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1권 : 황제 사냥꾼 [제3장] – 기적을 감상하는 태도 8
뱃사공의 이름은 데무즈였다. 갈대밭 사이에서 갑작스럽게 검 은 레콘이 나타났을 때 그는 꽤 놀랐다. 카지라와 러크, 우기츠 와 함께 나나본 지역은 최후의 대장간으로 가는 레콘들이 통과해 야 하는 지점이기 때문에 제국의 다른 장소보다 레콘을 볼 확률 이 높은 곳이다. 하지만 그런 사정은 데무즈와 관련이 없었는데, 다름 아닌 그의 직업 때문이다. 비록 데무즈는 어떤 고객도 거부 하지 않았지만 레콘들은 그가 제공하는 용역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데무즈는 상당한 호기심을 가지고 검은 레콘을 관찰했지 만, 검은 레콘과 자신이 서로 연관될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뒤이어 일어난 일은 그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다. 여전히 자 신과 무관하다고 생각했기에 데무즈는 순수하게 호기심만을 추구 할 수 있었다. 그의 눈앞의 광경은 독특했지만 이해하기 어렵진 않았다. 데무즈는 제국병들에게 쫓기던 레콘 범법자가 이곳까지 쫓겨온 거라 판단했다. 서른한 대나 되는 소화차에 감명 받은 데 무즈는 검은 레콘이 꼼짝 못하고 잡힐 거라 확신했다.
물론 데무즈는 자신이 인질이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하지 않 았다. 레콘이 혹 그런 시도를 하려 한다면 그냥 배를 나루터에서 조금 떨어뜨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때 데무즈가 예상 못한 일이 일어났다.
강 건너편에서 희미한 소음이 들려왔다. 혹 뱃손이 부르나 싶 어 돌아본 데무즈는 이상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그곳에는 말을 탄 십여 명의 발케네 국경 수비 대원들이 서 있었다. 그들이 배 를 부르고 있지는 않았다. 다만 똑바로 선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데무즈는 혹시나 싶어 자신의 배를 가리켜 보였지만 수 비 대원들 중 한 명이 손을 가로저었다. 배를 보낼 필요가 없다 는 뜻이었다. 데무즈는 어리둥절하여 다시 레콘과 대치 중인 제국병들을 돌아보았다.
니어엘 헨로 수교위도 강 건너편에 나타난 발케네 국경 수비 대원들을 확인했다. 그리고 니어엘은 그들 중 한 명이 텡 마바노 조장이라는 것도 알아보았다. 지멘이 체포되는 모습을 구경하러 온 것이라 판단한 니어엘은 극적인 모습을 연출해 볼까 하는 유 혹을 느꼈다. 이를테면 말에서 내려 칼을 뽑아 들고 지멘에게 다 가가는 것 같은. 하지만 니어엘은 자신을 억누르며 안장에 매달 아 둔 활을 집었다. 자포자기한 지멘이 뭔가를 집어던질지도 모 른다는 희박한 가능성을 고려해서 화살을 먹이지는 않았다. 비어 있는 손으로 말고삐를 움켜쥐며 니어엘이 말했다.
“무기를 내려놓고 땅에 엎드려라, 지멘.”
데무즈는 움찔하며 새로운 눈빛으로 지멘의 등을 바라보았다.
‘지멘이라고?’
지멘은 아무 반응도 없었다. 지멘이 꿈쩍도 하지 않자 니어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인정하기 싫더라도 받아들여, 지멘. 네겐 남은 팻감이 없어.”
아실은 울고 싶었다. 통증도 피로감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멍한 기분 속에서 아실은 자꾸만 울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 렸다. 6년 동안의 목숨을 건 노고가 물거품이 되었다면 더 이상 울지 않을 까닭도 없을 듯했다.
상상 속에서 아실은 처절하고 비장한 최후들을 꽤 예습했지만, 그 상상 속 어디에도 이런 경우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언덕을 이룬 인마의 사체도, 땅을 흠뻑 적신 피도, 붉게 타오르는 석양 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 ‘황제를 죽이겠다고 떠들고 다녔지만 결국 일개 수교위도 당하지 못하는 조무래기라는 말이야”
아실은 손을 뻗어 안을 수도 없는 지멘의 목을 끌어안으려 했 다. 깃털들 속에 얼굴을 파묻은 아실은 소리 없이, 눈물 없이 울었다. 그때 지멘이 말했다.
“뭄토, 너를 용서하겠다.”
니어엘은 뭄토를 돌아보았다. 뭄토는 움찔하며 벼슬을 세웠다.
그의 부리가 욕이라도 퍼부을 듯 열렸다. 하지만 뭄토는 아무 말 도 하지 않았다. 니어엘은 어깨를 으쓱이고 다시 지멘을 바라보았다.
지멘이 몸을 돌렸다.
아실은 놀라서 깃털 속에서 머리를 들었다. 니어엘에게 등을 보인 지멘은 그대로 앞으로 걸어갔다. 아실은 흠칫 놀라 지멘의 벼슬을 움켜쥐었다. 니어엘 또한 당황했다. 뭄토를 용서하겠다는 지멘의 말이 그녀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문득 니어엘은 뭄토가 말했던 바다의 이름을 생각했다. 쟁룡해, 바다에 관심을 둘 필요가 없는 레콘이 알고 있는 바다의 이름이라면 그것밖에 없다. 쟁룡해. 그 바다는 어느 유명한 레콘과 남다른 관련이 있 다. 6년 전, 엘시 에더리와 함께 그녀 자신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쟁룡해.
타이모가 빠진 바다의 이름이다.
“지멘!”
니어엘은 다급하게 외쳤다. 지휘관의 당혹은 곧 병사들에게도 전파되었다. 제국병들은 수군거리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병사들 이 혼란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자각은 니어엘을 진정시켰다. 그녀 는 보다 단호한 어조로 외쳤다.
“지멘! 기다려! 네 마음대로 너를 처벌할 수는 없다. 너는 폐 하께 처벌받아야 한다!”
걸음이 약간 느려지긴 했지만 지멘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발케 네 국경 수비 대원들도 당혹한 듯 강 건너편에서 아스라한 소음 이 들려왔다. 아실은 겁먹은 얼굴로 지멘의 벼슬을 자꾸 끌어당겼다. 그러나 지멘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익숙하지 않은 무게에 나무들이 삐걱거렸다. 나루터의 기둥을 때리는 강물의 소리가 스산하다. 철썩, 철썩.
지멘은 나루터 끝에 섰다. 그의 부리에서 비장한 말이 흘러나왔다.
“태워 줘.”
데무즈는 자신의 기분을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