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1권 : 황제 사냥꾼 [제1장] – 잠든 불씨 7

랜덤 이미지

피를 마시는 새 1권 : 황제 사냥꾼 [제1장] – 잠든 불씨 7


집중한 채 비스그라쥬 백의 니름을 듣던 아라짓 제국의 지배자는 빙그레 웃었다.

<흥미롭군. 엘시가 그런 생각을 했단 니름인가.〉

<잠시 대장군의 보고서를 인용하겠습니다. ‘널리 알려진 바, 정우라고도 불리는 비셀스 규리하와 아이저 규리하의 관계는 그 다지 돈독한 부녀 관계라 하기는 어렵고, 비셀스 규리하가 이 전 쟁에서 폐하께 대적하려는 의도를 품거나 실행했다는 증거는 어 디에서도 포착되지 않았사옵니다. 그런즉, 원치 않았던 환란 문에 피폐하고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변경백령의 백성들이 친근하게 여길 수 있는 규리하 공 비셀스 규리하로 하여금 그들 을 보살피게 한다면 이는 곤경에 처한 양 떼가 익숙한 양치기를 만난 것과 다름없으니 그 뜻이 제법 장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라고 썼더군요, 폐하.>

<재미있는 의견이군. 하지만 즈믄누리에서 자란 인간에게 통치 라니. 그 비셀스인지 정우인지 하는 여자는 어떤 사람이지?>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없는 듯해서 개괄적인 것만 알고 있습 니다. 아이저 규리하의 장녀이며 상당히 병약하게 태어났다고 합 니다. 모든 사람들이 살기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이 저 규리하의 오랜 친구인 즈믄누리의 바우 머리돌 성주가 그 이 야기를 전해 듣고는 그녀를 즈믄누리로 데려와야겠다고 결정했습 니다.〉

치천제는 조금 놀랐다.

<성주가?>

〈예.〉

<그 결정은 즈믄누리에서 이루어졌나?>

<그렇습니다.>

비스그라쥬 백 데라시는 황제가 왜 질문하는지 알고 있었다. 즈믄누리의 성주가 즈믄누리에서 내리는 결정들에 대한 신비한 이야기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

<아이저 규리하는 그 결정을 따르기로 했고 결국 그 결정은 옳았습니다. 비셀스는 건강을 회복했고 그 후로 지금껏 즈믄누리에 서 자랐습니다. 물론 아이저는 바우 성주에게 매년 푸짐한 선물 을 보냈으며 변경백의 장녀로서 알아야 할 일을 가르치기 위해 간혹 특별한 스승을 즈믄누리로 보내었습니다. 하지만 한번도 규 리하로 불러들이는 일은 없었습니다. 전쟁이 벌어지기 직전 아이 저는 처음으로 그녀를 성으로 불러들였습니다. 아마 인질이 될까 봐 걱정한 것이겠지요. 그리고 그녀에게 그 이상으로 흥미로운 이야기는 없습니다. 주위 사람들과 다른 점 때문에 좀 우울해하 며 어린 시절을 보냈을 테지만, 그건 그녀의 성격에만 영향을 미 쳤을 뿐 능력에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습니다. 어떤 면으로 도 특기할 만한 점은 보여 주지 않았습니다. 능력만 놓고 본다 면, 백작이 저잣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촌부에게 규리하를 넘겨준 다 해도 비셀스에게 주는 것과 별 차이는 없을 겁니다.>

<차이가 있어.〉

<예?>

<비셀스는 규리하를 포기했지. 강대한 규리하를 간단히 포기하 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게다가 거부할 경우 당할 수 있는 곤란한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그건 대단한 능력이라고 할 수도 있지.>

<그건 그저 도깨비다운 수줍음일 겁니다.>

<설명할 수 있겠나?>

<예. 보고서에 인용된 그녀의 발언을 놓고 보거나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더라도 비셀스 규리하는 인간의 사고 방식보다는 도깨 비의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리고 평범한 도깨비라면 수십만 명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라면 일단 거절부터 할 겁니다. 폐하께서도 기억하시겠지만 즈믄누리의 바우 머리돌 성주는 죽기 전에 그렇게 애를 쓰고도 결국 성주의 자리에서 물 러나지 못했습니다. 결국 어르신이 된 후에도 즈믄누리를 다스려 야 했던 열 명의 선대 성주들과 같은 처지에 처해 있고, 바우 머 리돌 성주가 그 상황에 만족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 다. 비셀스가 거절한 것도 그런 거부감 때문일 겁니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자기가 위험해지는데.>

<두 가지 방식으로 그런 선택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선 비 셀스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도깨비들 사이에서 자란 탓에 죽 음에 대한 제대로 된 관념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비셀스는 그저 아버지가 불러서 이곳에 왔을 뿐인 자신이 큰 처벌을 받지 는 않을 거라고 믿고 있을 겁니다.〉

황제는 수긍하듯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는 닐렀다.

<부냐 때문에 그런 것일까.>

데라시는 대답하지 않았다. 황제가 대답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 실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가의 니름은 인간의 언어보다 훨씬 본 심을 잘 드러낼 수 있다. 그리고 데라시는 황제의 추측에 공감했 다. 누구라도 엘시 백작이 정우에게 사형 대신 규리하 통치를 제 안한 것을 알면 부냐 헨로의 처지를 떠올릴 것이다.

황제가 닐렀다.

<그래서 우리의 마루나래는 처녀가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자 어떻게 대응했지?>

미리 대비하고 있었기에 데라시는 즉각 닐렀다.

<백작은 규리하 백성들에게 신뢰를 받고 있거나 받을 수 있다 고 생각되는 인사들의 이름을 거론하고 간략한 추천 사유를 덧붙 였습니다. 글자와 문장 부호보다는 공평함과 객관성이 더 많이 들어 있는 것 같은 보고서였고, 당연히 그 이름들 중에 칼리도 백 엘시 에더리는 없었습니다.〉

<곤란하군.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도 하지 않는 건 가. 그래도 엘시여야 해. >

<그에겐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습니다, 폐하. 게다가 그 가 받아들인다 해도 발케네 공은 절대로 승복하지 않을 겁니다.〉

데라시가 조심스럽게 니른 뜻밖의 이름을 접하자 황제의 니름에 노기가 묻어났다.

<짐은 락토의 승낙이나 거부를 구한 적이 없어.>

<하지만 락토 빌파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칼리도 백에게 공작위 를 하사하기는 어렵습니다. 귀족원의 심사권이 있으니까요. 발케 네 공이 귀족원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누군가가 공 작이 되는 것을 막을 정도의 힘은 가지고 있습니다.〉

황제는 손등의 비늘을 조금 세우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짐과 제국을 위해 이 정도의 대승을 거둔 백작을 적대시하는 것은 락토에게 있어 스스로에게 내리는 금치산 판정이 될 거다.〉 

<그런 가정을 하고 계신 거라 짐작했습니다, 폐하. 하지만 락 토 공작의 입장에서는 바로 이때가 아니면 절대로 백작을 억누를 수 없다고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락토 공작은 엘시 백작이 큰 모욕을 당하길 바라며 이 전쟁을 주시하고 있었을 겁니다. 하지 만 백작은 손쉽게 이겼고 공작은 지금쯤 초조해하고 있을 테지 요. 이 시점에서 엘시 에더리에게 공작위를 하사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면 공작은 모험을 결심할 겁니다. 어쨌든 그는 자신의 코 앞 에 엘시 공작이 탄생하는 것을 좌시할 사람은 아니니까요. 암살 공이 결행하는 모험은, 글쎄요, 가장 원만한 형태로 수습되더라 도 백작에게 큰 상처를 남길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규리하를 다른 자에게 주라는 건가?>

<당분간만이라도 황제령으로 두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짐은 절대로 지상의 땅을 가지지 않아. >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한시적인 기간 동안만……………〉

<더 이상 니르지 마.>

데라시는 절망감 비슷한 것을 느꼈다. 황제와 가까운 사람은 아무도 없고 데라시는 언제나 자신이 다른 자들보다 아주 약간 황제와 더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하려 애썼다. 그런 생각은 그에 게 자제력과 겸손함을 주었다. 또한 안전함도. 불에 조금 더 가 까이 있으면 더 따뜻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 속에 손을 집어 넣으면 비늘이 타버릴 뿐이다. 거리를 두어야 한다. 그런데도 데라시는 자신을 황제의 최측근으로 여기고 싶은 충동에서 자유 롭지 못했다.

그러나 황제는 때때로 데라시의 그런 충동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곤 했다. 지상의 땅에 대한 황제의 거부감은 데라시가 도무 지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였다. 어차피 지상의 지배자는 그녀 이며 각 영지의 지배자들은, 그런 사실을 자주 확인하는 것을 좋 아하지는 않겠지만, 그녀의 대행자일 뿐이다. 따라서 지상의 땅을 가지지 않는다는 황제의 선언은 원칙적으로 모순이다.

황제의 그런 불가해함을 접할 때마다 데라시는 자신이 다른 사 람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는 느낌을 받아야 했다. 그런 느낌이 그를 괴롭혔지만 데라시는 무엇이 타고 있는지 알려고 불 속에 손을 집어넣는 짓은 하지 않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엘시 에더리입니까?>

황제는 오른손으로 입 주위를 받친 채 생각에 잠겼다. 데라시 의 기대대로 그 시간은 짧았다. 그리고 그 내용은 데라시의 기대 대로 전혀 예상외였다.

<비셀스 규리하를 회유해 봐.>

<예? 비셀스 규리하를 니르셨습니까?>

<엘시의 생각이 재미있군. 빌파가 아무리 무도하다 해도 다른 사람들의 결혼을 트집 잡을 수는 없겠지.>

비스그라쥬 백은 잠깐 고민한 후에야 황제의 니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비셀스 규리하에게 규리하를 주고, 차후에 엘시 백작과 결혼 시킨다는 니름이십니까?>

〈그래.〉

<하지만…… 폐하. 니를 것도 없이 백작은 폐하를 위해 규리 하를 무너뜨렸지만, 그의 흉중에는 폐하께서 니르신 것처럼 부냐 헨로의 석방을 도모하려는 마음도 있었을 겁니다. 백작이 부냐 헨로 대신 비셀스 규리하와 결혼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결혼하게 만들어.〉

황제의 명령은 예상외라는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데라시 는 니름과 표정 양쪽으로 최대한의 낭패감을 표현하며 닐렀다. 

<폐하, 그게 그렇게 ‘문을 닫아’라든가 ‘책을 가져와’ 라는 명 령처럼 간단한 명령 같지는 않군요.>

〈짐이 누구냐고 묻고 싶군,데라시.〉

<만물의 지배자이십니다. 하지만 폐하, 인간들은 결혼을 개인 적이며 타인의 참견을 불허하는 문제로 생각합니다.〉

<인간들도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걸.>

<하지만 우리에게 결혼이라는 관습이 없는 이상 인간들이 하는 설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 들의 관습이 엉터리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정말 엉터리일 경 우에도 무익합니다.>

그렇다면 자신들의 결정으로 결혼하게 되었다고 믿게 만들어.〉

그리고 황제는 마음속으로 어떤 영상을 그렸다. 그것은 데라시에게 정확하게 전달되었다. 데라시가 본 영상에는 목에 올가미가 걸린 부냐 헨로가 나타나 있었다. 그리고 그 올가미의 끝은 어떤 인간 여자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여인의 얼굴은 뚜렷하지 않았지 만 데라시는 어렵잖게 그녀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2미터가 넘는 키에 씨름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인간 여자를 비셀스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긴 어려웠다. 그러나 실제 비셀스는 전 혀 그렇게 생기지 않았기에 데라시는 정신적인 미소를 지었다. 

<엘시 백작이 그런 조건을 감내할지 의문입니다만, 알겠습니 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무자비할 정도로 명령형으로 일관하던 황제는, 데라시의 응낙 을 받자 약간의 동정심을 보여 주었다. 황제는 부드럽게 닐렀다. 

<이 전쟁 때문에 고생 많았다. 데라시. 하지만 무슨 일이든 뒤 처리가 말끔하지 않다면 노력도 무의미해지지. 조금만 더 수고해 줘.〉

데라시는 감명을 받았음을 솔직하게 드러내었다. 황제에 대한 길고 힘든 봉사의 세월 동안 데라시가 이 정도의 보답을 받은 적 도 드물다. 보답을 바란 적이 없기에 데라시는 그런 가벼운 배려 에도 크게 감동했다. 깊이 고개를 조아린 다음, 데라시는 자신 있게 닐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폐하.>

황제는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그리고 지나가는 니름처럼 닐렀다.

<그래. 그런데 그건 어떻게 되었지?>

데라시는 황제가 니른 그것이 무엇인지 모를 사람이 아니었다.

<현재 금고방의 위치는 파악했습니다. 하지만 여는 방법을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을 열기 위해선 비셀스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여러 가지로 비셀스를 만나 봐야겠군. 네가 맡도록.> 

<알겠습니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