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1권 : 황제 사냥꾼 [제1장] – 잠든 불씨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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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마시는 새 1권 : 황제 사냥꾼 [제1장] – 잠든 불씨 5


황궁은 제국 정치의 중심이며 제국 의례의 중심이기도 하다. 가장 수준 높은 예법이 필요한 곳이기에 황궁에서 제안되고 채택 되고 실행되는 의례는 모든 교양 있는 제국 신민들이 지켜야 하 는 예의의 기준이 된다.

늦은 오후, 황제의 의전관에게 배달된 한 통의 서한은 황궁이 요구하는 모든 예법을 완전히 충족시키는 아름다운 문구와 격조 있는 수사로 구성되어 있었다. 의전관은 감탄할 수도 있다고 생 각했다. 그러나 서한에 담긴 요청이 지극히 난처한 것이기에 그 의 감동은 크게 희석되었다. 고민하던 의전관은 서한을 챙겨든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 시간쯤 후 의전관은 고민에서 벗어났다. 원만한 일 처리 솜 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다. 자기 고민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재주가 있었을 뿐이다. 따라서 의전관이 고민에서 헤어 난 시점, 황궁에서는 또 다른 사람이 고민에 빠졌다. 어쩌면 세 상엔 고민 총량 불변의 법칙 같은 것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고약한 법칙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불명확하지만 그 법칙의 희생자는 분명히 존재했다. 의전관에게서 서한을 받아 든 사람은 비스그라쥬 백 데라시라는 이름의 나가였다.

황궁 내에서 데라시의 위치는 조금 모호하다. 그는 비스그라쥬 의 백작으로서 제국법과 자신의 사소한 재량권에 따라 비스그라 쥬를 지배해야 할 사람이다. 하지만 데라시는 비스그라쥬가 아닌 하늘누리에 거주하고 있었다. 물론 대리인에게 영지를 맡기고 보 다 문화적인 곳에서 세련된 생활을 누리는 귀족들은 많았지만 그 런 귀족들은 보통 하늘누리에 거주하지 않는다. 하늘누리에는 제 한된 면적밖에 없으므로 하늘누리를 다스리는 천경유수는 합리적 인 필요성을 증명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하늘누리 거주를 허락하 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늘누리에 거주하는 귀족들은 대부분 관리 이거나 제국 공신이거나 대귀족 등 황제의 최측근에서 제국의 통 치에 관여하는 자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데라시는 황제의 관리 가 아니며 황궁 내에서 뚜렷한 직책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황족도 아니다. 그러나 데라시는 황궁에 출석하며, 중요 한 사안들에 관여하고, 때론 의견을 개진하고, 아주 가끔은 집행 도 담당한다. 그리고 그 사실에 대해 불평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 지 않다.

데라시는 자신의 모호한 위치에 유감을 가져 본 적이 없다. 그 모호성을 책임 없는 권한이라는 매력적인 힘의 원천이라고 생각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전관의 고민을 인수한 지금 비스그라쥬 백은 자신의 모호한 처지에 넌더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책임을 추궁당하지는 않지만 동시에 어떤 일이든 떠맡을 수도 있는 것이 모호함의 또 다른 일면이다.그 때문에 데라시는 만병장(萬兵將)의 당혹스러운 요청을 검토해야 하는 처지에 빠졌다.

아라짓 제국에는 적지 않은 수의 십병장(兵將)이 있다. 그리 고 백병장(百將) 또한 귀족감이나 공신록을 뒤져 보면 어렵잖 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천병장(千兵將)이라는 무시무시한 권 리를 가진 사람은 넓은 제국에 아무도 없다. 상식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지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식이라는 말이 항상 그렇 듯 천병장이 있을 수 없다는 상식도 기괴한 일탈을 보여 준다. 터무니없게도 제국에 한 명의 만병장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유일한 제국 만병장의 서신은 데라시의 머리를 아프게 만들고 있었다.

벽난로를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겼던 데라시는 결국 의전관의 처신을 모범으로 삼기로 했다.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기로 결정한 것이다. 데라시는 의자에 앉은 채 황궁 안 어딘가를 향해 닐렀다. 

<데라시입니다. 폐하. 찾아뵈어도 되겠습니까?>

어딘가에서 그에 대답하는 니름이 들려왔다.

<와.>

비스그라쥬 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목소리를 조금 높 여 누군가를 부르자 그의 방 옆에 붙어 있던 부속실에서 시종 한 사람이 나왔다. 그의 손에는 데라시가 요청한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데라시는 시종의 도움을 받아 두툼한 옷을 입었다. 데라시가 착의를 끝내자 시종은 그의 등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 옷 뒤쪽에 달려 있는 주둥이의 마개를 열었다. 시종은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주전자를 들어 올려 주둥이에 끓는 물을 부어 넣었다.

데라시는 몸이 무거워지고 답답해지는 것을 민감하게 느꼈다.

하지만 그런 대책 없이는 벽난로가 있는 그의 방에서 나갈 수 없 었다. 규리하의 땅은 변온 생물인 나가들이 생활하기에 적절한 온도가 아니었고 그 점은 규리하의 하늘 또한 마찬가지였다. 시 종이 주둥이의 마개를 단단히 닫은 후 데라시는 지체 없이 방을 나섰다.

그는 황궁을 가로질러 바쁘게 걸어갔다. 굳이 걸음을 재촉할 필요는 없었다. 사람들은 데라시의 시간을 뺏으면 안 된다는 것 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늘누리의 사람들은 발아래에서 펼쳐진 승전에 흥분해 있었고 그 사실에 대해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했다. 양자가 모두 아는 정보를 끝없이 교환하는 일이 가진 사교상의 가치를 인정하긴 해도, 데라시는 그 때문에 물이 식어 몸이 차가워지는 꼴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대단히 급한 일이라도 있는 양 황급히 걸어갔다. 그리고 흥겨워하던 이 들은 그런 비스그라쥬 백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어쨌든 황궁뿐 만 아니라 하늘누리 전체가 승전에 기뻐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비스그라쥬 백을 구태여 붙잡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데라시는 아무 방해 없이 황제의 집무실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데라시는 집무실 입구에 서 있던 장애물을 올려다보 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2미터의 신장에 가슴둘레는 그 이상이 아 닌가 의심스러운 장애물이었다.

황제의 집무실을 지키는 금군 구레는 짧은 순간 유혹을 느끼는 듯했지만, 결국 자신이 고지식한 인물임을 보여 줄 기회를 포기 했다. 그가 백작에게 이름과 방문 목적을 묻고 그것을 황제에게 전하고 허락을 얻는 것은, 물론 황궁의 예법에 맞는 일이지만 지 나치게 번거로운 일이다. 그래서 구레는 그냥 문을 열어 주었다.

방문 안으로 들어서자 데라시는 몸이 뜨거워지는 반가운 기분을 느꼈다. 하늘누리에서 이 계절에 벽난로를 때는 곳은 세 군데 뿐이다. 데라시는 벽난로를 바라보았다.

아라짓 제국의 지배자인 치천제는 활활 불타오르고 있는 벽난 로 근처에 앉아 있었다. 들어오는 데라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황제는 데라시가 문을 닫자 닐렀다.

<구레는 드디어 자신의 소중한 의무를 포기했군.>

<자신을 바보로 만드는 일을 포기한 것입니다, 폐하. 그는 제 가 항상 폐하께 허락을 받은 후에 찾아온다는 것을 눈치 챘습니 다.〉

<그에게도 눈치라는 게 있나 보지? 두뇌로 갈 영양이 전부 근 육으로 간 것 같은데.>

<구레를 탐탁찮게 여기시는 뜻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만, 폐하, 그는 성실한 사람입니다.>

치천제는 귀찮음이 역력한 표정으로 백작을 외면했다. 황제는 창가로 다가가 그곳에 놓인 화분을 바라보며 닐렀다.

<난롯가에 옷을 걸어 두어라.>

데라시는 고개를 숙여 감사한 다음 무거운 보온복을 힘겹게 벗 었다. 벽난로에는 그런 용도로 부착된 옷걸이가 있었다. 데라시 가 보온복을 벽난로 옆에 걸어 두자 황제가 질문했다.

<무슨 일이지?>

<조금 전 대장군 엘시 에더리가 승전 보고를 보내왔습니다.> 

치천제는 기뻐하지 않았다. 전쟁터를 직접 내려다볼 수 있는 수도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황제 또한 이미 전쟁의 결과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황제는 이어질 니름을 기다렸다. 데라시는 벽난로 옆에 서서 닐렀다.

<그리고 의전관에게 보내는 자문 요청서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수령한 의전관은 감당하기 어려운 내용이라 판단하고 답장을 쓰 기전 제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네게 떠넘겼다는 니름이군. 무슨 내용이지?>

<대장군은 의전관에게 특정한 의전 형식에 대해 자문을 구했습 니다.>

<개선식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

<아닙니다, 폐하. 대장군은 승전을 거둔 장수가 승전 보고를 하면서 죄수들의 대사면 건의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자문을 구 했습니다.>

꽃을 들여다보던 황제는 놀란 표정으로 데라시를 돌아보았다.

<대사면?>

<예, 폐하.>

<부냐 이야기군.〉

<그런 것 같습니다, 폐하.〉

비스그라쥬 백은 황제가 언짢아할 것이라 짐작했다. 하지만 황 제는 담담하게 닐렀다.

<가끔 생각하는 건데, 우리 대장군은 지독한 사람이야. 네 생 각은 어떤가, 데라시? 짐이 부냐 헨로를 용서해야 할까?>

데라시는 곤혹스러움을 느꼈다. 황제는 부냐 헨로에 대해 사람 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었고 데라시가 어떻게 생각하 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부냐 헨로의 사건은 보통의 상식만 갖춘 자라면 모든 선민 종족이 비슷한 판단을 내릴 단순한 사건이었 다. 따라서 황제의 질문은 데라시의 의견이 궁금해서 던진 것은 아니다. 짧은 시간 동안 황제를 거들까 고민했지만 데라시는 결국 사실대로 니르기로 했다. 황제는 데라시가 일부러 심중과 다 른 니름을 한다는 것을 짐작하지 못할 사람이 아니다.

<부냐 헨로가 그녀의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 실수를 저지른 것 은 사실입니다, 폐하. 하지만 저는 그녀의 행동을 죄라고 니르고 싶지는 않습니다.>

<용서하라는 건가?>

그렇게 해 주신다면 폐하의 자애로움에 많은 이들이 감사할 것입니다.>

<대장군도 그럴까?>

<네? 당연히 그렇겠지요.〉

<글쎄, 데라시. 대장군은 부냐 헨로를 용서해 달라고 하지 않 았어. 대신 규리하 변경백령으로 달려와 이 땅의 불패 신화를 버렸지. 이렇게 거친 남자도 드물지. 그러고는 짐이 기분이 좋아 져서 죄수들의 대사면을 명령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 그중에 부냐 헨로가 포함되길 바라면서. 이렇게 소극적인 남자도 드물 지.〉

<그것이 엘시 백작의 방식입니다. 그의 희망을 이루어 주시길 간원드립니다. 백작으로 하여금 폐하께 바친 충정이 값진 것이었 다고 여기게 해 주십시오.>

<데라시.>

<네?>

<값을 받지 못하더라도 그는 짐에게 충성해야 돼. 그렇잖은가?> 

데라시는 비늘이 일어나는 것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그리고 조 금 후엔 자신의 어리석음에 염증을 느꼈다. 데라시의 발아래에는 충성의 값을 매기려다가 몰살당한 자들이 있었다.

<망극합니다, 폐하.>

치천제는 별로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은 채 꽃잎을 만지작거 렸다. 그리고 집중하지 않은 니름처럼 닐렀다.

<부냐 헨로는 엘시에게 어울리지 않아. 짐은 엘시에게 공작의 위를 주어 규리하를 다스리게 할 생각이었다.>

데라시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허리 를 펴 창밖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떤 산이나 시야를 가로막는 지평선도 보이지 않는 하늘누리의 하늘이었다.

<아이저 규리하가 남겨 둔 독기를 모두 태우려면 그 정도 불길 은 필요할 테지. 이곳을 탐내는 얼간이들이야 많겠지만, 그런 반 편이들 중 하나를 그곳에 앉히는 것은 그에게 사형을 언도하는 일이 될 것이다. 살아서 아무 쓸모가 없는 그런 반편이들의 문제 는, 죽은 후에 없던 쓸모가 생기는 대신 소란만 일으킨다는 거 지. 엘시만이 이곳을 다스릴 수 있다. 그런 엘시에게 부냐 헨로 는 짐이 될 거야. >

데라시는 당혹을 감추기 어려웠다. 황제의 니름은 합리적이었 다. 하지만 엘시 에더리는 전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다. 데라시는 황제에게 엘시 에더리가 보내온 보고서의 흥미로운 부분을 닐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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