앞에 둔 호랑이와도 같은 그 모습에 그를 아는 사람들은 흠칫하여 몸을 떨었으나, 아쉽게도 국일호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기에 그 미소 뒤에 숨어 있는 흉포함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패기가 좋은 젊은이로군. 그렇게까지 정중히 부탁하는 데 거절하는 것도 도리는 아니지. 본 파 누구의 솜씨를 보고 싶은가? 특별히 원하는 사람이라도 있나?”

국일호는 노해광이 자신의 요청을 승낙할 뿐 아니라 비무의 상대자를 지목하라고 하자 내심 쾌재를 부르면서도 겉으로는 감격에 찬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과연 서안을 호령하는 분다운 호쾌한 모습이십니다. 이번에 이곳에 온 종남파의 제자들 중 저와 오래전부터 안면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자리에서 모처럼 그 친구와 어울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겠군요.”

“오, 본 파의 제자 중 자네의 지인이 있단 말인가? 그 친구가 누구인가?”

국일호의 시선이 쏜 화살처럼 한 사람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손가장의 손풍입니다.”

손풍은 국일호가 등장할 때부터 표정이 좋지 않더니 그가 자신을 콕 찍어 지목하자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제길. 어째 그냥 지나칠 것 같지 않더라니.”

노해광은 그의 그런 표정을 본 척도 하지 않고 그를 손짓해 불렀다.

“손풍과 인연이 있단 말이군. 손풍, 이리 오너라.”

손풍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노해광의 앞으로 엉기적거리며 걸어왔다.

노해광은 그 버릇없는 태도를 보고도 전혀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입가에 엷은 미소를 매달았다.

“저자의 말이 사실이냐?”

손풍은 노해광의 담담한 듯하지만 무서운 힘이 담긴 눈과 마주치자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퍼뜩 깨달았다. 이건 호랑이 입에 자기 머리통을 스스로 집어넣고 있는 형국과 다름없지 않은가?

그는 재빨리 머리를 조아리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이런 자리에서 밝힐 정도로 친분 있는 사이는 아닙니다. 그저 소싯적에 잠깐 어울린 적이 있었으나, 철이 들고 나서는 서로 각자의 길을 가느라 왕래가 전혀 없었습니다.”

손풍의 말만 들어도 노해광은 두 사람 사이가 대충 어떠한지 짐작이 갔다.

서안의 뒷골목에서 파락호처럼 지내던 손풍이 명문세가의 아들인 국일호와 제대로 된 교우관계를 맺었을 리가 없다. 필시 괄시를 받거나 따돌림을 당하다가 자연스레 사이가 멀어졌을 게 분명했다. 더구나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서너 살은 되어 보이니 손풍이 일방적으로 당하는 관계였을 게 불을 보듯 뻔했다.

노해광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별반 표정 없는 얼굴로 담담한 음성을 내뱉었다.

“그런 인연도 인연인 건 확실하지. 그리고 무릇 강호인이라면 그런 인연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한다.”

손풍은 순간적으로 욱하는 마음에 무어라고 대꾸하려다 노해광의 표정을 보고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노해광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그를 빤히 바라보며 한 자 한 자 분명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무리 사소한 은원도 결코 잊지 마라. 악연(惡緣)이라면 확실하게 매듭을 짓고, 선연(仙緣)이라면 끊어지지 않도록 잘 이어 나가야 한다. 저자와 너의 인연은 둘 중 어느 것이냐?” 

손풍은 몸을 가늘게 떨다가 한 차례 심호흡을 하고는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사숙조의 말씀이 맞습니다. 오늘 저자와의 일을 확실하게 매듭짓도록 하겠습니다.”

그제야 노해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 조금 본 파 제자의 태가 나는구나. 조금 전과 같은 맥없고 무기력한 모습은 절대로 웃어른들 앞에서 보여서는 안 된다. 더구나 이렇게 많은 이목이 집중된 자리에서는 더더욱 삼가야 한다.”

손풍은 찔끔하여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명심하겠습니다.”

노해광은 옆에서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 성락중을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자네가 저 녀석과 강호를 같이 다녔으니 잘 알겠군. 저 녀석의 장점은 무엇인가?”

손풍도 호기심이 이는지 성락중을 힐끔 쳐다보았다.

성락중은 특유의 온화한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몸이 튼튼하다는 거요.”

손풍은 내심 잔뜩 기대하고 있다가 실망한 표정이 되었다. 사실 그는 자신의 십이경맥을 뚫어 주기 위해 열흘 넘게 고생했던 성락중에게 짙은 고마움과 함께 은근한 친근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자신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할지 기대 반, 걱정 반의 심정으로 귀를 기울였는데, 단순히 몸이 튼튼하다는 말만 듣게 되자 실망스럽기도 하고 속이 상하기도 했다.

모진 고생 끝에 십이경맥을 뚫은 후 제대로 된 무공의 고수가 되기 위해 나름대로 열과 성을 다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왔건만, 아직도 다른 사람의 눈에는 자신이 몸뚱어리 튼튼한 것만 믿고 있는 한심한 놈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하나 성락중의 말을 들은 노해광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확실히 예전보다도 단단해 보이는군, 장괘장권구식은 모두 배웠느냐?” 

손풍은 그들의 반응이 알 듯 모를 듯하여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장괘장권구식이라면 눈 감고도 펼칠 수 있을 만큼 익혔습니다.”

“그렇다면 제법 좋은 승부가 되겠군. 하 사제도 저 녀석에게 한마디 해 주지 않겠나?”

하동원은 빙글거리며 웃고 있다가 손풍이 자신을 쳐다보자 그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더니 불쑥 입을 열었다.

“두려움은 네 적이 아니다.”

“예?”

손풍이 그의 말뜻을 몰라 어리둥절하여 되묻자 하동원은 조금 전보다 한층 더 진지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두려움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평생 안고 가야 할 동반자다.”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저자가 전혀 두렵지 않은데요.”

하동원은 히죽 웃으며 앞에 있는 술잔을 들었다.

“내 얘긴 모두 끝났다. 잘 싸우고 오거라.”

손풍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몸을 돌리다가 문득 낙일방을 쳐다보았다.

손풍이 가장 흠모하면서도 닮고 싶어 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낙일방이었기에 그에게서도 무언가 격려의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낙일방은 희미한 미소만 짓고 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서운한 생각이 들 법도 했지만, 입을 다문 채 살짝 웃고 있는 그 모습이 너무 멋있어 보여서 손풍은 그저 혀만 내두를 뿐이었다. 

‘낙 사숙은 정말 무슨 표정을 짓고 있어도 한 폭의 그림 같구나. 나도 저렇게 되어야 할 텐데.’

때마침 동중산이 그에게 다가왔다.

“자네가 그동안 흘린 땀과 눈물을 기억하게. 그건 결코 무의미한 게 아니었네.”

손풍은 피식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별걱정도 다 하는군. 내가 얼마나 멋진 놈이 되었는지 보여줄 테니 동 사형은 한쪽 눈이라도 크게 뜨고 지켜보도록 하시오.”

옆에서 듣고 있던 서문연상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말버릇하고는, 지고 돌아오면 그 혓바닥을 잘라서 두 번 다시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지 못하도록 만들 테니 각오해라!”

손풍은 아녀자답지 않은 험악한 소리에 뭐라고 대꾸하려다 그냥 몸을 돌리고 말았다. 여기서 어설프게 대들었다가는 나중에 본산으로 돌아가서 그녀에게 얼마나 시달릴지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손풍이 사람들의 환호성을 받으며 무대 위로 올라가자 이미 국일호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와라. 꽁무니를 뺄 줄 알았더니 그래도 여기 올라올 배짱은 남아 있구나.”

국일호의 얼굴에는 자신만만한 미소와 득의양양한 기색이 가득 담겨 있었다.

사실 국일호와 손풍의 인연은 제법 오래되었다.

손풍은 폭풍 같은 소년 시절을 보내다가 뒷골목을 기웃거리고 있을 즈음 국일호 무리와 만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서안 최대의 부자라는 손 노태야의 아들이라는 걸 알고 그에게 친근하게 대했던 국일호는 손풍이 별다른 재주가 없는 한심한 인물임을 파악하자 이내 태도가 돌변하여 그를 아랫사람 대하듯 했다.

자존심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손풍은 거칠게 그에게 대항하였고, 허구한 날 두들겨 맞는 신세가 되었다.

손풍이 발연 대노하여 그 무리를 뛰쳐나온 것은 불과 육 개월도 되지 않은 후의 일이었으나, 그때 손풍과 국일호의 사이는 남보다 못한 철천지원수가 되어 있었다. 

다만 그 후로 국일호는 쌍하보 보주의 아들답게 본격적인 무공 수련에 바빠서 뒷골목 출입을 자제하였기에 손풍이 그에게 시달리는 일은 별로 없었다. 

손풍 또한 그와 자신은 노는 물이 다르다고 생각하고 마음속의 분노를 속으로 삭여 왔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제는 잊힌 존재인 줄 알았던 국일호가 먼저 자신을 지목하여 비무를 청해왔으니 손풍 입장에서는 억울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해서 마음을 가다듬기 힘들 정도였다. 

다행히 사문의 어른들에게 충고를 듣느라 간신히 흥분을 가라앉힐 수 있었으나, 다시 국일호의 앞에 서서 그의 밉상스러운 얼굴을 보고 있자니 속에서 열불이 뻗쳐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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