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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653화


“에 또오오. 그냥 여기에서 계속 죽치고 있어볼까? 그럼 혹시 하도 안 와서 이 몸을 찾으러 올지도 모르잖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동천의 성격상 얼마나 한 자리에서 계속 기다릴 수 있을지가 관건이었다. 또한 그 사이에 뜻하지 않은 일로 사건에 휘말려 위험해질지도 몰랐고 말이다. 바로 지금처럼.

“어? 저게……, 사람이네?”

이런 곳에서 사람이 보인다면 무조건 무림인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많고, 많다는 것은 일단 숨어야 한다는 뜻이렸다?”

중얼거리고는 있었지만 동천은 이미 숨어있는 상태였다. 그것도 만일에 대비하여 환영혈의 사건에서 가로챈 은형포단(隱形包緞)을 사용해서 말이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이것 참 보물이란 말야? 언제 한번 정화가 목욕하는데 미리 숨어 들어가서 몰래 훔쳐보고 싶은……, 으음! 이 몸처럼 심지가 곧은 분이 그런 저급한 생각에 몰두를 하다니. 반성하자!’

반성은커녕 그 뒤로 좀더 야한 생각을 하다가 가까스로 멈춘 동천은 서둘러 전방을 예의주시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정체불명의 무림인들이 근접해서 정신을 차렸던 것이지, 그들이 아니었다면 언제까지고 야한 생각들로 입을 ‘헤∼!’ 벌리고 있었으리라.

‘어디 보자. 한 놈, 두시기, 석 삼, 너구리, 오징어…어? 저것들이 왜?’

안쪽에서 바깥쪽을 볼 때 뿌옇긴 했지만 일반인이 아닌 이상 기척을 감지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혈살을 죽일 때 찔렀던 무기가 네 치(12Cm) 정도의 가느다란 구멍을 남겼는지라 그 부분으로 바깥쪽을 본다면 평상시와 다름없는 시야로 감시가 가능했으니 동천으로서는 더욱더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르는 누가 바위로 변한 은형포단을 보게 된다면 그 뚫린 부분은 자연적으로 움푹 파인 것처럼 비추어졌기 때문이었다.

각설하고, 사람들의 숫자를 세다말고 깜짝 놀란 동천은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설 뻔했다. 왜냐하면 자기네들끼리 잘 떠나간 것처럼 보였던 제갈연과 모용현상 일행이 의문의 사내들과 함께 자신이 숨은 곳을 스쳐지나갔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제압을 당한 듯 각기 한사람씩 어깨에 걸쳐져서 말이다.

‘저것들 짜증나네……. 아니, 위험을 무릅쓰고 살길을 마련해주었더니 고작 1각도 못 버티고 다른 놈들에게 잡히냐? 물론 진구 아저씨는 실력이 쳐지니까 예외로 둬야 하지만 말야. 음, 제갈연도 여자니까 예외로 해줄까?’

쓸데없는 생각들을 하느라 납치범(?)들이 사라진 뒤에야 정신을 차린 동천은 서둘러 은형포단을 갈무리한 뒤 조심스럽게 그들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가능한 들키지 않으려고 왼쪽 대각선 방향으로 멀찍이 떨어져서 그들을 쫓기 시작한 동천은 상대들의 눈치를 살피랴 앞쪽의 지형지물들을 살피랴 아주 정신이 하나도 없었음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정체불명의 사내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시선을 그쪽에만 집중시키다 보니까 정작 달려가는 것에는 상당히 무리가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게 또 무작정 쫓아가는 거하고 기척을 숨기며 정신이 분산된 거하고 달려가는 게 틀리구나! 역시 사람은 실전을 겪어봐야 실력이 느는 것인가?’

당연한 진리를 이제야 깨달아 놓고 마치 자신이 대단한 사람인 양 득의의 웃음을 짓던 동천은 서서히 멈추는 그들의 모습에 급히 신법을 정지시켰다.

더 이상은 가까이 갈 수 없는 관계로 활용할 수 있는 내공을 전부 청각에 집중시킨 그는 도움이 될만한 이야기가 들려오기를 바라면서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이내 두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로 멈추라고 했느냐.”

“아무래도 제갈세가의 여식이 피를 너무 많이 흘린 모양입니다. 이대로 두었다간 위험합니다.”

“뭣이? 아까는 죽을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그, 그랬는데 지혈을 한 부분이 급하게 움직이다 보니 알게 모르게 풀려서 그동안 피를 계속 흘렀던……, 컥?”

주먹으로 맞는 소리가 들리고 뒤이어 말하던 사내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거기에서 눈을 부릅뜬 동천은 머리가 지끈거려옴을 느꼈다.

‘이거 야단났구나. 어쩐지 아까 기절한 듯한 얼굴이 창백하더라니 그거 때문이었나? 으음, 안 될 것 같으면 그냥 순순히 잡힐 것이지 꼴에 제갈세가의 여식이라고 반항을 했다가 크게 한번 당한 모양이로군.’

순순히 잡히는 것은 동천이나 할 짓이었지만 그는 그것을 정석으로 여기고 있었다. 물론 크고 작은 변수들이 존재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아마도 그녀는 그 변수들 중 하나 때문에 저렇게 된 것이리라. 적어도 동천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런 바보 같은 놈! 만일 이 계집이 죽기라도 한다면 인질로서의 가치는 물론이고 오련과 철천지원수가 되는 것인데! 또한, 입막음을 위하여 남은 놈들까지 전부 죽여야 할텐데 이 일을 네가 감히 감당할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겠느냐?”

동천의 생각이 조금 길었지만 질책하는 사내의 말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이어진 상황이었다.

눈을 뜨게 되어 전방을 바라보자 무릎을 꿇은 사내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는 장면이 보였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하여주십시오!”

“시끄럽다! 응급치료를 시행하여 살리지 못한다면 너도 죽은목숨인 줄 알아라!”

매정하게 엄포를 놓은 백발의 노인은 쓰러진 제갈연에게 다가가 허리 부분의 옷자락을 늑골 중간까지 들어올린 후 상처부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멀리에서 지켜보는 중인 동천에게는 공교롭게도 그녀의 상의를 마구(?) 벗기고 있는 것으로 보여졌다.

‘윽? 저, 저 늙은이가 감히 어디에다 손을 대는 거지? 이런 시팔! 알고 봤더니 저거 색마였던 거야?’

알다시피 색마라고 하면 치를 떠는 동천인지라 그는 주먹을 불끈 쥐며 한바탕 난리를 칠 기세였다.

하지만 용케도 그는 참았다.

‘침착 하자. 지 입으로 치료한다고 했는데 설마 무슨 짓이야 하겠어? 그래, 이런 상황에서는 이 몸이라도 침착해야 제갈연과 진구 아저씨를 구할 수가 있을 거야. 침착, 또 침착…….’

섬살부대주 약산만 있었더라도 저들의 이목을 끌어서 전력을 분산시키게끔 했을 것이었다. 그 다음에는 동천이 몰래 다가가 남은 놈들을 처치한 뒤에 제갈연과 강진구를 구출하는 것이었고 말이다. 물론 그 와중에 약산이 어떻게 될지는 몰랐지만 동천은 그가 당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계획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약산으로서는 진짜 천만다행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후우! 속을 썩이는 계집이로군.”

그때 응급치료가 끝난 듯 보였다. 이마의 땀을 쓸어 내리는 노인의 행동으로 보건 데 고도의 정신력으로 집중한 탓도 있겠지만 진기요상대법을 겸한 것이 크게 작용한 듯 싶었다.

이를 멀리에서 지켜본 동천은 그가 진기요상대법을 사용했는지 아닌지 알 턱이 없었지만 일단 제갈연이 무사한 것처럼 보이자 그도 내심 한시름 놓았다.

그제야 좀더 다른 곳으로 시선을 할애할 수 있게된 동천은 정체불명의 사나이들을 찬찬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의 차림새는 어떠한 문파적 특색을 나타내는 것이 없었고 복면을 한다거나 검은색. 아니면 한가지 색으로 통일을 한다거나 하는 것도 없었다. 누구나 다 입고 있을 만한 평복들로 주류를 이루었던 것이다.

‘병장기도 검으로 통일했고, 어떠한 집단의 무리들이라는 것도 나타내지 않았고, 그냥 뜻이 맞는 자들끼리 모였다고 하기엔 오련의 자제들을 저따위로 대할 리가 없는데…….’

분명히 구린 냄새가 느껴졌는데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 이러고 있자니 이만저만 난감한 것이 아니었다.

“시간을 조금 지체했구나. 서둘러 가자!”

“예, 강 단주님!”

그들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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