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1권 : 황제 사냥꾼 [제2장] – 돌과 바람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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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마시는 새 1권 : 황제 사냥꾼 [제2장] – 돌과 바람 7


탈해 머리돌은 뻐끔이의 누름쇠를 눌러 연초를 점화시켰다. 연 기를 가득 빨아들인 탈해는 볼을 부풀린 채 한동안 가만히 있었 다. 잠시 후 즈믄누리의 무사장은 큰 입을 벌려 연기를 뭉게뭉게 뿜어내었다. 탈해는 연기들 중 일부가 부서져 촛불에 휘말려 들 어가는 것을 보면서 말했다.

“불가능합니다.”

엘시 백작은 고개를 들어 탈해를 바라보다가 다시 서탁을 내려 다보았다. 그곳에는 대장군에게 보내진 보고서들과 함께 정우 규리하가 보낸 서신이 놓여 있었다. 엘시는 좀 전에 그것을 탈해에게 내놓았고 탈해는 아직 그것을 집어 들지 않았다. 엘시는 손가락들을 엮어 서탁 위에 얹었다.

“왜 확신하는 거지?”

“저도 그런 생각을 했으니까요.”

“자네도 했다고?”

“예. 정우가 즈믄누리를 떠난 직후였을 겁니다. 정우가 보고 싶어서 성주님께 여쭤 본 적이 있습니다. 혹 즈믄누리에서 라수의 방으로 이동하는 방법이 없냐고. 라수의 방도 한때는 즈믄누리의 일부분이었으니까 제 생각엔 가능할 것 같았거든요.”

“그렇다면 정우는 역시 도깨비처럼 생각한 것이군. 그렇지 않 으면 자네처럼 생각한 것일지도 모르겠군. 그래서 바우 성주님은 뭐라고 하셨지?”

탈해는 다시 연기를 잔뜩 뿜어내었다.

“안 된다고 하시더군요.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의 허락이 없고 서는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신께서 그런 일을 허락해 주실 리가 없다고 덧붙이셨지요.”

엘시는 의아해했다. 탈해가 거론하는 여신은 도깨비를 돌보는 신이 아니다.

“왜 레콘의 여신께서 허락하셔야 된다는 거지?”

“그건 저도 모릅니다. 성주님께서 그렇게만 말씀하셨으니까요.”

엘시는 조금 고민하다가 곧 그것을 떨쳐 내었다. 신학은 그의 최대 관심사가 아니었고 엘시는 실제적인 일에 대해 생각했다. 규리하 성의 지하 금고방과 즈믄누리가 연관이 없다면 아이저 규 리하가 즈믄누리로 도피했을 가능성은 없다. 그때 탈해가 툭던 지듯 말했다.

“그렇다면 정우는 즈믄누리로 가고 싶어했다는 말이군요. 결혼 하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고요.”

투명하게 흘러내리던 촛농이 하얗게 굳었다. 엘시는 흔들리는 촛불이 서탁 위에 어지러이 뿌리는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정우는 강압에 의해 결혼할까 봐 걱정한 거야. 나는 그런 일 이 없을 거라고 설명했고.”

“강압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결혼할 마음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어쨌든 그녀도 결혼할 나이가 되지 않았나. 아이를 가지고 싶 다고 하더군.”

“그 이야기를 했군요. 정우는 자기가 아이를 좋아한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엘시는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지?”

탈해는 무의미해 보이는 손짓을 하며 말했다.

“실제로 아이를 겪어 본 다음에 내린 결론이 아니라는 겁니다. 뭐, 정우가 아이들을 겪은 후에도 좋아할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지금 정우가 아이를 좋아한다고 말한다면 그건 일종의 환상입니 다. 저희는 정우가 아이들을 가까이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왜지?”

“도깨비불 때문이지요.”

“아. 그렇군.”

“예. 말하는 법을 갓 터득한 아이들이 얼마나 말을 많이하는지 는 각하께서도 아실 겁니다. 불을 다루는 법을 터득한 도깨비의 아이들도 마찬가지지요. 불장난이 한이 없습니다. 도깨비들끼리야 아무 위험이 없습니다만, 정우가 그런 불장난을 당한다면 끔찍한 일이 일어나겠지요.”

탈해의 음색이 어두웠다. 아이들과 놀고 싶어하면서도 접근을 금지당한 정우에 대해 생각해 보자 엘시도 동정심을 느꼈다. 

“안됐군. 하지만 자기 아이를 키우는 일에 환상을 품는 것은 처녀들의 권리일 테지. 정우가 결혼과 자녀에 대한 환상을 가지 고 있다는 게 결혼할 수 없는 이유가 되지는 않아. 하지만 결국 결정을 내리는 것은 그녀야. 그러니 자네는 이 편지를 바우 성주 님께 가져가야 해.”

탈해는 엘시가 가리킨 서신의 피봉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탈해 에게 익숙한 글씨로 친전이라 적혀 있었다. 그의 눈썹이 좌우로 처졌다.

“솔직히, 성주님께서 정우가 결혼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리실까봐 겁납니다.”

“그런가.”

“폐하께서는 도대체 왜 그러시는 거죠? 누구는 억지로 결혼시 키고 정인이 있는 누구는…………….”

탈해는 자신의 입을 원망하며 엘시의 안색을 살폈다. 엘시는 굳은 얼굴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각하. 경박하게 입을 놀렸습니다.”

“탈해, 사과는 내 제국이 부냐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듣겠다고 했어.”

“제국이 어떻게 부냐를 사랑할 수 있단 말입니까? 부냐는 지금 제국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풀려나야 제국을 위해 봉 사하든지 말든지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더욱 풀려나야지요. 기회를 줘야 합니다.”

“나는 갇혀 있지 않아. 부냐가 제국에 봉사하지 못한다면 내가 하면 돼.”

탈해는 문득 어떤 의심을 느꼈다. 탈해는 솔직하게 그 의심을 말해보았다.

“정우가 결혼하는 것이 제국에 도움되는 일입니까?”

“주인을 잃은 이 땅에 가장 도움되는 일은 조속히 새 주인을 주는 것 아니겠나? 정우가 통치에 관심 있었다면 폐하께선 그녀 를 규리하의 통치자로 임명하셨을 거야. 하지만 정우가 원하지 않으니 그 남편에게 맡길 수밖에 없지. 정우가 통치도 거부하고 결혼도 거부한다면 도대체 의무를 뭘로 생각하는 거냐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겠지. 안 그런가?”

“그게 왜 정우의 의무입니까? 정우가 이 땅과 가진 인연은 여 기서 태어났다는 것뿐입니다. 정우가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면 그 대상은 오히려 즈믄누리일 겁니다.”

“즈믄누리는 정우를 규리하로 보냈어.”

“그건 바우 성주님께서…………….”

“바우 성주님이 즈믄누리의 의지를 대표하지 않는다고 말할 건가?”

탈해는 할 말이 없어졌다. 신경질적으로 뻐끔이를 빨던 탈해는 이미 연초를 다 태웠음을 알았다. 누름쇠를 눌렀지만 뻐끔이는 쇠 부딪치는 소리로 딸꾹질을 할 뿐이었다. 여섯 대를 다 피운 것이다. 탈해는 섬세하지 못한 동작으로 뻐끔이를 품 안에 쑤셔 넣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엘시가 말했다.

“탈해, 종족이나 성별, 부모나 고향 등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그것들은 그냥 받아들여야 해. 그것들이 주는 이익과 마찬가지로 손해도. 그런 손해들에 괴로워할 시간이 있다면 차라 리 그 손해를 줄이거나 손해를 이익으로 바꾸는 일을 생각하는 쪽이 낫지. 정우도 마찬가지야. 정우는 반역자가 될 아버지의 딸로 태어났어. 하지만 나는 정우에게 그것에 대해 괴로워하거나 다른 이들을 원망할 시간이 있다면 차라리 그 시간에 상황을 개 선하도록 애쓰라고 말하고 싶어. 그리고 자네에게도 정우가 그럴 수 있도록 도와주라고 말하고 싶군. 아버지를 부정하고 즈믄누리로 돌아가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규리하의 차기 지배자의 아내가 되어 폐하께 봉사하는 것도 또한 방법이야. 나는 후자를 지지하 네. 전자가 바르지 못한 일이라고 믿기 때문은 아니야. 전자의 경우 정우가 서약 지지파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야.”

“네? 정우는 충성 서약에 대해서는 아무 의견도 없을 겁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사 람들의 눈에는 규리하의 통치자라는 엄청난 지위를 포기하는 정 우가 이상하게 보이겠지. 그리고 그런 이들은 정우가 그 부친처 럼 서약을 지지하기 때문에 황제가 내린 지위를 거부하는 것이라 고 설명하겠지. 그렇게 된다면 정우는 물론이거니와 정우를 후원 하는 즈믄누리에까지 피해가 갈 거야.”

“어이구, 말도 안 됩니다!”

“맞아.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 공정하게 말하고 싶으 니 전자의 좋은 점도 거론해야겠군. 결혼을 거절하고 즈믄누리로 간다면 정우는 그 아버지에게 공격당하지는 않겠지.”

탈해는 기가 찬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게 장점이라는 겁니까?”

엘시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을 뻗어 서신을 집어 들었다.

엘시는 그것을 탈해에게 내밀었다.

“가게. 결정은 정우가 할 거야. 우리가 그녀의 결정까지 대신 해 줄 필요는 없어. 그래서도 안 되고. 다만 정우가 요구하는 정 보들을 제공하려 애써야 할 거야. 그것이 바른 일이겠지.”

거부감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지만 탈해는 상당히 수긍하게 되었다.

“그 말씀이 맞군요. 결정을 대신하려 해서는 안 되겠지요.” 

탈해는 서신을 받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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