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1권 : 황제 사냥꾼 [제1장] – 잠든 불씨 6
원래 아이저 규리하의 것이었던 보좌 옆에 서서, 칼리도 백이 자 황제의 대장군인 엘시 에더리는 틸러 달비 부위의 설명을 들 었다. 설명을 경청한 백작은 훌륭한 상황 판단과 민첩한 대응을 높이 사서 즉석에서 틸러에게 포상을 내렸다. 상당한 양의 금편을 받은 틸러는 아버지가 틀림없이 기뻐할 거라 생각하며 대전에서 물러났다.
엘시 에더리는 정우 규리하를 바라보았다.
정우 규리하는 몇 단 아래의 바닥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얼굴 과 어깨를 뒤덮은 머리카락을 가만히 바라보던 엘시는 갑자기 앞 으로 걸어 나갔다. 도열해 있던 제국군의 장수들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대장군과 정우를 바라보았다.
엘시는 정우 앞에 섰다. 눈앞에 선 다리를 본 정우는 고개를 들어 대장군을 올려다보았다. 엘시는 단 위에 있는 보좌를 가리 키며 조용하게 말했다.
“규리하 공 비셀스 규리하. 당신은 규리하 변경백의 최우선 계 승권자로서 저 자리에 앉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까?”
정우의 창백한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수만의 군대를 휘하에 둔 제국의 만병장인 남자가 어떻게 포로로 잡힌 힘없는 여인에게 자신의 것을 지켜보겠느냐는 식의 야비한 소리를 할 수 있는지 정우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엘시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 본 그녀는 거기에 비웃음이나 조롱이 없음을 깨달았다. 문득 정 우는 정신을 잃기 전에 겪었던 기묘한 일을 떠올렸다.
정우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대장군님, 저는 여섯 살이 될 때까지 자신이 이상하게 생긴 도깨비라고 생각하며 혼자 속상해하곤 했어요. 제가 충분히 이해 할 만한 나이가 된 후에야 즈믄누리의 어르신들은 제 신분과 킴 으로서 알아야 할 것들을 가르쳐 주셨지요. 하지만 그분들은 킴 이 아니고 그랬던 적도 없던 분들이죠. 지금 제게 어떤 것을 암시하고 싶으시다면, 대장군님, 도깨비에게 말하듯이 말씀해 주세요. 그 편이 이해하기 쉬우니까요.”
묵묵히 정우를 내려다보던 엘시는 그녀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당연한 일이지만 당신의 아버지는 이 땅을 더 이상 지배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 땅은 새로운 주인을 얻어야 합니다. 폐하께 서 적절한 인선을 하실 수 있도록 나는 이 땅의 새 통치자로 어 울리는 품격과 덕성을 가졌다고 여겨지는 인사를 추천할까 합니 다. 그 목록에 당신을 포함시켜도 되겠습니까, 규리하 공?”
도열한 제국군의 장수들은 간신히 신음을 흘리지 않았다. 하지 만 그들의 눈은 정우의 눈과 똑같았다. 정우는 당황하여 고개를 갸웃거리다 말했다.
“정우라고 불러 주시면 좋겠어요. 반란자의 딸인 제가 어떻게 규리하의 새 통치자가 될 수 있지요?”
“그것이 그렇게 바르지 못한 일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정우.”
“예? 무슨 말씀인가요?”
엘시 에더리는 참을성 있게 설명했다.
“정우, 불쾌하시겠지만 조금 전 시카트 규리하가 한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정우는 생각하기도 싫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녀가 입을 열기에 앞서 엘시가 말했다.
“시카트 규리하와 아이저 규리하가 두려워한 것은 결국 당신의 변경백위 계승입니다. 당신은 변경백위의 최우선 계승권자이며, 당신이 이 전쟁에 적극적 참여를 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그리 고 당신의 경우는 부작위에 의한 종범에도 해당하지 않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거역하는 것은 힘든 일이니까요. 따라서 당신이 변경백위를 계승하는 것에 큰 문제는 없습니다.”
정우는 틸러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하지만 기절이 이해력을 증진시킬 리는 없기에 그녀는 여전히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제 아버지와 동생은 왜 그걸 두려워하는 거죠?”
“유서 깊은 규리하 가문은 제국 전역에 걸쳐 다종다양한 친교 를 쌓아 왔으며 그런 친교의 대상 중 상당수는 규리하 변경백령 은 규리하 가문이 지배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분들 중 일부는 규리하 가문 이외의 사람들에게 변경백령이 넘어 간다면 불평을 하고 심지어 화를 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변경 백위가 당신에게 계승된다면 그들이 화를 낼 명분은 없어집니다. 그것은 도주한 아이저 규리하의 예비 지지자들이 이탈한다는 의 미입니다.”
“제 아버지와 함께 화를 내어 줄 사람이 줄어든다는 의미인가요?”
“영민한 이해이십니다. 또한 당신이 죽을 경우 제국군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악담을 퍼뜨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 바르지 못한 책략을 통해 아이저 규리하는 중도적 인사들의 규합을 도모할 수 도 있습니다.”
“아아.”
제국군의 장수들은 한숨을 내쉬었지만 정작 자신들이 누구에 게 한숨을 내쉬는지는 알지 못했다. 도무지 정치적이지 못한 정 우와 민감한 정치적 사안을 아무렇게나 말해 버리는 엘시 백작 중 누가 더 그들을 어이없게 했는지는 뇌룡공 륜 페이가 부활한 다 하더라도 가늠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엘시의 직설적인 설명이 정우의 이해를 도운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제가 변경백위를 계승하는 것에도 문제가 있을 것 같 은데요. 폐하의 권위를 염려하는 많은 분들이 제 변경백위 계승 을 역겨워하실 것 같아요.”
“나도 아무런 반대가 없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아이저 규리하가 고집했던 것을 거부한다면 그런 거부감 또한 상당히 사라질 겁니다.”
“아버지가 고집했던 것…… 충성 서약을 부정하라는 말씀인가요?”
“그렇습니다.”
그것이 전쟁의 원인이었다. 황제는 더 이상 충성서약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아이저 규리하는 서약 지지파의 우두머리였 다. 어느 쪽도 적극적으로 원했던 것은 아니지만, 결국 양자의 의견 차는 피의 무게로 조절할 수밖에 없었다.
장수들은 이 해괴한 대화가 그럭저럭 정리 단계에 들어섰다는 안도감 속에 행복해졌다. 하지만 정우는 안도하지 못한 채 오른 손으로 왼쪽 손목을 움켜쥐었다.
“대장군께서 말씀하신 대로 한다면, 저는 아버지와 가족들의 적이 되겠군요.”
“그들에게 당신은 이미 적입니다.”
정우는 몸을 떨었다.
“그렇군요. 시카트가 저를 좋아해서 칼을 들지는 않았을 테니.”
“내 권고를 따르겠습니까?”
“대장군님, 저는 이 땅을 다스리고 싶지 않아요. 그런 무거운 책임에 대해선 생각해 본 적도 없어요.”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정우. 당신은 어쩌면 자신 속에 있는 통치력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에게 물려줄 때까지만 저 자리를 지켜도 됩니 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나는 당신에게 저 자리를 지키라고 권 하고 싶습니다. 당신에게 반란자의 혈족으로 처형당하는 취미가 없다면.”
정우는 소스라치게 놀라 마치 물리적인 공격을 받은 사람처럼 상체를 젖혔다. 엘시는 그녀를 안심시키듯 뒤로 조금 물러났다. 정우는 입술을 떨며 말했다.
“이 땅의 지배자가 되거나, 처형되거나 둘 중에 하나밖에 없는 건가요?”
“내 생각엔 그렇습니다.”
“어째서죠?”
“이미 말씀드린 사실들에서 유추할 수 있을 겁니다. 당신이 충성 서약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당신에게도 아이저와 같 은 역심이 있을 거라 믿을 겁니다. 따라서 당신은 충성서약을 부정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충성서약 없이 규리하의 통치자가 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엘시의 희망과 달리 정우는 백작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녀는 공포에 떨었다.
“저는 아버님이 부르셔서 이 성에 왔을 뿐이에요. 딸이 아버지……의 명령을 따른 것이 잘못인가요? 겨우 그런 일 때문에…………… 동생 에게 살해당할 뻔하고………… 저는 도깨비…… 킴들의 논리로 저를……… 그건 부당하기 짝이 없는…….”
정우의 말이 혼란스러워졌다. 엘시는 짧게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당신이 당했던 모든 바르지 못한 일들에 대해 진심으로 유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내 질문에 빨리 대답해 주길 부탁합니다.”
“빨리?”
“나의 명령을 받아야 하는 장병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우는 엘시가 아무런 대가 없이 선물을 주고 있음을 깨달았 다. 패배자를 자기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데도 엘 시 에더리는 정우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었고 그것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사만 명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사용해야 하는 지 휘관이 오직 한 사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에게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배려에 커다란 당혹감을 느낀 정우 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대답했다.
“저는 그 자리를 원하지 않아요.”
정우는 자신의 말에 놀랐지만 그것을 부정하거나 부연하지 않 았다. 다만 크게 뜬 눈으로 엘시를 바라보았다. 엘시는 실망했는 지 만족했는지 알기 어려운 표정이었고 그 때문에 정우는 불안해 졌다. 조금 후 그가 입을 열었을 때도 그녀는 자신이 대장군의 기대를 충족시켰는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당신의 방으로 돌아가십시오, 정우 규리하. 몸가 짐을 돌봐 줄 사람 한 명을 허락하겠습니다. 그리고 내 허락 없 이는 방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물론 당신의 요구가 정당하다면 나는 언제든 출입을 허락할 것입니다.”
정우 규리하에게 유폐 명령을 내린 다음 엘시는 그 일을 담당 할 사람을 선임했다. 정우는 민첩하게 진행되는 상황을 넋을 잃 은 채 바라보다가 명령을 받은 장수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에야 입을 열었다.
“대장군님, 저는 이제 제 방에서 처형을 기다려야 하나요?”
“그것은 폐하께서 결정하실 일입니다.”
정우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때 엘시가 다시 말했다.
“기회가 된다면 당신에겐 황제 폐하께 대적할 의도가 없었으며 다만 아버지의 명령을 따라 이곳에 온 것뿐이라는 사실을 폐하께 아뢰겠습니다.”
정우의 얼굴이 밝게 빛났다. 그녀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대장군님.”
“폐하께 정확한 사실을 고하는 것은 내 의무입니다.”
정우는 머리를 깊이 숙여 인사하고는 대전에서 물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