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1권 : 황제 사냥꾼 [제1장] – 잠든 불씨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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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마시는 새 1권 : 황제 사냥꾼 [제1장] – 잠든 불씨 4


전사의 전쟁과 위관의 전쟁은 서로 다르며, 위관의 전쟁과 장 군의 전쟁은 같지 않다. 전사의 전쟁은 단순하다. 싸우고 죽이고 노략질하면 된다. 전사는 개전부터 종전까지 자신의 행동을 변화 시킬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다른 이들을 지휘하는 자가 되면 전쟁의 막바지에서 흥미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극적인 입 장 변화’라 불러야 할 만한 일이 바로 그것인데, 전쟁의 결말이 결정되고 승자와 패자가 구분되는 시점이 오면 수비자와 공격자 의 행동 방침은 서로 바뀐다. 수비자는 그때껏 지키려 애쓰던 것 을 적극적으로 파괴하려 들며, 공격자는 자신이 공격하던 것을 지키려 애쓰게 된다.

이런 입장 변화의 기저에는 적에게 줄 바에야 부숴 버린다는 이해하기 쉬운 이유도 있고 그보다 조금 더 복잡한 이유도 있다. 복수를 맹세하며 불타는 성을 등지고 도망치는 낭만적인 영웅은 노래꾼들의 노래에나 등장하는 고풍스러운 허구다. 진짜 복수자 의 냉혹한 복수는 패배가 결정된 순간에 이미 시작된다. 남겨 두었을 경우 자신을 위협하게 되는 물건들을 파괴하는 일이 그것이 다. 그리고 복수의 법칙은 분루를 흘리며 패배의 아픔을 노래하 는 서사시적 영웅보다는 침착하게 비밀 서류를 불태우는 실용주 의자들을 돕는다.

이런 사정을 모두 이해했을 때 비로소 규리하 전쟁 막바지, 규 리하 성 3층에 있는 커다란 방에서 일어난 기괴한 격투의 내면에 존재하는 합리성을 깨닫게 된다. 그 혼란스러운 격투는 복도를 달리던 제국군 부위 틸러 달비가 느닷없이 들려온 여인의 비명에 놀라 방 안으로 뛰어듦으로써 시작되었다.

틸러 달비는 눈앞의 광경에 당황했다. 한 소녀가 벽에 등을 기 대고 주저앉아 있었다. 비명을 지른 것은 소녀임이 분명했다. 그 런데 그 앞쪽에 있는 것은 틸러의 예상과 달리 무도한 본능에 눈 을 빛내는 제국군이 아니었다. 얼핏 보아도 반란군의 장수임이 분명한 소년이 손에 든 검으로 소녀를 겨누고 있었다. 소년의 화 려한 갑옷을 본 틸러는 다시 주저앉아 있는 소녀를 보았다. 그 순간 틸러 달비가 200명을 지휘할 능력을 가졌다고 판단한 인사 책임자의 안목이 빛을 발했다. 틸러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고함 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가 사태를 완전히 이해했다는 것은 그 의 외침만 들어 보아도 알 수 있다.

“멈추시오, 시카트 규리하!”

시카트 규리하라 불린 소년 장수는 무서운 표정으로 소녀를 향 해 검을 휘둘렀지만 틸러가 집어던진 투구 때문에 그 공격은 성 공하지 못했다. 시카트는 두 번째 공격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물러섰다. 그리고 틸러의 공격에 대비했다. 틸러는 자신이 이상 황을 이해하고 있음을 한 번 더 증명해 보였다.

“정우 규리하! 피하십시오!”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소녀가 움찔하며 틸러를 바라보았다. 그 것은 소녀의 이름이었고 정우는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틸 러가 그녀를 구하려 하고 있음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구하기 위해 틸러가 싸움을 건 상대는 시카트 규리하, 즉 그녀의 남동생이었다.

적군이 그녀를 위해 남동생과 싸우고 있었다. 끔찍하리만큼 이 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정우는 마비되어 버렸다.

그녀는 멍한 눈으로 두 남자의 격투를 바라보았다. 틸러 달비 는 정우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초조했지만 그것이 큰 문제 는 되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 격투의 결과가 처음부터 분명했 기 때문이다. 틸러는 시카트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고 그의 야전 검술은 시카트보다 몇 배나 우수했다. 비록 투구가 없었지만 틸 러는 여유 있게 시카트를 밀어붙였다. 시카트의 곤경을 본 정우 는 남동생을 구해야 한다는 충동을 느꼈다.

“시카트……!”

하지만 정우는 일어나지 못했고 그런 자신이 엄청나게 모멸스 러웠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속 한구석에서 진심으로 제국군 부위 가 자기 남동생을 죽여 주길 바라고 있음을 깨달았다. 두 번 생 각하기도 싫은 소름 끼치는 충동이었다.

하지만 시카트를 본 정우는 다시 공포를 느꼈다. 제국군이 뛰 어들기 전 남동생은 실제로 그녀를 죽이려 했다. 되살아난 공포 가 혼란으로 바뀌었고 정우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짧고 모진 비명이 흘렀다.

검을 놓친 시카트는 팔의 상처를 움켜쥐고 창백해진 얼굴로 틸러를 바라보았다. 틸러는 소년의 검을 멀리 차버린 다음 자신의 검으로 소년의 목을 겨누었다.

“시카트 규리하, 귀 가문의 포악성은 잘 알고 있었지만 육친을 죽일 정도로 악독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시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적의 등 뒤에 있는 누나를 향해 외쳤다.

“누나! 죽어, 자살하란 말이야!”

정우는 숨이 꽉 막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눈에 당장 눈물이 그렁해졌다. 하지만 시카트의 비정한 권고는 계속되었다.

“이놈들은 누나를 이용할 거야. 그래선 안 돼! 아버님과 규리 하를 위해……!”

시카트는 말을 맺지 못하고 다시 비명을 내질렀다. 칼을 쥔 주 먹으로 시카트의 입을 후려친 틸러는 허물어지는 상대를 보며 투 덜거렸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꼬마가 있지요. 말 적은 꼬마와 말 많은 꼬마. 그런데 저는 후자를 아주 질색합니다.”

시카트는 피가 흐르는 입을 움켜쥔 채 증오 어린 눈으로 틸러 를 올려다보았다. 틸러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아이저 변경백은 그런 아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모르겠지만, 시카트 규리하, 우리 아버지의 경우엔 이랬습니다.”

호쾌하게 날아간 발이 시카트의 복부에 명중했다. 시카트는 숨 이 막히는 소리를 내며 고꾸라졌다. 소년을 두어 번 더 걷어차서 꼼짝할 수 없게 만든 다음, 틸러 달비는 자신이 아버지의 명예에 보탬이 되었는지 누가 되었는지를 고민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눈물에 흠뻑 젖은 두 눈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틸러는 남의 집안일에 쓸데없이 끼어든 훼방꾼이 된 것 같다고 느꼈 다. 틸러는 정우에게 남동생을 공격한 것에 대해 사과해야 할지 살려준 것에 대해 감사를 받아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그때 정 우의 입이 갑작스럽게 열렸다. 심하게 일그러진 표정과 달리 어투는 놀랍도록 뚜렷했다.

“당신은 아마 이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군요. 나는 잘 모르겠어요. 그러니 설명을 좀 해주면 좋겠어요. 당신은 어떻게 나와 시카트를 알고 있지요? 그리고 시카트가 왜 나를 죽이려 하 는 거죠? 그리고 당신은 왜 나를 구한 거죠? 원래 성격이 폭력적 인가요?”

틸러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질문이 뚜렷하면 대답도 뚜렷할 수 있다. 그리고 틸러는 정우만큼이나 대답을 필요로 하고 있었 다. 틸러는 자신과 정우 두 사람에게 들려주듯 말했다.

“질문은 네 개였지만 말씀하지 않으신 다섯 번째 질문에도 대 답하겠습니다. 규리하 공 아가씨. 저는 제국군 가시나무 군단의 312소대장 틸러 달비 부위입니다.”

정우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틸러는 마주 목례한 다 음 계속 설명했다.

“병사의 전투는 단순하지요. 이기면 짓밟고 지면 도망치면 됩 니다. 병사에게 그 외의 전투는 없습니다. 하지만 지휘관의 전투 는 좀 복잡합니다. 패배했을 경우 지휘관은 물론 병사들처럼 도 망쳐야겠지요. 하지만 지휘관의 임무에는 데려갈 수 없고, 그렇 다고 해서 남겨 둘 수도 없는 자를 처리하는 일도 포함됩니다.” 

정우 규리하는 처리한다는 말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틸 러는 시카트의 동태를 곁눈질하며 계속 말했다.

“제가 알기로 아이저 규리하에겐 병약한 장녀가 있습니다. 태 어난 직후 죽을 뻔했지만 즈믄누리의 도깨비들이 맡아서 살려내 었지요. 그 장녀는 그곳에서 성장했고 도깨비들이 붙여 준 도깨 비식 이름으로 불리는 일이 더 많았습니다. 아이저 규리하는 그 딸을 반쯤은 죽은 사람 취급했지만, 전쟁이 벌어지자 이성으로 불러들였습니다. 하지만 병약한 그녀는 험난한 도피행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놔두고 가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인질이 될 수도 있고 심한 경우 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그녀는 아 이저 규리하의 장녀이니까요. 그녀가 규리하의 많은 비밀을 알고 있다는 것도 위험 요인입니다. 제거해야 합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저로서는 반란군 장수에게 위협당하고 있는 여인이 누구인 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공격하는 반란군 장수가 누군지 짐작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이저 규리하나 그의 아들뿐이지요. 나이 를 보니 시카트 규리하일 것 같더군요. 그리고 저는 필요할 때만 폭력적입니다.”

아버지에게 자신이 죽여야 하는 딸이 되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정우는 틸러의 말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 는 틸러가 대단히 명쾌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 때문에 정우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는데 모든 것이 설명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니름을 하실 줄 아셨던 것은 아니군요. 단순하군요.”

“예. 대단히 단순하지요.”

“고마워요, 달비 부위.”

그리고 정우는 더 견딜 수 없었다.

“이 고마움을…….”

말이 이어지길 기다리던 틸러는 정우가 기절로써 고마움을 표 시했다는 것을 알았다. 제국군 부위는 쓰러진 두 남매를 번갈아 쳐다보고 나서 머리를 조금 긁적거렸다.

“남자는 칼로 쓰러뜨리고 여자는 혀로 쓰러뜨렸다는 거지. 아 버지가 보면 자랑스러워하시겠군.”

별로 재미없는 농담으로 스스로를 치하해 보려 했던 달비 부위 는 잠시 후 자신에 대해 넌더리가 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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