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1권 : 황제 사냥꾼 [제2장] – 돌과 바람 5
규리하 성의 방으로 돌아온 정우는 잠깐 동안 어디에도 앉지 않은 채 왔다 갔다 했다. 흥분이 채 가시지 않아서 앉기가 힘들 었다.
하늘누리에서 내려오기 전 정우는 용기를 내어 어떤 제안을 했 고 엘시는 약간 주저한 다음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정우는 올라갈 때와 반대 방향으로 엘시의 발 위에 섰다. 뒤로 뻗은 두 손을 엘시에게 맡긴 채 정우는 허공을 똑바로 응시하며 하늘을 날아 내려왔다.
정우는 그 느낌이 마음에 들었다. 딱정벌레를 탈 때와 전혀 다 른 느낌이었다. 인간 기준으로 보통에 조금 못 미치는 체구를 가 진 정우는 도깨비들 기준으로는 굉장히 작은 축에 속했고, 그런 체구로는 즈믄누리의 거대한 딱정벌레들을 완전히 통제하기 힘들 었다. 물론 인간들 중에서 정우만큼 딱정벌레를 잘 타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하지만 즈믄누리에서 그녀는 그저 그런 수준의 딱정벌레 기수였다. 정우는 그제야 딱정벌레를 탈 때는 그것을 통 제하느라 비행 자체에 완전히 몰입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엘시가 상상한 계단은 딱정벌레와 달리 직선으로밖에 움직 이지 못했지만, 정우는 자신이 그보다 더 멋지게 움직이는 계단 을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우는 그 가능성에 흥분했다.
‘계단을 상상하는 법을 배워야겠어. 난 어쩌면 하늘누리에서 가장 복잡한 계단을 상상할 수 있을지도 몰라.’
정우는 자신의 생각이 허황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비행에 대해 잘 모르는 킴들과 달리 그녀는 이미 비행에 익숙했다. 자신의 계 획을 좀 더 검토하기 위해 정우는 의자에 앉았다.
정우의 생각 속에서 차례차례 떠오르는 계단들은 그림으로 표 현하기조차 어려운 것이었다. 거기엔 세상에서 가장 황당한 건물 에 익숙하고 자유로이 하늘을 날아다녔던 사람이 떠올릴 수 있는 개념이 덧붙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즐거운 상상에 푹 빠져 있던 정우가 현실을 인지한 것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을 때였다. 정우는 약간 어리둥절한 기분 속에서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제 국군 부위를 바라보았다. 틸러 달비 부위는 경례하고 말했다.
“규리하 공 아가씨, 편지를 받으러 왔습니다.”
정우는 입을 틀어막았다. 바우 성주에게 보낼 편지를 쓰는 것 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정우는 틸러에게 몇 번이나 사과 한 다음 한 시간쯤 후에 다시 와 달라고 부탁했다. 틸러가 나가 자 그녀는 자신의 머리를 한 번 쥐어박고는 서둘러 지필묵을 챙 겼다.
먹을 갈자 송연묵의 향긋한 냄새가 퍼져 나갔다. 제국 대부분 의 지역에서는 제조가 쉬운 유연묵을 쓰지만 즈믄누리에서는 나가들의 못마땅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송연묵을 제조해 쓴다. 다행 히도 비늘 덮인 수목 애호가들에겐 위로가 될 만한 사실이 있었 다. 도깨비들은 효율적으로 그을음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소나무 를 남벌하지 않는다.
먹을 다 갈자 정우는 붓을 풀었다. 그녀는 도깨비지 위에 글을 쓰면서 어린애처럼 자신이 쓰는 글을 읽었다.
“존경하는 바우 성주님, 좋은 꿈 꾸셨는지요. 건강하시죠?”
정우는 킥 웃었다. 죽은 지 오래된 바우 성주에게 건강하냐고 묻는 것은 당연히 농담이다. 정우는 즐거운 기분으로 붓을 놀렸다.
“온갖 일을 다 겪었지만, 심려해 주시는 덕분에 저는 잘 있습 니다. 지금 저는 제국군에게 붙잡힌 포로의 처지이긴 합니다만 규리하 성의 제 방에서 자유롭게 이 서신을 쓰고 있습니다. 감옥 이라는 곳에 있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그 감옥이라는 것을 구경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조금은 했어요. 진짜 감옥에 갇 혀 있는 사람들이 제 말을 들으면 화를 내겠지요.
제국군이 성을 점령하기 직전 아버님께서는 이이타와 몇몇 가 신들과 함께 어딘가로 도주하셨습니다. 시카트는 도주하지 못했 습니다. 놀라지 마세요, 성주님. 시카트는 저를 죽이려고 남았다 가 제국군에게 붙잡혔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우시죠? 저도 이해를 못했지만 몇몇 분들이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분들의 말에 의하면 저는 아무래도 아버님께 해가 되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아버님의 친구 분들은 아버님의 땅이 다른 사람에게 주어지면 화를 낼 거랍니다. 하지만 아버님의 땅이 아버님의 장녀인 제게 주어지면 그 친구 분들은 화를 낼 명분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버 님은 황제 폐하에 대한 분노를 공유해 줄 사람이 필요하답니다.
그래서 아버님은 아버님의 땅이 제게 주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 십니다. 또한 제가 죽을 경우 아버지는 그것을 제국군의 소행으 로 위장하여 제국군에 대한 악평이 퍼지게 할 수도 있다고 합니 다. 그럴 경우에도 아버지의 친구 분들은 화를 내겠지요. 제가 이해하는 상황은 대충 이렇습니다. 그 때문에 저는 아버지의 지 지자들이 가할지도 모르는 공격을 피해 제국군의 보호를 받는, 좀 우스꽝스러운 처지에 처해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님은 당신의 친구들뿐만 아니라 당신의 딸 또한 화 나게 만드셨어요. 바우 성주님, 저는 정말 화가 나요. 저는 아버 님의 땅을 원한 적이 없어요. 제가 아버님의 땅을 계승하는 것이 두려우셨다면, 아버님은 왜 저를 이곳으로 불러들이신 거죠? 애 초에 저를 원하지 않으셔서 즈믄누리로 보내신 거라면 끝까지 즈 믄누리에서 살게끔 내버려둬도 될 텐데요. 혹 아버님은 필요할 때 저를 간단히 제거하기 위해 이곳으로 저를…………..”
정우는 먹물이 번지는 것을 보았다. 그 먹물을 번지게 하는 것 은 눈물이었다. 정우는 붓을 벼루에 내려놓고 눈 주위를 만져 보 았다. 손가락이 금세 젖어 들었다.
정우는 오른손 손등으로 눈 주위를 슥슥 닦았다. 하지만 눈앞 은 다시 부옇게 바뀌었다. 정우는 왼손으로 눈을 닦았다. 눈물은 계속 흘러나왔다. 그녀는 양손의 손바닥을 차례로 들어 눈을 닦 았다. 두 손이 눈물로 흠뻑 젖었다. 목에서 오리 우는 소리 같은 것이 났다. 그녀는 두 손을 주먹 쥐어 눈을 힘껏 눌렀다. 눈이 아팠다.
정우는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얹었다. 두 팔이 힘없이 좌우로 떨어졌다. 젖은 볼이 차갑게 느껴졌다. 쉼 없이 솟아 나오는 눈물은 정우의 양쪽 귀를 타고 흘렀다. 그녀는 입을 열었다.
“하하하.”
정우는 오른손으로 비녀를 뽑고 머리를 흔들었다. 출렁 하며 일어났던 머리카락들이 등받이 뒤쪽으로 너울치며 흘러내렸다. 정우는 두 손으로 비녀 양쪽을 붙잡고 얼굴 앞으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것으로 두 눈을 가렸다. 콧등 위에 비녀를 올려놓은 채 정우는 두 손을 놓았다.
볼을 타고 흘러 들어온 빛이 비녀 표면의 복잡한 문양을 문질 러 광을 내었다. 정우는 고개를 미세하게 좌우로 까딱거렸다. 흔 들리는 비녀가 눈꺼풀을 부드럽게 두드렸다. 그 서늘한 느낌이 좋았다.
긴 시간 그렇게 앉아 있던 정우가 고개를 숙였다.
비녀는 코를 타고 흘러내려 턱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기다리던 손으로 비녀를 받은 정우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문을 두드린 다음 누군가가 오면 즈믄누리로 가는 가장 빠른 수단을 준비하라고 외칠 작정이었다. 하지만 문 앞에서 정우는 걸음을 멈췄다. 엉망으로 젖은 눈가 와 두 볼을 소매로 쓱 훔치고는 분한 표정으로 문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요청을 들어줄 리 없다.
손끝이 아팠다. 손을 들어 보고서야 자신이 손가락이 하얘지도 록 비녀를 꽉 움켜쥐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정우는 그것을 가슴 에 붙였다. 그러자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허벅지까지 미치는 긴 머리채가 거추장스러웠다. 정우는 그것 을 두 손으로 쥐어 올려 목 주위에 감았다. 그리고 보편 상식의 눈으로 보기엔 무의미해 보이는 일련의 행동을 취했다. 행동을 끝낸 정우는 확신을 가지고 손잡이를 붙잡았다. 심호흡을 하고 문을 힘있게 잡아당겼다.
그곳에 있어야 하는 복도 대신 그녀가 바라던 것이 나타났다. 정우는 짧은 비명 같은 탄성을 질렀다. 문을 꼭 붙잡은 채 좌 우를 돌아보았다. 방 안에는 물론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씩 웃 으며 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문을 닫았다.
방은 고요함에 잠겨 들었다.
조금 후 문이 다시 열렸다.
안으로 들어선 것은 제국군의 부위 틸러 달비였다. 틸러는 들 어서자마자 절도 있게 경례를 했다. 하지만 경례의 끝마무리는 좀 어정쩡했는데, 자신의 경례를 받아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틸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금 전 정우가 했던 행동을 되풀이했다. 좌우를 둘러본 것이다. 그러나 틸 러는 아무도 발견할 수 없었다.
틸러는 방 안으로 성큼 들어와 작게 말했다.
“규리하 공 아가씨?”
대답이 없었다. 틸러는 방 안을 돌아다니며 정우를 찾았다. 창 문을 내다보고 부속실을 열어 보았지만 어디에서도 정우를 찾을 수 없었다. 다시 방 가운데로 돌아온 틸러는 덜컥 겁을 집어먹었 다. 그리고 그런 자신이 의아했다. 틸러는 자신이 왜 겁을 집어 먹었는지 생각했다. 대답은 단순했다. 틸러는 들어왔던 문을 부 술 듯한 기세로 뛰쳐나갔다.
제국군은 발칵 뒤집어졌다. 성을 점령하고 있던 가시나무 군단 의 군단장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에게까지 그 소식이 전달되는 데 채 10분도 소요되지 않았다는 것은 가시나무 군단의 의사 전달 체계가 효율적이라는 증거일 수도 있고 그 소식의 중대함을 나타 내는 증거일 수도 있다. 마지오 상장군은 즉각 규리하 성의 모든 출입구를 봉쇄시키고 수색을 명령했다. 그 즈음 규리하 성의 출 입은 이미 엄격하게 통제되고 있었으므로 정우가 밖으로 나갔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마지오 상장군은 정우가 반드시 성 안 어딘 가에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마지오 상장군에겐 안된 일이지만, 하늘누리에 있던 엘시는 정 우의 서신이 오지 않는 것에 궁금함을 느꼈다. 서신을 받으러 온 엘시의 몸종 이레 달비에게 마지오 상장군은 못을 씹는 기분을 느끼며 정우가 사라졌음을 알렸다. 이레는 황급히 하늘누리로 올 라가 엘시에게 그 사실을 보고했다. 엘시가 정우의 방에 도달한 것은 틸러가 정우의 부재를 확인했을 때부터 한 시간이 조금 지 났을 무렵이었다.
엘시는 시허릭과 몇몇 교위, 그리고 최초 발견자인 틸러 달비 부위와 함께 정우의 방에 들어섰다. 방 안을 일별한 엘시는 탁자 위에 놓인 서신을 발견했다.
“저것은 뭐지?”
시허릭은 떫은 표정으로 말했다.
“정우 규리하가 쓰던 편지입니다. 쓰던 도중에 그만둔 것 같습니다.”
엘시는 탁자로 다가가 서신을 들여다보았다. 내용을 읽고 나서 그는 눈살을 조금 찡그렸다. 정우가 흘린 눈물은 이미 말라 있었 지만 먹이 번진 자국이나 종이가 운 자국은 선명했다. 엘시는 그 것을 그대로 놓아둔 채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편지를 쓰던 도중에 사라졌다면 계획적인 것은 아니겠군. 즉흥적으로 결심한 것일 수도 있고, 그렇잖으면 침입자가 있었을 수도 있군. 시허릭?”
“절대로 침입자는 없었습니다. 대장군님. 문밖에는 병사들이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창문을 통해 들어왔을 가능성은 없다고 생 각합니다.”
당연한 말이기에 엘시는 미소를 지었다. 규리하 성은 전투 성 이었고 창문은 이나 쏠 수 있을 정도지 사람이 드나들 넓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은 모든 것을 명확하게 해 두고 싶어했다. 언제나 말(馬)냄새와 양파 냄새를 풍기고 다 니며 아내에게조차 매력적이라는 말을 듣지 못하는 그였지만, 일 처리에 있어서는 빈틈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의 아내가 결혼을 결심한 것도, 엘시 에더리가 규리하 토벌군을 구 성하며 참나무 군단과 더불어 가시나무 군단을 주축으로 삼은 까 닭도 그런 성격 때문이다. 시허릭의 성격을 알기에 엘시는 별 기 대 없이 질문했다.
“비밀 통로는?”
“이 방의 벽 두께라든지 천장, 바닥을 모두 검사했습니다. 이 방에는 비밀 통로가 없습니다.”
예상대로였다. 엘시는 방을 죽 둘러보았다.
“그렇다면 정우는 이 방에 있어야 해. 그런데 사라졌단 말이군. 정우가 어르신이 아닌 바에야 홀연히 사라질 수는 없지 않은가.”
“저도 영문을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수색 중이니 곧 발견될 라 믿습니다.”
“쥘칸에겐 연락했나?”
시허릭의 얼굴이 굳었다.
규리하 토벌군에는 가시나무 군단과 참나무 군단 이외에 몇몇 독립 여단이 참여하고 있었고 그중 쥘칸 장군의 지휘를 받는 엉 겅퀴 여단은 케나린 요새를 점령, 주둔하고 있었다. 그리고 케나 린 요새는 규리하령의 대도시들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충지에 위 치했다. 따라서 규리하령의 완벽한 통제를 위해선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과 쥘칸 장군의 관계가 돈독해야 할 터이다. 하지만 현실 은 그렇지 못하다. 물론 시허릭과 쥘칸이 서로를 자신이 아는 최 악의 인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상대방의 불명예에 대해 가장 크게 웃어 줄 용의는 똑같이 가지고 있다. 시허릭은 볼멘소리로 말했다.
“대장군님, 정우 규리하가 성을 빠져나갔을 가능성은 결코 없 습니다.”
“시허릭, 만약 두 시간 전이라면 자네는 정우가 이 방을 빠져 나갈 가능성도 결코 없다고 말했겠지. 물론 정우에게는 우리만큼 이나 이성이 낯설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규리하 가문의 장녀야. 혹 비상 수단 같은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 쥘칸에게 연락해 서 수색대를 조직하라고 해. 물론 자네도 그래야 할 테고. 서두 르게.”
시허릭은 마지못한 표정으로 수긍했다. 엘시는 다시 방 안을 둘러보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가 손잡이를 쥐려 했을 때였다. 문이 갑자기 열렸다.
엘시는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나 문을 바라보았다. 열린 문을 통 해 안으로 들어온 것은 머리카락을 치렁치렁하게 늘어뜨린 여자 였다. 한눈에 알아볼 수 없었기에 누구냐고 물으려 하다가 엘시 는 그녀의 옷이 눈에 익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우?”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신음이나 약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엘시는 입을 다문 채 정우의 뒤편을 응시했다. 그곳은 그 가 조금 전 걸어왔던 복도가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넓고 깊은 것이 있었다. 그리고 한번에 알아볼 수 없는 많은 물건들이 있었 다. 엘시가 정우의 뒤쪽을 좀 더 자세히 관찰하려 했을 때 정우가 문을 닫았다. 정우는 엘시를 올려다보았다.
“예. 저예요.”
엘시는 정우를 바라보다가 손짓으로 그녀를 비켜서게 했다. 정 우가 옆으로 물러난 후 그는 직접 문을 열었다. 대장군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문 뒤에는 복도가 있었다. 현실 감각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엘시는 잠깐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서 있었다. 어느 정도 자신이 안정되었다고 생각한 엘시는 정우에게로 몸을 돌렸다.
“라수의 방입니까?”
“예?”
“정우, 당신은 라수의 방에서 여기로 온 겁니까?”
“네, 그래요.”
제국군의 장교들은 다시 신음을 흘렸다. 엘시는 흥분하지 않으려 애쓰며 말했다.
“이 방에서 라수의 방으로 바로 갈 수 있습니까?”
정우는 엘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의 곁을 지나쳐 걸어갔 다. 시허릭과 다른 사람들 사이를 태연하게 걸어간 정우는 서신 이 놓여 있던 탁자 앞에 앉았다. 그리고 탁자 위에 팔꿈치를 얹 고 두 손을 깍지 껴 그 위에 턱을 얹었다. 잠시 그 모습을 보던 엘시가 말했다.
“모두 밖으로 나가서 기다리도록.”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과 수교위들, 틸러 달비 부위는 궁금해 못 견디겠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대장군의 명령을 따랐다. 그들이 모두 밖으로 나간 다음 엘시는 문을 닫고 정우에게 걸어갔다.
“정우.”
정우는 엘시를 쳐다보지 않은 채 말했다.
“예.”
“이해하긴 어렵지만, 이 방에서 지하 금고방으로 바로 갈 수 있습니까?”
“예. 성안이라면 어디에서든 라수의 방으로 갈 수 있어요. 그 런데 나올 때는 들어간 곳으로만 나올 수 있더군요. 킴의 건물처럼. 그래서 즈믄누리로는 갈 수 없었나 봐요.”
엘시는 당황했다.
“즈믄누리로 간다고요?”
정우는 깍지 낀 두 손을 앞으로 죽 내밀며 몸을 의자 등받이에 파묻었다. 그리고 두 손을 무릎 위에 떨어뜨렸다.
“온갖 방법을 다 써 봤어요. 성주님 서재로 가는 방법, 3층 손 님방으로 가는 방법, 딱정벌렛간으로 가는 방법, 도서실로 가는 방법. 생각나는 방법은 다 써 봤는데 갈 수 없더군요.”
“여기서 즈믄누리로 곧장 가려고 했다는 겁니까? 제국을 횡단 해서?”
엘시의 머릿속이 급박하게 움직였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아이 저 규리하는 즈믄누리로 도망친 것일지도 모른다. 딱정벌레로 날 아가도 한 달은 걸리는 즈믄누리로 곧장 이동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지만, 즈믄누리 자체가 이미 상식적인 장소가 아니다. 하지만 정우는 부정했다.
“그런 방법은 없나 봐요.”
“정리해 보겠습니다. 당신은 이 성 안의 어느 곳에서든 곧장 라수의 방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올 때는 들어 간 곳으로 나오게 됩니다. 맞습니까?”
“생각해 보니 어느 곳에서든 가능한 것은 아니군요. 문이 있는 곳이라고 해야겠군요.”
“정말 놀랍군요.”
“그 정도는 즈믄누리에선 아무것도 아니에요, 대장군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놀랍군요.”
정우는 엘시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하는지 알고 싶으세요?”
“아니요. 듣고 싶지 않습니다.”
“궁금하실 것 같은데.”
“궁금합니다. 하지만 말하지 마십시오. 하늘누리에서 말했듯이 당신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말할 의무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 제는 다른 이유에서 당신이 그 비밀을 간직하길 바랍니다.”
“그 다른 이유가 뭐죠?”
“당신은 언제든 다른 사람들은 갈 수 없는 곳으로 갈 수 있습 니다. 그렇다면 만에 하나 불측한 습격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당 신에겐 피신처가 있는 셈입니다.”
정우는 두어 번 눈을 깜빡거렸다. 그녀는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보진 못했다. 그리고 새로 안 사실에 환호하지도 않았다.
“예. 무슨 일이 생기면 곧장 라수의 방으로 도망치겠어요.”
“기분이 상하셨군요.”
“도망칠 곳이 있다는 것에 기뻐할 수는 없군요.”
“동감입니다. 도망칠 일 자체가 없어야겠지요. 되도록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일을 하셨습 니까?”
“왜냐니요?”
“왜 즈믄누리로 가려 한 겁니까? 탈해가 당신의 서신을 가지고 바우 성주님께 가기로 했잖습니까.”
정우는 탁자를 밀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똑바로 서서 엘시를 바라보았다.
“대장군님, 지금 저를 놀리시는 거예요?”
“네?”
“제가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하면 비스그라쥬 백이 알았다고 말 하고 저를 즈믄누리로 보내 주실 거라고 정말 믿으세요? 그럴 리 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잖아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모르세요? 즈믄누리에서 나온지 얼마 안 된 저도 다 알겠는 데요. 편지를 쓰다가 이 바깥에서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지 깨달 았어요. 제 아버지는 괴물이 아니에요. 아버지를 잘 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괴물이 변경백령을 지배할 수는 없겠지요.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예요. 그렇다면 이곳에서는, 즈믄누리 바깥에서는 자기 것을 빼앗길 것 같으면 그 상대가 딸 이라도 주저 않고 죽인다는 말이에요. 그게 이 세상의 방식이죠. 그렇다면 자기와 아무 관련도 없는 여자 한 명 결혼시키는 것쯤 이야 일도 아니겠지요. 데라시 백작님은 제가 뭐라고 하건 반드시 저를 결혼시킬 거예요.”
“당신이 겪어야 했던 일에 큰 유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백작이 당신의 생각에 신경 쓰지 않을 작정이라면 당신이 숙고할 시간을 사십 일이나 줄 리는 없잖습니까.”
“사순이건 팔순이건 줄 수 있지요. 혼례 준비에는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그렇게 여길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당신의 혼례를 관장할 사 람은 비스그라쥬 백이 아니라 납니다. 그리고 나는 사십 일 후 당신의 답변을 듣기 전까지는 어떤 준비에도 착수하지 않을 작정 입니다.”
정우는 엘시의 두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인간보다는 도깨 비의 눈빛에 더 익숙한 그녀였지만 엘시의 눈에서 거짓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정우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정말 제 의견을 존중하실 건가요?”
“그럴 겁니다.”
“비스그라쥬 백이 아니라 폐하께서 저를 결혼시키라고 명령하 셔도 제 의견을 더 존중하실 건가요?”
“정우.”
“아니군요.”
엘시는 곤혹스러웠다. 그 곤혹스러움은 익숙했다. 갑작스러운 분노를 느낀 엘시는 자신을 다스리기 위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바르지 못합니다.”
“네?”
“규리하 공, 그런 부당한 조건을 걸어서 당신을 존중하려는 사람을 곤경에 빠트리는 일은 바르지 못합니다. 왜 성의를 가지고 당신을 대하려는 사람을 괴롭힙니까. 당신의 조력자에게 불가능 한 일을 부탁하여 그를 좌절시키는 것이 재미있지도, 당신에게 도움되지도 않을 텐데요.”
“어머, 대장군님?”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도 한계를 가진 사람입니다. 내 도 움을 얻고 싶다면 우선 내 현실적 한계를 인정하십시오. 그런 것 을 인정하지 못하는 저 무수한 바보들처럼 굴지 마십시오. 그런 바보들이 오해를 만들어 내고, 그런 바보들이 세상이 원래 각박한 것인 양 착각하게 만듭니다.”
“대장군님, 죄송해요. 폐하를 거론한 것은 그냥 해 본 소리였 을 뿐이에요. 제 무력하고 답답한 심정을 말하고 싶어서……… 전 정말이지 대장군님이 폐하께 대항하면서까지 제 뜻을 따라 주길 바란 적이 없어요.”
엘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정우는 그가 화가 났다고 생 각했다.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분노의 대상을 오해하고 있었다. 그 순간 엘시는 정우에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엘시는 자신이 한 말을 들을 대상이 정우가 아니라는 것을 알 고 있었다. 사과해야 한다고 느꼈지만 설명이 지나치게 많이 필 요했다. 엘시는 고개를 조금 떨어뜨렸다. 인사 같기도 하고 외면 같기도 한 모호한 동작이었다.
“쉬십시오. 화한을 받을 사람을 있다가 보내겠습니다.”
엘시는 뒤로 돌아섰다. 방문 앞에 선 그는 잠깐 뒤를 돌아보았 다. 정우는 똑같은 자세로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엘시는 문을 열고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