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1권 : 황제 사냥꾼 [제2장] – 돌과 바람 2
정우 규리하는 주위를 둘러보며 주눅이 드는 것을 느꼈다. 규리 하성을 이루는 뼈대들은 말할 것도 없겠지만 그 안에 있는 가구 들 중에도 그녀보다 어린 가구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불편했다. 정우는 그런 자신이 이상했다. 그녀가 자란 즈믄누리 또한 지 상에서 짝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오래된 건물이었다. 하지만 정우 는 곧 즈믄누리와 규리하의 거성은 크게 다름을 깨달았다. 밤의 다섯 딸인 혼란, 매혹, 감금, 은닉, 꿈의 도움을 받아 건설된 도 깨비의 거성 즈믄누리는 반쯤은 현실적이고 반쯤은 관념적인 건 물이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보면 정신 나간 건물이었다. 규리하 성에 왔을 때 정우는 방으로 돌아가려면 나왔던 문으로 다시 들 어가야 한다는 사실에 당황했고 계단을 올라가면 위층이 나타난 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런 당황과 충격 속에서 정우는 자 신이 식당을 찾지 못해 굶어죽거나 화장실을 찾지 못해 민망한 꼴을 보이고 말 거라고 굳게 믿었다. 다행히 그녀 또한 정상적인 방향 감각을 가진 보통 사람이었기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 다. 규리하 성은 지극히 무겁게 현실에 밀착하여 있었고 그런 단 단한 현실감은 즈믄누리에선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규리하 의 거성을 이루는 모든 부분들은 지나쳐온 시간의 얼룩들을 하나 빠짐없이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은 장엄했지만 따스하지는 않았다.
결국 주위의 무거운 풍경에서 안정감을 얻지 못한 정우는 자신 의 비녀를 만지작거렸다. 그것은 즈믄누리에서 가져온 물건이기 에 즈믄누리의 기분을 전해 주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 다. 정우는 한숨을 내쉬고는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한 번만 더야.”
정우는 몇 번째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다짐을 하며 품에서 편 지를 꺼내어 펼쳤다. 종이 위로 뛰쳐 오를 것 같은 탈해의 글씨 를 보자 채 읽기도 전에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서신의 내용은 별다른 것이 없었다. 격려와 위로의 말들이 재 치 있는 단어들로 표현되어 있었고 정우가 생각하기에도 황당하 기 짝이 없는 조언들이 있었다. 정우는 비스그라쥬 백에게 말할 때는 고함을 지르라는 탈해의 조언에서 과민성 이외에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비웃지는 않았다. 나가들이 귀 머거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탈해가 그렇게 쓸데없는 조언을 하는 것은 정우의 안위를 몹시 염려하기 때문이다.
서신을 다 읽은 정우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접어 다시 품속에 넣었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우는 들어오라는 소리를 하기 직전에 비녀를 다시 만지고 옷 깃을 쓸어내리고 뺨도 두 번 쓰다듬을 수 있었던 자신에 감탄했 다. 그래서 문을 열고 들어온 부위 틸러 달비는 꽤 만족스러운 표정의 정우를 볼 수 있었다.
“준비가 되었습니다. 규리하 공 아가씨. 가실까요?”
정우는 일어섰다. 틸러는 그녀를 밖으로 안내했다.
그 시간, 밖에서는 엘시 백작이 정우를 기다리며 제국군 수교위 한 명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엘시는 수교위의 보고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수교위는 잠깐 동안 대장군의 모습을 관찰했다. 대장군은 자신의 지위를 나타낼 수 있는 장신구는 아무것도 착용하지 않은 채 평범한 옷 을 입고 있었다. 다만 허리에 화려한 검대를 차고 있었고 그곳에 는 황궁에서 빌려온 의전용 사이커가 매달려 있었다. 대장군에 게 검이 없지는 않았지만 엘시는 나가의 예법을 따르려면 나가의 검을 차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그런 옷차림을 본 수교위는 약 간의 분노를 느꼈다.
“각하, 무례한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 일을 각하께서 하 실 필요는 없습니다. 데라시 백작의 요구는 부당합니다. 황제의 대장군이신 각하께서 전쟁 포로의 수행원 노릇을 한다는 것은 어 불성설입니다. 제게 맡겨 주십시오.”
“우리의 전쟁 포로는 장차 규리하를 다스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미 내가 수락한 일이다. 경거망동이 없도록 해라.”
수교위는 불만스럽다는 표정을 애써 감추었다. 하지만 엘시의 다음 말이 이어지자 수교위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리고 그 요청에 대해서는 불허한다고 전해라. 아직 작전이 종료되지 않은 만큼 민간인의 출입을 허락할 수는 없다.”
수교위는 희희낙락했다. 건방진 데라시 백작의 또 다른 요청이 기각되는 것은 수교위를 즐겁게 했다. 그때 엘시의 고개가 옆으 로 돌아갔다. 덩달아 고개를 돌린 수교위는 계단 위에 나타난 정우를 발견했다.
정우와 눈이 마주친 엘시는 목례했다. 정우 또한 목례한 다음 계단을 내려갔다. 수교위는 엘시에게 경례한 다음 달려갔다.
엘시 앞에 선 정우는 달려가는 수교위의 뒷모습을 잠깐 쳐다보았다.
“좋은 꿈 꾸셨어요, 대장군님? 이번에도 대장군님의 명령을 들 어야 하는 많은 부하들을 남겨 두고 제게 시간을 내셨나 보군요. 점령군 총지휘관이시니 바쁘시겠지요.”
“당신을 호위하는 것 또한 내 일입니다.”
정우는 엘시의 옷차림을 관찰하고 나서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황궁에 들어가는 거라서 화려한 옷을 입어야 하는 줄 알았어 요. 그런데 대장군님의 옷을 보니 그러지 않아도 되나 보군요.”
“아닙니다. 내 역할이 호위자이기 때문에 이렇게 입은 것입니 다. 이 칼도 그 때문에 황궁에서 빌려 온 것이지요. 그런데 그 복장은 도깨비의 것입니까?”
정우의 옷차림은 낙낙했다. 그녀보다 큰 사람에게 맞을 것 같 은 옷이었다. 하지만 소매 끝과 바지 끝, 겨드랑이와 허리 등은 단단하고 맵시있게 조여 있었다. 품이 커서 위엄 있으면서도 거 추장스럽지 않은 옷차림이었다.
“예. 즈믄누리에 있는 친구가 도깨비보다 작은 제 몸에 맞도록 만들어 준 거죠. 점잖은 자리에서 입으라고 선물해 줬어요. 킴의 옷을 입어야 하나요?”
“아닙니다. 그렇게 바꾸니 색다르고 보기 좋군요.”
정우는 감사의 의미로 목례했다. 엘시는 조금 주저하다가 말했다.
“승강기를 이용해서 하늘누리에 올라가면 좋겠지만 승강기는 꽤 느립니다. 무거운 승강기를 적은 힘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여러 개의 아륜을 쓰다 보니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습니다.”
“전 천천히 올라가도 상관없는데요. 물론 비스그라쥬 백을 기 다리게 하고 싶지는 않지만.”
“저격의 위험이 있습니다.”
자신이 왜 저격당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정우는 질문하려 했 다. 하지만 그 순간 시카트 규리하의 일이 떠올랐다. 얼굴이 굳 어진 정우를 본 엘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땅엔 아직 아이저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네…… 네.”
“승강기들은 가볍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안전성이 취약한 편입 니다. 그래서 하늘누리의 환상 계단을 쓰고 싶습니다. 빠르게 움 직이는 계단을 상상하실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없는데요.”
“부끄러워할 일은 아닙니다. 하늘누리에 사는 사람들 중에도 그것을 제대로 상상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다행히 내가 상상할 수 있지만 그 계단은 내게만 작용합니다. 그래서 내가 상상한 환 상 계단에 당신을 태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소용이 없잖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내 옷은 나와 함께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정우는 그 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설마 저를 업으실 건가요?”
“아닙니다. 내 발등을 밟으십시오.”
어리둥절해하던 정우는 조금 후에야 킥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우가 이해했음을 알게 된 엘시는 특별한 계단을 상상했다. 저 높은 곳에 있는 하늘누리에서 엘시의 발 앞까지 이어진 경 사로 같은 것이 나타났다. 엘시는 장식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었 기에 경사로의 모습은 무미건조했다. 그가 주의를 기울인 것은 경사로 제일 아래쪽에 돌출된 단이었다. 그것은 엘시가 앉을 수 있는 크기였고 아래쪽엔 발판도 있었다. 단에 앉은 엘시는 발판 위에 놓인 자신의 발등을 가리켰다. 엘시의 동작을 정신없이 바라보던 정우는 약간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허공에 앉아 계신 것 같아요.”
“예. 이 계단이 내게만 작용한다는 것은 내 눈에만 보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안전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엘시는 두 손을 내밀었다. 엘시의 앉음새를 관찰한 정우는 실 제로 그가 편안하게 앉아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래서 정우는 주저하지 않고 엘시에게 걸어가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엘 시의 두 발등 위에 자신의 발을 하나씩 얹었다.
“발 아프시죠?”
“괜찮습니다. 혹 높은 곳을 싫어하면 눈을 감으십시오.”
“전 도깨비들과 함께 딱정벌레도 타고 다녔어요. 대장군님.”
“알겠습니다. 빠를 테니 조심하십시오.”
그리고 엘시는 자신이 앉은 단이 경사로를 따라 움직이는 모습 을 상상했다. 상상은 그대로 현실이 되었다. 물론 엘시에게만. 하지만 엘시의 발등 위에 선 정우는 엘시와 같이 상승할 수 있었 다. 몸이 뒤로 홱 쏠리는 것을 느낀 정우는 겁먹은 소리를 냈지 만 엘시의 손이 그녀를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곧 정우의 목소리 가 탄성으로 바뀌었다.
엘시가 상상한 것 중 어느 것도 정우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기 에 정우의 감각에서 그것은 하늘을 나는 사람의 발등에 서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의지하고 있는 사람이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우는 엘시가 앉아 있는 계단을 상상해 보려 했지만 곧 포기했다. 자신이 상상한 계단이 엘시의 계단과 교란이라도 일으키지 않을까 걱정스러웠기 때문이 다. 물론 그런 일을 했더라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정우가 상상한 계단은 정우에게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래서 환상 계단에 대한 이해가 아직 충분하지 않은 정우는 계단에 대해 생각하는 대신 비행에 대해서만 생각하기로 했다. 그것은 어렵지 않은 일 이었다. 독특하기 짝이 없는 비행이었으니까.
규리하는 추운 지방이었고 상승은 빨랐다. 바람은 정우의 볼을 세차게 문질러 빨간 손자국을 남겨 놓았다. 그러나 정우는 별로 괴로워하지 않았고 심지어 상쾌하다고 여겼다. 진귀한 경험에 흠 뻑 빠져 있던 정우는 상승 속도가 급격하게 줄어들자 아쉬움을 느꼈다.
하지만 위를 쳐다보고 정우는 아쉬움을 까맣게 잊었다.
거대한 하늘치가 하늘을 모조리 뒤덮은 채 그녀의 앞을 가로막 고 있었다.
지상에서 볼 때도 거대했지만 이 높은 고도에서 바라본 하늘치 의 모습은 압도적이었다. 끝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광대한 하늘 치의 아래쪽을 보며 정우는 땅을 향해 거꾸로 내려가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그런 생각을 하자 그녀는 불안해졌다. 하늘치의 아래쪽에 전속력으로 부딪혀 죽은 것도 추락사라고 불러야 하는 건지 질문하려 했을 때 정우는 나루터를 보았다.
나루터는 하늘치의 옆구리 쪽에 돌출된 구조물이었다. 50미터 는 됨직한 길이였지만 하늘치의 터무니없는 크기 때문에 그렇게 길어 보이지 않았다. 방향을 가늠한 정우는 자신들이 그곳에 도 달할 것을 짐작했다. 정우는 안심했다. 그녀의 생각대로 얼마 후 엘시는 부드럽게 나루터 위에 도달해서 정우가 그 위에 내려서도 록 도와주었다. 그리고 정우의 곁에 선 엘시는 자신이 상상했던 계단을 없앴다.
“환상 계단은 하늘치 위 어디로든 이어질 수 있지만 그렇게 하 면 혼란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천경유수는 이런 나루터 에 이어지는 형태로만 상상하도록 제한하고 있습니다.”
“이걸 나루터라고 부르는군요. 어울리네요.”
주위를 둘러본 정우는 먼 곳에 낮은 위치로 가설되어 있는 나 루터를 몇 개 더 발견했다. 어지간한 산꼭대기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서 허공을 향해 불쑥 튀어나와 있는 모습들은 마치 부러진 교각처럼 보여 불안했지만 딱정벌레를 타곤 했던 정우는 당황하 지 않았다. 엘시는 나루터 반대쪽의 계단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엘시와 정우가 도착한 나루터는 황궁에 부속된 것이어서 다른 통행인은 만날 수 없었다. 계단 끝에 올라선 정우는 거대한 담장 을 발견했다. 담장의 높이는 상당했고 그 중간에는 레콘이라면 거북함을 느낄 작은 문이 있었다. 문 안에 들어서자 익숙한, 하 지만 이곳에서 볼 수 있을 거라 예상할 수 없는 것이 나타났다. 그것은 흙더미 사이의 골에 자연석들이 쌓여 이루어진 돌계단 이었다. 정우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엘시를 돌아보고는 계단을 빠르게 올라갔다. 몇 미터쯤 올라가 그녀는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곳에는 숲이 있었다.
색채가 가득한 숲이었다. 순박한 초록과 교태 어린 금빛, 근엄 한 붉은빛과 따스한 검은색이 범람하고 있었다. 그 흘러넘치는 빛깔들 사이에서 위풍당당한 거목들이 풍성한 그림자를 부드러운 풀 위에 던지고 있었다. 하지만 거목들은 햇빛을 나눠 쓸 아량도 가지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바닥에는 눈이 아프도록 선명한 음영 들이 잔뜩 흩어져 있었다. 이미 풍부한 색채를 지니고 있는 숲은 그 음영들과 어우러져 빛의 급류 속에서 첨벙였다. 목향을 가슴 가득히 들이켠 정우는 약간 어지러운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눈 을 몇 번 깜빡여 자신을 추스르고 뒤를 돌아보았다.
“저 담장은?”
“사실은 담장이 아니라 흙이 쏟아지지 않도록 막아 둔 제방입 니다. 혹은 화분의 바깥 면이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어떻게 이곳에 숲을 만들었죠? 설마 하늘치의 등 위에 원래부 터 숲이 있었던 것은 아닐 텐데.”
“예. 흙과 나무를 지상에서 옮겨 와 만든 것입니다.”
정우는 가까이 있는 나무로 다가가 확인해 보고 싶다는 듯이 줄기를 쓸어 만졌다. 그것은 분명히 나무였다. 정우는 또다시 감 탄사를 터뜨리고는 엘시를 돌아보았다.
“보기 좋기는 하지만 이렇게 힘든 일을 해야 할 이유가 있나요? 환상 계단이라는 것이 있으니 숲을 보고 싶은 사람은 언제든 내려갈 수 있을 텐데요.”
“그렇긴 합니다만 이 숲에는 미관 이외에도 장점이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죠?”
엘시는 돌계단을 오르며 설명했다.
“이 하늘누리는 어떻게 보면 대단히 불안정한 도시입니다. 구조적으로 하늘누리는 떠 있는 셈이나 다름없습니다. 하늘치의 등에 기둥을 박거나 할 수는 없으니 하늘누리는 그냥 얹혀 있을 뿐 입니다. 따라서 무게가 중요한 요소입니다.”
“무게요?”
“매끄러운 탁자 위에 놓인 가벼운 도깨비지는 잘 미끄러지지만 도깨비지 위에 서진을 올려두면 잘 미끄러지지 않습니다.”
정우는 이해했다. 무거운 것이 잘 미끄러지지 않는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러면 하늘누리의 무게를 늘리려고 숲을 만든 건가요?”
“이 숲에는 그런 장점도 있다는 겁니다. 초기의 하늘누리는 꽤 불안정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불안정을 무릅쓰고 건물들을 계속 늘렸습니다. 물론 하늘누리의 모든 건물들은 바닥 아래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하늘누리의 무게를 늘리자 오히 려 안정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는 하늘누리 유수부 사람들은 이 위로 무거운 것을 올리는 일에 거부감을 느끼기보다 반가워 하게 되었습니다.”
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콘 같네요.”
“예?”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도시가 가장 높은 곳에 있다는 것. 보 통은 가벼운 것들이 높이 올라가잖아요? 하지만 네 선민 종족 중 에서 가장 높이 뛰어오르는 것은 가장 무거운 레콘이죠.”
“하늘누리가 가장 무거운 도시는 아닐 텐데요.”
엘시의 지적대로 지상에 있는 도시 중에는 하늘누리보다 더 큰 도시도 많았다. 하지만 정우는 좋은 대답을 가지고 있었다.
“황제 폐하가 계시잖아요.”
엘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우가 말한 무거움은 형이상학적인 것이었다.
“그렇군요. 그럼 가실까요.”
엘시는 정우를 오솔길로 안내했다.
오솔길 끝에는 나루터에 면한 것보다 훨씬 낮은 담장이 있었 다. 문 앞에는 네 명의 경비병들이 패검한 채 서 있었다. 정우는 그들의 표정을 보고는 불안했다. 경비병들의 표정은 사나웠다. 자신의 신분이 전쟁 포로라는 것을 떠올린 정우는 그런 신분의 사람이 하늘누리에 올라온 것이 경비병들을 화나게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경비병 중 한 명이 엘시에게 말했 을 때 정우는 자신의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알았다.
“웬 행차이신가, 에더리.”
정우는 깜짝 놀라서 경비병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방자 한 태도로 말한 사람이 인간이며 레콘이 아니라는 것을 알자 정 우는 또 다른 가설을 검토해 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왜 정신병자 가 하늘누리의 경비를 서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놀란 정우와 달 리 엘시는 그런 태도에 별로 구애되지 않는 듯 평온하게 말했다. “평안하셨습니까, 스카리.”
스카리라는 남자의 얼굴에 승리감이 떠올랐다. 그는 갑자기 고 개를 홱 돌리더니 다른 경비병들에게 외쳤다.
“내가 뭐랬어! 엘시 에더리는 대장군의 옷만 벗겨 놓으면 대장 군 노릇도 못할 거라고 했지? 내 말대로잖아!”
경비병들은 거친 웃음을 터뜨렸다. 스카리는 분노의 미소로 정 우를 쳐다보았다. 그 무서운 눈빛을 본 정우는 다시 스카리를 정신병자로 규정하고픈 충동을 느꼈다. 스카리는 비아냥거림이 가 득한 태도로 말했다.
“승리는 병사들이 낚도록 내버려두고 자신은 여자를 낚았군. 마루나래라 하지 않을 수 없군. 왜 부냐를 시체나 닦게 내버려뒀 는지 알겠어.”
엘시는 스카리의 발언에 아무런 논평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담 담하게 용건을 말했다.
“이분은 규리하 공 비셀스 규리하이며 비스그라쥬 백 데라시와 만나기 위해 황궁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이분의 신원은 내가 보 증합니다. 연락이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통과를 허락해 주십시오.”
엘시의 건조한 태도는 스카리를 더욱 흥분시켰다. 밉살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눈빛으로 엘시를 노려보던 스카리는 갑작스레 앞 으로 한 발 다가섰다. 그리고 물러나지 않은 엘시의 얼굴 앞에 자신의 얼굴을 바짝 붙였다.
스카리는 목숨의 위협을 당하는 뱀이 쉬쉿거리는 태도로 속삭였다.
“이 야비하기 짝이 없는 자식아, 내 지위를 도둑질한 것까지는 참을 수 있다. 내게는 네가 감히 손댈 수도 없는 지위가 남아있으니까.”
스카리의 얼굴에 분명한 우월감이 떠올랐다. 자신이 상대보다 고귀하고 우수한 사람임을 확신하는 자의 표정이었다. 그 때문에 스카리의 말에는 약간 훈계 같은 어조가 묻어났다.
“하지만 내 사랑까지 강탈했다면, 최소한 내게 행복해하는 모 습을 보여 줘야 해. 네깟 녀석은 모르겠지만 그게 사나이의 의리다. 이건 내 사랑을 두 번 짓밟는 짓거리야! 최소한의 명예도 모르는 이 추잡한 소인배 녀석아!”
서로의 눈이 채 한 뼘도 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엘시와 스카 리는 서로를 직시했다. 갑자기 정우는 엘시가 칼을 뽑아 들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느꼈다. 엘시의 몸 어디에도 그런 징조는 나타 나지 않았지만 정우의 예감은 뚜렷했다. 엘시 에더리는 만병장이 며, 한 사람을 죽이는 일은 이만 개의 팔이 아닌 하나의 팔로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결국 엘시는 아무 이유 없이 언제든 사람을 죽여도 되는…..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
스카리는 엘시의 뺨이라도 후려칠 것같이 어깨를 경직시켰다. 하지만 스카리는 결국 한담가들을 격분시키는 결정을 했다. 불미 스러워서 흥미로운 뒷이야깃거리를 제공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옆으로 물러나며 경멸이 가득한 눈으로 엘시를 노려보았다.
엘시는 정우에게 걸어가자는 손짓을 했다. 그 손짓을 본 정우 가 황급히 걸음을 떼자 엘시는 그 뒤를 조용히 따라 걸었다. 그 들이 몇 걸음 걸어갔을 때 뒤쪽에서 젖은 칼날 같은 목소리가 들 려왔다.
“부탁한다. 에더리.”
엘시의 걸음이 멈췄다. 목소리는 계속되었다.
“더러운 비겁자가 나를 몰락시켰다고 생각하면 견딜 수 없어. 내가 사내다운 사내에게 패배했다고 느끼게 해 줘. 부냐를 그 에서 꺼내!”
엘시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정우는 난처한 기분을 느끼며 엘 시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엘시가 다시 걸음을 뗐을 때 정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싶었다.
두 사람은 경비병들 사이를 지나쳐담 안으로 들어섰다. 담 안 쪽에는 판석들이 정교하게 깔려 있었고 앞쪽으로는 거대한 건물 이 있었다. 정우는 그것이 황궁임을 깨달았지만 한동안은 그것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정우는 엘시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먼저 입을 연 것은 엘시였다.
“죄송합니다. 당신의 호위자 때문에 당신이 불필요하게 지체했 습니다.”
“아니요. 저는 괜찮아요. 그런데 대장군님, 왜 그런 폭언을 감수하신 거죠?”
엘시는 두 호흡쯤 침묵했다가 담담하게 말했다.
“스카리 빌파는 과거 내 상관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내지 휘 하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유수부 산하에 있습니다. 또한 발케 네 공 락토 빌파의 최우선 계승권자로 락토 공작과 마찬가지로 발케네 공의 호칭을 허용받고 있습니다. 그가 나를 하대하는 것 은 바르지 못한 일이 아닙니다.”
정우는 그 엄청난 신분에 놀랐다. 정우 또한 규리하 공의 호칭 을 사용할 수 있지만 그것은 공작에 버금가는 변경백의 권위에 대한 예우일 뿐, 공작가의 최우선 계승권자와 그녀가 사용하는 호칭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그리고 아이저 규리하가 도주한 지 금 규리하 공이라는 호칭에는 농담 같은 분위기만 남아 있을 뿐 이다. 하지만 발케네 공의 경우엔 그렇지 않다.
“그런 분이 왜 하늘누리에서 경비병을 하고 있죠? 발케네에 가면 황제처럼 살 수 있을 텐데.”
“그의 거취에 대해서는 스카리 본인이 대답해야겠군요. 들어가실까요.”
황궁 안으로 들어선 후에야 정우는 자신이 황궁의 외관을 제대로 보지 못했음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