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1권 : 황제 사냥꾼 [제5장] – 깨어난 불씨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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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마시는 새 1권 : 황제 사냥꾼 [제5장] – 깨어난 불씨 4


제이어 솔한이 머물고 있는 여숙은 호화스럽지 않지만 꽤 안락해 보였다. 그리고 제이어는 그곳에서 호방한 숙박객으로 통하는 것 같았다. 지멘과 아실의 모습을 본 여숙의 종업원들은 ‘또 손 님을 데려왔구나.’하는 반응을 보이며 좋아했다. 음식을 차린 방으로 안내해 준 종업원에게 수고료를 듬뿍 주는 제이어의 모습 을 본 아실은 그들이 좋아할 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종업원들이 물러가고 넓은 방에 세 사람만 남자 제이어는 함지 에서 직접 술을 퍼 아실과 지멘에게 돌렸다. 그가 자신의 사발을 들어 올리고 말했다.

“괜찮다면 아이저 규리하의 건강을 위해 잔을 들도록 합시다.” 

짧은 순간 아실은 의혹의 눈으로 제이어를 관찰했다. 아직 역 사가들은 아이저 규리하를 위해 먹을 갈지 않았으며, 반역자를 위한 건배를 제안하기엔 확실히 시기상조다. 하지만 그런 태도는 황제 사냥꾼을 자신의 거처로 초대한 대범함과 어울렸다. 받아 주지 못할 것이 없다. 지멘이 이미 잔을 들어 올렸음을 확인한 아실은 씩 웃으며 제이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반역자를 위해 건배했다.

잔을 내려놓은 제이어는 두 손을 깍지 껴서 그 위에 턱을 얹었 다. 그리고 빙글빙글 웃으며 지멘과 아실을 바라보았다. 아무 말 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신기하다는 듯이. 아실은 지멘을 한 번 바 라본 다음 입을 열었다.

“아저씨는 이곳에서 뭐 하고 계시죠? 무기를 받으러 온 것은 아닐 텐데.”

제이어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역시 대화를 담당하는 건 너로군. 건강에 해로운 망치를 들고 다니는 쪽이 아니라.”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라는 것, 또한 둘을 잘 안다는 듯한 태도가 아실의 비위를 건드렸다.

“지멘과 대화하고 싶으세요?”

“아니.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너야. 다만 그 때문에 지멘이 화를 내지 않았으면 좋겠군.”

“걱정 말고 하세요.”

아실은 지멘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지멘 또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거나 하지 않았다. 지멘은 몸 전체로 자신이 말없 는 참관인의 역할에 익숙함을 보여 주었다. 제이어는 그 상황에 흥미를 느끼면서 말했다.

“그럼 먼저 질문 하나 하지. 지금까지 모은 것이 삼백만은 넘었지?”

지멘은 제이어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실이 긴장 하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아실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뭐가 삼백만이라는 거죠?”

“황제의 세금 수송대를 습격해서 모은 돈 말이야. 금편 삼백만 닢은 될 테지.”

조금 전 그 돈에 대해 생각했던 지멘은 흥미로운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가용할 충분한 자금이 있는데도 아실은 일 년에 두 번 정례 행사처럼 세금 수송대에 대한 공격을 요구했다. 그것이 치 천제를 곯려 주는 일이 될 거라 생각했기에 지멘은 동의했다. 물 론 쉽지는 않았다. 레콘들이 지킬 때도 있었고 배로 세금을 실어 나르기도 했다. 하지만 넓은 제국에는 강이 이어져 있지 않은 곳 이 분명히 있었고 모든 세금 수송대에 레콘 경비병들이 배치될 수는 없었다. 최초의 공격을 성공시켰을 때 그들은 이미 가지고 다닐 수도 없는 막대한 금편을 획득했고, 그 이후부터는 획득한 돈을 모처에 숨겨 두었다. 지멘에게 그곳은 필요할 때마다 찾아 가서 쓸 돈을 가져오는 창고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지멘은 쌓 여 있는 금편이 얼마나 되는지 몰랐다. 

‘그게 삼백만이나 되나? 그 정도면 많은 병사를 살 수 있겠군.’ 

제이어는 계속 말했다. 

“내 계산이 조금 틀렸을지 모르겠군. 하지만 하늘누리를 침입 했으니 모을 만큼 모은 것은 분명하겠지.”

지멘은 하늘누리 침입과 그들이 모은 돈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돈으로 병사를 산다는 생각을 지멘이 한 것은 반 시간 전이었다. 그런데 제이어는 훨씬 전에 있었던 하늘누리 침입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하늘누리를 침입할 당시 지멘에게 필요했던 것은 그의 망치와 상상력뿐이었고 돈은 조금도 필요하 지 않았다. 지멘은 아실 쪽을 쳐다보았다. 아실은 가면 같은 얼 굴로 제이어를 마주 보며 말했다.

“후원자가 필요하세요? 아저씨와 검소한 생활이 관계 없는 것 같기는 하군요.”

“아, 고맙지만 괜찮아. 요즘 나에겐 후원자가 있으니까. 나는 모 인사의 특사로 이곳에 와 있어. 얼마 동안은 지내기에 문제없을 것 같아.”

아실은 눈을 가늘게 떴다.

“사람들은 당신이 철저한 야인이라고 하던데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군. 하지만 철저한 주변인은 철저 한 중앙인과 같아. 주변에 머물기 위해서는 중앙에 머물기 위한 것과 똑같은 적극성과 노력이 필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떠밀려 다니게 돼. 주변에서 중앙으로, 중앙에서 주변으로. 아이저 규리하가 그랬듯이.”

“지금 세상에서 가장 유서 깊은 가문의 수장이었던 사람을 말하는 건가요?”

“그 세상에서 가장 유서 깊다는 가문은 27년 전에 끝났다고 봐 야 해. 충의공 괄하이드 규리하가 부러진 대도를 들고 죽은 채 싸웠던 날 말이야. 하지만 제국에게, 그리고 선황께 왕이 되지 않는 왕자들은 아직 필요한 존재였지. 그래서 찾아낸 것이 충의 공의 재종손인 열다섯 살짜리 소년이었어. 아이저 규리하는 어느 날 느닷없이 중앙으로 끌려 나온 거지. 생각해 보면 27년 전 그 날 충의공의 모습은 그 이후 규리하 가문의 모습을 예언한 것이 나 다름없어. 규리하 가문은 죽은 상태로 제국을 위해 봉사했지. 그리고 27년이 지난 지금 그 봉사는 드디어 끝났어. 치천제께서 는 아이저 규리하에게 서약 지지파의 우두머리라는 관을 씌운 다 음 벼랑 끝에서 내치셨어. 아이저 규리하는 다시 주변으로 밀려 난 거야. 자신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현재 추락하 고 있어. 하지만 어쩌면 아이저는 자신에게 날개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줄지도 모르지. 어쨌든 그도 규리하니까.”

아실은 안대를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그 행동이 어떤 사람들을 당황하게 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제이어는 아실이 귀고리나 반지를 만지작거리는 것처럼 바라보았다. 아실은 안대에서 손을 뗐다.

“그래서 아저씨는 아이저 규리하와 다르다는 건가요? 다른 사람에게 등 떠밀려서 움직이지는 않았다는 거죠?”

“내가 야인이라고 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설명했을 뿐이야.”

“좋아요. 그러면 아저씨는 모 인사의 특사로 여기서 무슨 일을 하는 거죠?”

“당연한 말이겠지만 네가 모 인사의 동의를 받아 오기 전에는 내 임무에 대해 말해 줄 수 없군. 그리고 내가 너와 지멘을 만나려고 한 것은 모 인사와 상관없는 일이야.”

“그럼 우리가 가진 돈에 대한 이야기는 뭐죠?”

“그건 그냥 내 호기심을 만족시키려는 거였어.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게 아니야.”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데요?”

“황제의 심장병에 대한 이야기. 관심 있을 것 같은데.”

아실은 관심이 없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지멘이 갑자기 몸을 세 배로 부풀렸기 때문이다.

아라짓의 황제를 가리키는 수식어 중에 ‘살아 있는 모든 것들 의 주관자’라는 말이 있다. 이 거창한 말에는 황제의 드높은 권 위에 대한 칭송의 의미 외에 평등주의자를 흥분시키는 고약한 의 미가 숨어 있다. 비록 도시 연합의 나가들이 아라짓의 황제를 실 질적인 세계의 지배자로 인정하고 있지만, 아라짓의 황제가 도시 연합을 직접 통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황제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주관자라면 도시 연합의 나가들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는 의미가 된다.

이 맹랑한 중상의 근거는 모든 나가들이 스물두 살 되는 해에 치르는 심장 적출식이다. 심장을 적출한 나가는 그 이후로 불사 에 가까운 존재가 된다. 어떤 생물도 감당할 수 없는 손상을 능 히 견디며 적절한 환경과 시간이 주어지면 그 손상을 말끔히 복구시키는 것이다. 면밀하게 통제된 죽음을 한 번 경험함으로써 나가들은 그런 초인적인 능력을 획득한다. 심장병은 바로 적출된 나가의 심장을 담아 두는 병이며, 나가들은 그 심장병을 자신의 도시 중앙에 있는 심장탑에 보관한다.

치천제가 불사에 가까운 존재라는 사실은 그녀의 파멸을 원하 는 지멘과 아실에겐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실은 제이어 솔한이 자신들의 애로점을 거론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 다. 황제의 심장병이 애로 사항이 아닌 검토해 볼 만한 대상이 되 기 위해선…… 아니, 아실은 그런 희망을 감히 품을 수 없었다. 아실은 당장이라도 부리를 벌릴 것 같은 지멘에게 손을 뻗었 다. 아실의 펼친 손바닥을 본 지멘은 깃털을 눕히려 애썼다. 제 이어는 두 사람의 동작을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아실은 화를 참으며 말했다.

“아저씨, 황제의 심장병에 대해 나눌 이야기가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요.”

“이상하군. 너와 지멘의 목표는 황제를 죽이는 것인 줄 알았는데.”

아실은 지멘이 더 참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 자신 이 그랬으니까. 아실은 비명처럼 외쳤다.

“심장 파괴로는 치천제를 죽일 수 없어요!”

제이어는 아실이 폭발하기를 기다렸음이 분명하다. 그는 만족 한 표정으로 아실을 쳐다보았다. 그녀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희롱 하는 것 같은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아실은 자신을 더 제어할 수 없었다. 아실은 벌떡 일어났다.

“오래전에 검토해 봤어요! 예, 지도그라쥬의 심장탑에 있는 치천제의 심장병을 깨트리면 그를 죽일 수 있어요. 하지만 바로 그 런 이유 때문에 황제는 지도그라쥬에서 적출을 했어요. 한계선 이남의 최대 도시에서! 시련은 원시제의 요구를 받아들였고…………… 지카그라쥬와 미라그라쥬의 모든 적출 대상자들이 지도그라쥬에 모였고・・・・・・ 지도그라쥬의 적출 대상자들과 함께………황제도 적출했어요. 그중에서 그녀의 심장병을 찾을 수는 없어요!”

아실의 흥분은 지멘을 진정시켰다. 적어도 겉으로 지멘은 차분 한 표정을 유지한 채 제이어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제이어는 지 금 이 순간 위험한 자가 누군지 착각하지 않았다.

“당신 생각은 어떻습니까, 지멘?”

제이어가 말을 시켰기 때문에 지멘은 자신을 더욱 진정시켜야 했다. 지멘은 차분하게 말했다.

“내가 아는 어떤 소녀의 의견은 타당하다. 그런 방법은 없다.” 제이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런 방법은 없지요. 선황께서는 자신의 후계자에게 최고 의 안전 보장을 선물했지요.”

갑작스럽게 아실은 제이어가 무엇을 원하는지 깨달았다. 매우 단순하면서 저열한 이유, 그녀를 약 올리려는 것이다.

‘아하, 너 같은 녀석 알아. 장난감을 원해? 가소로운 것들에 일희일비하는 사람들을 비웃고 세상을 은근히 경멸하는 사람처럼 비춰지고 싶어서? 원한다면 가져. 주겠어. 누가 누굴 가지고 노 는지 보라고.’

아실은 펄쩍펄쩍 뛸 듯이 흥분하여 말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황제의 심장병이 어쨌다는 거예요?”

제이어는 만족했고, 아실도 만족하게 되었다. 제이어는 배부른 표정으로 말했다.

“황제의 심장병은 지도그라쥬에 있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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