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1권 : 황제 사냥꾼 [제2장] – 돌과 바람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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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마시는 새 1권 : 황제 사냥꾼 [제2장] – 돌과 바람 6


아라짓 제국의 지배자인 치천제는 몸단장을 끝냈다. 제국의 통 치자는 자신의 손으로 몸단장을 한다. 하늘누리의 무게를 늘리는 것에 열심인 유수부 사람들도 하늘누리의 거주민을 늘리는 데는 난색을 표하며, 황제 또한 그들의 의견에 동의했다. 한 명의 사 용인만 둔 칼리도 백 같은 경우는 좀 극단적인 경우에 속하지만 대부분의 하늘누리 고위 인사들은 적은 수의 사용인만 두며 그것 은 황제 또한 마찬가지다.

치천제가 몸단장을 끝내길 기다리던 황제의 시종장 블레드 백 작은 쟁반에 받쳐 든 물건들을 들고 황제에게 다가갔다. 황제는 쟁반 위에 놓인 물건들 중 하나를 잠시 바라보았다. 차갑고 뜨거 움을 시각적으로 볼 수 있는 나가의 눈으로 본 황제는 그 물건이 뜨겁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황제는 그것을 집어 올렸다.

검은 모피가 아래로 축 늘어졌다. 군데군데 구멍이 나고 가장 자리는 거칠었지만, 어떤 물건이 가지는 권위에서 이 망토를 따 를 만한 물건은 드넓은 제국 내에도 별로 없다. 그것이야말로 대 호왕의 흑사자 모피였다.

하지만 황제가 그 망토를 걸칠 때는 단지 권위만 걸치는 것이 아니다. 망토를 몸에 두른 황제는 몸이 따스해지는 것을 느꼈다. 도깨비감투만큼이나 신비한 그 망토는 자체에서 열을 낸다. 원칙 적으로 한계선을 넘을 수 없는 나가인 황제가 한계선 이북에서도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것은 그 망토 덕분이다. 망토를 덮은 황제는 쟁반 위에 놓인 두 번째 물건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쉬크톨이었다. 육친을 베기 위해 제작되는 포악한 검 쉬크톨은 바로 그런 사명 때문에 치명적으로 예리하다. 달인의 손에 쥐어진 쉬크톨은 돌을 베어 낸다. 검에 관심 있는 자라면 누구든 탐내는 칼이지만, 손에 넣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신의 비 극적인 사명을 달성한 직후 쉬크톨은 소유자에 의해 부러지기 때 문이다. 하지만 쉬크톨의 어두운 역사에서 단 한 자루 부러지지 않고 남은 검이 있었다. 바로 황제가 집어 든 대호왕의 쉬크톨이 었다.

황제는 그 유서 깊은 검을 허리에 착용했다. 실로 위엄에 찬 모습이라는 평가는, 아마도 역사학자만이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역사학자가 아닌 블레드 백작은 위통을 느꼈다. 황제가 가진 놀라운 두 개의 장신구는 그 한없는 권위와 경이적인 기능 과 함께 착용자를 무뢰배로 보이게 하는 환상적인 효과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방금 탈영한 병사가 안심하고 말을 걸 것 같은 모습이 된 아라짓 제국의 통치자는, 존경하는 황제의 존경스럽지 못한 모습에 괴로워하는 시종장 블레드의 보필을 받으며 대전으 로 향했다.

블레드의 고통은 다행히 길지 않았다. 황제와 그의 최측근, 이 경우엔 블레드 백작만이 이용할 수 있는 통로를 통해 대전으로 나아간 블레드는 자긍심이 충족되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옥좌가 놓인 단 아래로는 넓은 방 가득히 많은 관료들이 서 있 었다. 산적 두목 같은 황제의 모습에 비하면 오히려 황제처럼 보 이는 화려한 복장의 관료들은 모두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똑같은 모습을 취하면 사람의 숫자가 많다는 것 이상의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법이다. 대전 1층뿐만 아니라 복층으로 되어 있는 2층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어 얼핏 보아도 백 명은 족히 넘을 듯했으나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나가 황제가 소음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놓고 본다면 그들의 공경심을 짐작할 수 있다.

치천제가 화려한 옥좌에 앉고 사람들이 고개를 든 후에도 소음 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블레드가 준비했던 목록을 들어 첫 번째 접견자의 이름을 불렀을 때 비로소 낮은 소음이 들려왔다.

사람들 사이를 조용히 걸어 나온 첫 번째 접견자는 머리를 박 박 깎은 승려였다. 어디에도 없는 신을 섬기는 사찰들의 총본산 인 하인샤 대사원에서 온 니존 대덕은 승려의 예에 따라 합장하 고 고개를 숙였다. 치천제가 말했다.

“듣겠다.”

니존 대덕은 의례적인 인사를 한 다음 가지고 온 문제를 차분 하게 설명했다. 대전에서 황제는 과도한 수사를 용납하지 않았 다. 다른 접견자들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이다. 수사에 대한 황제 의 혐오감은 퍽이나 유명해서 접견을 앞둔 사람들은 요점을 빨리 말하는 방법을 따로 연습해야 할 정도였다. 그래서 니존 대덕은 자유무역당원이나 쓸 만한 어투로 자신의 요구 사항을 설명했다. 니존 대덕은 먼저 발케네 공이 건설 중인 스카리 요새에 대해 간략히 거론했다. 암살공이 자기 땅에 요새를 짓는 일이 하인샤 대사원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궁금해하던 치천제는 그 요새가 수 원을 확보하기 위한 수로 공사 때문에 하인샤 대사원의 소유지를 침범했음을 듣고는 사태를 이해했다. 발케네 공은 하인샤 대사원 이 보낸 항의를 무시했고, 대사원은 황제에게 그 사실을 탄원하 기 위해 하늘누리로 온 것이다.

치천제는 하인샤 대사원이 자기 재산을 보호받길 원한다고 착 각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황제에게 오지 않았을 것이다. 지나 치게 많은 토지 때문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당하는 하인샤 대사원 에게 그 먼 곳에 있는 땅은 아무런 매력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하인샤 대사원이 원하는 것은 적당한 값을 받고 발케네 공에게 그 땅을 파는 일일 것이다. 틀림없이 거래가 오갔을 텐데도 이 문제가 황제의 대전까지 왔다면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다. 발케 네 공이 구매에 관심 없는 것이다. 암살공에게 그 땅이 필요하다 는 점, 하인샤 대사원이 부당한 가격을 요구했을 리 없다는 점 등을 고려해 본 치천제는 그것이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모든 고려에도 불구하고 치천제가 대답했을 때, 사람들은 니존 대덕의 말이 끝났을 때와의 시간 간격을 느끼지 못했다.

“명백한 재산권 침해가 인정된다. 발케네 공은 하인샤 대사원 의 땅을 구입하든지, 토지 이용료를 지불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우회로를 건설해야 할 것이다. 수로 공사는 즉각 중단하며 하인 샤 대사원과 발케네 공 양자가 만족할 수 있는 시점까지 재개될 수 없다. 이것이 황제의 권고다.”

언제나 빠른 치천제의 대답은 사람들에게 황제가 즉흥적이라 는 인상마저 주었다. 황제의 일 처리 또한 빨랐기에 그런 인상은 어쩔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 순간 자신들이 들은 황제의 권고를 천오백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 있는 암살공 또한 듣고 있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황제의 ‘즉각’이라는 표현은 말 그대로 즉각이었다.

니존 대덕 또한 그런 경이적인 일을 가능하게 하는 비밀이 무 엇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비밀이 어디에 있는지는 몰랐다.

니존 대덕은 많은 사람들이 비밀이 있으리라 자신 있게 지목하는 단을 바라보았다. ‘정말 저 아래쪽이 비어 있고 거기에 세 번째 벽난로가 있는 것일까?”

상념에 잠기는 바람에 니존 대덕은 황제를 약간 언짢게 했다. 그리고 그런 경우 치천제는 직설적이다.

“물러가라.”

니존 대덕은 화들짝 놀라 예를 표하고 물러났다.

비스그라쥬 백 데라시가 니존 대덕의 의심을 알았다면 즐거워 했을 것이다. 세 번째 벽난로 방이 황제의 발아래에 있다는 소문 을 조장한 사람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이에 대한 데라시의 우위는 거기까지였다. 황제가 접견자들과 만나던 시각 에 데라시는 벽난로 방에 있었지만 그가 있는 곳은 두 번째 벽난 로 방이라 불리는 자신의 방이었다. 첫 번째 벽난로 방은 물론 황제의 거처였고, 비밀에 싸인 세 번째 벽난로 방의 소재에 대해 서는 데라시도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정도밖에 알지 못했다. 무 슨 일이 일어나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거기에 어떤 사람들이 있 는지는 잘 알고 있지만 그 소재는 모르는 것이다.

데라시는 세 번째 벽난로 방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상상해 보 았다.

세 번째 벽난로 방은 탁자들이 많이 놓여 있는 어마어마하게 넓은 방이다. 여상히 볼 수 있는 방과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큰 방이지만 그 방에서 처리하고 있는 업무를 생각하면 오히려 작다 할 수 있다. 거대한 벽난로가 있는 벽을 제외한 다른 벽에 는 단지들이 가득 놓인 선반들이 설치되어 있다. 벽난로 이외에 는 조명이라 할 것이 없어서 나가가 아니고선 그 모든 시설을 알아보기 힘들 것이다. 다행히도 그 방에 있는 자들 중 인간이나 도깨비, 레콘은 한 명도 없다.

데라시는 계속 상상했다. 황제가 니존 대덕에게 말한 직후 세 번째 벽난로 방에서는 한 명의 나가가 벽으로 다가갈 것이다. 그 리고 단지 하나를 방 가득히 놓인 탁자들 중 하나로 가져온다. 나가는 주저 없이 단지의 내용물을 탁자 위에 쏟아 놓는다. 단지 안에서는 뱀들이 쏟아져 나온다.

뒤엉켜 쏟아져 나온 뱀들은 꿈틀거리며 흩어지고 그중 몇몇은 목을 빳빳하게 쳐든 채 주위를 경계한다. 당장이라도 뱀들이 탁 자 아래로 쏟아질 것 같지만 방 안에 있는 나가들은 별로 걱정하 지 않는다. 단지를 가져온 나가조차 태연한 동작으로 빈 단지를 탁자 가장자리에 내려놓는다. 그리고 그 나가는 탁자 위에서 구 불거리는 뱀들을 응시한다. 강력한 정신 억압이 시작되자마자 뱀 들은 움직임을 멈춘다.

한자리에서 미세하게 떨던 뱀들은 잠시 후 기묘하게 움직인다. 빠르게 움직였다가 멈추고, 다시 뒤엉켜 탁자 위에 무늬를 그리 는 뱀들의 모습은 마치 명필가가 휘둘러 대는 붓자국처럼 보인 다. 실제로 그것은 일종의 문자다.

데라시는 상상의 영역을 바꿨다.

비스그라쥬 백은 멀리, 암살공이 지배하는 엄혹한 땅 발케네를 상상했다. 암살공의 성 모처에서는 세 번째 벽난로 방에서 일어 나는 일과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그곳에 모인 자들 또한 탁자 위에 놓인 뱀들의 움직임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두 무리의 뱀들은 똑같이 움직인다. 세 번째 벽난로 방의 율모기가 몸을 뒤틀 때 발케네에서는 밀뱀이 몸을 뒤트는 것처럼 약간의 세부 사항은 다를 수 있지만 뱀들이 그려 내는 무늬는 똑같다. 읽을 수 있는 자들에게 그 무늬는 명확한 의미를 드러낸다. 그리 하여 발케네에 있는 자들은 뱀의 무늬를 보며 황제의 권고를 알 게 된다.

데라시는 비늘이 약간 부딪치는 것을 느꼈다. 데라시는 뱀부리 미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기적을 행하는 모습을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동감하긴 어려웠다. 뱀부리미들의 일과 직업 정신에 대 해 고민하는 대신, 데라시는 자신에게 보내는 황제의 니름에 집 중했다.

<락토가 그 땅을 원하면서도 구입을 꺼린다면 대답은 하나다. 그가 구입한 땅은 봉지가 아닌 락토 빌파의 사유지가 될 터이니 짐의 행정관이 락토 빌파의 재산 파악을 위해 들어가야 한다. 즉 락토는 발케네에 짐의 사람이 들어가는 것을 꺼리고 있다는 의미 다. 자기 땅에 상전의 대리인을 들이지 않는 것이 락토에게 자존 심의 만족 이외에 무엇을 주는지 고려해 봐야 할 것이다.>

데라시는 붓을 들어 치천제의 니름을 받아 적었다. 세 번째 벽 난로 방의 뱀부리미들이 전령의 역할을 담당한다면 두 번째 벽난 로 방의 데라시는 비망록 기자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 뒤로도 계속 황제의 니름이 전달되었다. 대전의 옥좌에 앉 은 황제는 접견자들의 탄원이나 요청, 제안 등에 대해 필요한 권 고나 황명을 결정했고 그것들은 곧 뱀부리미들에 의해 사어(蛇 語)로 바뀌어 제국 전역으로 전달되었다.

그 광경의 모식도 같은 것을 그려 본다면 굉장한 장관일 것이 다. 그 모식도는 세 번째 벽난로 방으로부터 제국 곳곳을 향해 뻗어 있는 무수한 거미줄을 그리는 것으로 시작해야 할 것이다.

거미줄들의 길이는 수십에서 수천 킬로미터까지 다양하다. 황제 의 의지는 그 거미줄을 흔들고 거미줄의 반대편 끝에 있는 영주 와 행정관들은 황제의 의지를 즉각 실체화시킨다. 무려 수천 킬 로미터의 거리에서! 따라서 제국의 모든 신민들은 황제와의 정치 적 거리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황제는 제국 전체를 동시에 다스 리므로.

‘아냐.’ 

데라시는 생각했다. ‘동시는 아니야. 그렇다면 접견자 들은 필요 없겠지.’비스그라쥬 백의 생각대로였다. 사어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충분했다. 사어 해독은 교육으로 터득할 수 있는 능력이므로, 하지만 사어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적었다. 사어를 쓰는 뱀부리미가 되기 위해선 나가들 가운데서도 희귀한 정신 억 압의 능력을 선천적으로 갖춰야 한다. 그런 능력을 갖추었으며 동시에 뱀부리미에게 필요한 다른 자질도 갖추고 있는 자들 중 벽난로의 온기에 의지하여 한계선을 넘을 수 있었던 자는 극히 드물다. 그리고 그 소수의 뱀부리미들은 모두 세 번째 벽난로 방 에 있다. 따라서 거미줄을 흔드는 쪽은 황제뿐이다. 거미줄 반대 편의 신민들은 황제의 뜻을 읽을 수는 있지만 자신의 뜻을 황제 에게 보낼 수는 없다. 그 때문에 접견자들이 황제에게 찾아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정치적 거리감은 여전히 없다. 제국의 수도는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국에는 변두리가 없다. 어느 지점을 변두리라 명명한다 해도 그곳은 언제든 수도 인접 도시가 될 수 있다.

비스그라쥬 백 데라시는 깊은 만족감을 느꼈다. 뱀부리미도 아 닌 그가 한계선을 넘어 나가들이 살 수 없는 땅까지 와서 확인한 것은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데라시가 보는 아라짓 제국의 모 습은 완벽했다. 제국은 자신의 의지를 세상 모든 곳에 순식간에 전달할 수 있으며, 또한 필요한 곳 어디라도 자신의 중심을 보낼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 체제를 달성할 수 있었던 집단이 유사 이래 오직 하나뿐이기에 아라짓 제국 체제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그 체제는 무한한 가능성을 약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황궁의 대전에 선 도르 헨로 자작은 제국에서 아무런 가능성도 발견할 수 없었다.

대전에서 무기로 사용될 수도 있는 물건을 소지하는 것이 불가 능했지만 황제는 도르 헨로 자작에게 지팡이 소지를 허가했다. 도르 헨로 자작은 지팡이 없이는 서 있지도 못할 상황이었다. 사 나운 산지니를 팔뚝에 얹고 말을 달리거나 호쾌하게 바둑돌을 내 리치던 자작의 모습을 또렷하게 기억하던 사람들은 떨리는 몸을 지팡이에 의지하여 힘겹게 걸어가는 자작을 보며 동정심을 느꼈다. 사람들 사이에서 산공부사 파라말 아이솔이 속삭였다.

“도르 자작 기절하겠는데요, 형님. 끝까지 걷지도 못할 것 같습니다.”

파라말 아이솔의 형이자 율형부사인 사라말 아이솔은 진지하게 말했다.

“내 생각에도 기절한 채 걸으면 이상할 것 같아.”

언제나처럼 파라말은 고개를 홰홰 내둘렀다. 사람들의 기대 섞 인 오해에도 불구하고 파라말은 사라말과 대화가 가능한 유일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율형부사와 말이 통하는 사람 이 세상에 한 사람쯤은 있다고 믿고 싶어했다. 그들의 바람이 잘 못된 게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아니지만, 파라말은 다시 사라말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옹골차기가 차돌 같던 이가 저렇게 한순간에 썩은 허수아비 꼴이 되는군요. 자식이란 그런 건가 봅니다. 부냐 헨로에 대한 재심 청구가 기각된 이상 도르 자작에겐 이것이 마지막 수단일 겁니다. 어떻게든 성심을 움직여 주면 좋겠군요.”

“아아, 맞아 기절한 채 걸으면 폐하께서도 동요하실 거야. 그 런 뜻이었구나?”

파라말은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리며 도르 헨로를 돌아보았다. 파라말 이외의 많은 사람들이 걱정했지만 다행히 도르 자작은 끝 까지 쓰러지지 않고 걸어갔다. 황제가 말했다.

“듣겠다.”

하지만 자작은 곧장 말하지 못하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 의 딱한 처지를 고려한 듯 치천제는 예외적으로 기다렸다. 간신 히 호흡을 가다듬은 도르 헨로는 떨리는 두 손을 지팡이 위에 얹 은 채 힘겹게 말했다.

“지극히 고귀하신 폐하. 폐하의 미천한 종복 도르 헨로가 돈수 백배코 아뢰옵니다.”

치천제는 또다시 예외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수사에 대한 거부감을 보이지 않은 것이다. 도르는 한마디 한마디가 유언인 양 힘겹게 말했다.

“폐하, 감히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사람의 인생이 한 번이라 말하는 자 많사옵니다만, 제가 보기엔 도깨비가 아니라도 사람의 인생은 두 번입니다. 처음에는 자식으로 살고, 그 다음엔 부모로 살게 됩니다. 그 둘은 한 사람의 두 가지 모습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두 사람입니다.”

주위를 둘러본 파라말은 그들 중 누가 자식을 가진 사람인지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공감 어린 부모들의 시선 속에서 도르가 말했다.

“존경하는 폐하, 제 여식이 참으로 씻지 못할 대죄를 범했사옵 니다. 제 손으로 직접 중벌을 내리도록 윤허하여 주시길 간청드 리는 것이 폐하를 섬기는 신하된 도리일 것입니다. 그러나 나약 한 아비의 마음이 저를 옹졸하게 만듭니다. 평생을 부끄러움 없 이 살길 바랐건만, 이제 저는 부끄러움 속에서 천박해진 자신을 보게 되었사옵니다. 제 여식이 태위청에 끌려간 후 저는 매일처 럼 뼈가 부서지고 장이 끊어지는 고통을 맛보았사옵니다. 이제 저는 옹졸하고 천박한 아비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런 아비로서 말하겠사옵니다. 제 여식은 제 목숨입니다.”

도르 자작의 눈에 눈물이 영글었다. 도르는 흐느끼며 말했다. 

“제 여식이 저지른 죄를 사해 달라 청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 만 죄를 논하기 위해서는 그 근원을 따져야 할 것입니다. 자녀의 죄는 결국 부모의 가르침이 잘못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부디, 폐하, 저로 하여금 제 여식의 벌을 대신하게끔 허락하소서. 부디 제 것일 수 없는 작위와 봉급을 반납하고 딸을 잘못 가르친 죄수 로서 벌을 받도록 하여 주소서.”

파라말은 코가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산공부사가 아는 도르 는 자신의 작위를 사랑했다. 그것은 명예욕이나 권력욕과 달랐 다. 명예욕이나 권력욕은 타인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도르에게 타인은 필요없었다. 도르는 자작으로서 행동하고 사고하는 것을 즐겼을 뿐이다. 그런 도르 헨로가 작위를 포기하고 딸의 벌을 신하게 해 달라고 간청하고 있었다.

황제는 세 번째의 예외를 보여 주진 않았다. 도르의 말이 끝나자마자 치천제의 대답이 시작되었다.

“비록 짐에게 자식이 없으나, 그대의 말에 담겨 있는 절절한 진심은 짐에게도 부모와 자식 간의 비할 데 없이 귀중한 인연의 무게를 짐작케 하는 바가 크다. 도르 헨로.”

도르의 얼굴에 희망이 떠올랐다. 그러나 황제는 준열하게 말했다.

“그러나 신상필벌은 치도의 처음이고 마지막이다. 상을 대신 받는 자가 있을 수 없듯 벌을 대신하는 것 또한 부당하다. 그대 가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야기한다면, 짐은 그대의 철없는 딸이 가벼이 위험에 빠트린 무수한 장병들의 어머니들을 말하겠다. 그대의 딸이 그대의 목숨이라면, 장병들 또한 그 어머 니들에겐 목숨이다.”

도르 헨로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황제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선고했다.

“따라서 짐은 그대의 해괴하기까지 한 요청을 거부한다. 물러 가 근신해라. 이것이 황제의 대답이다.”

“폐하!”

“물러가라.”

도르는 물러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몸을 휘청거리 면서 도르는 외쳤다.

“폐하, 부디 허락하여 주소서. 딸의 벌을 대신케 하여 주소서!” 

치천제는 두 번 말하지 않았다. 대신 손을 들어 문을 가리켰다. 파라말 아이솔의 몸이 움찔했다. 치천제의 동작은 격하지 않았 지만 그 안에는 분노가 담겨 있었다. 문득 파라말은 치천제가 진짜 화를 낼 이유가 있음을 깨달았다. ‘폐하께서는 도르 헨로가 자신의 사사로운 정을 제국법 위에 놓으려 한다고 여기실 수 있 다.’ 위험했다. 시대착오적인 충성 서약을 고집하다가 죽은 자들 의 피가 채 마르지도 않은 시점이었다.

도르 헨로 또한 치천제의 분노를 느낀 듯했다. 그는 힘없이 고 개를 떨어뜨렸다. 그러나 몸을 돌리지는 않았다. 애타는 심정으 로 바라보던 파라말의 시선이 도르 헨로의 지팡이에 멈추었다. 지팡이를 쥔 도르의 손 모양새가 좀 이상했다. 그 모양새를 살피 던 파라말의 가슴이 철렁했다.

‘지팡이 안에 수상한 것이 들어 있다!’

파라말 아이솔은 앞으로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그때 누군가의 손이 파라말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뒤를 돌아본 파라말은 형이 붙잡은 것을 알았다. 파라말이 황제 시해라는 말을 외치려 했을 때 사라말이 실로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폐하 만세!”

사라말은 동생의 손을 낚아채어 앞으로 돌진했다. 파라말은 발 목을 접질릴 뻔하며 그 뒤를 따랐지만 똑바로 서지는 못했다. 사 라말이 다시 그를 내팽개쳤기 때문이다.파라말은 쓰러질 것을 각오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기대했던 충격은 오지 않았 다. 파라말은 눈을 떴고 형의 손이 자신의 손을 붙잡고 있음을 깨달았다. 사라말은 양팔을 옆으로 쭉 뻗고 오른손으로 동생의 손을 움켜쥐고 있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힘겹게 깨달은 파라 말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러나 사라말이 급하게 손을 잡아당 겼기에 파라말의 비명은 삼켜지고 말았다.

도르 헨로는 자신의 옆에서 춤을 추는 아이솔 형제를 보며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기겁했다.

사라말은 파라말의 두 손에 깍지를 껴 그가 빠져나가지 못하도 록 한 채 빙글빙글 돌았다. 꽤 즐거워 보였지만 파라말은 그 감 정을 공유할 수 없었다. 잠깐이라도 멈췄다간 손등이 뒤로 꺾일 판국이었다. 어쩔 수 없이 형을 따라 돌며 파라말은 애처롭게 말 했다.

“형님! 대관절…….”

“살아야 딸을 구합니다.”

파라말은 흠칫 놀라서 사라말을 바라보았다. 사라말은 옆을 보 고 있었다. 형의 눈길을 따라간 파라말은 뻣뻣하게 굳은 모습으 로 서 있는 도르 헨로 자작을 발견했다. 파라말은 뭔가를 알 것 같았으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곧 형의 손이 그의 허리를 낚아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다시 쩌렁쩌렁 울리는 율형 부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국 만세! 오오, 아라짓 만세!”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온갖 소리를 내지르며 형제에 게 달려들었다. 그때 그의 머리 위로 뭔가 엄청난 것이 휙 날아 갔다.

코뿔소가 머리 위로 날아간다면 비슷한 느낌일 것이다. 아이솔 형제들을 뜯어말리려 애쓰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대전에 서 있던 사람들 모두가 그 엄청난 기운에 놀라 머리를 감싸고 비명을 지르며 엎드렸다.

돌풍처럼 사람들의 머리 위를 날아 황제 앞에 사뿐히 내려선 것은 금군 부악타였다. 오뢰사수의 일원인 그 용맹한 레콘은 대 전에서 소음이 들리자마자 지체 없이 뛰어든 참이었다. 벼슬을 꼿꼿이 세운 부악타는 우람한 두 팔을 벌린 채 황제에게 다가오 는 어떤 위협이라도 막아 내겠다는 듯이 눈을 부라리며 대전을 훑어보았다. 그러나 부악타는 곧 어리둥절해졌다. 그의 시야 어 디에서도 위험의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애처롭기까지 한 모습으로 엎어져 있는 사람들과, 그 가운데서 동생의 몸을 이리 저리 흔들며 춤추고 있는 율형부사의 모습이 있을 뿐이었다. 그 리고 그 광경은 부악타의 상상력을 가혹하게 고문했다. 어쩔 줄 몰라하는 부악타에게 황제의 명령이 들려왔다.

“부악타, 말려.”

부악타는 황명을 듣자마자 앞으로 성큼 걸어갔다. 하지만 그는 이 존경받는 대신들의 광태를 어떻게 저지해야 할지 알 수 없었 다. 그래서 부악타는 아무렇게나 행동했다. 그는 물건 들어 올리 듯 율형부사와 산공부사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한 손에 한 명씩 대신을 들어 올린 부악타는 황제에게 돌아섰다. 사라말은 그때까 지도 기쁨에 겨워 황제와 제국의 영광을 말하고 있었다. 부악타 는 그가 울음을 터뜨리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치천제는 왼손으로 턱을 받치고 한숨을 내쉬었다.

“흔들어.”

꼿꼿하게 서 있던 부악타의 벼슬이 수그러들었다. 그는 자신을 이해해 달라는 표정으로 사라말을 한 번 본 다음 그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곧 사라말이 조용해졌다. 삐뚜름한 모습으로 두 사람 을 바라보던 치천제가 말했다.

“율형부사.”

대전에 엎드려 있던 사람들도 하나 둘 일어서서 두 형제를 바라보았다. 사라말은 어지러움 때문에 조금 늦게 대답했다.

“예, 폐하.”

“상황을 알고 싶군.”

“황제 폐하와 같은 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이 기뻤습니다.”

“짐에 대한 그대의 애정에 감동하고 싶지만, 그걸 꼭 지금 춤 으로 표현해야 했나?”

“노래를 못 부릅니다.”

사람들의 침묵 사이에서 익살맞은 표정의 소음들이 하나 둘 비 어져 나왔다.

그 소음들은 뒤엉켜 알아듣기 힘든 불협화음을 구성했고 조금 후 어떤 유서 깊은 동작도 참여시켰다. 주위를 둘러본 파라말은 머리 옆에 손가락을 가져가 빙글빙글 돌리는 사람들을 꽤 많이 볼 수 있었다. 황제가 말했다.

“춤으로 표현해 줘서 고맙군. 짐도 노래엔 조예가 없으니까.”

사람들은 이제 창의력을 시험당하게 되었다. 당장이라도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사람들은 떠올릴 수 있는 모든 방법 을 동원했다. 시뻘겋게 변한 얼굴 위로 핏줄이 탱탱 솟아오른 모습들은 어찌 보면 좀 괴기스럽기까지 했다. 황제가 말했다.

“기쁨조차도 표현하지 않으면 심화가 되는 법. 짐은 제국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애정을 거침없이 표현한 율형부사의 용기와 실 행력에 찬사를 보낸다.”

이제 사람들의 얼굴은 거무죽죽하게 바뀌었다. 몇 명은 당장 쓰러질 것 같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율형부사와 산공부사가 대신의 체통과 대전의 위엄을 손상시켰음을 묵과하긴 어렵다. 각자 태오회, 그 리고 다음 번 지급되는 봉급을 절반으로 삭감한다. 태형은 금군 구레가 맡도록. 부악타는 구레에게 두 부사를 데려가라. 두 부사의 형벌은 기록에 남기지 않는다. 이것이 황제의 명령이다.”

그리고 치천제는 옥좌에서 일어났다. 접견이 끝났으니 대전 회 의를 시작해야 할 터이지만, 황제는 중요한 대신 두 명에게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겼기에 대전 회의를 잠시 연기하기로 했다. 치천 제는 다 죽어 가는 블레드 백작의 보필을 받으며 떠났다. 황제가 대전을 떠나자마자 여기저기서 엉덩방아 찧는 소리가 들려왔다. 율형부사와 산공부사는 폭소와 야유,엄청난 질문들을 받으며 대전 밖으로 끌려갔다. 부악타가 베풀 수 있는 최선의 친절은 아 무도 못 따라올 만큼 빠르게 달리는 일이었다. 덕분에 아이솔 형 제는 멀미를 일으켰다. 주위가 좀 조용해진 것을 깨달은 파라말 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대단하십니다, 형님.”

사라말은 멀미 때문에 반쯤 혼절한 상태여서 동생의 말에 대답 하지 못했다. 파라말이 계속 말했다.

“조금 전에 깨달았습니다.”

듣고 있는 부악타를 고려하여 파라말은 더 말하지 않았다. 하 지만 사라말은 파라말이 뭘 깨달았는지 알 수 있었다. 파라말이 그제야 깨달은 것은 황제 시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다른 모든 성인 나가와 마찬가지로 심장을 적출한 치천제를 죽이는 것 은 매우 힘들다. 최소한 쇠약한 인간 노인의 칼에 치천제가 죽을 일은 없다. 도르 자작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며, 사라말은 황 제시해가 아니라 자살 시위를 막기 위해 난동을 부린 것이다.

파라말은 형의 상황 판단에 감탄했다. 하지만 투덜거림을 억누르긴 힘들었다.

“그렇더라도 이게 무슨 개망신입니까. 좀 상식적인 방법을 쓰 실 순 없었습니까? 아버님께서 이 소식을 전해 들으면 형님을 가 만두지 않으실 겁니다. 그리고, 젠장. 봉급도 삭감당했잖습니까.” 

사라말 아이솔은 누군가에게 허리를 붙잡혀 들려 가는 사람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준엄한 얼굴로 동생을 노려보았다.

“아우야, 네 봉급이 그리도 중요하더냐? 내 생각에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는 것 같다.”

파라말은 당황했다. 그는 몇 푼의 돈보다 자작의 목숨이 훨씬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은 자신 또한 마찬가지이며 다만 불평을 좀 해 본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사라말은 동생이 변 명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넌 당연히 내 봉급부터 생각했어야 해. 그러니 네 봉급을 나 한테 다오. 간신히 원상복구되겠군.”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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