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1권 : 황제 사냥꾼 [제5장] – 깨어난 불씨 9 (1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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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마시는 새 1권 : 황제 사냥꾼 [제5장] – 깨어난 불씨 9


대장장이 헤치카의 판매 대행인이자 세상이 평온한 것은 자신 이 세상을 가만히 놔두기 때문이라는 망상에 빠지는 것을 즐기는 소년인 돔의 관심은 언제나 최후의 대장간에 들어서는 레콘에게 쏠려 있었다. 돔이 먹이를 노리는 맹수가 답습하고 싶어할 눈초 리로 레콘들을 바라보면, ‘얍! 맡겨 둔 단검을 이제 가지러 온 거냐? 맡아 줘서 고맙다고 말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 속에 레콘 은 돈을 내놓게 된다. 그 순간은 돔에게 인생의 절정기이며, 따라서 돔은 하루에도 몇 번씩 절정을 경험한다.

그런 돔에게 지멘과 아실을 관찰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배신처 럼 느껴졌다. 무기를 이미 가지고 있는 지멘이나 레콘의 무기와 완벽히 무관한 아실에게 자신의 귀한 주의력을 할애하면서, 결국 돔은 도착적인 즐거움을 느끼기로 했다. 돔은 이미 인생을 알고 있다. 지멘과 아실이 최후의 대장간을 떠난 것을 확인하고서 헤 치카의 작업장으로 뛰어갈 때 돔의 발걸음은 경쾌했다.

“갔어요!”

“알았다. 그럼 수고해라.”

헤치카의 대답을 들은 돔은 휘파람을 부르며 다시 절정을 맞으러 달려갔다. 헤치카는 귀엽다는 표정으로 돔의 뒷모습을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 떠났다는군.”

“저도 들었습니다. 그럼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지요.”

“더 할 얘기가 없는 것 같은데. 나는 레콘의 무기만 만들어.” 

“물론이지요. 다른 종족의 무기를 만들라는 말이 아닙니다. 당 신이 지금까지 하던 일을 말하는 겁니다.”

늙은 대장장이 헤치카는 조그마한 인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 다. 인간들 사이에서 그가 살인 기사라는 기분 나쁜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을 떠올렸다.

“최후의 대장장이께서 확실히 동의했나?”

제이어 솔한은 빙긋 웃었다. 헤치카는 그 웃음이 맑다고 생각했다. 왜 그런 이름으로 불릴까. 단지 대국 상대자에게 일어난 불상사를 가지고 그렇게 부른다면 무례일 텐데.

“제가 무슨 경을 칠지 모르니 거짓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최후 의 대장장이께서 동의하신 것은 제가 여러분과 만나서 이야기를 해도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겠지요. 사실 그분께서는 여러분이 쓰시는 별철을 만들어 내실 뿐 여러분 이 어떤 무기를 만드는가는 전적으로 여러분의 재량이지 않습니 까?”

헤치카는 피로감을 느꼈다. 제이어의 말은 전부 옳았다. 그러 나 제이어의 요청은 헤치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왜 그런 것이 필요할까. 최후의 대장장이가 대신 판단해 주었으면 좋을 텐데. 헤치카는 결국 대가 세고 무서움 없는 레콘답게 말했다. 

“네 후원자는 락토 빌파인가?”

제이어는 곤혹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그것은 암살공에게 확인받으셔야 할 질문인 것 같은데……………. “

“락토 빌파인가?”

제이어는 웃음을 거두었다. 살인 기사는 헤치카의 시선을 피하 려고 주위로 눈을 돌렸다. 그러자 거대한 도구들이 눈에 들어왔 다. 레콘의 병기를 만들어 내기 위한 압도적인 크기의 집게와 망 치와 모루와 노. 제이어는 옆을 쳐다보며 말했다.

“락토 빌파라면 어쩌시겠습니까?”

“락토 빌파인가?”

제이어는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그는 헤치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제 후원자는 암살의 주인입니다.”

헤치카는 부리를 한 번 부딪쳤다. 그리고 조금 후 다시 그것을 부딪쳤다. 발케네 공이 사용하는 감투 문장은 그들 가문에 내려 오는 세 개의 저주받은 도깨비감투 이야기에 기인한다. 착용자의 모습을 감추는 도깨비감투의 효과는 널리 알려져 있지만, 빌파 가문에 내려오는 이야기 속의 도깨비감투들은 그 이상의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한다. 그 저주받은 감투들은 열을 보는 나가의 눈에서조차 착용자를 감춘다. 암살자에겐 최고의 도구라 할 수 있다.

제2차 대확장 전쟁의 다급했던 시기, 도깨비 장인들은 나가들 의 눈을 피하기 위해 그런 무서운 물건을 만들어 내었다. 그것을 받은 자들은 빌파 가문의 세 남자였고, 2차 대확장 전쟁과 천일 전쟁 동안 그들은 대단한 활약을 보였다. 하지만 천일 전쟁이 끝 난 다음 그들은 그것을 잃어버렸다고 주장했고 아라짓 제국의 황제들은 발케네의 도둑들 중 가장 우수한 도둑들인 그 남자들에게 서 그것을 회수하지 못했다. 물론 그들이 그것을 정말 잃어버렸 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발케네 공 자신이 직접 그 감투 를 이용하는지, 그렇지 않으면 무서운 시험 끝에 선택된 암살자 에게 그것을 주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그것을 소재로 한 낭 만적이면서 무서운 이야기도 많지만, 어쨌든 사람들은 그 저주받 은 감투들이 여전히 남아 있으며 때때로 사용된다고 믿는다. 발 케네 공은 암살공이며, 그래서 발케네 공은 암살의 주인이다. 헤치카는 수염볏을 쓰다듬었다.

“내가 만들어야 할 단검이 몇 개라고?”

“우선 천 자루입니다.”

“더 많을 수도 있다는 건가?”

“그럴지도 모릅니다. 어쩌시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할까? 헤치카는 알 수 없었다. 암살공이 쓰지도 못할 레콘 단검을 천 자루나 필요로 하는 까닭이 무엇일까? 그것 을 인간용 장검으로 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단검은 단지 크기를 줄여 놓은 장검이 아니다. 무게 분포가 완전히 다르다. 헤 치카는 무거운 심정으로 말했다.

“좀 생각해 보고 대답해야겠군. 내일 대답해 주면 어떻겠나.” 

제이어는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얼굴을 보며 헤치카 는 다시 혼란을 느꼈다. 어쩌자고 저렇게 맑은 표정일까. 나이도 적지 않게 먹은 사람이.

제이어는 간략한 인사를 남기고 헤치카의 작업장을 떠났다. 홀 로 남은 헤치카는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머리가 복잡했다. 헤치 카는 아실에게 세상 돌아가는 일을 제법 안다고 말했던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 그는 알 수 없었다.

헤치카는 익숙한 작업에서 마음의 위안을 얻기로 했다. 늙은 대장장이는 턱없이 익숙하기에 눈을 감고도 할 수 있는 일들을 민첩하게 해치웠다. 별철을 녹일 준비를 갖춘 헤치카는 자신의 노에 불을 붙였다. 발로 밟는 풀무를 쓰기에 불을 다루는 일은 혼자서도 할 수 있었다. 헤치카는 세심하고도 정이 깃들인 손놀 림으로 노 속에서 잠든 불씨를 깨웠다. 일어나렴. 일을 할 시간이구나.

늙은 대장장이의 부드러운 손길 속에 불꽃이 잠을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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