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1권 : 황제 사냥꾼 [제1장] – 잠든 불씨 2
아라짓 제국의 수도이자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주관자인 황제 가 있는 하늘누리의 날씨는 언제나 화창하다. 간혹 구름이 끼거 나 약간의 비가 올 때는 있지만 견디기 힘들 정도로 날씨가 불쾌 한 경우는 절대로 없다. 날씨가 수도 신민들을 우울하게 할 정도 로 고약해지면 하늘누리는 다른 날씨를 찾아 이동해 버리기 때문 이다. 그래서 제국의 수도에는 유사 이래 어떤 도시에도 붙은 적 이 없었던, 오로지 제국 수도 하늘누리에만 허용된 이름이 붙어있다.
지금, 한 인간 사내가 바라보는 하늘에 제국의 이동 수도(移動首都)하늘누리는 장엄한 모습으로 떠 있다.
하늘누리를 바라보던 사나이가 검을 뽑아 들었다. 칼집을 빠져 나온 칼날이 살과 피로 이루어진 또 다른 칼집을 찾듯 서늘한 빛 을 뿌렸다. 잠시 칼날을 들여다보던 남자는 그것을 높이 들어 올 렸다.
머물렀다가, 황제의 대장군 엘시 에더리는 단호하게 칼을 내렸다.
“앞으로.”
거대한 함성과 함께 나팔이 울렸다.
둔한 나팔 소리는 고막이 아닌 척추를 울리는 듯하다. 온몸을 흔든 다음 사라진 후에도 여운으로 피를 끓게 만드는 진군의 신 호. 바람을 거슬러 고개를 쳐드는 깃봉과 어지러이 나부끼는 깃 발들. 전단 전개를 알리는 교위들의 짧은 외침과 복창하는 부위 들의 훨씬 다채로운 고함. 흥분한 부위가 망각한 것들을 빈틈없 이 지적하는 수전사들. 입술 끝을 가볍게 들어 올리는 상전사들. 흥분을 남용하는 하전사들.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일사불란하게 뒤를 잇는다. 뒤섞인 소음들이 충일한 노래를 만들 때, 전투라는 이름의 광시곡은 화려한 도입부를 연주한다.
성벽을 이백 미터쯤 앞둔 곳에서 진형이 구축되었다. 그리고 도입부가 잦아들었다.
발이 멈추고 칼은 다시 당겨 쥐어졌다. 갑자기 찾아온 침묵을 깨트리기 싫은 듯 신호는 손짓에 의해, 그리고 그것을 인계한 깃 발에 의해 전달되었다. 잠시 후 거대한 다섯 형체가 각자 백미터 정도의 간격을 두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장엄한 도입부에 이은 잔혹한 전개부의 시작을 알릴 자들로, 사람들이 오뢰사수(五 射手)라 부르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레콘이었다. 그리고 기괴한 물건들을 들고 있었 다. 인간이나 나가의 눈에는 병기라기보다는 건설 장비 같은 인 상을 주는 그 물건은 레콘을 위해 제작된 활이었다. 기다란 금속 판들과 정교하게 다듬어진 수십 개의 금속 조각들이 맞물려 탄생 한 철궁은 길이만 3미터에 달했고 양쪽 고자를 잇는 시위는 육중 한 쇠사슬이었다. 레콘들은 각자 2미터가 훨씬 넘는 철시(鐵矢) 를 꺼내어 절피에 먹였다. 보통의 활이라면 실로 감아 두는 부분 이지만 그 활들의 절피는 주조한 쇳덩이였다.
레콘들이 쇠사슬 시위를 잡아당기자 활을 이루는 부품들의 연 결부에서 불꽃과 굉음이 울려 퍼지고 쇠사슬이 비명을 내질렀다. 황제를 위해 평생 한 번밖에 택할 수 없는 무기로 활을 선택한 그들 오뢰사수들의 눈에는 한 점 흔들림도 없었다. 군단 앞에 우 뚝 솟은 그들의 모습은 번개를 머금은 거대한 구름송이들처럼 보 였다.
신호는 필요 없었다. 오뢰사수는 오직 야수적인 전투 감각에 의해 동시에 시위를 놓았다.
폭발음에 가까운 소리를 내며 철시들이 해방되었다. 무수히 비 산하는 불티들 속에서 튀어오른 철시들은 휘어짐을 찾기 어려운 직선 궤도를 그리며 날아갔다. 이윽고 돌을 깎는 소리와 함께 성 벽이 달걀 껍데기처럼 박살 났다. 흙먼지와 벽돌, 돌조각들로 이 루어진 거대한 꽃 다섯 송이가 성벽 위에 피어났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잘 알고 있던 사람들의 눈에도 그것은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돌격!”
함성과 함께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두 번째 철시를 잡아 당기는 오뢰사수 사이로 사만 명의 병사들이 일제히 뛰쳐나갔다. 규리하 전쟁 스무엿새째, 규리하의 반란자들이 예상했던 것보 다 훨씬 빠른 시점에, 황제의 대장군 엘시 에더리와 제국군은 규 리하 성에 대한 공성전을 개시했다.
철시의 이차 사격은 모두 중앙 성문에 집중되었다. 성문은 단 숨에 같은 부피의 잡동사니 비슷하게 바뀌었다. 오뢰사수는 조준 을 높였다. 먼지가 사그라지고 있던 성벽은 다시 다섯 줄기의 벼 락에 난타당했다. 성벽 위에서는 규리하의 용맹한 병사들이 모든 종류의 방어 기재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열다섯 발의 철시는 그 상당수를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성벽이 무너지고 먼지가 자욱이 피어오르는 상황에서는 제대로 대처하기 어려웠다. 수비군은 애 처롭기까지 한 함성을 지르며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것이나 먼지 속으로 집어던지고 쏘아 날렸다. 하지만 철시의 소나기는 끊이지 않았다. 성벽은 소름 끼치는 진동을 되풀이했고 곳곳에서 벽돌이 허물어지며 수비군을 덮쳤다.
오뢰사수의 철시는 투석기에 사용되는 탄환과 다르다. 도무지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어쨌든 화살에 속하는 철시는 강력한 힘을 일점에 집중시킨다. 당연히 탄환보다 관통력이 월등할 수밖에 없 다. 그 때문에 성벽 서편에서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 일어났다.
어떤 놀라운 우연이 빚어낸 기적처럼 세 발의 철시가 같은 부 분에 날아들었다. 성벽 서쪽 모퉁이의 그 부분은 전체 구조에서 상당한 하중을 받는 부분이었다. 가장 먼저 날아든 철시는 성벽이 나무판자인 양 꿰뚫고 들어가 박혀 버렸다. 충격으로 금이 간 돌 위로 두 번째와 세 번째 시가 날아들자 성벽은 무거운 신음 을 토하며 무너졌다. 마치 핏줄기처럼 석재와 목재들이 솟구친 직 후 그곳에는 몇 사람이 지나다닐 만한 틈이 벌어졌다. 그 아래에 는 무너진 돌더미가 해자 위에 다리 같은 것을 형성했다.
성문을 향해 진격하던 제국군의 일부에서 경험 많은 교위가 즉 각 판단을 내렸다. 그의 지휘를 받던 병사들은 사다리와 밧줄 등 을 팽개치고 새로 만들어진 틈으로 돌격했다. 그들은 운이 좋은 자들이었다. 적절한 위치에 있지 못해서 사다리를 이용해야 했던 제국병들은 규리하의 병사들이 전쟁의 오랜 예법에 따라 정성 들 여 준비한 환영 선물을 받았다.
투석과 투창, 노궁, 그리고 끓는 기름이 소나기처럼 퍼부어졌 다. 쏟아지는 기름은 닿는 순간 사람을 튀겨 버렸다. 그리고 뒤 따라 떨어진 횃불이 기름을 폭발시켰다. 불의 폭풍이 제국군을 휘감자 제국병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해자에 몸을 던졌다.
무너진 중앙 성문과 서편의 틈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병사들도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다. 규리하의 거성은 이중 구조였고 수비군 은 내성벽 위에도 상당히 많은 병력을 배치해 두었다. 그들이 쏟 아 붓는 화살과 돌들이 침입자의 머리 위로 우박처럼 쏟아졌다. 제국병들은 방패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두 번째 성문을 돌파 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화염과 연기, 비명과 유혈, 돌과 화살과 창과 방패들이 세상의 참된 주인처럼 보였고 어디에도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부딪치 는 창검, 비등점을 넘어 버린 듯한 의식의 불안정하고 급격한 부침. 죽음과 삶이 모호해지는 그 순간,병사들은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불분명한 처지에 빠져 들었다.
그러나 성에 기대어 싸워야 하는 수비군의 입장에서 침입을 허용한 것은 이미 패배로 가는 길을 한 발짝 내디딘 셈이었다.
전통을 소모한 오뢰사수들이 엘시를 흘깃 돌아보았다. 그들 다 섯 명은 이십이금군에 속한 자들이며 엘시의 지휘권에 포함된 자 들은 아니었다. 따라서 그들이 물러나기 전 엘시를 쳐다본 것은 황제의 대장군에 대한 예의 이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의 시 선에는 조금 다른 것도 섞여 있었다. 성벽 앞의 해자에는 레콘의 무릎을 적실 수 있는 물이 흘렀고 그것을 넘는 것은 레콘에게 커 다란 심리적 타격을 줄 수도 있다. 그래서 그들의 뻣뻣한 태도에 는 대장군이 혹 돌격을 요구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그런 요구 를 받으면 황제의 금군은 황제의 명령만 받는다고 강변하려는 결 의도 조금 섞여 있었다.
물론 엘시에겐 그런 악덕이 없었다. 엘시는 부드럽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금군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고 싶지만 전 투 중이라 어렵군요. 승리 후에 찾아뵙고 제대로 인사드리겠습니 다. 그리고 철시는 제가 모두 수거하겠습니다.”
레콘의 화법은 상대가 누구든 크게 바뀌지 않았다.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군, 칼리도 백. 그럼 물러가겠다. 좋은 싸움이 되길.”
오뢰사수들은 가볍게 목례한 다음 고개를 들어 하늘누리를 올 려다보았다. 엘시 또한 부지불식간에 그들의 시선을 좇았다. 가 시적인 변화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조금 후, 오뢰사수들은 허공을 밟으며 하늘로 오르기 시작했다. 하늘누리는 모든 방문객에게 각자의 계단을 제공한다. 그리고 그 계단은 밤의 다섯째 딸과 마찬가지로 그 자신만 볼 수 있다. 원한다면 어떤 계단을 상상해도 좋다. 나무계단이든 돌계단이든, 아니면 자신의 괴벽을 만족시키기 위해 사다리나 미끄럼틀을 상 상해도 좋다. 상상하는 순간 계단은 나타나며 오직 상상한 사람 자신에게만 작용한다. 그것은 물론 하늘누리가 가진 놀라운 편리 함이지만 동시에 취약점이라 할 수도 있는데,하늘누리에 대한 가장 최근의 도전에서 그 점은 여실히 증명되었다. 허공을 밟으 며 걸어 올라가는 레콘들을 보며 엘시는 어떤 기시감 같은 것을 느꼈다. 그가 직접 본 사실은 아니다. 하지만 전해 들은 이야기 는 충격적이었다.
몇 되지 않는 황제의 적 중 매일같이 명성을 드높이고 있는 담 대한 도전자는 하늘누리에서 1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참으로 기발한 계단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도전자가 상상한 계단은 중간 지점까지 상승하다가 그 이후부터는 고공에서 하늘누리로 내려 오는’ 계단이었다. 건축학보다는 지리학의 대상이 되어야 할 그 런 어마어마한 구조물을 상상하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지 만 도전자는 필사적으로 상상했고 마침내 바라던 계단이 도전자 앞에 나타났다. 레콘이었던 도전자는 밤을 틈타 그 계단을 달렸 다. 10킬로미터 저편에서, 그리고 중간 지점부터는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침입자를, 하늘누리의 감시자들이 발견하는 것은 불가 능했다. 결국 도전자는 하늘누리에 무단침입하는 데 성공했다. 다행히도 도전자는 그 이상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도망쳤지 만 그 후로 하늘누리의 감시자들은 익숙한 방향인 아래뿐만 아니 라 위쪽도 경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규리하 성에 대한 공격이 다급하게 이루어진 이유 또한 그 소문이 퍼지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엘시는 규리하의 필사적인 병사들이 제각기 그런 계단을 통해 하늘누리로 밀고 내려오는’ 모습을 상상하기도 싫었다.
오뢰사수들은 그런 엄청난 계단을 상상할 필요는 없었고, 그래 서 동작만 보고도 단순한 계단을 상상했음을 알 수 있는 모습으 로 걸어 올라갔다. 계단에서 보는 풍경은 훌륭한 것이겠지만 그 들은 한번도 전쟁터를 뒤돌아보지 않았다. 선의로 해석한다면 자 신들의 이바지함을 강조해 보이지 않는 겸손한 태도일 것이다. 그리고 악의로 해석한다면 인간이나 나가들의 전투는, 그것이 설 령 몇 만 명의 사활이 걸린 거대한 것이라도 관심거리가 되지 않 는다는 레콘의 오만함일 수도 있다. 엘시 에더리는 둘 중 어느 것이 사실에 부합하는지를 놓고 고민하지 않았다. 대신 성벽의 전투를 바라보며 예비대의 투입 시기를 가늠했다.
세 시간 후, 제국군은 규리하 성을 완전 점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