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1권 : 황제 사냥꾼 [제1장] – 잠든 불씨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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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마시는 새 1권 : 황제 사냥꾼 [제1장] – 잠든 불씨 8


대저택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는 하늘누리에서도 엘시 백작의 집은 두드러지게 단출했다. 티나한 로(路)와 갈바마리로 교차 지점에 있는 엘시 백작의 조그마한 집에는 단 두 명의 식솔만이 거주하고 있다. 엘시 에더리 자신과 그의 몸종 이레 달비가 그 두 명이다.

하늘누리의 집을 동산으로 봐야 할지 부동산으로 봐야 할지를 놓고 다투는 법리학자들은 많았고, 제반 상황은 그 해답이 제시 될 수 있는지조차 모호하게 만들고 있지만, 칼리도 백 엘시 에더 리 자신은 이미 오래전에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엘시는 식솔들 이 거주하고 귀빈을 맞이하기 위한 공간으로는 쟁룡해에 면해 있 는 자신의 저택을 이용했고 하늘누리 위에서는 천막 생활이나 다 름없는 생활을 했다.

평소 엘시는 대장부가 처신을 올바로 하기 위해 필요한 사용인 은 한 명이면 족하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몸종인 이레 달비는 정반대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이레에게 백작은 모시기 쉬운 상전이었다. 집안의 일에 그다지 까다롭게 개입하지 않기 때 문이다. 하지만 백작을 방문하는 어마어마한 신분의 손님들을 제 대로 대접하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레는 만성피로를 느꼈다. 이레의 사정을 잘 아는 인사들은 재치 있게도 필요한 준비물들을 하인의 손에 들려 방문함으로써 이레를 도와주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런 재치를 가진 것은 아니었 는데, 예를 들어 도깨비 탈해 머리돌 같은 이가 그랬다.

탈해는 다양한 집을 방문하는 즐거움이 각기 다른 물맛과 술 맛, 장맛을 보는 것에 있다고 믿었고, 그래서 자기 집의 음식을 싸들고 다른 집을 방문하는 것을 크나큰 불행으로 생각했다. 사 람들은 음식이나 술맛의 개별성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있었지만 물맛에 대해서는 곤혹스러워 할 수밖에 없었다. 생물의 등 위에 건설된 하늘누리에는 당연히 우물이 없기 때문에 황제를 포함하 여 모든 하늘누리 시민들은 같은 빗물을 마신다. 하지만 탈해는 같은 물이라도 집집마다 달라진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가치관을 고집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탈해의 말에 동의하기 힘들었다. 

“백작님 댁의 물맛이 좀 바뀌었군요.”

엘시의 집 마루에 앉은 탈해가 이렇게 말했을 때 이레가 어처 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 것은 그런 사정 때문이다. 이레는 ‘어떻게 바뀌었는지 알려 주시지요.’ 라고 말하고 싶은 기색을 역 력히 드러내었지만 존경하는 주인의 체면을 생각하여 그 말을 삼 켰다. 그리고 엘시는 사용인의 바람을 잘 이해하는 좋은 주인이 었다.

“물맛이 바뀌었다니, 그건 도대체 무슨 말인가?”

“아, 오셨습니까, 각하.”

탈해는 마당을 가로질러 오는 엘시를 보며 몸을 일으켰다. 엘 시가 마당 저편에서 탈해의 말을 들은 것은, 황제의 대장군이 지 위에 걸맞은 초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 정도로 집이 협소하 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네 걸음만에 마당을 가로지른 백작은 마루에 걸터앉아 투구를 벗었다.

“앉아, 탈해. 그리고 이레, 나도 맛이 바뀌었다는 그 물 좀 가져다주겠어?”

이레는 깊숙이 목례했다. 그 목례는 평소보다 극진했다.

“알겠습니다, 가주님. 그런데 의복을 준비할까요?”

엘시는 가주라는 말에 미소를 지었고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이레는 얼굴을 조금 붉혔다. 엘시가 말했다.

“그래 주면 좋겠군. 갈아입고 바로 나갈 테니 외출복으로.” 

“알겠습니다, 주인님.”

이레는 조금 후 물그릇을 가져와 맵시 있게 내려놓은 다음 옷 을 준비하러 갔다. 물을 한 모금 마신 엘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물맛이 바뀌었다는 거지? 하늘누리에서 마시는 물은 다 똑같은데.”

탈해는 대답하기에 앞서 품에서 짧은 곰방대를 꺼냈다. 엘시는 무례를 탓하지 않았다. 이레가 떠날 때까지 기다렸으니 오히려 사려 깊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엘시는 탈해의 매혹적인 곰방대 를 조용히 감상했다.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무슨 물건인지 상상도 하기 힘들 것이다. 그것은 도깨비 대장장이나 상상할 수 있는 곰방대였다. 물부리는 보통의 곰방대와 비슷했지만 연초를 채워 넣는 곳의 구 조가 특이했다. 곰방대 끝에는 잘 다듬어진 금속 원통이 부착되 어 있었고 그 원통에는 여섯 개의 구멍이 연근처럼 뚫려 있었다. 그 구멍 안에는 모두 연초가 채워져 있었고 채워 넣은 연초가 휴 대중에 쏟아질 염려가 없도록 정교한 덮개가 있었다. 그 작동 구조는 대략 다음과 같았다. 한 구멍의 연초를 다 피운 후 누름쇠라 불리는 곰방대의 특정한 부분을 건드리면 원통은 자동으로 육분의 일 회전한다. 그리고 다음 구멍의 연초가 ‘장전’ 되며 동 시에 ‘점화’ 된다. 여섯 번을 다 피운 후에는 물론 다시 연초를 채워 넣어야 하지만 대단히 편리한 물건임에는 분명하다. 실제로 탈해는 곰방대 아랫부분의 꼭지를 잡아당김으로써 연초 피울 준비를 다 끝냈다.

연기를 한 모금 빨아들인 다음 탈해는 코와 입으로 동시에 연 기를 뿜었다. 그 곰방대의 이름이 뻐끔이라는 것을 떠올린 엘시 는 정말 정직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탈해가 말했다.

“제가 방금 마신 물에서는 그 집안 주인이 입맛을 잃어버린 흔 적이 보이더군요. 집주인이 물로 허기를 달래고 있음이 분명했습 니다. 성실한 물독은 그럴 경우 물에 자양분을 담으려 애씁니다.” 

엘시는 미소를 떠올렸다.

“성실한 물독이라고 했나?”

“예. 잘 구워지고 정성껏 관리된 물독은 집안 식구들에게 성실 하려 애씁니다. 그런 물독에 담긴 물은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스하지요. 몹쓸 벌레가 꾀거나 상하는 일도 드뭅니다. 한편, 대충 구워지고 아무렇게나 관리된 물독은 집안 사람들에게 별다 른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지요. 그런 물독의 물을 마시는 식구들 은 성정을 상하게 됩니다. 따라서 물독은 성질 모진 식구들에게 더 궂은 대우를 받게 되는 악순환이 일어납니다. 이 댁의 물독은 칼리도에서 가져온 것이지요?”

“맞아. 내 기억으로도 조부님 대까지 올라가는 물건인 것 같 아. 더 오래되었을지도 모르고.”

“그런 해묵은 물독은 입맛을 잃어버린 집안 식구를 위해 물을 진하게 만드는 재주도 가지고 있습니다. 물맛이 변한 것은 그 때문이지요.”

“자네의 넘겨짚는 버릇이 더욱 심해질 것 같지만, 요즘 식사가 좀 부실했다는 것은 인정하겠어.”

“그분의 일에 대해서는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각하.”

“고마워.”

그리고 엘시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탈해는 화제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대승을 거두셨다고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엘시 또한 화제가 바뀌길 기다렸던 듯 빠르게 말했다. 

“축하하러 온 것은 아니겠지. 자네가 며칠 전에 하늘누리에 나 타난 것을 가지고 사람들은 온갖 흉흉한 이야기를 다 꾸며 대더 군. 즈믄누리의 무사장이 전쟁터에 나타나다니 긴장할 일 아닌 가? 하지만 나는 자네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군. 비셀스 규리하지?”

탈해는 더 이상 자제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정우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조금 전 만나고 오는 길이야.”

“만나고 오셨다고요!”

“그래. 아무 데도 상한 곳이 없이 안전하게 잘 있어.”

“자신을 죽이는 신이여, 감사합니다!”

탈해는 고함을 지르는 것으로도 모자란 듯 박수까지 쳤다. 다섯 번 빠르게 박수를 친 탈해는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됐습니다. 정우가 안전하다면, 전쟁도 이제 끝났으니 즈믄누리로 데려가도 되겠군요?”

“즈믄누리로?”

“예. 물론 정우가 동의해야겠지만.”

엘시 에더리는 팔짱을 끼고 잠시 할 말을 골랐다. 그동안 탈해 는 입에 물고 있던 뻐끔이를 한 번 더 맛있게 빨아들였다. 엘시 는 잠시 후 투구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도 그녀도 그쪽을 선호하는 것 같으니 정우라고 부르지. 정우의 동의는 무의미해. 폐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가 중요 하지.”

“아, 예. 하지만 폐하께서 아버지가 불러서 여기 왔을 뿐인 정 우에게 설마 벌을 내리시겠습니까.”

“자네들이 정말 정우를 보호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규리하로 보 내지 말았어야지.”

“그런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사실 제가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사태가 이렇게 될 것을 짐작했군.”

“예. 하지만 성주님께서 돌려보내야 한다고 결정하셨습니다.” 

엘시는 눈을 조금 크게 뜨며 탈해를 바라보았다. 모든 사람들 과 마찬가지로 백작 또한 즈믄누리의 성주들이 내리는 결정에 대 한 신비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다. 즈믄누리의 성주들이 내리 는 결정의 독특한 성격을 잘 나타내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황제가 태양이 두 개라고 말하면 조신들은 걱정할 것이다. 황제가 미친 것이 분명하기에. 즈믄누리의 성주가 태양이 두 개 라고 말하면 도깨비들은 걱정할 것이다. 태양 하나를 잃어버린 것이 분명하기에.’엘시는 다짐하듯 질문했다.

“바우 성주님께서 그렇게 결정하셨다는 건가? 정우를 규리하로 보내야 한다고?”

“예. 오래전 정우를 즈믄누리로 데려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성주님께서 결정을 내리셨습니다. 변경백이 연락을 보냈을 때 정우 는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성주님께 여쭤봤습니다. 성주님 은 가라고 하셨고, 그래서 정우는 그 결정을 따른 겁니다. 정우 자신은 이곳에 오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녀가 부친과 변경백령에 큰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바르지 못하다 하긴 어렵겠지.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정우가 즈 믄누리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도 바우 성주님의 결정인가?” 

“아닙니다, 각하. 성주님께서는 그 문제에 대해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엘시는 희미한 안도감을 느꼈다. 물론 그 또한 도깨비가 아닌 자들이 흔히 그러하듯 즈믄누리의 성주가 내리는 결정보다는 자 기 자신의 결정을 따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것 또한 다른 자들과 마찬가지였다. 탈해가 말했다.

“정우를 되돌려받는 것은 도깨비들의 소망입니다. 그녀는 킴이 지만 우리 가족입니다. 그래서 여쭙고 싶습니다. 폐하의 의중이 어떠한지 알 수 있을까요?”

“이봐, 탈해. 나는 조금 전에 전쟁터를 떠나 이곳으로 올라왔 어. 물론 승전 보고는 이미 황궁으로 보냈지만 아직 폐하를 알현 하지는 못했네. 자네가 좀 일찍 왔군.”

“그렇다면 혹 비스그라쥬 백 데라시는 만나 보셨습니까?”

엘시는 잠깐 동안 말을 멈췄다가 나직하게 질문했다.

“탈해, 왜 비스그라쥬 백을 거론하는 건가?”

“예? 폐하께선 현명한 데라시 백작의 의견을 높이 사신다고 들었습니다.”

“폐하께서는 물론 비스그라쥬 백의 현명함을 귀하게 여기시지만, 동시에 모든 이의 의견을 존중하는 분이기도 하시지. 미안하 지만 나는 백작 또한 아직 만나지 못했어.”

탈해는 실망한 표정으로 다시 뻐끔이를 들어 올렸다. 그는 누 름쇠를 누르려 하다가 생각을 바꿔 뻐끔이를 품속에 집어넣었다. 

“각하, 저는 몽화각에 머물고 있습니다. 몽화각도 좋지만 거기 선 도깨비들밖에 볼 수가 없지요. 괜찮으시다면 이 댁에 머물면 서 정우의 구명을 도모해도 되겠습니까? 정우의 일을 잘 풀기 해선 아무래도 각하의 도움이 절실할 것 같습니다.”

“내 집이 자네 집이야.”

엘시는 그의 하나뿐인 몸종이 비명을 지를 말을 태연히 꺼낸 다음 말했다.

“하지만 구명에 대해서는 좀 기다려 보라고 권하고 싶군. 정우 규리하의 신병을 확보하는 과정에 좀 괴상한 일이 발생했어.” 

엘시는 시카트 규리하와 정우 규리하 사이에서 일어난 일을 설 명했다. 소름 끼친다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던 탈해는 잠시 침 묵하다가 곧 표정을 밝혔다.

“알겠습니다! 시카트 규리하는 일부러 그랬을 겁니다. 제국군 병사가 다가오길 기다려 그런 모습을 보여 준 거지요. 누나가 자 신들의 적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참 영리한 행동입니다.”

엘시는 씁쓸한 기분을 느꼈지만 탈해의 호의 어린 넘겨짚기를 반대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그럴지도 모르는 일이다. 가능성은 낮지만, 탈해의 낙관적인 해석은 계속되었다.

“애초에 변경백이 정우를 이곳으로 불러들인 것도 그 때문인지 모르겠군요. 정우가 즈믄누리에 있으면 그녀를 반란자의 혈육이라는 신분에서 헤어나게 할 방법이 없지요. 그렇다면 성주님의 결정은 역시 옳았던 겁니다! 이제 이해가 되는군요.”

“그런지도 모르겠군. 어쨌든 그런 일 때문에 정우의 신분을 규 정하는 일에 변수가 발생했지. 그러니 구명에 대해서는 조금 기 다려 보게. 어쩌면 자네가 애쓰지 않아도 좋은 결과가 있을지 모 르니까.”

“성주님이 결정하신 일이니까 꼭 잘될 겁니다. 그렇다면 조만 간 정우를 만날 수 있겠군요. 그때까지 신세를 좀 지겠습니다.” 

“얼마든지 그래도 좋아. 다만 한 가지는 유념해 줘. 이레 앞에 서는 그걸 좀 조심스럽게 사용하도록 해.”

“뻐끔이 말씀이지요? 알겠습니다.”

“다행이군. 그럼 쉬고 있어. 나는 다시 나가 봐야겠어.”

“어디 가십니까? 혹 황궁의 고관들을 만나는 자리라면 제가 좀 따라가면 안 될까요?”

엘시 에더리는 좀 기묘한 표정으로 탈해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관들도 있긴 하지만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긴 어려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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