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1권 : 황제 사냥꾼 [제2장] – 돌과 바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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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마시는 새 1권 : 황제 사냥꾼 [제2장] – 돌과 바람 4


황궁 미술실로 걸어가며 엘시 에더리는 번민을 느꼈다.

황제의 대장군은 낭만주의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가 현실주 의자도 때론 맹랑한 환상에 빠질 때가 있는 법이다. 엘시는 데라 시가 마지막으로 건넨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보다 긍정적이고 무책임한 희망을 즐기는 엘시의 작은 일부분은 데라시의 말을 이렇게 해석했다. 

‘엘시, 전승을 축하하는 대사면 은 어렵겠지만 결혼을 축하하기 위한 대사면은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가능할까? 데라시는 위엄을 보인 직후에 자비를 보일 수는 없 다고 했다. 그 말은 황제의 자비를 보이기 적당한 시점은 흉사가 아닌 길사가 있을 때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가 대사면을 베풀어 축하할 만큼 비셀스 규리하의 결혼이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물론 규리하 변경백위는 제국의 중요한 작위이지만 최고위 서열이라고 할 수는 없다. 생각할수록 엘시는 자신의 희망이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여 의기소침해졌다.

그렇다면 희망을 품기를 권하는 듯한 데라시의 말은 도대체 무 슨 의미일까? 엘시는 데라시가 그저 자신을 희롱하기 위해 그렇 게 말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데라시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엘시는 비스그라쥬 백이 그렇게 유치한 자가 아님을 알고 있었 다. 데라시가 누군가를 희롱한다면 그보다 훨씬 고급스러우면서 도 잔인한 방법을 사용했을 것이다.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그 말에는 어떤 의미가 있다.’

하지만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엘시는 어느새 자신이 황궁 미술실에 도달한 것을 깨달았다. 그는 상념을 멈추고 정우를 찾았다. 회화보다는 조각이 주를 이 루는 황궁 미술실은 시야를 가리는 부분이 많았다. 몇 걸음 움직 인 후에야 엘시는 정우를 발견했다.

그리고 엘시는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야 눈앞의 광경에 적응할 수 있었다.

정우는 기묘한 동작을 취하고 있었다. 한쪽 팔을 멀리 던지고 다른 팔은 귀 쪽으로 구부린 모습이었다. 엘시에게는 그것이 정 지된 춤처럼 보였다. 대장군이 바라보는 동안 정우는 어깨를 으 쓱이며 옆으로 폴짝폴짝 뛰어갔다. 그리고 또다시 기묘한 동작을 취했다. 정우는 앞쪽을 흘끔흘끔 바라보며 손이나 발, 허리의 각 도를 변화시키고 있었다. 대장군은 조금 후에야 정우 규리하가 조각상을 흉내 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황을 깨달은 엘시는 곧 우려를 느꼈다. 다음 조각상은 도약하는 티나한을 묘사한 마루젤의 작품이었다. 티나한이 승천하기 직전에 제작된 가장 유 명한 작품이었고, 의문의 여지 없이 훌륭한 예술품이지만 흉내 내기가 쉽지 않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티나한의 상 앞에 선 정우 또한 자신이 난관에 봉착했음을 깨 달은 듯했다. 정우는 한참 동안 조각을 바라보았다. 엘시는 인기 척을 내는 것이 정우를 돕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다음 순 간 정우가 뛰어오르는 바람에 그는 숨을 들이마시고 말았다.

뛰어오른 정우는 일순간 티나한의 모습을 완벽하게 재현했다. 비록 전설적인 티나한의 철창이 없긴 했지만 내뻗은 두 팔만큼은 박력으로 가득했다. 앞으로 내뻗은 다리나 뒤로 크게 휜 허리 또 한 영웅의 재현으로 부족함이 없었다. 또한 그녀는 마루젤의 조 각엔 나타나 있지 않은 시간 경과까지 재현했다. 땅에 착지한 정 우는 가공의 창을 회수하며 우아하게 몸을 돌렸다.

결과적으로, 정우와 엘시의 눈이 마주쳤다.

가공의 창으로 겨냥당한 남자와 남자를 겨냥한 여자는 잠깐 동 안 얼어붙은 모습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정우는 눈만 깜빡이며 엘시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엘시가 익 힌 예절에는 이런 경우의 처신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기에 그는 아무 행동도 할 수 없었다. 멍한 정신 속에서 엘시는 정우가 저 렇게 똑바로 바라보고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정우가 갑자기 움직였다.

엘시는 주춤할 뻔했다. 정우는 흔들림 없는 걸음으로 그에게 척척 걸어왔다. 엘시 앞에 도달한 정우는 곧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엘시가 따귀라도 맞는 것이 아닌가 하는 황당한 생각을 했을 때였다.

정우의 손이 그의 눈을 덮었다.

엘시는 이해할 수 없었기에 꼼짝도 하지 못한 채 굳어 버렸다. 짧은 시간 동안 그는 온갖 생각을 다했고 그것들 대부분이 말도 안 되는 생각들이었다. 엘시는 귓불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 암흑 속에 있는 엘시에게 정우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잊으세요.”

그 말을 채 이해하기도 전에 엘시는 암흑에서 해방되었다. 그 는 눈을 몇 번 깜빡이고 주저하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다른 곳 을 보고 있던 정우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엘시를 처음 봤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머, 대장군님. 오셨어요?”

입을 열자마자 엄청난 실언이 나올 것 같았기에 엘시는 입을 꽉 다물었다. 엘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정우는 고개를 약간 갸웃했다.

“방금 오셨죠?”

가까스로 엘시의 입이 열렸다.

“예, 지금 오는 길입니다. 많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지루하셨지요?”

“아니요, 지루하지 않았어요.”

“조각들을 감상하셨군요.”

“아니요. 흉내냈어요.”

엘시는 입을 딱 벌린 채 정우를 바라보았다. 그 얼굴을 마주보던 정우의 볼이 부풀었다. 그녀는 입술을 떨더니 마침내 폭소를 터뜨렸다.

정우는 허리를 구부린 채 웃었다. 엘시는 넋을 잃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까스로 웃음을 멈춘 정우는 눈물을 닦으며 엘시를 바라보았다. 엘시의 딱딱한 얼굴을 보고 그녀는 주춤했다.

“죄송해요. 스스럼없이 굴어서 화나셨어요?”

“네? 아니요, 그냥 조금 당황했습니다.”

“당황하셨어요?”

정우는 그 말에 대해 조금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황제의 대장군이시며 제국의 유일무이한 만병장이 신 어려운 분께 장난을 치는 킴은 없겠군요. 제가 지나치게 도깨 비처럼 굴었나 보군요.”

엘시는 정우의 판단이 정확하지는 않다고 생각했지만 부연하 지 않았다. 정우는 두 손을 뒷짐지고 조각들을 돌아보았다.

“굉장히 많네요. 폐하는 조각을 좋아하시나 보지요?”

엘시는 좀 평범한 대화로 바뀐 것에 안도했다.

“그렇긴 합니다만 각 영지의 통치자들이 많은 조각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제국에 조각가가 그렇게 많나요?”

“그런 것은 아닙니다. 폐하께선 음주도 하지 않고 잡수시는 것 또한 제한되어 있습니다. 먹을거리가 제외되는 것만으로도 특산 품의 상당수가 제외됩니다. 그래서 폐하께 진상되는 물건은 대부 분 공예품입니다. 물론 폐하께서 이런 선물을 즐기시는 것에는 공예인들을 간접 후원하시려는 의지가 포함되어 있기도 합니다.” 

“죄송해요.”

엘시는 다시 암담함을 느꼈다. 정우의 말이 다시 평범의 울타리를 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빙글 돌아서 대장군을 바라보았다. 

“처음 봤을 때 제게 상황을 설명해 주신 것, 쾌히 제 호위를 맡아 주신 것, 데라시 백작 앞에서 저를 거들어 주신 것 때문에 제게 호의를 가지셨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대장군 님을 친근하게 생각했나 봐요. 당치 않은 생각이겠죠.”

“괜찮습니다.”

“아뇨, 괜찮지 않아요. 대장군님은 제 원수니까요.”

엘시는 정우의 화법을 따라가길 포기했다.

“대장군님은 제 아버지를 무찔렀어요. 그러니까 원수가 맞을 거예요. 그런데 애써 봐도 화가 나지 않아요. 저도 아버지의 적 이잖아요. 대장군님도 제적이고 아버지도 제 적이라면, 저는 도 대체 뭐죠?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데 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 어요. 괜찮다면 저는 두 분과 친하고 싶어요. 아버지는 저를 낳 아 주신 분이니 당연히 그렇고, 대장군님과도 적이 되고 싶진 않 아요. 탈해와 친하시다고요?”

“부족한 나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는 친구입니다.”

“아뇨. 탈해 머리돌 말이에요.”

엘시는 즈믄누리에서 탈해가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궁금해 졌다. 자신 또한 즈믄누리의 무사장을 거론한 것이라는 엘시의 말에 정우는 혼란스러워 했다.

“제가 말하는 탈해와 대장군님이 말씀하신 탈해가 정말 같은 도깨비인지 확신은 안 가지만, 만약 같은 사람이라면 지금 대장군님 댁에 머물고 있겠군요. 그를 만날 수 있을까요?”

“장차 그럴 시간이 오겠지만 지금 당장은 어렵습니다. 당신은 난방이 되는 방을 나오기 힘든 비스그라쥬 백의 특수한 사정 때문에 이곳에 올 수 있었던 겁니다. 회담이 끝난 이상 당신은 다시 규리하 성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당신의 안전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정우는 두 팔로 자신을 감싸고 검지를 까딱거렸다.

“아버지의 지지자들 중 누군가가 저를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말씀이죠?”

“유감입니다만 가능성은 있습니다.”

정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만약 결혼한다면 아주 무시무시한 혼례식이 되겠군요.

혹 전투가 벌어지진 않을까요?”

“책임지고 안전하게 치르겠습니다.”

“예? 대장군님께서 책임을 지신다고요?”

“만약 당신이 혼례를 치르기로 결심한다면 내가 그 일을 주관하게 될 겁니다.”

정우는 입술을 둥글게 만든 채 엘시를 바라보았다.

“그건, 그러니까 대장군님이 제 신랑감을 물색하고 대장군님의 이름으로 혼서를 보낸다는 뜻인가요?”

“그 외의 일도.”

“외람될지 모르겠지만, 저를 잘 아시지도 못하잖아요?”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정우. 처음부터 잘 아는 두 사람은 없을 겁니다. 당신은 도깨비들 사이에서 자랐고 나는 나가 황제 를 모시고 있지만, 어쨌든 우리는 같은 인간입니다. 다른 종족 사이에서도 가능한 대화가 우리 둘 사이에서만 불가능할 거라고 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서로 의논해서 좋은 결혼 상대자를 찾아 보도록 하면 어떻겠습니까.”

정우는 입술을 밀어 올렸다. 그런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조금 후 입술을 내리며 입술 양쪽 끝은 위로 올렸다.

“아직 결혼을 결심한 것은 아니에요.”

“예.”

“하지만 결혼해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은 조금 드네요.”

엘시는 희미하게 웃으며 목례했다. 그때 정우가 말했다.

“그리고 잊어 주세요.”

한참 후에야 엘시는 무엇을 잊어야 하는지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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