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1권 : 황제 사냥꾼 [제3장] – 기적을 감상하는 태도 6
“둑이 무너진다!”
“안 돼! 난 수영 못해!”
“뗏목에 타라! 쓸려 내려간다!”
발길질을 좀 세게 하면 먼지가 일어날 것 같은 바싹 마른 언덕 위에서, 눈동자와 입 안 외에 어느 곳도 젖어 있지 않은 모습으 로 니어엘 헨로 수교위는 수난 사고에 동반될 법한 탄성들을 내 뱉고 있었다. 킬킬거림은 이 경우 존경의 표시가 될 것이다. 그 렇기에 수교위 주위에 있던 부위들과 수전사들은 마음놓고 킬킬 거렸다. 니어엘은 빙긋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럼 이제 귀관들의 상상력을 점검해 볼까. 카루스 부위.”
니어엘은 부위 한 명을 지적했다. 다른 부위와 수전사들의 환 호를 받으며 머쓱한 표정으로 걸어 나온 카루스 부위에게 니어엘 은 자리를 양보해 주었다. 언덕 정상에 선 카루스 부위는 힘껏 외쳤다.
“사람-려! 어푸!ᅳ람 살려!”
카루스 부위는 손바닥으로 입을 막았다 뗐다 하면서 실감나는 외침을 만들어 내었다. 좋은 상상력에 대한 찬사로 작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니어엘 또한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찬사를 보냈다. 그리고 부하들에게 나머지를 맡겨 두고 그녀는 언덕을 내려갔다. 언덕 아래엔 그녀의 야영지가 있었다. 병사들의 경례를 받으며 자신의 천막으로 걸어간 니어엘은 지멘이 어떤 모습일지 짐작하게 도와주는 좋은 표본을 보았다.
뭄토는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 양쪽을 짓누르며 무릎에 부리를 박고 있었다. 니어엘이 그 애처롭다 할 광경에서 눈을 돌린 까닭 은 무정하기 때문이 아니다. 니어엘은 뭄토 근처에 있는 인간 남 자들을 빨리 쫓아 버리는 편이 뭄토에게 더 도움될 거라 판단했 다. 그래서 그녀는 남자들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남자들은 일부러 그렇게 모아 놓은 것처럼 한결같이 체구가 크고 사나워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모두 갑옷을 입고 무장하 고 있어 그 사나움이 더욱 두드러졌다. 하지만 한 가지 기묘한 점이 있었는데, 그들이 허리에 차고 있는 것은 분명히 칼을 맬 수 있는 허리띠였지만 어디에도 칼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때문에 이들의 신분을 혼동할 가능성은 다행히 없었다. 사내들이 옆에 놓아둔 방패들에는 유명한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발케네의 공작가를 나타내는 감투 문장이었다. 도깨비들은 자신 들의 장난감이 사용된 이 문장에 재미를 느낄지 모르지만 도깨비 가 아닌 사람들 중에 그럴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물론 암살 공의 괴팍한 성미를 거스를 만한 요건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절대로 그럴 수 없었다. 니어엘이 자리에 앉자 남자들 중 하나가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감탄했습니다, 헨로 수교위.”
“고맙습니다, 마바노 조장.”
마바노 조장이라 불린 남자는 목례하고 언덕 쪽을 잠깐 곁눈질했다.
“하지만 저렇게 계속 고함을 지르면 지멘도 이것이 속임수라는 것을 알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 근방은 물난리가 일어날 지형이 아닙니다. 어쩌면 지멘은 소리의 방향으로 야영지의 위치를 짐작 할지도 모릅니다.”
“지멘이 저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에 속아 주기를 바라는 것 은 턱없이 과분한 소망이겠지요. 저는 그저 지멘의 신경이 곤두 서길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 저 소리는 시간을 두고 각자 다른 곳에서 들릴 겁니다.”
니어엘이 말을 맺을 때쯤 언덕 위의 소란이 끝났다. 그리고 어 둠 속에서 말 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발케네 국경 수비대의 텡 마바노 조장은 트집 잡을 것이 없으리라는 것을, 혹은 자신이 생각해 낼 만한 문제들은 니어엘이 이미 고려했으리라는 것을 인정 했다. 그래서 텡은 원론적인 문제로 곧장 직행하기로 했다.
“당신이 드높은 열의로 이 작전에 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 어 기쁩니다, 수교위. 지멘의 체포는 틀림없이 폐하의 기쁨일 테 고 언제나 폐하의 안녕을 바라는 제 주군의 기쁨이기도 할 테니 까요. 물론 저는 당신의 열의가 우리 모두의 존중을 받는 틀 안 에서 펼쳐질 거라 믿습니다.”
“정당한 믿음이십니다.”
“혹 저희들이 도와드릴 것이 있다면 말씀하십시오. 기꺼이 도 와드리겠습니다.”
“친절한 말씀 감사합니다. 지금으로선 떠오르는 것이 없군요. 여러분의 귀한 조력이 있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잊지 않고 부탁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무운을 빕니다.”
텡 마바노는 시간을 지체하지 않았다. 용건이 끝나자마자 마바 노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례는 우스꽝스러운 행동이 될 터였으므로 니어엘은 손을 내밀었다. 텡은 그 손을 마주잡아 두 어 번 흔들고는 자신의 부하들과 함께 모닥불 곁을 떠났다. 니어 엘은 그들을 배웅하고 나서 다시 모닥불 곁으로 돌아왔다. 뭄토 는 조금 전 그녀가 보았을 때와 똑같이 무정물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니어엘은 뭄토를 내버려두고 자신의 천막에 들어갔다. 어둠 속 에서 자신의 사물을 뒤져 곧 동그란 술병 하나를 꺼내어 돌아 나 왔다. 모닥불 옆으로 돌아온 니어엘은 병째 술을 마셨다. 제국병 하나가 황송해하며 잔을 들고 나타났지만 니어엘은 고개를 저어 그를 물러나게 했다.
니어엘이 세 모금째 마셨을 때 웅크리고 있던 뭄토가 말했다.
“그 자식 뭐 하러 온 거야?”
니어엘은 하마터면 당신을 놀리러 온 건 아니라고 말할 뻔했다.
“경고를 하러 온 겁니다.”
“무슨 경고?”
“지멘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발케네 경계선을 넘지 말라는 경고 지요. 제국군이 국경 인접 지역에서 작전을 시작하면 항상 옵니 다. 도대체 어떻게들 알고 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작전을 시작할 때 발케네 수비대에 공문을 보내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저편에서는 세작들에게 지급하는 돈을 아낄 수 있어 고마워할지도 모르지요.”
뭄토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존중하는 틀 어쩌고 하는 건 그 소리야?”
“그렇습니다.”
“그거 좀 넘어가면 안 되냐? 그놈들은 넘어왔잖아.”
니어엘은 모닥불을 헤쳐 불길을 살렸다.
“아, 저도 몇 명의 부하들만 데리고 칼 없이 넘어가려 한다면 그럴 수 있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넘나드는 것처럼 말입니 다. 하지만 발케네령 안에서 군사 행동을 일으키면 안 됩니다. 경계선을 넘나드는 것을 대충 눈감아 주는 영주들도 있다고 들었 습니다만, 발케네 공은 자기 땅에 제국군이 들어오는 것을 자기 바지에 남의 손이 들어오는 것보다 더 싫어합니다.”
뭄토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만약 지멘이 그 경계선을 넘어 도망치면 어떻게 되는데? 넌 못 쫓아가는 거야?”
“그렇습니다. 지멘도 그걸 알고 있을 겁니다. 그자는 자주 그런 식으로 제국군의 추적을 뿌리칩니다. 제가 화살을 쏘았던 강이 발 케네와 제국령 나나본의 경계입니다. 지멘은 그 강을 건너려 애쓰 겠지요. 물론 건널 수 없습니다. 저를 그가 붙잡을 테니까.”
“뭐?”
“예? 제가 그를 붙잡는다고요.”
“조금 전에 반대로 말했어.”
“설마요. 그럴 리가 없지요. 그건 말도 안 됩니다.”
뭄토는 도와줄 사람을 찾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상했다. 지 휘관의 난행을 말리러 다가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뭄토는 니어엘이 폭압적인 상관이라서 그렇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뭄 토는 뒤통수를 조금 긁적거리다가 자신을 돕기로 했다.
“너 술주정뱅이냐? 혹 그렇다 해도 작전 중에 그렇게 퍼마셔도 돼?”
니어엘은 대답 없이 입 안에 술을 부어 넣었다. 짜증이 났지만 동시에 뭄토는 짜증을 부릴 근거가 희박하다고 생각했다. 니어엘 은 해야 할 일을 말끔히 처리했으며 부과된 임무를 완수하면서 자기 즐거움을 찾는 사람을 탓할 수는 없다. 최소한 레콘인 뭄토 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뭄토는 눈이나 붙이자는 결심 하에 땅에 누웠다. 그런데 니어엘이 말을 했다.
“저는 지멘이 싫습니다.”
뭄토는 고개를 돌려 니어엘을 바라보았다. 니어엘은 술병을 든 팔을 세운 무릎 위에 얹고 다른 손으론 땅을 짚은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뭄토가 질문했다.
“왜 싫은데?”
니어엘은 그 말에 대한 대답으로 술병을 확 들어 올렸다. 입에 술을 때려 붓는 니어엘을 보며 뭄토는 자신의 질문이 잘못된 것 인가 생각했다. 하지만 딱히 짚이는 바가 없었다. 술병을 내린 니어엘은 숨이 막혔던지 몇 번 콜록거렸다.
“지멘은 미치광이입니다.”
“미쳤다?”
“그럼요. 미쳤지요. 황제 폐하를 죽이겠다고요? 백보천보 양보해서 그에게 그럴 권리가 있다고 치지요. 그러고 나서 어쩌 겠다는 겁니까? 자기가 제국을 더 잘 다스릴 수 있다는 걸까요? 6억 명의 삶을 자기가 책임지겠답니까?”
니어엘은 헝클어트리듯 자신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백 명에 한 명이 어린애라고 쳐도 육백만 명입니다. 저는 한 명의 어린애도 저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을 바라지 않아요. 그런 데 육백만 명의 어린애가 겪게 될 고통보다 자기 숙원이 더 중요하다는 겁니까?”
“그건…….”
“대답해 보세요. 뭄토. 당신도 레콘입니다. 제가 당신 정체를 알고 있을 줄 몰랐죠?”
주정이라 생각했던 뭄토는 조금 후에야 농담임을 깨닫고 피식 웃었다. 니어엘은 검지와 엄지로 술병의 목을 붙잡은 채 이리저 리 흔들었다.
“예. 당신도 뒤돌아볼 줄 모르고 옆길로 새지 않고 충고를 들 으면 화를 내는 레콘이지요. 그런데 당신이라면 육백만 명의 아 이들이 고통 당해도 자기 숙원을 추구할 겁니까?”
동족으로서 지멘을 변호하고 싶었지만, 뭄토는 지멘의 숙원이 황당하다고 생각했다. 뭄토가 선택한 타협안은 가만히 모닥불을 들여다보며 “나라면 애초에 그런 숙원을 가지지 않아.”라고 말하 는 것이었다.
그 대답은 니어엘을 만족시키지 못한 것 같았다. 니어엘은 술 병을 기울여 남은 술을 모두 마셨다. 그러고 나서 몇 번 실패한 후에야 병뚜껑을 제자리에 끼워 넣었다.
“그럼 역시 지멘은 미쳤군요. 그래서 제가 내일 정오에 그를 붙잡는 겁니다.”
“내일 정오?”
“지금쯤 지멘은 자기가 축에 몰렸다는 걸 느끼고 있을 테지요. 내일 아침은 지멘이 자유의 몸으로 맞이하는 마지막 아침이 될 겁니다. 그리고 내일 정오, 유료 나루터에서 저는 지멘을 붙잡을 겁니다. 그를 절망도에 처박아 버릴 겁니다. 기러기의 노래가 그 를 기겁하게 하고 파도 소리가 그를 파괴하게 만들 겁니다.”
벼슬 곤두서는 선언에 뭄토는 불쾌함을 느꼈다. 문득 뭄토는 지멘에 대한 니어엘의 증오가 다른 자에 대한 것에서 전이된 것 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느꼈다. 뭄토는 그 가설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지멘에 대한 니어엘의 혐오감에는 확실히 지나친 면이 있었다.
그러나 뭄토는 자신의 의문을 풀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가 듣 게 된 니어엘의 다음 소리는 코 고는 소리였다. 조금 고민하던 뭄토는 자신의 의문과 제국군 수교위를 한꺼번에 천막 안에 던져 넣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참 훌륭한 해결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