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1권 : 황제 사냥꾼 [제1장] – 잠든 불씨 3
애꾸눈 소녀는 땅에 쓰러진 레콘을 내려다보았다.
소란스럽게 흩어진 깃털과 핏자국 가운데 레콘은 비참한 모습 으로 쓰러져 있었다. 제멋대로 던져진 다리들은 상체와 비정상적 인 각도로 이어져 있었다. 허리가 부러진 것이 틀림없다. 인간이 나 도깨비가 당했다면 즉사하고 말았을 엄청난 타격이었지만 레 콘은 그 무시무시한 생명력으로 아직 살아 있었다.
추하고 슬픈 모습이었다.
몸의 다른 곳의 사정도 그다지 말끔하지는 못했다. 수염병에 의해 힘겹게 턱에 매달려 있는 부러진 아랫부리는 피와 타액으로 젖어 있었다. 파리들이 그 주위를 앵앵거리며 날아다녔지만 레콘은 손을 들어 파리를 쫓을 기력이 없었다. 파리들은 최강 종족의 피를 게걸스레 탐식했다.
소녀는 손을 내저어 파리 떼를 쫓았다.
레콘은 초점을 맞추려는 듯 몇 번 눈을 껌뻑였지만 성공하지 못한 듯 눈을 감았다. 그리고 속삭이듯 말했다.
“고맙다”
부러진 아랫부리 때문에 발음이 좀 기괴했다. 소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레콘이 다시 말했다.
“네가 아실이지?”
“그래요.”
“넌 황제의 병사들을 무척 싫어한다던데.”
“그보다 더 싫은 건 아직 찾지 못했어요. 고맙게도.”
즈라더는 통증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힘겹게 움직여 미소를 지었다.
“싫어하는 사람에게 왜 이런 친절을 베풀지?”
애꾸눈 소녀 아실은 잠시 침묵했다. 흐려진 즈라더의 눈에 아 실의 안대는 얼굴 위를 기어가는 불길한 벌레처럼 보였다. 아실 이 입을 열었다.
“싫어하는 사람이 마음의 짐으로 남는 것도 싫으니까.”
“기묘하군. 네가 나를 이렇게 만든 것도 아니잖아.”
“제 눈을 빌려 드리고 싶군요. 지금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꼴이 말이 아닌 모양이군.”
“그래요.”
즈라더는 갑자기 통증을 느낀 듯 눈을 감았다. 뻔뻔스러운 파리들이 다시 날아들었다. 아실은 손을 휘저어 그들을 쫓았다.
즈라더가 말했다.
“이상하구나.”
“뭐가 이상하죠?”
“너는 마음의 짐이 될까 봐 무참한 지경의 사람을 내버려두지 못하는 착한 아이다. 그 상대가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그런데 왜 지멘에게 협조하는 거지? 지멘의 숙원을 몰라?”
“잘 알고 있어요. 제 숙원과 같으니까.”
“네 숙원?”
“예. 숙원이라는 말은 당신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에요.”
잠깐 고민하던 즈라더는 오만한 레콘으로서 대답하기로 했다.
“네가 감히 숙원을 추구하는 레콘을 흉내 낼 수 있을 것 같 으냐?”
“못할 것 같아요?”
아실은 잽싼 동작으로 단검을 뽑아 들었다. 날이 예리하게 선 것이지만, 레콘을 겁줄 물건은 아니었다. 그것이 설령 허리가 부 러진 채 죽음을 기다리는 레콘이라 해도. 즈라더는 멸시를 표시 하기 위해 부리를 딱 부딪치려 했지만 부러진 아랫부리 때문에 그 동작은 무위로 돌아갔다.
“그 조그마한 가시로 뭘 어쩌려는 거냐?”
“영감님 명줄을 끊어 줄 수도 있어요.”
“그럴 수 있다 치자. 그런데, 왜? 레콘의 흉내를 내는 것과 내
명줄을 끊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는 거냐?”
“저는 약해지지 않을 거예요.”
“약해지지 않는다?”
“영감님 꼴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약해진단 말이에요. 하지만 저는 강해질 거예요. 당신들처럼 저도 끝까지 숙원을 추구할 거 예요. 그런 불쌍한 모습을 하고 있어도 이 단검으로……”
즈라더의 손이 휙 움직였다.
아실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제대로 보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바람에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아실은 자신의 단검이 즈라더의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워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즈라더는 단검 을 세 손가락 사이에 엇갈리게 끼우고 손에 힘을 줬다. 그러자 단검은 가슴을 에는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압도적인 힘의 과시에 아실은 심장이 멎을 듯한 두려움을 느끼 며 주저앉았다. 주검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는데도 즈라더는 손가 락만으로도 그녀를 죽일 수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즈라더는 쓸 모없는 쇳조각이 된 단검을 내던지고 부드럽게 말했다.
“네 우위가 확실하기 전까지는 불쌍하다는 말 따위를 함부로 하는 게 아냐. 자, 이젠 어떻게 하겠어? 목을 조를 거야?”
아실은 부들부들 떨며 물러났다. 정신없이 미끄러지던 그녀의 다리가 무엇인가에 호되게 부딪혔지만 그녀는 비명을 지를 수도 없었다. 차마 고개를 돌릴 수 없었기에 아실은 손을 뒤로 뻗어 거기에 있는 것을 만졌다. 그것은 즈라더의 도끼였다. 즈라더는 쿨럭거리며 웃었다.
“나를 죽일 작정이라면 내 무기를 건드리는 무례쯤이야 저지를 수도 있겠지. 그걸 들어 올려 나를 내리찍을 건가?”
아실은 비참한 심정으로 등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에겐 침대 크기가 될 도끼날이 기둥같이 육중한 자루 위에서 번득이고 있었다. 굳이 시도하지 않아도 아실이 그것을 손톱만큼도 움직일 수 없음은 분명했다. 아실은 다시 즈라더를 돌아보았다. 즈라더는 그 녀의 눈에 눈물이 괴는 것을 보았다. 아실은 목이 메어 말했다.
“제기랄, 마음껏 비웃어요. 이 늙다리 깃털쟁이!”
아실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래요. 저는 아무 힘이 없어요. 죽어 가는 사람한테 단검을 뺏길 정도로 힘없는 바보예요. 당신처럼 잘나 빠진 레콘이 보기 엔 짜증 나도록 한심하겠죠.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조그마한 인 간 여자고, 그나마 눈도 하나뿐이죠!”
즈라더는 다시 아실의 안대를 응시했다. 아실은 오른손 검지로 안대가 없는 쪽을 가리켰다.
“하지만 저는 이 눈으로 황제가 죽어 자빠지는 모습을 볼 거예요!”
파리 소리가 소란스럽다. 즈라더는 시야가 더욱 흐려지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그게 이상하다는 거다, 아실. 넌 마음의 짐이 될까 봐 나를 내버려둘 수 없다고 했지. 그런데 황제가 죽으면 마음의 짐이 될 것 같지 않나?”
“천만에요. 아주 기뻐할 거예요.”
“나와 그녀의 차이가 뭐지?”
“싫어하는 것과 증오하는 것의 차이지요!”
“그런가?”
“그래요.”
“황제는 불쌍한 사람이다.”
“뭐라고요?”
즈라더는 엄청난 불신감으로 되물어 오는 아실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늙은 레콘은 시선을 들어 아실의 등 너머를 향해 말했다.
“자네 때문에 그렇다는 건 아냐, 지멘.”
아실은 몸을 돌렸다.
나무 사이에서 지멘이 걸어 나왔다. 육중한 망치는 피범벅이 되어 있었고 풍성한 깃털들 사이에서 덩이진 유혈이 붉은 꽃처럼 만발해 있었다. 검은 깃털인데도 피는 또렷하게 보였다. 하지만 아실은 지멘이 다쳤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그녀의 질문은, 지멘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지멘이 쫓아간 병사들에 대 한 것이었다.
“어떻게 됐어요?”
지멘은 아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쓰러져 있는 즈라더에게 말했다.
“부하들은 다 죽었습니다.”
“묻어 줬나?”
“그래서 좀 늦은 겁니다.”
“나도 그렇게 처리할 건가?”
“아니요. 나무 위에 던져 놓을 겁니다. 날개 달린 시체의 벗들 이 당신을 배웅하겠지요.”
즈라더는 희미하게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아실은 즈라더의 만 족감을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지멘이 즈라더의 유해를 다루는 방식의 거친 정도는 이 경우 즈라더에 대한 지멘의 존중의 척도 가 된다. 개의 사체보다는 호랑이의 사체가 사냥꾼의 위력을 더 잘 드러낼 수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아실은 자신이라면 나무 위 에 던져져 몰염치한 햇살과 새카맣게 몰려든 까마귀들에게 유린 당하는 최후를 만족스러워할 거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즈라더 또한 그런 최후를 맨 정신으로 받아들일 생각은 없는 듯했다.
“던지기 전에 자네 망치를 한 번 써 주게.”
“그렇게 할 겁니다.”
“고맙군.”
“황제가 나 때문에 불행하지는 않다고 말한 것은 나에 대한 모욕입니까?”
“자네는 누군가의 불행이 될 충분한 자격을 가지고 있어. 자네를 적으로 두고 마음 편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겠 지. 하지만 황제는 자네가 없다 하더라도 이미 불행해.”
“그녀가 왜 불행합니까?”
즈라더는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부서진 부리에서 나온 것은 말이 아닌 격렬한 기침이었다. 즈라더는 당장이라도 산산조각 날 것처럼 격렬하게 기침했다. 대답할 기회보다는 평안을 주는 것이 낫다는 판단 하에 지멘은 망치를 당겨 쥐었다.
그러나 즈라더는 눈빛으로 그 친절을 거부했다. 죽는 것이 두려워서는 아니다. 그는 살아날 수 없음을 오래전에 인정했다. 즈라더에겐 할 말이 있었다. 지멘은 망치를 늘어뜨렸다.
긴 시간 후에 즈라더는 간신히 말을 빚어낼 수 있을 정도의 안 정을 되찾았다.
“이 땅의 먼지에 취하여 오랜 세월을 돌아다녔다. 온갖 것을 보고…… 온갖 것을 만졌다. 발은 지저분한 것들을 밟았지만 눈 은 언제나 아름다운 것을 좇았다. 가는 달을 앞지르며 황야를 쏘 다녔고, 산꼭대기에 서서 누구보다 먼저 뜨는 해를 보았다. 어쩌 다가…………… 올려다본 하늘의 별들이 낯설어질 때는 있어도, 세상에 끝은…… 없었다.”
즈라더는 지멘을 쳐다보았다.
“무애(無碍)한 세상에………… 울타리 세워 봐야 부질없는 짓이다.”
그는 껄껄 웃었다. 지멘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눈빛으로 늙은 레콘을 마주 보았다. 즐겁게 웃던 즈라더가 갑자기 말했다.
“도끼를 쥐어 줘.”
지멘은 손을 뻗어 즈라더의 도끼를 쥐어 올리지 않았다. 그럴 수는 없다. 대신 그는 즈라더의 몸을 들어 올렸다.
늙은 레콘은 엄습하는 고통에 피 끓는 신음을 토했다. 아실은 도끼 옆에서 황급히 물러났다. 도끼 옆에 즈라더를 내려놓은 지 멘은 즈라더의 피투성이 오른손을 들어 도끼 자루에 올려놓았다. 고통에 파헤쳐진 즈라더의 얼굴에서 한 줄기 만족이 피어올랐다. 그가 말했다.
“납병을 하고 싶은데, 괜찮…… 겠나?”
아실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앞으로 다가설 듯 움찔했다. 하지 만 곧 자제심을 발휘하여 제자리를 지켰다. 즈라더를 고요히 내 려다보던 지멘이 말했다.
“납병을 하고 나면 망치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만.”
“은원의 도구가………….. 아니라 친절의 도구로 쓰이는 거니 상관없 다. 써도 돼. 내 도끼를………… 최후의 대장간에 돌려보내고 싶다.”
지멘은 침묵했다. 그러나 시간을 끌 수 없었다. 즈라더는 당장 이라도 호흡을 멈출 것 같은 상태였다. 결심을 굳힌 지멘은 망치 를 옆에 내려놓고 곧게 섰다.
“처음 하는 거라 서툴 겁니다. 양해하시길.”
즈라더는 괜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멘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이여. 한 자루 도끼를 쥐고 당신의 가 호 속에 싸웠던 전사가 이제 그 도끼를 놓으려 합니다. 때론 승 리했고 때론 패배했습니다. 도끼로 얻은 명예는 모두 당신에게 보내고 도끼로 갚아야 할 원한은 모두 잊으려 합니다. 세상에 맺 었던 것들을 모두 끊고 풀어내어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려 합니 다. 이후로 그는 다시는 무기를 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죽 음을 제외한 어떤 것도 그에게 무기를 들지 않을 겁니다.”
지멘은 고개를 숙여 즈라더에게 말했다.
“보살펴 주신 여신과 병기에게 인사하십시오.”
즈라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이미 숨을 멈췄나 생각한 지 멘은 벼슬을 뻣뻣하게 세웠다. 그러나 즈라더는 곧 부리를 움직 여 말했다.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이여. 긴 세월.. 당신의 가호 덕분 에…… 제 도끼와 동행할 수 있었습니다. 명예도 없이, 원한도 없 이………… 당신에게 갈 시간을 조용히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지멘은 소리 없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즈라더의 말이 계 속되었다.
“적과 나 사이에………… 언제나 서 주었던 신의 있는 벗이여. 고 맙다. 이제 편히…… 쉬어라.”
납병례가 끝났다. 들끓는 피를 상대방의 피로 식히던 전사는 사라지고 한 명의 사람만 남았다. 지멘은 즈라더의 손을 들어 그 의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제야 가능한 일을 조심스럽 게 수행했다.
지멘은 도끼를 쥐어 올렸다.
즈라더의 피가 튀지 않을 위치에 도끼를 내려놓은 지멘은 다시 돌아왔다. 그는 즈라더가 눈을 감을 때까지 기다리려 했지만 즈라더는 그것을 거부했다. 대신 늙은 레콘은 또렷하게 말했다.
“해.”
지멘의 망치가 위로 올라갔지만 즈라더는 눈을 감지 않았다.
늙은 레콘은 온 힘을 다해 외쳤다.
“세상아, 들어라! 즈라더가 여기 있었다-!”
거대한 메아리를 들으며 지멘은 망치를 내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