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1권 : 황제 사냥꾼 [제4장] – 묻은 것과 믿은 것 5
규리하 성의 한쪽에서 대장군이 기묘하고 불쾌한 경험에 시달 리던 시각, 성의 다른 곳에서는 비스그라쥬 백 데라시가 문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그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혹 누군가가 그 사실을 알았다 하더라도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른 종 족에겐 그저 쌀쌀한 정도였지만 나가인 데라시에겐 열까지 세기 도 전에 혼수 상태에 빠질 만큼 추운 기온이었다. 하지만 데라시 는 아무 어려움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문 바로 앞에 섰을 때 데라시는 몸이 둔해지는 것을 느 꼈다.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짜증을 느꼈지만 그는 차분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커다란 도깨비 한 명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유? 어, 제 몸이 둔해지고 있군요. 당신의 도깨비불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기유 구마리는 아차 하는 표정으로 뭔가를 했고 그러자 데라시 의 몸이 다시 더워졌다. 기유는 고개를 꾸벅하며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백작님. 라수의 방에 들어가는 방법을 궁리하다 가 잠깐 불을 놓쳤습니다.”
데라시는 한숨을 내쉬고 싶었다. 물론 그러지는 않았다. 데라시가 벽난로가 있는 자신의 방에서 이렇게 먼, 즉 보온복에 든 더운 물마저 식을 정도로 먼 규리하 성까지 무사히 도달할 수 있 었던 것은 기유가 붙여 준 도깨비불 덕분이다. 기유는 나가에게 가장 쾌적한 온도의 도깨비불을 만들어 데라시의 몸에 붙여 주었 고 그래서 데라시는 한계선 이남에 있는 것처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데라시가 불평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은 것은 그런 고마움 때문이 아니다. 기유 구마리는 이 야행을 유쾌한 장 난의 일부로 알고 있었고 그것은 데라시가 조장하고 싶어하는 착 각이었다. 그래서 데라시는 공모자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무슨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까?”
“예! 라수의 방도 지하 창고라고 할 수 있으니까 즈믄누리의 지하 저장고에 도달하는 방법과 비슷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미닫 이처럼 열어 보세요.”
“이건 여닫이문인데요?”
“그렇지요. 여닫이문을 미닫이문처럼 통과해야 합니다.”
데라시는 좀 어처구니없는 심정을 느끼며 기유의 말처럼 해보려 했다. 문 손잡이를 붙잡고 옆으로 민 것이다. 그러자 여닫이 문에 대해 그런 행동을 취했을 때의 당연한 반응이 일어났다. 문 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데라시는 다시 기유를 돌아볼 수밖에 없 었다.
기유는 뒤통수를 조금 긁적였다.
“제 설명이 잘못됐나 보군요. 그러니까 여닫이문이지만 미닫이 문처럼 여는………… 으으, 아무래도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지요. 잠 깐만 옆으로 비켜 보세요.”
데라시는 순순히 그렇게 했다. 데라시의 자리에 선 기유는 여닫이문을 열 때와 같은 방향으로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자신에게 한 말과 다르지 않느냐고 항의하려 했을 때 데라시는 말문이 막 히는 광경을 보았다.
문짝은 열리는 대신 통째로 끌려 나왔다.
마치 커다란 서랍을 잡아당긴 것 같았다. 문은 아래쪽을 바닥 에 붙인 채슥 미끄러져 나왔다. 데라시는 그 문이 어떻게 서있 을 수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여닫이도 아니고 미닫이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즈믄누리 식이었다.
문 너머의 공간을 살펴본 기유는 문을 도로 밀었고 그러자 서 랍을 닫는 모습을 연상시키며 문이 제자리로 밀려 들어갔다. 그 광경에 매혹된 데라시에게 기유가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것도 없는데요. 이 방법은 아닌가 봅니다.”
데라시는 항복하는 기분으로 말했다.
“시도해 볼 만한 다른 방법을 궁리하는 일은 당신에게 일임하 겠습니다. 저는 그 다른 방법이라는 것을 떠올릴 수조차 없을 것 같으니까.”
데라시는 자신이 잘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기유가 중 얼거린 말은 “나가는 방법으로 들어가 보면 어떨까.” 였기 때문이 다. 데라시는 나가는 것과 들어가는 것에 동작 상의 무슨 차이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기유가 도깨비만 떠올릴 수 있는 갖가지 괴상한 방법을 시도하 는 것을 보며 데라시는 잠시 엘시에 대해 생각했다.
엘시는 정말 이 비밀이 지켜지리라 믿은 걸까? 도깨비들의 다 른 창조물들이 그러하듯 몽화각의 성격을 한 가지로 규정 지을 수는 없지만 그곳에 가장 영리한 도깨비들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도깨비들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집단 이 데라시의 영향권이라 할 수 있는 하늘누리에 있는 것이다. 그 리고 데라시는 엘시가 몽화각의 존재를 간과했으리라고 믿을 수 는 없었다.
따라서 엘시가 알지 못한 것은 데라시가 어느 정도로 필사적인 가 하는 것이다. 데라시는 라수의 방에 반드시 들어갈 작정이었 고 수단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었다. 아이저 규리하 는 붙잡히지 않았고 따라서 그가 ‘그 물건’을 가지고 도망쳤는 지, 그렇지 않으면 놔두고 갔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그 물건이 있는 라수의 방에 들어가 보는 방법뿐이었다. 그것도 되도록 빨 리. 만약 낙성 당시 아이저 규리하가 그 물건을 가지고 도망쳤다 면 지금 그것이 어디까지 흘러갔을지는 짐작할 수도 없다. 그것 이 규리하 성을 빠져나갔다는 것만이라도 알아야……………..
데라시는 사고가 흐려지는 것을 느끼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몸이 차가워져 있었다. 라수의 방으로 들어가는 일에 열 중한 기유가 또다시 데라시의 몸에 붙여 둔 도깨비불을 잊어버린 것이다. 데라시는 불평했다.
“기유, 제 몸이………….”
“열었습니다!”
데라시는 말 그대로 펄쩍 뛸 뻔했다. 기쁨 때문이 아니다. 데 라시는 소리를 잘 듣는 종족들에게 배운 손짓을 해 보였다. 데라 시가 입 앞에 손가락을 세우는 것을 본 기유는 커다란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네요.”
하지만 기유는 자신의 부주의에 당황하기보다는 나가에게 소리에 대한 주의를 듣는 것에 재미를 느꼈다. 낄낄거리는 기유를 보며 데라시는 다시 한숨을 내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속으로 불평을 니르면서 데라시는 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데라시는 기유를 용서하게 되었다.
하늘누리에서 환상 계단을 이용하여 은밀히 내려왔기 때문에 데라시와 기유는 규리하 성의 꼭대기 층에 있었다. 그리고 지금 기유가 연 문 뒤에는 라수의 방이 있었다. 이전에 본 적이 없었 지만 데라시는 작은 박물관을 연상시키는 그 방이 라수의 방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지하에 있는 라수의 방이 최상층 방과 같은 높이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은 데라시를 혼란스러운 기분에 젖게 했다. 고개를 돌려 창문을 확인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데라 시는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방 안이 어두운 것을 본 기유는 작은 도깨비불들을 몇 개 만들 어 여기저기 띄워 보냈다. 도깨비불 아래 드러나는 광경은 더욱 인상적이었다. 규리하 가문의 유구한 역사가 방 안 가득 퇴적되 어 있었다. 그리고 역사학자가 아닌 데라시는 낭패감을 느꼈다. 자신이 찾는 물건이 어디에 있을지 백작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즐비한 서가엔 서책과 장부, 두루마리 이외에 나가들이 사용하 는 서판도 꽤 쌓여 있었다. 그리고 무수한 상자들은 놓을 공간이 부족하여 겹쳐 쌓여 있었다. 그 공간 사이사이에 목공예품이나 도기, 문방구, 악기, 족자, 편액, 그리고 무향의 지배자들이 사 용했던 것이라 짐작되는 무구들이 잔뜩 놓여 있었다. 멍한 심정 으로 후사린 규리하의 무기라도 볼 수 있을까 생각하던 데라시는 잠시 후 그것이 말도 안 되는 소망임을 깨달았다. 이 방에서 가 장 오래된 물건이라도 규리하 가문을 재건한 과텔 규리하의 시대 이상은 올라가지 않을 것이다.
그때 기유가 가져온 물건을 잘 보이는 곳에 내려놓았다. 그것 은 새장이었고 안에는 새가 있었지만, 새는 진짜가 아니었다. 어 쨌든 금속으로 된 몸을 가지고 있는 새는 없다. 도깨비 대장장이 들이 만들어 낸 기발한 물건들 중에서도 특기할 만한 그 인조새 는 알을 낳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고양이를 애타게 하는 등의 일 반적인 새가 가지고 있는 능력은 없지만 그 대신 풍부한 어휘력 을 가지고 완벽하게 부적합한 말을 늘어놓을 수 있는 비상한 능 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만든 도깨비 대장장이는 자랑스럽게 황제에게 선물했고 황제는 그것을 다시 데라시에게 선물했다. 데 라시는 평소 소유자의 인내력 향상 이외엔 그 인조새에 아무 쓸 모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도깨비나 도깨비의 감성을 가지 고 있는 인간은 그것을 재미있어 할 거라고 판단했다. 더 정확하 게 니른다면 데라시는 라수의 방 잠입에 기유를 동원하기 위한 핑계가 된다고 판단했다.
새장을 내려놓은 기유는 도깨비지를 꺼내었다. 거기엔 ‘햇빛이 잘 드는 창가에 가져갈 것’이라는 지시가 적혀 있었다. 도깨비들 은 자신들의 공예품에 동력이 필요할 경우 도깨비불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 인조새는 도깨비불 대신 하늘에 떠 있는 불을 이용한다. 그래서 태양이 없는 이 시각 새는 잠들어 있었다. 새 장으로 도깨비지를 눌러 놓은 기유는 그것을 바라보며 만족스럽 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생각해 봐도 정말 괜찮은 생각이십니다. 백작님. 정우가 여기 들어와서 이걸 보면 깜짝 놀라며 좋아할 겁니다. 정우를 달 래는 일은 저희들이 먼저 생각했어야 하는 일인데 백작님께 신세를 졌군요.”
데라시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직 목표하던 물건의 소재를 확인하지 못한 비스그라쥬 백은 시간을 끌기로 했다.
“당신이 도와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요. 그러잖아도 푹 주무셔야 할 이런 시각에 불러내서 정말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잘 자는 일은 도깨비에게 대단히 중요한 일로 취급된다.
“하지만 제 몸에 불을 붙여 주고 이 방에 들어오는 방법을 알아내는 건 도깨비가 아니면 안 되기 때문에 불편을 끼쳐 드려야 했습니다.”
“아뇨. 이런 일이라면 언제든지 불러 주십시오. 아, 물론 다른 경우라도 백작님이 부탁하시면 언제든지 도와드릴 테지만요.”
데라시는 더 이상 시간을 끌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낭패였 다. 도깨비불이 없으면 방에서 나올 수 없는 처지이기에 기유와 함께 돌아간 다음 혼자 되돌아온다거나 하는 방법은 불가능했다. 데라시에겐 고맙게도 거기엔 시간을 끌고 싶어하는 사람이 한 명이 아니었다. 어쨌든 그 밤 그의 동행자는 중요 사망 원인에 호기심이 포함되어도 이상할 게 하나도 없는 종족의 일원이었다.
“그런데, 저, 백작님, 바쁘시죠?”
“아니요. 특별히 바쁜 일은 없습니다.”
“그럼 구경 좀 하고 가도 될까요? 물론 백작님께서 돌아가셔야 한다면 도깨비불을 유지해야 하니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이런 구경을 항상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저 도 구경 좀 하고 싶군요.”
기유는 기뻐하며 규리하 성의 보물들에게 다가갔다. 그 모습을 충분히 관찰하며 데라시는 마음속으로 정해 둔 위치로 천천히 움직여갔다.
조금 후 데라시는 기유에 대해 조금도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기유의 주의력은 라수의 방에 가득한 기념품과 보화들이 가져가 버렸고 데라시에게 할애될 주의력은 남지 않았다. 그러잖아도 다 른 사람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던 데라시에겐 다행이었다.
<그게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오레놀 선사는 라수 규리하가 그 것을 대수롭잖은 것처럼 취급한다고 적어 뒀지. 선사의 눈이 정 확했다면…… 아냐, 아니다. 이 방을 관리한 사람들은 규리하 가 문의 사람들이다. 선사의 입장보다는 이 방을 직접 관리한 사람 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 타당하겠지. 그래, 아마도 라수 의 물건들은 한곳에 모여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라수의 소지품 이었던 물건을 찾으면 되는데, 라수의 소지품 중에서 유명한 것 은? 물론 책이지. 저술량이 엄청나니까. 하지만 그것은 모두 규 리하 성의 도서실에 있으니 다른 물건을 떠올려야 해.>
그때 기유가 데라시의 어깨를 툭 쳤다. 데라시는 화들짝 놀랐고 그 모습을 본 기유는 고개를 꾸벅했다.
“미안합니다, 백작님. 제 말을 듣지 못하셔서요.”
“아, 이런 사과하겠습니다. 잘 알겠지만 저는 신경을 쓰고 있지 않을 땐 귀머거리나 다름없지요. 무슨 말을 했지요?”
“괜찮습니다. 저는 유감이라고 말했습니다.”
“유감? 왜죠?”
“찾으시는 물건이 여기 없는 것 같아서요.”
엘시에게 한 번 당한 일이지만 데라시는 다시 경악했다. 데라시는 니를 줄 아냐고 묻고 싶은 것을 간신히 억누르며 말했다.
“무슨 말이죠?”
기유는 대답 대신 도깨비지를 내밀었다. 데라시는 인조새에 대한 지시 사항이 왜 자신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되는지 알 수 없었 다. 어리둥절한 기색의 백작을 본 기유는 자신의 머리를 탁 쳤다. “이런. 이 글씨는 백작님이 보시기엔 좀 작군요. 제가 읽어 드 리겠습니다. 여기엔 ‘나는 졌지만 너는 이기지 못했다. 데라시. 그 물건을 내가 가져가니까.’라고 적혀 있습니다. 작은 글씨로 쓴 걸 보니 규리하 공께서는 아마도 백작님이 직접 오실 줄은 몰 랐던 모양이군요. 하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그리고 기유는 뭐라고 더 떠들었지만 데라시의 귀에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것은 말 그대로의 의미인데, 기유의 말에 집 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가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자신의 동행자가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할 도깨비라는 사실을 저주하며 데라시는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 해야 할지 생각했다. 결국 데라시는 그 상황을 웃기는 것으로 만 들기로 했다.
“아이저 규리하가 그 물건을 가져갔다는 것을 알게 된 건 잘됐 지만, 이왕이면 그 물건이 뭔지도 적어 뒀으면 더 좋았을 텐데 요. 아이저에겐 미안하지만 그가 그렇게 귀하게 여기는 물건이 무엇인지 저는 도통 짐작되지 않는군요.”
데라시의 바람대로 기유는 재미있어 하는 것 같았다. 기유가 아이저의 서신을 데라시의 손에 쥐어 주고 문 쪽으로 걸어갈 때 까지 데라시는 그렇게 생각했다. 기유는 문 앞에서 데라시를 돌아보았다.
“그럼 돌아갈까요?”
데라시는 눈을 크게 뜬 채 기유를 바라보았다.
아이저 규리하의 서신이 발견된 이상 데라시에겐 이 방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기유가 바로 떠나는 것은? 기유 구마리의 목적 또한 구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유는 데라시가 라수의 방 을 찾은 진짜 이유를 알고 있었다! 기유가 재미있어 한 것은 시 치미를 떼려 하는 데라시의 능청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데 라시의 목적에 대해 기유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데라시는 일단 기유가 호의적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도깨비 에게 기대할 수 있는 가장 가능성 높은 반응이 그것이기 때문은 아니다. 데라시가 그 물건을 찾는 것을 기유가 원하지 않았다면 동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혹은 새장을 놓고 바로 돌아갔을 것이 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저의 서신을 몰래 빼돌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기유는 그와 동행하여 라수의 방으로 들어오는 방법을 찾 아 주었으며, 구경하고 싶다는 핑계를 대어 데라시가 그것을 찾 을 시간을 주었으며, 데라시가 읽을 수 없는 서신을 대신 읽어 주기까지 했다. 기유는 분명히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데라시는 그 호의를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데라시에겐 재확인이라 할 수 있다. 몽화 각에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데라시는 몽화각의 도깨비들이 어디까지 관찰하고 어디까지 해석하는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관찰과 해석을 통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꼭 확인해 두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모든 추측과 판단, 결심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으면서 데라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올라가지요.”
데라시의 몸에 붙인 도깨비불을 계속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기 유는 황궁까지 동행했다. 데라시의 방 앞에서 기유는 좋은 꿈 꾸라는 인사를 남기고 데라시의 몸에서 도깨비불을 거뒀다. 떠나는 기유의 모습을 보기엔 규리하의 날씨가 너무 추웠으므로 데라시 는 간략한 인사만 건네고 황급히 방으로 들어섰다.
방 안에는 기대하던 것과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 기다리고 있었 다.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벽난로는 데라시가 기대하던 것이 었다. 하지만 부지깽이로 벽난로를 헤집고 있는 사람은 데라시의 시종이 아니었다.
치천제는 문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데라시는 당황하여 뭐라 니르려 했지만 그 전에 치천제가 고개를 돌렸다. 황제는 부지깽 이를 치우며 닐렀다.
<도깨비는 돌아갔나?>
데라시는 자신이 도깨비와 함께 외출했다는 것을 황제가 어떻 게 짐작했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벽난로 곁에 그의 보온복이 걸려 있었으니까.
<예. 문 앞까지 바래다 주고 돌아갔습니다.>
<몽화각의 도깨비들은 여간내기들이 아니지. 어떻게 눈을 피했지?>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제 목적이 뭔지 짐작하고 있더군요.>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고 의자를 가리켰다. 데라시는 의자에 앉 았다. 그리고 황제가 맞은편 의자에 앉길 기다렸다. 하지만 치천 제는 선채 닐렀다.
<그렇다면 도깨비들도 이 전쟁의 또 다른 중요한 이유를 알고 있다는 니름이군. 그리고 네가 그걸 찾도록 도와주었다면 일단 방해하지는 않겠다는 의사 표시로 받아들여야겠군.>
<그런 것 같습니다. 폐하. 하지만 도깨비들은 누구의 일도 방해하지 않으니 특별한 의미를 두긴 어렵습니다.>
<그건 어디 있지?>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아이저 규리하가 가지고 갔습니다.>
<그렇다면 아이저 규리하도 알고 있었다는 것이군.>
<그렇습니다. 이런 서신을 남겨 두었더군요.>
데라시는 아이저의 서신을 꺼내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가인 치천제는 그것을 읽을 수 없었기에 데라시는 기유가 그것을 읽어 주었을 때의 기억을 치천제에게 보냈다. 치천제는 팔짱을 꼈다.
<도깨비들도 알고 아이저도 알고 있다면 모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나 보군.>
<한 사람은 있을 겁니다, 폐하.〉
<엘시를 니르는 것이군.>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당사자만 이 전쟁의 중요한 이유를 모 른다는 것은 어찌 보면 비극적이군요.>
<비극이라고? 천만에. 엘시에겐 엘시 자신의 이유가 있어. 부 냐를 석방시키기 위해 싸웠지. 그리고 짐을 만족시키기 위해 싸 웠고, 그는 그 두 가지를 자기 식으로 결합시켰고, 다른 사람들의 이유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을 거야. 만약 알았다면 그것도 결합시켰겠지만. >
<잘 모르겠습니다, 폐하. 엘시가 우유부단하다고 니르시는 겁니까?>
<엘시가 우유부단하다면 세상에 엄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니름이 되겠지.>
데라시는 그것이 과장이라고 생각했지만 더 이상 니르지는 않았다. 치천제가 닐렀다.
<그건 그렇고, 아이저가 그것을 가져갔다고 했지? 지금 그의 처지에선 사용할 수 없을 테니 아마도 비싼 값에 팔려고 하겠군. 구매자를 예상해 볼까.>
<상식적으로는 폐하께 팔아야 합니다.〉
<아이저가 짐에게 그걸 양도할 작정이라면 전쟁이 발발하자마 자 그랬을 텐데.>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폐하. 아이저는 서약 지지파가 그를 지원해 주길 기다렸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 만 지원은 없었고 아이저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렇다면 아 이저는 서약 지지파에 대한 의리를 지킬 필요가 없지요.>
<하지만 짐에 대한 증오는 더욱 커졌겠지. 너는 지금 나가처럼 생각하고 있어, 데라시. 아이저는 인간이지. 그리고 규리하고. 아이저는 그것을 이 땅을 되찾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겠지만 거 래 수단이 아닌 투쟁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을 거다.>
<그렇다면 목록의 두 번째 이름은 어떨까요? 시련입니다.>
치천제는 정신으로 데라시를 툭 치는 것과 유사한 니름을 닐 렀다.
<농담하는 건가, 아니면 두 번째 이름을 니르기 싫어서 일곱 번째나 여덟 번째 이름을 끌어온 건가? 만약 아이저가 분별력을 완전히 상실하여 미라그라쥬에 그걸 들고 간다면 아르키스는 당 장 그를 붙잡은 다음 잘 묶어서 짐에게 보낼 거다. 데라시, 왜 락토를 니르지 않는 거지?>
데라시는 비늘을 살짝 부딪쳤다. 무례하지 않지만 자신의 부정적인 견해는 전달할 수 있을 만큼.
<폐하, 쇼자인테쉬크톨은 일단 시작되면 암살자와 암살 대상 중 한 사람이 죽기 전에는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이 쉬크톨이라는 건가?>
<암살공은 그것을 알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있던 아이저 규리 하가 어떻게 되었는지 똑똑히 보았으니까요. 암살공이 야심가이 긴 하지만 멍청하지는 않습니다.>
<아이저의 분노가 락토를 설득할 수도 있지. 그가 그 ‘쉬크톨’ 을 락토에게 주어 짐을 암살하게끔 획책할 가능성은 많아. 암살 이라면 암살공 외에 누가 전문가라 자칭하겠나.〉
<니르시는 것처럼 아이저는 그렇게 되길 바라겠지요. 하지만 암살공은 바라지 않을 겁니다, 폐하.>
<확신하나?>
이런 일에 확신이라는 것은 없다고 니르려던 데라시는 문득 치천제의 눈빛을 보았다. 치천제는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나나본에서 한 수교위가 재미있는 보고를 보내왔다. >
<니어엘 헨로 수교위군요.>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추측하지만, 치천제는 데라시가 수천 명이나 되는 제국군 수교위의 이름과 임지를 다 외고 있을 거라 생 각하지 않았다.
<짐이 알아두어야 하는 사람인가?>
<부냐 헨로의 언니입니다.>
<그리고?>
치천제가 부냐의 이름에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데라시는 약간 당황하여 다른 정보들을 꺼냈다.
<아마도 가장 젊은 수교위들 중 한 명일 가능성이 높고, 국수 급의 기사들 중에서도 가장 젊은 편입니다. 군사와 혁기 양쪽으 로 그 나이에 그 정도의 성취를 보였다는 건 놀랄 만한 일이라고 사료됩니다. 같은 분야들에서 그보다 더 대단한 성취를 이룬 사 람의 영향을 받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엘시?>
〈예. 수교위로 진급하여 독립 중대를 지휘하면서 떠나게 되었 지만, 그 이전까지 니어엘 헨로는 칼리도 백의 수하에 있었습니다. 아마 엘시가 부냐와 만난 것도 그녀 때문일 겁니다.>
무심히 데라시의 설명을 듣던 황제는 엘시의 이름에 반응을 보 였다. 치천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시의 부하였다면 이해가 되는군. 영민한 사람 같더군.>
치천제는 니어엘 헨로의 보고서에 대한 기억을 데라시에게 통 째로 보냈다. 잠시 후 데라시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유무역당에서 또 항의가 들어오겠군요. 범죄자와 무법자 의 친구, 패륜의 수호자, 배금주의의 왕 유료도로당주를 규탄한다…….)
<만일 그런다면 이번에야말로 그 배은망덕한 것들에게 준엄한 훈계가 내릴 것이다. 그들이 무역을 할 수 있는 것이 누구의 도 로 때문인가? 그런데도 무역로를 공짜로 쓰겠다는 욕심을 포기하 지 못하고 있으니, 금편에 눈이 어두워 도리를 소홀히하는 것들 이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은가.>
데라시는 치천제의 반응을 잘 기억해 두었다가 자유무역당주 지테를에게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유료도로당에 대한 황제의 애정은 변함이 없으니, 아무래도 자유무역당이 유료도로당에 지불하는 막대한 도로 사용료가 축소될 날은 오지 않을 것 같다.
지테를 당주는 항의를 포기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황제는 데라시를 당황하게 했다.
<그렇다고, 네 선에서 은밀히 전해. 그러면 귀찮은 항의서는 보내지 않겠지.〉
데라시는 비늘을 눕히려 애쓰며 황제를 조심스럽게 바라보았 다. 황제는 무심하게 닐렀다.
<황제는 유료도로당을 편애하니 비스그라쥬 백은 자유무역당 에게 친근한 척하는 것이 좋겠지. 그러면 지테를은 짐에게 화를 낼 수 있고 게라임은 너를 경멸할 수 있을 테니 공평하겠군. 그리고 우리는 필요할 때 그들을 긴장시킬 수도, 고분고분하게 할 수도 있겠지. 네가 이미 그랬던 것처럼.>
데라시는 당혹감과 동시에 만족감을 느꼈다. 그가 지테를에게 은밀한 호의를 보낸 까닭은 황제가 니른 이유 때문이다. 황제가 유료도로당에게 무조건적인 애정을 보내고 있는 이상 앙숙이라 할 수 있는 자유무역당에게도 누군가가 호의를 보내지 않는다면 자유무역당은 피해 의식에 빠질지도 모른다. 물론 단순히 자유무 역당을 안심시키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황제가 지적했듯 연초 교 역권과 아이저 규리하를 맞바꾸는 거래를 데라시가 쉽게 성사시 킬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자유무역당과 쌓아 둔 관계 때문이다. 황제는 데라시의 그런 공작을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필요한 일 이라고 생각했기에 내버려둔 것이다. 데라시는 갑자기 자신에게 비밀이라는 것이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몽화각의 도깨 비들도 황제도 데라시가 하는 일을 다 꿰뚫어 보고 있었다. 데라 시는 그 사실에 대해 잠깐 불평하려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어쨌든 황제에게 미리 니르지 않았다는 사실은 엄존했고 황제가 쾌히 사후 승인을 해 준 시점에 자신이 독단적으로 일을 꾸몄다는 사실을 부각시키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데라시 는 다른 화제를 꺼냈다.
<일전의 하인샤 대사원의 일도 그렇고, 아무래도 암살공은 다 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야 하는 뭔가가 있는 모양이군요. 폐하, 그것이 아이저 규리하라고 생각하십니까?>
치천제는 데라시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황제는 벽난로로 다가가 손수 장작을 집어 불에게 먹였다. 시련의 나가들이 참을 수 없는 배신으로 여기고 아예 거론조차 하지 않으려 하는 행동 이다. 불길이 가벼운 액체처럼 나무 껍질 위로 흐르는 것을 보던 황제가 갑작스럽게 닐렀다.
<짐의 주의를 끄는 것은 니어엘 헨로 또한 지적한 바로 그 부 분이다. 락토는 제국군이 들어갈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지멘이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 했지. 지멘이 어떻게 보면 한낱 부랑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그건 아주 약한 빌미야. 짐이락 토의 시의라면 편집증이라고 진단했을 만큼. 그렇다면 락토는 반 역자 아이저 규리하가 발케네에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할까?>
<무슨 니름이신지 알겠습니다. 제국군이 따라 들어오면 안 되 니 결사적으로 막겠군요.〉
<아니지. 손이 하나 더 있다면 세 손 들어 환영하겠지.>
데라시는 턱을 약간 앞으로 내민 채 황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 다. 열을 보는 그의 눈은 벽난로 주위에서 춤추는 열류를 볼 수 있었으므로 황제가 가만히 서 있는데도 계속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황제가 닐렀다.
<자기가 비밀을 가지고 있노라고 만천하에 알리는 바보는 없 다. 락토는 바보가 아니지. 짐에겐 그가 제발 자기 영지에 관심 을 가져 달라고 애원하는 것처럼 느껴지는군. 그 이유는 모르겠 지만. 아마 그곳에 황제 전용 덫이라도 만들어 뒀나 보지. 그렇 다면 왜 지멘은 안 되는 것일까? 간단하지. 지멘은 짐을 노리는 암살자며, 한 번이지만 천경에 그 더러운 발을 딛기까지 했지. 따라서 락토는 지멘이 발케네에 있다면 짐이 그곳으로 가지 않으 리라 생각한 거지. 하나 아이저는 다르지. 아이저 규리하를 받아 들인다면 그보다 더 확실하게 짐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방법은 없 을 것이다.>
데라시는 황제의 설명에 대해 생각했다. 앞뒤가 맞지 않는 니 름은 아니었지만 데라시는 거기에서 직관과 비약의 흔적을 발견 할 수 있었다. 데라시는 지나친 단정이 아니냐고 정중하게 니를 방법에 대해 생각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치천제가 단정적으 로 니르거나 말할 때는 그것이 정말 직관적 사유의 끝에서 나온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귀찮다는 이유에서 니르거나 말하지 않은 사유가 허다하게 있었던 것인지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음 순간 치천제는 그 어느 때보다 단정적으로 닐렀다.
<아이저 규리하와 라수의 『천경비록(天京秘錄)』은 발케네로 갔다, 데라시.>
데라시는 반론을 포기했다. 치천제는 몸을 돌려 데라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것들을 짐에게 가져오너라.〉
데라시는 치천제가 아이저 규리하에 대한 경멸 때문에 무정물을 지칭하는 대명사를 썼다고 착각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황제에게 바쳐야 하는 것은 『천경비록』과 아이저 규리하의 시체인 것이다. 데라시는 머리를 조아렸다.
〈니르신 대로 시행하겠습니다,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