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1권 : 황제 사냥꾼 [제1장] – 잠든 불씨 10
아실은 투덜거리며 이끼 뭉치를 움켜쥐었다. 그것으로 즈라더의 도끼를 닦으면서도 투덜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지멘이 그녀에게 요청한 일은 아니다. 아실이 누구보다 잘 알 고 있듯 지멘은 아실에게 아무것도 요청할 수 없다. 지멘은 단지 즈라더의 도끼를 내려놓고 “이 피와 흙먼지를 닦아야겠군.”이라 고 혼잣말을 중얼거렸을 뿐이다. 아실이 견디지 못하고 물가로 걸어갈 때까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아실이 한쪽 면을 다 닦은 후 도끼를 뒤집을 때도 지멘은 혼잣말을 했다.
“반대쪽도 닦아야 겠군.”
아실은 이것이 그녀가 그에게 저지른 일의 복수라고 생각하지 는 않았다. 지멘은 그런 졸렬한 복수를 시행하기엔 지나치게 자 부심 강한 사람이었다. 결국 지멘은 물을 견딜 수 없었던 것뿐이 다. 즈라더의 도끼에 엉겨붙은 피딱지는 물을 대지 않고서는 닦 아 낼 수 없을 만큼 굳어 있었다. 자신의 능력이 닿지 않아 다른 자에게 조력을 구해야 하는 상황이 더 불만스러운 것은 지멘일 거라는 사실을 알기에 아실은 화를 내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투 덜거릴 권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즈라더의 도끼는 너무 컸다. 그 녀가 그 도끼날 위를 기어다니며 닦아야 할 만큼.
나무 꼬챙이와 젖은 이끼 뭉치를 이용하여 마지막 피딱지를 긁 어내고 나자 아실은 녹초가 되었다.
“다 닦았어요.”
“나는 이 일을 해 준 누군가에 대해 고맙게 생각한다. 즈라더 또한 그자에게 고마워할 거다.”
“천만에요. 맡길 거 또 없어요? 이제 슬슬 재미가 붙는 참이거든.”
지멘은 별 대답 없이, 그리고 아실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로 즈라더의 도끼를 집어 들었다. 아실은 이끼 뭉치와 나무 꼬챙이 들을 집어던지고는 허리를 뒤로 젖혔다. 허리에서 들려오는 우두 둑 하는 소리에 기겁하며 그녀는 다시 말했다.
“즈라더는 어떻게 이 빌어먹을 물건을 닦은 거지요? 납병하기 전엔 다른 사람이 만질 수도 없으니까 나 같은 사람이 대신 닦아 준 것도 아닐 텐데.”
지멘은 대답하지 않았고 아실은 그 질문을 반복했다. 지멘은 또다시 무시했고, 곧 그 사실을 후회했다. 아실이 세 번째로 같 은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지멘 자신이 사용했던 방법이다. 그 는 도끼에 밧줄을 묶어 자신의 가슴 앞에 걸며 맥없이 말했다.
“도끼는 인병(兵)에 속하니 즈라더는 아마도 기름을 사용했 겠군. 나에겐 그런 기름이 없지만.”
“아하! 그러니까 당신이 망치를 쓰기 때문에 제가 이 개고생을 한 거군요. 알았어요. 그런데 제국병들이 즈라더의 곁에 무기가 없는 것을 보면 우리가 마지막 대장간으로 가는 것을 짐작하지 않을까요?”
지멘은 자신에게 실망했다. 자신이 그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속마음을 뻔히 아는 아실은 빙그레 웃으며 지멘 의 허벅지 옆을 지나쳐 걸어갔다.
“조심하자고요, 지멘. 규리하에서 전쟁 중이니 엘시가 올 리는 없지만 그래도 그 작자에게 우리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려지 는 건 기분 나빠요.”
지멘은 앞서 걸어가는 소녀의 뒤통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아실의 머리 뒤를 가로지른 안대의 끈에 이르렀을 때 지멘은 수염볏을 조금 흔들었다.
레콘 지멘에겐 죽기 전에 반드시 성취해야 할 두 가지 사명이 있었다. 성숙한 모든 레콘들처럼 지멘 또한 평생을 던져 추구할 하나의 숙원을 가지고 있었다. 황제의 제거. 설령 용이라 하더라 도 어떤 레콘이 자신을 대상으로 그런 종류의 숙원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마음 편하게 살긴 힘들 것이다. 황제의 안위를 걱정하는 사람들 또한 지멘의 숙원을 안 이후로 인생의 즐거움이 반 이상 사라져 버린 기분을 맛봤다.
황제 자신은 지멘의 숙원에 대해 특별히 언급한 바가 없었다. 지멘이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하늘누리를 침입한 이후에도 황제는 그 사실에 대해 특별히 가타부타하지 않았다. 대신 즈라더와 그 의 도끼를 보냈다. 그것은 황제가 지멘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는 다는 명확한 증거였다. 그리고 지멘은 그 사실에 고무되거나 흥 분하지 않았다. 지멘은 어쨌든 황제를 죽일 것이고 그 사실에 대 해 황제가 어떻게 생각하든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지멘은 황제가 아니라 앞에서 걸어가는 조그마한 소녀 를 생각했다.
지멘의 두 번째 사명은 애꾸눈 소녀 아실에 대한 것이었다. 그 리고 그 사명은 지멘이 원한 것이 아니었다. 만약 단 한 번 시간 을 되돌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지멘은 주저 없이 아실을 만나게 된 날 이전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레콘의 가공할 힘 으로도 시간의 화살을 역전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언젠가 아실 은 마음대로 걸어 왔던 말 대신 다른 것을 그에게 줄 것이고, 그 것을 받으면 지멘은 가차없이 사명을 달성할 것이다.
지멘은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무익한 후회에 자신을 내맡기는 대신, 지멘은 앞으로 성큼 걸 어가 두 손가락으로 아실의 옷 뒤를 붙잡아 달랑 들어 올렸다.
아실은 놀라지 않았고 무례에 직면한 숙녀의 포효를 내지르지 도 않았다. 그녀에게 말을 할 수 없기에 행동에 곧장 돌입하는 지멘에게 익숙해 있었기 때문이다. 두 손가락에 붙잡혀 허공에서 대롱거리면서도 아실은 태평한 얼굴로 무슨 일이냐는 듯이 지멘 을 바라보았다. 그녀를 자신의 배낭 속에 집어넣기 전 지멘은 뭐 라도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직접 말할 수는 없었다. 지멘 은 허공을 향해 혼잣말처럼 말했다.
“아무래도 황제의 병졸들이 앞길을 가로막기 전에 많은 거리를 달려야 할 것 같군.”
아실은 빙그레 웃으며 지멘의 배낭에 다리를 파묻었다. 배낭 속의 온갖 잡동사니들을 피해 용케 하반신을 고정시킨 그녀는 두 손으로 배낭끈을 꼭 붙들었다. 마지막으로 머리를 가슴 쪽으로 잔뜩 끌어당긴 다음 말했다.
“됐어요. 가요!”
지멘은 부리를 한 번 탁 부딪친 다음 달리기 시작했다.
대비하고 있었지만 아실은 몸이 뒤로 휙 젖혀지는 느낌을 피할 수 없었다. 위험한 일이다. 지멘의 볏은 물론 말랑말랑하지만 표 면은 거칠다. 지멘이 빠르게 달리면 그 볏은 거세게 나풀거린다. 아실의 입장에서는 머리 바로 위에서 부드러운 칼이 춤추는 것과 다름없다. 아실은 턱을 더욱 강하게 끌어당겨 정수리로 지멘의 뒤통수를 찍어 누르듯이 했다.
얼마쯤 달리자 아실은 지루해졌다. 그녀는 지멘의 깃털 속에 얼굴을 묻은 채 아무 말이나 중얼거렸다.
“아이저 규리하가 박살 난다면 규리하 땅은 누가 가질까요? 규 리하의 깡패들이 가지고 놀려고 덤빌 테니까 얼간이를 보낼 수는 없을 거예요. 하지만 대가리 지나치게 잘 굴리는 친구도 안 되겠 지요. 규리하를 가지면 엄청나게 힘이 세질 테니까. 조건이 까다 롭군요. 얼간이가 아니면서 대가리 굴릴 줄 모르는 영주. 퍼스? 안 돼요. 얼간이예요. 락토? 황제가 바보가 아닌 이상은 그러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그년은 바보가 아니죠. 데라시? 그 개자식 이 잘나긴 했지만 통치 전문은 아니에요. 가장 괜찮은 선택은 역 시 엘시 에더리인데, 글쎄요. 만병장이 규리하까지 가진다면 지 나치게 위험해요. 아마 그러기는 어렵겠지요. 하지만 그년이 머 리가 돌아서 엘시에게 규리하를 주면 좋겠군요. 그럼 최소한 엘 시가 우리에게 올 가능성은 없어질 테니까.”
지멘은 아실이 쏟아내는 정보들에 놀라지 않았다. 아실 또한 지멘처럼 한 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었고 제국 정세에 대한 그녀 의 지식들은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으로 획득된 것이다. 때론 지멘 자신이 그런 정보 습득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정보 제공자와 대화 중인 아실의 등 뒤에서 조용히 내려다보는 방식으 로. 그런 응시는 정보 제공자를 협조적으로 만드는 효과가 충분 했다…………. 하지만 지멘 자신은 그런 정보들에 관심이 없었다. 아 실 또한 지멘이 관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그런 중얼거림 은 스스로 상황을 정리해 두려는 목적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곧 멈춰야 했다. 지멘이 30미터쯤 되는 절벽을 그냥 뛰어내렸기 때문이다. 아실은 잠시 숨이 막혔다가 조금 후에야 호흡을 회복했다.
그리고 아실은 다른 말을 꺼내었다.
“저 죽일 땐 그 망치 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외견상 지멘에게선 아무런 변화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실이 볼 수 없는 그의 눈에서만 잠시 모호한 빛이 일렁거렸을 뿐이다.
튀어오르는 돌멩이와 아우성치며 찢기는 풀잎들이 그를 대변하는 듯했다.
“즈라더는 레콘인데도 머리가 거의 깨져 버렸지요. 제기랄. 저 는 그걸로 맞으면 으스러질 거예요.”
지멘은 두 손으로 망치를 움켜쥐고는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달리는 기세 그대로 집어던졌다. 벼락처럼 날아간 망치는 그의 앞쪽에 있던 거목을 일격에 부러뜨렸다. 망치가 땅에 떨어 지기 전 그것을 낚아챈 지멘은 속도를 조금도 늦추지 않은 채 쓰 러진 나무 위를 뛰어넘었다. 그런 식으로 지멘은 시냇물 위를 통 과했다. 시냇물은 충분히 뛰어넘을 수 있는 넓이였지만 발아래 뭔가 딱딱한 것을 만들어 두지 않는 이상 지멘은 물 위에서 모험 할 생각이 없었다. 밟지 않을 나무라도 쓰러뜨려야 했다.
길을 만들면서 달리는 형국이었고, 아실에겐 놀랄 가치도 없는 일상사였다. 좀 냉정했다면 지멘이 평소보다 과격하다는 생각도 할 수 있었겠지만 아실은 자신의 생각에 몰두해 있었다.
“죽으면 알지도 못하겠지만, 그래도 지저분하게 죽는 건 싫어 요. 목을 졸라 줘요. 당신이 엄지와 검지로 내 목 잡고 힘만 좀 주면 될 거예요. 그렇게 죽여 주세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게. 부탁이에요.”
아실은 지멘의 깃털 속 깊이 머리를 파묻었다.
“그리고 저 죽인 후에도 안대는 벗기지 마세요.”
다섯 시간 후, 출발한 지점에서 3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서 무시무시한 질주는 끝났다. 나나본 남쪽의 이름 없는 분지에 멈춰 선 지멘은 광활한 대지 위에서 모아들인 온갖 먼지를 털어 낸 후 천천히 부리를 열었다.
“그러지.”
지멘의 예상대로 잠들어 있던 아실은 듣지 못했다. 대신 다른 사람이 말했다.
“무슨 말입니까?”
지멘은 대답하지 않은 채 말을 걸어 온 사람을 쳐다보았다. 몇 명의 인간들이 그곳에 앉아 지멘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 다. 어지간히 험한 꼴에 익숙한 자라도 동정심에 마음이 흔들릴 모습들이었다. 그들이 걸친 더러운 옷엔 핏물과 먼지가 기괴한 무늬를 그리고 있었고 옷 아래에 완전한 사지를 가지고 있는 자 들은 찾기 어려웠다. 어두운 숲 가장자리에서 그들은 모닥불을 피워 고기를 굽고 있었다. 하지만 충분한 장작을 모을 수 없었던 듯 불은 작았고 부족한 화력 때문에 고기는 구워지기보다는 그을 리고 있었다. 한 인간이 그걸 입에 넣고 두 손으로 잡아당기고 있었다. 날고기를 씹는 것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어 보였다.
지멘에게 말을 건 것은 찢어진 망토로 몸을 감싼 채 무리에서 약간 떨어져 앉아 있던 남자였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아래 움푹 팬 볼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고 원래 훌륭했던 수염은 손 질하지 않아 제멋대로였다. 남자는 왼손으로 망토 자락을 움켜쥔 채 서서히 일어났다. 똑바로 선 남자는 잠시 몸을 떨었다. 모닥 불 주위의 다른 인간들은 긴장하려 애쓰는 듯했지만 그보다는 피 로감에 굴복하는 것이 나을 것 같은 얼굴들이었다.
남자를 마주 보던 지멘은 불에 얹혀 그을리는 고기를 가리켰다.
“그건 뭔가?”
남자가 고개를 한참 들어 지멘을 올려다보았다. 메말라 갈라진 입술이 부스럭거리는 나뭇잎처럼 움직여 말을 빚었다.
“내 말입니다.”
고기를 굽던 인간들이 모두 고개를 숙였다. 남자는 오른손으로 수염을 쓸어내리려다가 포기하곤 말했다.
“저녁 드셨습니까?”
“아니.”
“함께 듭시다.”
지멘은 부리를 닫은 채 도끼와 망치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배 낭을 조심스럽게 벗어 내려놓은 다음 그 속에서 아실을 꺼내었 다. 아실은 실눈을 뜬 채 몇 번 웅얼거렸지만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듯 다시 지멘의 품 안에서 잠들었다. 지멘은 바닥에 앉은 채 한 팔로 아실을 안아 들고 다른 손을 뻗어 고깃덩이 하나를 집었다. 그의 날카로운 부리는 덜 익은 고기를 단숨에 뜯어내었 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남자가 천천히 앉았고 다른 자들 또한 다시 고기를 뜯기 시작했다.
침묵 속에서 진행된 식사는 해가 저물고 별이 떠오를 때 끝났 다. 인간들은 모닥불의 불빛을 낮추고 오래 탈 수 있도록 조처한 다음 적당히 쓰러져 잠들었다. 그들이 가벼운 콧소리를 내며 잠 들고도 한참 후에야 남자가 입을 열었다.
“나는 패했습니다.”
두 시간 동안 기다리고 있던 지멘은 천천히 남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말했다.
“황제는 나를 짓밟고 내 선조들이 가꾸어 물려준 땅을 빼앗았습니다. 왜 그랬는지 아십니까? 내가 그녀에게 충성을 맹세하겠다고 고집 부렸기 때문이지요.”
남자는 더 이상 말을 잇기 힘들다는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지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남자가 울고 있는지 확인하지도 않았다.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른 다음 남자가 다시 말했다.
“내 땅, 내성, 내 옷과 내 소지품들. 언제나 그런 것들을 은 근히 무시하며 살았습니다. 쩨쩨하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고, 그런 것보다 내 백성들에게 더 신경 쓰는 지배자로 보이길 원했 기 때문에. 그런데 나는 지금 빌어먹을 내 그릇이 지독하게 그립 습니다.”
“그릇?”
“그래요. 그릇. 내 식기 말입니다. 발란카 도자기지요. 다른 무엇보다도 그것이 그립군요.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소 인배인 겁니까?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속여 왔지만, 사실은 사소 한 위락물들을 숭배하며 살아온 얕은 작자일까요?”
지멘은 남자를 꾸짖지 않았다. 지멘이 아는 남자는 절대로 그 런 약한 말을 입 밖에 꺼낼 사람이 아니다. 상대방이 지멘이었기 에 남자는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좀 더 위로에 능숙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지멘은 부리를 열었다.
“이제 어찌할 텐가, 아이저.”
전(前) 규리하 변경백 아이저 규리하는 괴로운 표정으로 지멘 을 올려다보았다. 지멘은 냉랭하게 말했다.
“황제는 불시의 공격으로 규리하가 서약 지지파의 구심점이 되 는 것을 막았고 동시에 그들에게 강력한 경고를 보내는 데 성공했다. 서약 지지파들은 급속히 움츠러들겠지. 상금에 눈먼 누군가의 칼에 목을 내주는 것이 네 계획은 아니겠지.”
아이저는 그것이 지멘의 고찰일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래 서 지멘의 품 안에서 잠든 아실을 바라보았다. 지멘의 풍성한 깃 털 속에 파묻힌 채 아실은 가볍게 코를 골고 있었다. 아이저는 다 시 고개를 돌려 모닥불 주위에 쓰러져 잠든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모두 규리하의 용장들이었으며 아이저의 충실한 가신들이었다. 누구보다도 빛나던 이들이었지만 지금은 지치고 두려워하는 모습 으로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아이저는 미어지는 가슴을 움켜 쥐었다. 그곳에는 다 타 버린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운 가슴 외에 다른 것도 만져졌다. 그것이 아이저를 진정시켰다. 자신의 품속 에 넣어 둔 물건을 조심스럽게 쓸어 만지며 아이저는 질문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지멘은 아실이 중얼거렸던 말 중 마음에 담아 두었던 것을 꺼냈다.
“즈믄누리로 가라. 바우 성주는 너를 보호해 줄 거다. 그리고 황제 또한 네가 즈믄누리에 있다면 눈감아 줄 거다.”
“그럴 테지요. 그렇기에 나는 즈믄누리로 가진 않을 겁니다.”
“무슨 말이냐?”
“황제는 내게서 모든 것을 가져갔지만 나도 황제에게서 얻은 것이 있습니다. 황제는 아무도 그녀가 규리하를 칠 수는 없을 거 라 생각할 때 규리하를 쳤습니다. 배울 만한 일 처리 방식입니 다. 나도 그녀가 예상할 수 있는 일은 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그렇다면?”
“서약 지지파 중에는 안전을 위해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당분간은 그들 가운데 스며들어야겠지요. 당신의 경고대로 목을 조심하면서.”
“알았다.”
“나와 함께 가지 않겠습니까?”
지멘은 장작을 부러뜨려 모닥불 속에 꽂아 넣었다. 불티가 분 수처럼 피어올랐다. 손바닥을 들어 얼굴을 가렸던 아이저는 눈살 을 찌푸린 채 말했다.
“패배자의 제안이니 매력 있을 리 없겠지요. 이해합니다. 하지 만 당신과 나의 뜻은 같습니다. 지멘. 당신의 망치를 모욕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그 망치로 황제의 머리를 부수려면 일단 가 까이 갈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지멘은 얼마 전 상당히 가까이 갔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실패한 시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의 숙원을 성취하기 위해서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겁 니다. 옛날 티나한은 혼자 하늘치 위에 올라가려고 하지 않았습 니다. 그러는 대신 하늘치 발굴대를 조직했지요. 당신도 동료들 을 찾아야 합니다. 혼자 황제를 잡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내 동료가 되어 주겠다는 거냐?”
“셋이 하나를 상대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지금은 너와 함께할 수 없다.”
“왜 그렇습니까?”
지멘은 배낭 옆에 놓인 도끼를 가리켜 보였다. 물론 아이저는 그 도끼를 알고 있었다.
“즈라더의 도끼군요. 그러잖아도 질문하고 싶었습니다. 즈라더가 당신을 찾아갔던 모양이군요. 당신이 살아 있다면 즈라더가 죽은 것일 텐데, 왜 그의 도끼를 가져온 겁니까?”
“죽기 전 즈라더는 납병례를 했다. 나는 그의 도끼를 최후의 대장간에 가져가야 한다.”
“그렇군요. 그곳은…….”
“그래. 넌 갈 수 없어. 최후의 대장간을 방문 중인 녀석들 중 하나가 무기뿐만 아니라 숙원을 이룰 밑천까지 구하게 되었다고 좋아하면서 네 목을 가져가려 할지도 모르니까. 나에 대해서도 똑같은 생각을 품는 녀석이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너까지 지켜 줄 순 없다.”
“꼭 가야 합니까? 아니, 아닙니다. 당신은 반드시 가겠지요.”
아이저는 확신했고 그래서 지멘은 굳이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아이저는 쓰러져 잠든 부하들을 죽 둘러보았다. 용기를 얻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소득은 별로 없었다. 그들의 처참한 모 습에서는 동정심을 느끼는 것이 고작이었다. 다행히도 아이저는 동정심 외에 책임감도 느꼈다. 그들을 데리고 최후의 대장간으로 갈 수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부디 조심하길 바랍니다.”
“너도.”
아이저는 흙을 집어 들어 모닥불 위에 뿌렸다. 마치 꺼지지 않 아도 상관없다는 듯 무성의하게 그 동작을 반복하며 아이저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를 도와주기 위해 지멘이 땅에 손을 뻗었을 때 아이저가 갑작스럽게 말했다.
“다시 당신을 찾겠습니다. 내가 직접 당신을 찾아갈 가능성은 없겠지만 어떤 형태로든 연락을 보낼 겁니다. 식기를 그리워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가지고 찾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부디 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여 주십시오.”
어두워지는 불빛 속에서 지멘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분지 의 품 안을 비추던 모닥불이 몇 번 하품하다가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잠 속에서 불씨는 대화재를 꿈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