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1권 : 황제 사냥꾼 [제1장] – 잠든 불씨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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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마시는 새 1권 : 황제 사냥꾼 [제1장] – 잠든 불씨 9


하늘누리에는 무덤이 없다. 물론 제국 수도에서 사람이 죽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황제는 하늘누리에서 장례 의식을 금했다. 그리고 거기엔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 아래를 파면 시체를 묻을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유서 깊은 상식이지 만, 하늘누리에서는 같은 일을 시도할 경우 제국 수도를 멸망시킬 수도 있다. 하늘누리는 하늘을 떠다니며 결코 땅에 내려오는 일이 없는 거대한 생물 하늘치의 등에 건설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늘누리에서 누군가가 사망할 경우 시체는 지상으로 운구되 며 그곳에서 장례 의식이 거행된다. 제국의 아름다운 수도에 따 라다니는 악평이 생긴 이유 중의 하나가 그것이다. ‘하늘누리가 지나간 곳에는 무덤만 남는다.’ 풍경화가와 시인을 행복하게 하 는 제국 수도의 아름다운 모습에는 어울리지 않는 흉흉한 말이지 만 도리가 없다. 한편, 그 악평이 생긴 또 다른 이유는 훨씬끔 찍하다. 합리적인 이유에 의해 하늘누리는 지상의 도시 상공을 피한다. 그런 일은 지상의 신민에게 너무 많은 영향을 끼친다. 따라서 하늘누리가 사람들이 많은 곳에 나타난다는 것은, 규리하 변경백령에 대한 공격처럼 황제의 친정을 의미할 확률이 높다. 참혹한 학살이 뒤따르며 남는 것은 무덤뿐이다.

누구나 하늘누리와 지상을 잇는 계단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에 비춰 보면 놀랍지만, 시체를 아래로 운구하는 일은 좀 까 다롭다. 하늘누리의 계단은 그것을 상상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나타나며 그 사람에게만 작용한다. 하늘누리에 말이나 노새, 나 귀 같은 전통적인 사역 동물이 없는 이유는 그것이다. 그 동물들 은 계단을 상상할 능력이 없으며 설령 하늘누리에 데려다 놓더라 도 추락 사고의 위험이 높다. 여러 가지 크기의 승강기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조그마한 것이거나 곡물을 실어 나르는 것들이며, 당연한 일이지만 황제는 곡물 운반용 승 강기로 시체를 운반하는 일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운구는 순수하게 인력에 의해 실시된다. 이런 상황 때문에 하늘누리에 하나밖에 없는 장의 기관은 상당한 전문가 집단이다. 똑같은 형태의 계단을 상상할 수 있는 운구자들이 있으며(계단 모양이 달라지면 서로 보조할 수가 없다.) 시체를 오랜 시간 보존할 수 있는 냉동 장치를 갖추고 있다.

염사장 두이만 길토 또한 그런 전문가의 자부심을 실력으로 보 여 주는 일에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기술자였다. 하지만 그의 고객들은 그의 섬세한 기술을 평가해 줄 수 없으며 두이만 또한 고객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애쓸 필요가 없었다. 죽은 자들 만 고객으로 받으니 당연하다. 그 때문에 두이만은 약간 재미없 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두이만은 늦은 오후 찾아온 방문객에게 하늘누리의 다 른 주민이라면 보여 줬을 반응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부냐 헨로를 만나고 싶다고 하셨습니까?”

엘시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엘시 에더리에 게 ‘그분’이라든가 ‘염사 보조인’이 아닌 ‘부냐 헨로’ 라고 담담하 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두이만 길토뿐일 것이다. 곁에서 듣 고 있던 다른 염사들이 바람이 일어날 정도로 눈을 깜빡거렸지만 두이만은 사무적이라는 표현 이상으로 퉁명스럽게 말을 이었다. 

“저희에겐 적당한 면회 시설이 없습니다, 각하. 또한 죄인을 응접실로 불러올 수도 없고요.”

“안 된다는 말인가?”

“아니요. 염습실에서 만나도 괜찮으시겠냐는 질문입니다.”

또다시 한여름 오후 벌통을 연상시킬 만큼 맹렬한 눈 끔뻑임이 있었다. 하지만 엘시는 안도했다.

“만날 수만 있다면 나는 어디라도 상관없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다른 염사들이 보내는 ‘기회를 포착할 줄 모르는 바보’ 라든가 ‘당연히 깨끗한 옷을 입혀 응접실에서 만나게 해 줘야 함’에 해 당하는 눈빛을 무시하며 염사장 두이만은 천천히 일어났다. 두이 만이 조금도 서두르는 기색이 없이 밖으로 나가자 염사들은 의리 때문에라도 칼리도 백을 달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불행한 사실 은 그들 중 누구도 제국 만병장에게 말을 걸 배짱이 없었다는 사 실이다. 그래서 얼마 후 두이만이 돌아와 엘시에게 “따라오십시 오.”라고 말했을 때 불쌍한 염사들은 의리를 저버린 자신들에 대 한 자괴감에 빠지고 말았다.

염사장은 긴 통로로 엘시를 안내했다. 통로 좌우에는 문들이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감옥을 연상시키는 복도를 따라 걸 으며 엘시는 얼굴이 구겨지는 것을 애써 참았다. 두이만은 다른 문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엘시에게 말했다.

“저는 밖에 있겠습니다. 안에 의자를 가져다 놓았습니다.”

엘시는 두이만에게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엘시가 문 을 조심스럽게 당기자 잠겨 있지 않은 문은 간단히 열렸다. 순간 독한 약 냄새와 끔찍한 악취가 뒤섞여 밖으로 새어 나왔다. 엘시 는 신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안으로 들어서서 문을 도로 닫았다.

창문이 없는 대신 꽤 밝은 등롱이 있었지만 방 안은 답답했다. 육중한 돌벽은 당장이라도 방 안으로 쏟아질 것 같았다. 엘시는 눈을 몇 번 깜빡이고 조심스럽게 방 안을 살폈다. 커다란 석조 작업대 같은 것이 방 가운데에 놓여 있었고 그 옆에 물통 같은 것이 몇 개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앞쪽으로 두이만이 말한 의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의자들은 비어 있었고 방 안 어 디에도 엘시가 찾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엘시가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을 때 작업대 뒤에서 무엇인가가 천 천히 올라왔다.

그것은 앙상한 손가락들이었다. 석조 작업대 위를 거미처럼 움 직이던 손가락들은 그것을 할퀴듯 움켜쥐었다. 조금 후 그 손 뒤 로 인간의 형체가 따라 올라왔다. 헝클어진 머리와 땟국으로 찌 든 얼굴은 두억시니 같았다. 늘어난 목깃 너머로 드러난 가슴팍 때문에 가까스로 인간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넝마 같은 옷을 힘없이 움켜쥐어 가슴을 가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엘시는 숨이 콱 막히는 것 같았다.

부냐 헨로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엘시.”

엘시는 아무 말 없이 걸어갔다. 의자로 다가간 엘시는 자신의 웃옷을 뜯어내듯 벗었다. 그리고 의자 위에 웃옷을 정성스럽게 깔아 놓고 부냐에게 다가가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녀의 가 벼움에 일순 움찔했지만 엘시는 아무 말 없이 부냐를 의자 위에 앉혔다.

그리고 엘시는 작업대 옆의 물통을 끌어당겼다. 그는 물통에 걸려 있던 수건을 집어 들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부냐를 바 라보았다. 부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시체 닦은 물이죠.”

엘시는 수건을 도로 물통에 걸어 놓았다. 그리고 소맷자락을 끌어당겨 손에 쥐었다. 그는 그곳에 조심스럽게 침을 뱉은 다음 의자 옆에서 허리를 구부렸다. 그리고 소맷자락으로 부냐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닦아 내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부냐와 엘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엘시는 깨지 기 쉬운 것인 양 조심스럽게 부냐의 얼굴을 닦았고 그녀는 눈을 감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엘시의 손이 이마 주위로 옮겨 가자 부냐가 입을 열었다.

“무서워서 숨어 있었어요. 함께 있는 다른 죄수들이 경고했어 요.염사들이 저에게 이상한 짓을 할 거라고. 저 혼자 이곳으로 불려 왔을 때 저는 그 말이 사실이라고 생각했어요.”

부냐는 작업대 뒤에 숨어 있었던 일에 대해 설명하고 싶은 듯 했다. 입술을 꽉 깨물었던 엘시는 조금 후에야 낮은 목소리로 말 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떠드는 허언일 뿐입니다. 만약 그 런 일이 발생한다면 폐하의 법에 따라 하늘누리에서 바깥으로 집 어던져질 겁니다.”

“그런가요?”

“그렇습니다. 그렇게 집어던져진 시체는 짐승이 뜯어먹도록 내 버려둡니다.”

엘시는 부냐의 얼굴을 다 닦은 후 맞은편 의자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곧 다시 일어나 부냐의 뺨을 닦았다. 부냐가 그런 엘시의 손목을 가만히 붙잡았다.

“그만둬요, 엘시, 곧 더러워질 거예요. 옷만 상하게 하는군요.”

“옷은 상관없습니다.”

“제가 만들어 드린 옷이잖아요. 함부로 다루지 마세요.”

엘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끌어당겼다. 그때 그의 눈이 부냐의 손에 이르렀다. 엘시의 시선을 따라간 부냐는 자신의 손을 보고 무심하게 말했다.

“자꾸 얼어서 그래요. 어쩌면 동상에 걸릴지도 모르겠어요.”

“동상이오?”

“냉동실 근무가 많아졌어요. 전쟁 때문에. 사체를 냉동시켜야 하니까요.”

엘시는 입을 다물었다. 부냐는 생기 없는 목소리로 설명했다. 

“한꺼번에 많은 시체가 들어와서 지금 정신이 없어요. 냉동실 에서는 장갑을 끼고 작업해야 하지만 그런 손으로는 사체를 제대 로 다룰 수 없어요. 이렇게 볼품없는 모습도 제대로 씻을 틈이 없어서 그래요. 실망하셨지요? 하지만 제 모습이 보기 싫으시더 라도 조금만 더 계셔 주시면 좋겠어요. 며칠 동안 대여섯 시간밖 에 못 잔 것 같아요. 계속 시체를 염했지요. 견디기 힘들어요. 조금만 길게 이야기를…………….”

“그러겠습니다.”

“고마워요, 엘시.”

부냐는 졸린 듯 두 손에 자신의 얼굴을 담아 보였다. 엘시는 시체를 염하는 부냐의 모습을 상상해 보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 다. 황제의 대장군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큰・・・・・・ 큰 승리였습니다.”

부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전쟁은 그녀에게 더 많 냉동실 근무 외에 아무것도 아닌 듯했다. 엘시는 자꾸 메말라 가는 목을 힘겹게 적셔 말했다.

“역도의 수괴는 체포하지 못했습니다만 그의 가솔들 대부분을 주살하거나 체포했으며 근거지를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폐하께서 크게 기꺼워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폐하께서 대사면령을 내려 주실지도 모릅니다.”

부냐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대사면이라고 하셨어요?”

엘시는 희망적으로 들리도록 애쓰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저의 작은 노고를 크게 치하받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만, 마지막 대사면이 타이모 사건이 있었던 6년 전 이니 그리 빠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좋은 소식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부냐.”

엘시의 부드러운 말을 듣던 부냐가 툭 던지듯 대답했다.

“제 방면을 요청하지 않으셨다는 것이군요.”

엘시는 입을 다물었다. 부냐는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두 손을 찔러 넣어 머리를 힘껏 움켜쥐었다. 그러나 그 손은 곧 힘 없이 무릎 위에 떨어졌다.

“엘시, 당신은 칼리도의 백작이고 황제의 대장군이며 제국의 유일무이한 만병장이세요. 폐하를 위해 당신이 한 일을 흉내라도 낼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을 거예요. 그런 당신이 놀 라운 대승을 거두고도 폐하께 한 명의 죄수를 풀어 달라는 요청 도 못하시는 건가요?”

“부냐.”

“극악무도한 범죄자도 아니고 인륜을 저버린 패륜자도 아니에 요. 저는 그저 편지 한 장을 전달해 준 죄밖에 없어요. 예의를 지키기 위해 그 내용을 훔쳐보지 않았던 것이 제 잘못이지요. 그 때문에 이런 끔찍한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건가요?”

부냐는 무릎 위에 놓아둔 두 손을 서로 읽었다.

“그저 요청 한마디면 될 것을, 그 부탁 한 말씀 하시는 대신에 칼 한자루 들고 달려들어 규리하를 박살 내셨다는 건가요? 그러 고는 폐하께서 혹 즐거운 마음에 대사면령을 내려 주시지 않을까 기대하세요? 엘시, 저는 가끔 당신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요.”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하시다는 거죠? 당신은 자기가 옳은 일을 한다고 믿 지 않으신다는 건가요?”

“죄송합니다.”

부냐가 갑자기 앞으로 쓰러졌다. 그녀가 기절하는 줄 알고 깜 짝 놀란 엘시는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부냐는 엘시의 다리를 붙 잡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엘시! 제발…….”

엘시는 무릎을 꿇고 부냐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을 들여다볼 수는 없었다. 고개를 떨어뜨린 엘시에게 부냐는 눈을 맞추려 애쓰며 말했다.

“아시잖아요? 전 소란스러운 곳을 싫어했어요. 애초에 가고 싶 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당신이 대장군이기에 저는 위문단에도 참 가하고 그 사람의 편지도 받아 준 거예요. 당신 부하의 고민을 들어주는 일이 곧 당신을 돕는 일이 될 거라고 믿었어요. 그 사 람이 간자라는 것을 제가 어떻게 알았겠어요? 제발…… 엘시. 한 번만, 제발 폐하께 한 말씀만 해 주세요. 당신은 황제의 대장군 이에요. 한 번쯤은 폐하께 부탁할 수 있어요!”

엘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부냐는 엘시의 몸을 흔들려 했 지만 흔들리는 것은 그녀의 팔뿐이었다. 부냐는 울먹이며 외쳤다. 

“제발 제 마루나래가 되어 주세요!”

엘시는 연서에 인용되곤 하는 이 낡은 관용구가 이토록 무섭게 들릴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그때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부냐는 소스라치며 엘시의 어깨 너머를 바라 보았다.

안으로 들어선 두이만 길토는 서로를 붙잡고 있는 남녀를 닭 두 마리나 되는 양 무심하게 바라보다가 면회가 끝났다고 말했 다. 부냐는 절망적인 동작으로 엘시를 꽉 움켜쥐었다. 엘시가 황 급하게 말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면 안 되겠나?”

“미안합니다만 일이 많습니다. 각하. 그리고 이 방에서도 일을 해야 합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여긴 면회실이 아니라 염습실입 니다.”

그리고 두이만은 더 이상 기다리지도 않고 부냐의 팔을 붙잡으 려 했다. 엘시는 손을 내뻗어 두이만의 손을 밀어냈다. 그리고 정신 나간 듯이 보이는 부냐를 부축하여 일어나게 했다. 부냐를 일으켜 세운 엘시는 그녀의 귓가에 입을 가져가 속삭였다. 

“당신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뭐든 다하겠습니다.” 

부냐는 희열에 찬 표정으로 엘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 그 녀의 눈에 의혹이 떠올랐다. 그 의혹을 말로 풀어내기 전 두이만 이 다가와 부냐에게 문을 가리켰다. 그녀는 마치 보이지 않는 쇠 사슬에 끌려 걸어가는 것처럼 문으로 걸어갔다. 그러다가 갑자기 몸을 돌렸다. 그리고 엘시에게 몸을 던졌다.

엘시는 부냐를 꼭 끌어안았다.

부냐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엘시를 끌어안은 채 숨 막히는 소 리를 냈다. 울음을 참는 소리가 분명했다. 조금 후 부냐는 애써 엘시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뒤돌아보지 않은 채 밖으로 걸어갔다.

부냐와 두이만을 따라 엘시는 밖으로 나왔다. 두이만은 따라가 려는 백작에게 기다리라는 손짓을 했다. 엘시는 복도 벽에 기대 어섰다. 부냐와 두이만이 떠나고 난 뒤로 한참 동안 엘시는 그 렇게 서서 멍하니 바닥을 바라보았다.

복도 저편에서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 소리를 들은 순간 엘시는 갑작스러운 현기증을 느꼈다. 그는 자신 이 지상 수백 미터 상공에 있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리고 바닥은 느껴지지 않았다.

엘시는 두 손으로 벽을 짚으며 가까스로 주저앉으려는 몸을 지탱했다. 그는 슬픔이나 분노가 아닌 어지러움만 느꼈다. 아직까 지도 현실감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헨로 가의 영애 부냐가 죄수 부냐로 불린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맵시 있는 옷을 지어 내던 손길이 시체를 닦는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리 고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자신의 반려가 되리라 믿었던 사람에 게 일어났다는 것조차 믿을 수 없었다.

엘시는 벽에 기대선 채 갈고리처럼 구부린 손가락으로 머리를 짓눌렀다.

부냐를 데려갔던 염사장 두이만 길토가 돌아왔다. 두이만은 복 도 바닥에 병자 같은 모습으로 서 있는 황제의 대장군을 보면서 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나가시죠, 각하.”

엘시는 두이만을 쳐다보지 않았다. 두이만이 약간 성난 어조로 다시 말했다.

“이러고 계시면 우리가 일을 못합니다. 각하.”

엘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벽을 밀며 똑바로 선 다음 두이만을 쳐다보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갑자기 생각났 다는 듯이 말했다.

“혹 염사들이 여자 보조인을 상대로 바르지 못한 일을 하는 경우가 있나?”

두이만은 멀뚱히 백작의 등을 바라보다가 침을 뱉듯 말했다. 

“각하, 그런 놈이 있다면 제 손으로 직접 염했을 겁니다.” 

“알겠다.”

하지만 두이만은 그로선 드문 일이지만 길게 말했다.

“각하, 저는 이 하늘누리를 좋아합니다. 하늘누리는 근사합니 다만 손이 많이 필요하죠. 그래서 죄수들도 이렇게 일하는 겁니 다. 좋은 일이지요. 그래서 저는 제 관할에 있는 죄수들도 함께 하늘누리를 위해 일하는 동료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저는 간수 도 법의 대리인도 아니니까요. 죄수를 곯려 줄 의무 같은 것은 없습니다.”

“옳은 말이군, 염사장. 불쾌한 질문을 한 것을 사과하겠다.” 

“됐습니다. 매일 송장 대하는 놈이니 산 사람들이 하는 말은 불쾌한지 어떤지도 모르겠습니다. 왼쪽으로 가십시오.”

엘시는 안도감을 느꼈다. 뒤에서 따라오는 퉁명스러운 염사장 두이만이 속으로는 상냥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곳에서 부냐가 원래 받았던 대접은 기대할 수 없겠지만, 최소한 부당한 대접은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엘시는 그런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근시안적인가에 다 시 생각이 미쳤다. 그는 부냐가 이미 부당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부냐의 언 손을 떠올린 엘시는 뒤따라 오는 염사장에게 염사 보조인들의 냉동실 근무가 과한 것이 아닌가 물으려 했다. 하지만 백작의 입에선 엉뚱한 말이 나왔다.

“제국을 지키면서 자기 여자 한 명을 지키지 못하는 남자를 뭐 라 부르겠나?”

말을 끝냈을 때 엘시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황제의 대장군에게 어울리지 않는 넋두리로 이보다 더 적절한 말도 없을 것이다. 말 을 주워담는 것이 더 창피한 일이겠기에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 았다. 어쩌다가 자신이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는지 생각하며 엘 시는 등 뒤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조금 후 투덜거리는 듯한 두이만의 말이 들려왔다.

“제게 질문하신 거라면 대답하지요. 그건 병신입니다.”

엘시는 입을 다물려던 결심을 잊었다.

“어째서 그렇지?”

“제국은 다른 사람들이 지킬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건 제국도 아니죠. 하지만 그 여자는 그 남자가 아니면 아무도 지킬 수 없겠지요.”

엘시는 실망했다.

“그 남자의 제국이 그 여자를 싫어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제국이 여자를 싫어한다고요?”

“그래.”

두이만은 대답이 없었다. 엘시는 어느새 입구가 다가온 것을 보았다. 그가 부질없고 창피스럽기까지 한 대화를 잊으려 했을 때였다. 두이만이 말했다.

“제국이 여자를 좋아하게 해야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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