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1권 : 황제 사냥꾼 [제1장] – 잠든 불씨 1
세 바다가 한 바다가 되고
모든 대지 위에서 산맥들의 질주가 멈춘
그리고, 그런 것들에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꿈의 적서가 남김없이 규정된 시대에
한 남자가 호반에 서 있었다.
“피를 마시는 새가 가장 오래 살지.”
- 키탈저 사냥꾼들의 옛이야기 중
잠든 불씨
호수의 수면 위로 여섯 개의 탑신이 얼비친다.
바람이 잔물결을 일으킬 때마다 수면은 그 위에 비치는 모든 풍경을 몽상으로 바꿔버린다. 하지만 여섯 탑신의 모습은 굳건 하다. 그 영상은 수면 위의 탑을 비추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탑들은 수면 아래에 있다.
판사이 호수.
한때는 판사이 계곡으로 불렸다. 상고토(上)의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도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던 시절, 판사이 계곡은 고 대의 추억으로 가득했다. 저 유명한 왕의 길 끝에 있는 여섯 탑 은 물론이거니와 계곡에 우거진 숲 사이로 머리를 드러낸 가장 작은 경계비조차 장려한 역사의 증거였다. 고건물들 위로 무수한 단풍잎이 흩날리는 낙엽의 계절이 오면 판사이 계곡은 대지가 은 연중에 드러낸 고대의 기억처럼 보였다.
하늘 아래 영원을 말할 수 있는 도시는 없겠지만 판사이와 같 은 종말을 맞은 도시 또한 드물 것이다. 형언할 수 없는 미증유 의 재난이 닥쳐온 그날, 강들이 노호하여 흐름을 변경하고 산허 리와 둔덕을 타넘는 파도가 되어 계곡으로 몰아쳐 왔을 때, 도시 는 영원히 수장되고 말았다.
왕의 길 끝에 열주처럼 서 있던 여섯 탑 또한 그 끔찍한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육형제탑이라 불렀던 그 여섯 탑은 판사이의 다른 부분들과 좀 다른 결말을 맞았다. 범람 한 물은 동쪽에서부터 계곡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계곡의 건물들 과 울창한 숲을 닥치는 대로 파괴한 후 기세가 약해진 채 왕의 길 끝에 도달했다. 그리고 계곡의 가장 낮은 부분인 서쪽 부분에 서 서서히 차올랐다. 그래서 육형제탑은 원형을 유지한 채 물속 에 잠겼다.
그것을 판사이가 얻은 마지막 행운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런 생각에 동의하는 것은 아닌데, 예를 들어 지금 판사이 호수의 서쪽 기슭에서 물속에 잠긴 육형제탑을 바라보는 검은 깃털의 레콘 같은 경우엔 절대로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발아래에서부터 서서히 차오르는 물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레콘은 깃털을 부풀릴 수밖에 없었다. 레콘은 황급히 뒤로 몇 걸 음 물러났다. 시야에서 육형제탑이 사라지자 간신히 숨통이 트였 다. 검은 깃털을 모조리 부풀린 채, 레콘은 차라리 급류에 파괴 되는 쪽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의견은 레콘의 뒤편에 있던 동료 또한 마찬가지인 듯했다.
“차라리 박살 나는 편이 낫지, 물속에서 저게 무슨 꼴이람.”
레콘은 눈을 부라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 말에 반대하진 않지 만 ‘물’이라는 단어를 태연히 사용하는 무신경함에는 화가 치밀 었다.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종족의 노여움에 찬 시선을 받은 것 은 한 인간 소녀였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소녀는 사과했다.
“어, 미안해요.”
소녀는 조그마했고, 레콘의 곁에 서 있기에 그 조그마함은 더욱 두드러졌다. 150센티미터를 넘길까 말까 한 소녀의 신장은 3미터 를 훌쩍 넘는 레콘의 반에도 미치지 못했고 부피로 따진다면 똑 같은 소녀가 두 자릿수 이상 모여야 비슷해질 정도다. 그 조그마 한 소녀의 얼굴에서 레콘을 되비치고 있는 눈은 오른쪽 눈뿐이 다. 소녀의 왼쪽 눈은 조그마한 얼굴이 감당하기엔 너무 큰 얼룩 처럼 보이는 검은 안대에 덮여 있다. 코는 몇 번이나 부러졌는지 짐작도 할 수 없는 선을 가지고 있었고 귓바퀴 또한 귓구멍 안으 로 들어가고 싶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 전체를 한눈에 바라보던 레콘은 부리를 딱 부딪치고는 고개를 돌렸다.
용서받은 것이다. 하지만 애꾸눈 소녀는 다시 말했다.
“미안하다고요, 지멘.”
지멘은 수염볏을 쓰다듬으며 판사이 호수를 바라보았다. 거대하지 않은 레콘은 없지만 지멘이라는 이름의 레콘이 가진 거대함은 움직이는 생물보다는 차라리 거석이나 준령의 거대함에 가까웠다. 복잡한 감정을 담고 있는 두 눈은 보통의 레콘들보다 반 미터는 더 높은 곳에서 빛나고 있고 날카로운 부리에는 하얀 실금 같은 상처가 가득하다. 대부분의 레콘들이 격투 중 부리를 훌륭한 무기로 사용하지만 지멘의 경우 정도가 심했다. 남보다 월등히 높은 곳에서 내려 쪼는 부리의 파괴력은 압도적이다. 지 멘은 상처 가득한 부리를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그리고 다시 열어 혼잣말처럼 말했다.
“레콘은 그 말에 익숙해져야 해.”
애꾸눈 소녀는 그것이 혼잣말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건네진 말인 양 대답했다.
“에이, 설마?”
소녀가 말한 ‘설마’ 에는 그 말에 담길 수 있는 모든 부정적인 의미가 다 포함되어 있었다. 지멘은 일단 그 부정들을 수용하기로 했다.
“어떤 이는 설마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소녀는 짧게 웃었다. 지멘은 그 웃음을 못 들은 척했다.
“하지만 레콘은 언제나 모든 것에 도전했고, 그런 도전에 임할 때 다른 사람의 상식을 필요로 했던 적은 없다. 오직 하나의 액 체, 그 흔한 액체만이 레콘의 도전에서 보호되어야 할 이유는 전 혀 없다.”
지멘은 잠깐 멈췄다가 여전히 혼잣말처럼 말했다.
“물론, 그것이 레콘의 마지막 도전이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내 소망이긴 하다.”
애꾸눈 소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녀의 웃음은 지멘의 다음 동작에 싹 사라졌다.
지멘은 옆으로 손을 뻗어 땅에 세워 둔 거대한 망치를 들어 올 렸다. 망치라는 이름으로 지칭되긴 했지만 그것은 다른 망치들이 뭔지 못 알아볼 만한 녀석이었다. 대호(大虎)의 머리 형상을 한 망치 머리는 우아하지만 어딘가에 떨어뜨렸다가는 과실치사를 유 발할 크기였다.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망치 자루까지도 철로 만 들어져 있어 전체 무게는 상상을 초월한다. 전통적인 레콘의 가 치관에 입각하여 지멘은 그 누구도 자신의 무기를 만지도록 허락 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것을 들어 올리기 위해 인간 몇 명이 필 요한지는 아무도 모른다. 소녀는 필요한 인간의 숫자가 두 자리는 넘을 거라고 진지하게 말하는 사람도 본 적이 있다.
전설적인 망치를 집어 든 지멘은 뒤로 빙글 돌았다. 실로 위압 적인 광경이었지만 소녀는 겁먹지 않았다. 대신 오른쪽 눈을 확 불태웠다. 지멘은 소녀의 변화를 잠깐 주시한 다음 그녀의 뒤쪽, 수풀을 향해 외쳤다.
“앞으로 나와라!”
숲 속에서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걸어 나왔다. 그들의 복장은 황제의 병사들의 것이었다. 소녀가 비평가다운 태도로 말했다.
“뼈다귀도 없는데 개새끼들이 몰려드네?”
병사들의 눈썹이 치솟았다. 하지만 황제의 병사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녀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왜 활을 쏘는 대신 앞으로 걸어 나온 것인지도 몰려온 병사들 가운 데 도저히 못 보고 지나칠 수 없는 거대한 모습의 병사 한 명이 있었다. 지멘은 다른 병사들을 무시한 채 그 병사에게 말했다.
“오래간만이군요, 즈라더.”
“12년 만이지, 지멘. 그 망치는 자라는 것이 아닌가 싶군. 더 커진 것 같아.”
“크기는 모르지만 무게는 좀 무거워졌을 겁니다.”
레콘인 즈라더는 지멘의 레콘 식 표현을 쉽게 이해했다. 레콘 에게 보다 흔한 빛깔인 흰빛의 깃털을 가진 즈라더는 너비가 2미 터에 가까운 양날 도끼를 부채라도 되는 양 가볍게 들어 올렸다. 갈가리 찢어진 수염볏이나 생기 없는 깃털들은 그가 태어난 해가 대단히 오래되었음을 알려 주지만 늙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레 콘의 노화는 태어난 해가 언제인가에 달려 있지 않다. 손에 최후 의 대장간에서 받은 무기를 들고 있으며 그것을 자유로이 다룰 수 있는 이상 레콘은 언제나 젊은이고 언제나 투사다. 그리고 양날 도끼를 다루는 즈라더의 모습은 근시일 내에는 납병례(兵 禮)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없음을 잘 나타내고 있었다.
즈라더는 그 무시무시한 도끼를 어깨에 걸치면서 부리를 딱 소 리 나게 부딪쳤다.
“그 망치가 마신 피가 얼마나 되는지는 나도 잘 알아. 내 아들 의 피도 그 망치가 무거워지는 데 일조했으니까.”
“그 녀석, 형편없었습니다.”
“동감이야. 나였다면 그 녀석의 목을 떼는 데 도끼질 두 번이 면 충분했을걸. 얼마나 걸렸나?”
“두 번.”
즈라더는 씩 웃었다. 지멘 또한 웃으며 덧붙였다.
“무기가 무기인지라 아드님의 목을 떼진 못했습니다. 머리를 어깨 속에 쑤셔넣어 줬지요.”
“그 녀석 머리가 좀 푸석푸석하긴 했지.”
병사들은 도무지 자신들의 가치관에 부합되지 않는 이 기괴한 대화 형태에 상당한 위화감을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대화는 모범적이라고 할 만큼 레콘다운 대화이기도 했다. 즈라더가 말 했다.
“그 계단은 괜찮았어. 자네가 착안했나?”
지멘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애꾸눈 소녀가 미소를 지어 보 였다. 지멘과 소녀를 번갈아 바라보던 즈라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어.”
소녀의 미소가 더욱 커졌다. 그리고 지멘은 어떤 말도 듣지 못 한 척했다. 씩 웃던 즈라더는 왼손 엄지로 등 뒤를 가리켰다.
“여긴 좀 그렇군. 좀 떨어진 곳에 풍경 좋은 곳을 봐 뒀네.”
“알겠습니다.”
지멘과 즈라더는 그대로 잡담을 나누며 산책하듯 걸어갔다. 병 사들은 도무지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듯했다. 그리고 소녀는 그 들에게 경멸에 찬 시선을 보낼 뿐 어떤 도움도 주지 않은 채걸 어갔다. 병사들은 자신들의 처지가 곤혹스러워 어쩔 줄 몰라하며 그 뒤를 따랐다.
숲 가운데 형성된 약간 오목한 공터에 도달한 지멘은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 고개를 옆으로 조금 기울였다.
“약간 좁군요.”
즈라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몸 좀 풀까.”
휘적휘적 걸어간 즈라더는 자신의 양날 도끼를 뒤로 당겼다가 잠시 동작을 멈춘 채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어리둥절해하던 병사 들은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는 소녀를 보고는 황급히 그 동작을 따라했다. 즈라더는 씩 웃고 나서 무서운 기세로 도끼를 휘둘렀 다. 굉음과 함께 아름드리나무가 꺾였다.
즈라더는 그런 식으로 나무들을 공터 반대쪽으로 쓰러뜨렸다. 그리고 반대편에서 지멘 또한 같은 작업에 착수했다. 어지간한 대장간에서도 듣기 어려운 소음을 일으키며 즈라더와 지멘은 공 터의 면적을 확장시켰다. 수목 애호가인 나가들이 본다면 짝을 찾기 어려운 만행으로 규정짓고 격분했겠지만, 그 가운데 서 있 어야 했던 병사들과 소녀는 굉음이 울릴 때마다 머리카락이 곤두 서는 오싹함을 맛봤다.
두 명의 레콘은 잠깐 동안의 작업으로 공터의 면적을 두 배로 넓혀 놓았다. 둥근 공터는 이제 방사형으로 쓰러진 나무들로 테 두리를 둘렀다. 지멘은 망치에 묻은 나뭇진을 닦아 내고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애꾸눈 소녀를 돌아보았다. 소녀는 귀를 막고 있던 두 손을 허리에 옮겨 놓은 채 지멘을 마주 보았다.
못마땅하다는 눈으로 소녀를 보던 지멘이 마침내 손을 뻗었다. 기다리고 있던 소녀는 두 팔을 앞으로 들었다. 지멘은 한 손으로 소녀를 집어 높은 나무 위에 올려놓았다. 4미터 높이에 올려진 소녀는 두 팔로 나무를 감싸 안아 자세를 확보했다. 팔짱을 낀 채 그 모습을 보던 즈라더가 말했다.
“진다는 생각도 안 하나? 좋은 태도군.”
“당신을 상대로 그런 확신은 없습니다.”
“없다고? 그럼 왜 도망도 못 치게 저 애를 나무에 올려놓은 거지? 네가 지면 저 애는 도망쳐야 하잖아.”
“나무 아래에 있어도 어차피 당신에게서 도망치지는 못할 겁니다.”
“그렇군. 그럼 이건 내가 질 경우의 대비라는 건데… 병사 들을 다 죽일 생각이군?”
“예.”
병사들은 기겁하여 즈라더의 부리를 바라보았다. 즈라더는 자 신의 병사들을 죽 둘러보고 말했다.
“그냥 보내 줘. 그러면 나도 저 애를 그냥 보내 주겠다고 약속하지.”
지멘은 잠깐 주춤했다. 하지만 나무 위에 앉아 있던 애꾸눈 소녀가 대신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지멘은 소녀를 한 번 쳐다보고 나서 즈라더를 향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즈라더는 부리를 딱 부딪치고 병사들에게 말했다.
“도망쳐라.”
“무슨 말씀입니까, 즈라더?”
“내가 질 경우 지멘은 너희들도 다 죽일 거다. 저 여자 애가 방패막이가 되지 않도록 미리 대비해 두고 있잖아. 그러니 지금 도망쳐라. 내가 이기면 그때 너희들을 찾아가면 되니까.”
사태를 파악한 병사들은 창백해진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지멘은 그들이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는 무시무 시한 계명성(鷄鳴聲)을 내지르며 몸을 세 배로 부풀렸다. 레콘의 모든 전투 의욕을 담은 외침이었고, 어쨌든 레콘에게 전투 의욕 은 항상 과잉 상태인 법이다. 병사들은 귀를 틀어막으며 몸을 움 츠릴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기선을 뺏길 수 없었던 즈라더는 병사들을 돌보는 것을 포기한 채 맞고함을 내질렀다.
희고 검은 두 명의 레콘은 산이 떨쳐 일어나 맞부딪치는 기세로 격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