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655화
“예? 동생 분이 누구를 말씀하시는……, 아! 예, 맞아요. 안전하게 먼저 당문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셨다고 그분들이 말씀하셨어요.”
“흐흐, 내 아우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었을 것이니 당분간은 안심할 수 있겠구나.”
혈랑단주는 일단 동천의 말을 믿는 눈치였다.
‘휴우! 한고비는 넘겼군. 이제 제갈연과 진구 아저씨를 어떻게 구출해내야 하는 것인지가 관건인가?’
그때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동천에게 혈랑단주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너는 무슨 속셈으로 이 위험한 곳까지 와서는 정보를 건네준 것이냐. 그냥 네 갈 길을 갔어도 되었을 터인데. 혹여, 너에게 부탁한 흑혈단원들이 무슨 대가를 약속하기라도 했던 것이냐?”
듣고 보니 동천은 아주 중요한 정보를 알려준 셈이었다. 그래서 그는 금전이라도 두둑하게 얻어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오우! 얼마를 달라고 해야 할까나? 은자 100냥? 아냐, 너무 적어. 차라리 확 뜯어먹게 금으로 100냥을 부를까? 크크큭!’
희희낙락거리며 혈랑단주를 바라본 동천은 순간 전신이 얼어붙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딱히 살기가 깃든 얼굴도 아니었는데 동천이 무언가를 요구하는 순간 당장에 목이 날아갈 것만 같은 예감이 휘몰아쳤던 것이다.
그는 재빨리 계획을 바꾸었다.
“아,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제가 의술을 조금 할 줄 아는데 아는 것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어서 누군가 든든하게 보호해주지 않는다면 바람 앞의 등불이나 마찬가지인 신세입니다! 원래는 표국 분들을 따라다니며 혹시라도 다친 분들을 치료해주고 돌아갈 때 넉넉한 치료금을 받기로 했던 것인데, 현재 돌아갈 길이 막막하여 이렇게 라도 어르신들을 도와드리면 훗날 안전한 곳으로 가실 때 저도 좀 같이 데려가 주시지 않을까 싶었던 것입니다! 절대 다른 뜻은 없사옵고 이곳에서 살아만 나가게 해주신다면 소인 그저 감지덕지인데 감히 무얼 더 바라겠습니까?”
그래도 주제를 아는 녀석이라고 생각했는지 혈랑단주가 낮게 웃었다.
“흘흘, 그렇군. 의생이라고 했으니……. 응? 그렇다면 환자를 치료할 수도 있다는 뜻이냐?”
동천은 무식한 혈랑단주의 물음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철저하게 그 본심을 감추고 희색이 만면한 얼굴로 고개를 마구 끄덕여주었다.
“예예, 그렇습니다! 자랑인 것 같지만 소인의 실력이 제 사부님보다 뛰어나서 이번 표국의 행보에 제가 같이 따라나서게 되었던 겁니다요! 헤헤!”
마침 잘되었다고 생각한 혈랑단주는 갑자기 동천에게 다가와 그의 손목을 부여잡고 진기를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혹시 무림인일지도 몰라서 방심을 유도한 뒤 내력을 조사했던 것이다.
“크윽! 아악! 아, 아파요! 악!”
부드럽게 진기를 흘려보내면 상대가 내공을 끌어올리지 않아서 속이는 방법이 있었다. 그러나 이렇듯 무자비한 진기의 투입은 아무리 상대가 대비한다고 해도 본능적으로 미약하게나마 반발 작용이 감지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혈랑단주는 상대의 몸이 좀 축나겠지만 최대한 안전을 기하자는 의미에서 후자의 방법을 선택했던 것이다.
“음, 기본 혈도의 흐름이 매끄럽다는 게 의심스럽긴 하지만 내공은 전혀 없군.”
온몸이 끊어질 듯 아파와서 바닥에 쓰러진 채 숨을 헐떡거린 동천은 이렇듯 무자비한 방법을 쓸 줄은 몰랐기에 내심 이를 갈지 않을 수 없었다.
‘으으으! 두고보자, 이 씹탱이! 나중에 가도 그냥은 안 간다! 아주 뼈저리게 후회하게 해주마!’
동천이 내공의 존재 여부를 속일 수 있었던 것은 간단했다. 자신이라도 이런 살벌한 지역에서 무림인이 아닌 의생이 돌아다닌다고 했으면 상대가 아무리 조리 있게 설명을 해줬어도 무림인인지 아닌지 확인 절차를 거쳤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까 용악의 시체를 업었을 때 침술로써 단전에다 잠시 수작을 부렸던 것이고 말이다.
그리고 사실 완전히 내공을 억제하는 방법을 사용하려면 상당히 복잡해지는 관계로 이 효과는 2각을 넘지 못했다. 나중에라도 따분해진 혈랑단주가 심심풀이로 다시 조사하게 된다면 바로 들킬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여튼 간에 동천은 한참을 고통스러워하다가 겨우 무릎을 딛고 일어나며 말했다.
“그, 그건 의술을 익히면서 매일 아침마다 가벼운 삼재기공을 연마하느라 그럴 겁니다. 비록 익힌 지는 몇 년 안 되었지만……. 으으!”
“아하? 그렇군. 아직 어린 놈인데다가 하찮은 것이지만 운기토납법을 익히고 있었으니 진기의 흐름이 매끄러울 수도 있겠어.”
그제야 모든 의문이 풀렸는지 그는 대원들에게 미리 나갈 준비를 하라고 명령한 뒤 표정을 지우고는 동천에게 따라오라고 명했다.
덕분에 쉴 틈도 안 준다고 내심 씨부렁거린 동천은 대의(大義)를 위해서 참기로 하고 묵묵히 그를 따라갔다.
처음에 그는 이놈의 영감탱이가 왜 동공의 좌측 끝으로 가는 것인지 의아해했으나 알고 보니 그쪽 끝에 성인 두어 명이 지나갈 정도의 넓이로 꺾이는 부분이 있었다.
이곳에만 유일하게 횃불을 놓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마도 적들이 모르게 하려는 의도가 다분하다고 볼 수 있으리라.
“우와, 이런 공간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신기한 듯 주위를 둘러보는 동천의 모습에 혈랑단주가 음침하게 웃고는 말했다.
“감옥으로 쓰이는 곳이다. 저기 바로 앞에 철창을 보아라.”
통로는 막혀 있었고 그 벽 쪽에는 작은 횃불 1개와 철창들이 박혀 있는 감방이 세 군데 정도가 보였다. 혈랑단주의 등장에 감방을 지키고 있던 20대 후반의 사내가 앉아 있던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인사를 올렸다.
그러나 혈랑단주는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동천에게 계속 말했다.
“저기 마지막 감방 안에는 제갈세가의 여식이 크게 다친 상태이다.”
동천은 크게 놀란 척을 했다.
“헉? 제, 제갈세가의 여식이라면 그…….”
“네놈이 제법 무림세가에 관하여 아는 모양이로구나. 하긴, 표국과 연계될 정도라면 그럴 만도 하지. 하여간에 그렇다. 평소였다면 네놈이 평생을 가더라도 가까이서 볼 수 없을 정도의 귀한 집 자식이지. 그리고 그 계집을 살려내지 못한다면 너는 쓸모가 없어지는 것이니 죽는 것이고.”
“예에? 단주 어르신!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요? 저는, 저는 그저.”
“갈! 잔말 말고 들어가서 치료해라!”
벌벌 떨며 고개를 끄덕인 동천은
‘젠장, 떠는 척하기도 힘드네!’
라고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제갈연이 감금된 철창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허울뿐인 간수였지만 지키고 있던 사내가 자물쇠 형식으로 되어 있는 감방 문을 열어주었다.
안으로 들어가서 살펴보자 이곳은 인위적으로 판 흔적이 역력했다. 그러나 동천은 곧 신경을 끊었다. 쓸데없는 곳에 시선을 줬다간 의심을 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서둘러 허겁지겁 제갈연에게 다가갔다.
감방의 안쪽에는 불을 밝힐 그 어느 것도 들여놓지 않는 게 원칙이었지만 언제라도 환자의 상태를 살펴봐야 했고 그만큼 중요한 인물이었기에 특별히 침대 머리맡에다 등잔대를 세워두었다.
그 때문인지 그녀의 머리맡에서 비추는 연한 불빛은 창백하지만 요요(妖妖)로워 보이는 제갈연의 얼굴을 더욱더 고혹적이게 만드는 것만 같았다.
‘와아, 이렇게 보니까 참으로 대단하구나. 요물이 따로 없어!’
그때 싸늘한 혈랑단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을 넋 놓고 있는 것이냐! 시간이 없으니 어서 진맥을 시작해라!”
“예? 예에! 예!”
동천은 제갈연의 상태를 대충 보아도 목숨이 경각에 달한 상태까지는 아니었는데 웬 시간 타령을 하는 것인지 의아해했다.
그러나 혈랑단주는 어서 이 의생 놈의 결과를 본 뒤에 자신의 동생을 찾으러 갈 계획이었다.
원래는 일을 마치고 돌아온 길이라 대원들을 쉬게 해야 했지만 그깟 놈들보다는 당연히 동생의 안부가 중요했으므로 그들을 동원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미 나갈 준비들을 시켰고 말이다.
스윽.
그녀를 덮고 있는 얇은 이불을 걷어내자 피에 절어 있는 상의가 보였다.
눈살을 찌푸린 동천은 조심스럽게 상의를 벗긴 뒤 뒤쪽에서 보고 있는 혈랑단주를 의식해서는 속옷을 가슴의 바로 아래까지 밀어 올렸다.
‘흥! 늙은 색마에게 좋은 장면을 보여줄 수는 없지! 아암!’
동천은 자신의 행동에 뿌듯함을 느끼며 제법 잘 처리한 상처 부위의 붕대를 풀었다. 그리곤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
“으음! 관통된 거예요?”
“그렇다.”
‘그렇다? 젠장, 뚫린 입이라고 시원시원하게 대답하는군.’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이것은 단순히 외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부 장기가 손상되었을 확률이 8할 이상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동천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니, 이렇게 심각한 상태인데 이걸 지금 새파란 어린 의생에게 고치라고 데려온 거였어? 참나! 이 늙은이 혹시 미친 거 아냐?’
물론 동천이라면 살릴 수는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실력이 남들보다 조금 뛰어난 어린 의생으로 알려진 상태였다. 제갈연의 상처를 벌리고 그 안의 손상된 장기부터 꿰매야 하는 난이도 높은 기술은 결코 지금의 동천이 시행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살릴 수 있겠느냐, 없겠느냐.”
살기가 은근히 묻어나는 혈랑단주의 목소리……. 그제야 동천은 깨닫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자는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고 동천을 데려온 것이었다. 그나마 기대를 했다면 며칠만이라도 더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는지 정도?
‘에효∼! 이 영감 참 가지가지 하네? 이봐 영감. 심심해? 까까 사줘?’
말을 말아야겠다고 생각한 동천은 일단 어떻게 대답해줘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이, 이분을 살릴 수는 없겠지만 죽음의 시기를 늦출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예, 그리고 열흘 안에 뛰어난 의원을 모셔오시면 회생의 가능성도 있습니다.”
뜻밖의 대답이었던지 혈랑단주가 동천을 노려보았다. 마치 진위를 가리려는 듯한 매서운 눈빛이었다.
“그 말에 거짓이 없으렷다?”
동천은 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제 목을 걸고 감히 말씀을 드릴 수 이, 있습니다.”
잠시 더 노려본 혈랑단주는 결심을 했는지 말했다.
“좋다. 내 어딜 좀 다녀올 때까지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준다면 너를 살려주는 것은 물론이고 상부에 알려 큰 포상을 내려주겠다. 할 수 있겠지?”
“저기, 자신은 있지만 너무 시간이 촉박하게 돌아오시면 그다지 느끼실 수 없을 겁니다. 그 점은 감안해주십시오.”
혈랑단주도 막 나가는 인간은 아니었기에 충분히 배려해주었다.
“그 정도는 어렵지 않다. 내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가능한 너를 도우라고 일러둘 터이니 시킬 일이 있거든 어려워 말고 시키거라.”
“아? 감사합니다!”
“그 말은 돌아와서 받지.”
“예에, 단주님.”
천천히 들어왔던 것과는 달리 나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미 마음은 동생을 찾으러 가고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잠시 떠나간 혈랑단주를 씹어대던 동천도 곧 정신을 집중하고 제갈연의 치료에 들어갔다.
‘상처가 너무 깊다. 침술을 먼저 놓고 귀의흡수신공으로 치료를 해야 좋은데 그렇게 할까? 아니야. 그러자면 허벅지고 어디고 남들에게 보여주기 힘든 곳들까지 들춰놔야 하는데, 뒤쪽에서 훔쳐보는 저 새끼 때문에 그럴 수가 없어. 에그, 제갈연 너는 이 몸이 아니었으면 정신적으로나마 순결을 잃었을 것이 분명하니 이 몸에게 정말 감사해야 한다구. 알았어?’
한 손으로는 제갈연의 손목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상처 부위에 부드럽게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손목에 4할, 상처 부위에 6할의 내공을 밀어 넣었다.
원을 그리듯 파장을 퍼뜨리며 진기를 유도하자 순식간에 내공이 썰물처럼 빠지기 시작했다.
당황한 동천은 도로 흡수하기 시작했고 이내 상처 부위의 손을 떼는 수밖에 없었다.
동천의 진기가 직접적인 부위에 파고들자 마치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상처 부위에 스며들었던 것이다.
‘으아! 큰일날 뻔했다. 이건 마치 몸이 알아서 이로운 기운을 빨아들이는 현상이지 않은가.’
멀리에서 돌아가는 것과 바로 접촉하는 것의 차이였던지 제갈연의 몸이 본능적으로 상처 부위의 기운을 흡수했던 것이었다. 애초에 흘려보내는 기운이어서 그것이 더욱 용이했던 것이고 말이다.
‘쩝, 하는 수 없군. 시간이 좀더 걸리더라도 안전하게 치료를 해야겠다.’
동천의 내공만 높았어도 상처 부위가 요구하는 분량을 감당해낼 수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가뜩이나 또 나눈 내공이어서 그것이 불가능했다.
하는 수 없이 동천은 손목을 통해서만 진기를 흘려보냈고, 그것으로 치료를 감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때 의외의 방해꾼이 나타났다.
“이봐, 의생. 언제까지 진맥만 하고 있을 거지? 너 이놈 혹시 돌팔이 아냐?”
‘컥? 저, 저런 무식한 새끼를 봤나!’
아무것도 모르는 간수로서는 충분히 오해를 할 만도 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진맥과 다를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는 수 없어진 동천은 진기를 거두고 말했다.
“신중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지금부터 시작할 테니까 이제 관심을 끊어주시고요, 저는 누군가 제 시술을 지켜보게 되면 꼭 실수를 했는지라 아무도 제 시술을 지켜보아서는 안 돼요. 설마, 일이 잘못되어 혈랑단주님께 벌을 받고 싶지는 않겠죠?”
혈랑단주의 위세를 들먹이자 간수도 한 수 접는 수밖에 없었다.
“쳇! 깐깐한 놈이군. 돌아서 있을 터이니 서둘러 일을 끝마치거라.”
“예, 노력은 할게요.”
동천은 듣기에 따라서 애매할 수 있는 대답을 해준 뒤 일단 다른 이에게 보여도 상관없는 부위에만 집중적으로 침을 놓았다.
그는 제갈연의 엄지발가락에 침을 놓을 때 미녀의 발에서도 과연 냄새가 날까 맡아보고 싶었지만 괜히 변태가 되는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내심 자꾸 아쉬움이 남는 동천. 그러나 킁킁거리다가 걸리기라도 하는 날이면 이제까지의 모든 공이 수포로 돌아갔기에 동천은 이를 악물며 참고 또 참았다. 역시 이상한 쪽으로 집념이 강한 동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