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1권 : 황제 사냥꾼 [제3장] – 기적을 감상하는 태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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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마시는 새 1권 : 황제 사냥꾼 [제3장] – 기적을 감상하는 태도 1


“여기 있잖아.”

  • 레콘에겐 왜 성(姓)이 없냐는 질문에 자신의 철창을 들어 보이며 티나한이 한 말

기적을 감상하는 태도

나나본의 중앙 시장은 열기와 소음으로 들끓었다.

주막에 앉아 있던 지멘은 조용히 술잔을 들어 올렸다. 장터에 가설된 주막에는 레콘이 마음 편히 몸을 맡길 의자 같은 것은 없 었지만 주막 주인은 땅바닥에 멍석을 깔아 두었다. 그리고 장터 를 흘러 다닐 수 있는 물기에 대비하여 멍석 아래에는 짚더미도 깔아 두었다. 지금 그 멍석에는 지멘이 홀로 앉아 있었다. 레콘 과 동석할 수 있는 배짱을 가진 자들도 공성병기 같은 두 자루 병기와 동석할 용기까지는 끌어내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 결과로 주위의 다른 멍석들은 포화 상태였다.

주막 주인은 그 사실에 대해 짜증을 내지 않기로 했다. 그 또 한 지멘이 옆에 놓아둔 무시무시한 망치와 압도적인 도끼에 질린 것은 마찬가지였거니와, 지멘은 상당량의 음식을 주문했기에 주 인이 입은 손해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주막 주인은 손들의 수발 을 들며 그 무기들의 유래를 고민했다. 두 가지 무기를 쓰는 레 콘은 없기에 그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필요에 따라 가지고 다니 는 단검 같은 것을 제외하면 모든 레콘은 최후의 대장간에서 받 은 한 가지 무기만을 평생 지닌다.

그때 저편에서 낭랑한 외침이 들렸다. 건방지기까지 한 쾌활한 목소리였다.

“저는 버릇없이 자랐어요. 아저씨 때문에 제가 철 들어 버리면 책임질 거예요?”

주막의 손들이 피식거렸다. 주인 또한 얼굴을 기분 좋게 찡그 리며 외침이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지멘의 동행이 서 있었다. 두 자루의 무기만큼이나 기묘한 동행이었다.

거침없는 화법과 무례한 흥정 기술로 피혁상을 곤경에 몰아넣 고 있는 것은 인간 기준으로도 꽤 작은 키의 애꾸눈 소녀였다. 한쪽 눈을 덮은 큼직한 안대, 비뚤어진 코, 뭉개진 귓바퀴 등은 굉장한 불균형을 이루고 있었지만 그 불균형이 용케도 떠받치고 있는 것은 싱그러운 생기다. 선량하다는 평가를 받고 싶어하는 보통 사람들이라면 그 소녀에게 동정 어린 눈빛을 보낼 것 같지 만, 정작 그 생기 가득한 소녀는 자신을 별로 동정하지 않는 듯 했다. 소녀가 자신의 안대를 손가락질하며 외쳤을 때 그 사실은 분명해졌다.

“몰라요! 저는 반밖에 안 보이니까 반값!”

“그럼 장님한텐 공짜로 줄까!”

꽤 수학적인 대답이다. 그리고 소녀는 그 논리를 간단히 격파 했다.

“그러니까 저한테 고맙다고 해요. 그 꼴사나운 모피에 반값이 라도 준다잖아요.”

“젠장, 그 가격으론 무두질하는 데 쓴 백반 값도 안 돼, 아가씨.”

“그 말 물정 모르는 바보한테 또 써먹고 싶으면 저한테 잘 보 여야 할 거예요. 아저씨. 그렇지 않으면 여기서 반나절도 걸리지 않는 곳에 명반석 광산이 있다는 거 온 장터에 다 떠들고 다닐지도 모르니까.”

피혁상은 ‘허!’ 하는 소리를 내뱉었지만 속으로는 당황했다.

명반의 희귀성으로 으름장을 놓는 최후의, 그리고 가장 성공률 높았던 수단이 쓸모없어진 이상 그는 다른 수단을 바삐 강구해야 했다.

피혁상은 자신의 게으름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수단이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애꾸눈 소녀 아실은 자신이 정한 가격으 로 털가죽을 사들일 수 있었다. 그녀는 당당하게 전리품을 끌어 안고 가설 주막을 향해 걸어왔다.

주막 사람들은 모두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아실과 지멘을 훔쳐 보았다.

아실은 끌어안고 온 털가죽을 멍석에 내려놓고는 그 위에 털썩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지멘은 아무 말 없이 술잔만 비웠지 만 아실은 무슨 질문을 들은 양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아, 이거요? 옷 만들려고. 제대로 만들려면 시간이 꽤 걸리겠 지만 그럴 시간은 없고, 아무래도 둘둘 만 것보다 좀 나은 정도 밖에 안 되겠네.”

지멘이 질문하는 것을 듣지 못했기에 주막에 있던 이들은 좀 어리둥절해졌다. 그때 아실이 다시 말했다.

“걱정 마요. 금방이니까.”

주막의 손들과 주인은 더욱 곤혹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그들 사이에서는 지멘이 혹 니른 것이 아닌가 하는 종족적 특성을 무시하는 가설까지 오갔다. 하지만 지멘도 아실도 주위에서 일어나 는 동요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멘은 한결같이 술잔을 비웠고 아실은 지멘의 배낭에 머리를 집어넣었다.

조금 후 배낭으로부터 다급한 구조 요청이 흘러나왔다. 지멘은 옆을 돌아보지 않은 채 왼손을 뻗었다. 그리고 배낭에 처박혀 버 둥거리고 있는 아실의 발목을 붙잡아 들어 올렸다. 멍석 위에 똑 바로 앉혀진 아실은 한참 동안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씨, 배낭인지 뒤주인지.”

지멘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실은 지멘이 들은 척 해 주길 바라는 척하지도 않았다. 지멘은 술잔에, 그리고 아실은 꺼내 든 반짇고리에만 주의를 기울였다.

다른 옷도 마찬가지지만 털가죽 옷을 만드는 일은 매우 까다롭 다. 마름질도 힘들거니와 가끔 송곳이 필요해지는 바느질은 숙련 공의 기술이 아니고선 감당할 엄두도 내기 어렵다. 자신의 재능 이 어느 쪽에 있는지 분명히 알고 있던 아실은 세련미 따위는 고 려하지도 않았다.

아실은 자신의 옷 한 벌을 꺼낸 다음 거기에 털가죽을 잘라 붙 이는 방법을 썼다. 옷본도 필요 없고 정교한 마름질도 필요 없는 영리한 방법이다. 그리고 빠르기도 했다. 짧은 시간 동안 아실은 방한복 한 벌을 완성했다. 도저히 튼튼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아 실은 자신의 다리로 움직여야 할 일은 별로 없을 거라 생각했다. 직접 입고서 팔다리를 놀려 본 아실은 만족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제 출발해도 돼요.”

지멘은 움직이지 않았다.

붙잡혀 들어 올려지길 기다리던 아실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지 멘을 바라보았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장터 한쪽을 물끄러미 바라 보고 있었다. 아실은 의아해하며 그쪽을 쳐다보았다.

저 멀리서 젊은 레콘 한 명이 누군가를 향해 이야기하고 있었 다. 오가는 사람들과 천막들 때문에 레콘의 상대는 잘 보이지 않 았지만 사람들의 머리 위로 불쑥 올라와 있는 레콘의 모습은 탑 처럼 잘 보였다. 그 때문에 아래를 향해 이야기하는 레콘 젊은이 의 모습은 마치 일인극을 보는 듯했다.

아실은 그 젊은이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소음 때 문에 정확하게 무슨 말이 오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젊은이는 노기를 억누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목 뒤편의 깃털이 부풀어 올 랐다가 눕기를 반복했고 수염볏이 자꾸 뻣뻣해지고 있었다. 레콘 을 감성적이라고 말하긴 어렵겠지만, 어쨌든 그들의 감정 표현은 대단히 명확하다.

주막 주인에게 셈을 치른 지멘은 그 청년을 향해 곧장 걸어갔 다. 아실은 그 뒤를 따랐다. 가까이 다가가자 조금씩 젊은 레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기랄, 그런 법이 어디 있어?”

그러자 인간의 것으로 짐작되는 칼칼한 목소리가 그 말을 받았다.

“사람 말을 제멋대로 이해해 놓고 억지를 부리면 곤란하지요.” 

아직 그 모습을 보기 전부터 아실은 상대편의 용기가 대단하다 고 생각했다.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와 현장을 목격한 아실은 그 용감한 인간이 앞뒤 없이 무모해도 무방한 젊은이가 아니라 물정 밝을 중늙은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중년 남자는 괜찮은 옷을 입고 있지만 어떻게 봐도 투사라고 보긴 힘든 모습이었다. 레콘 청년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한 껏 젖히고 있기 때문에 목 뒤의 살들이 옷깃 너머로 비어져 나와 벌게져 있었다. 그를 상대하고 있는 레콘은 호리호리한 체구의, 그다지 잘 먹지는 못한 것 같은 모습의 청년이었다. 물론 레콘의 기준으로 날씬하다는 것이지 상대편의 인간은 비교도 될 수 없을 만큼 거대했다. 하지만 중년 남자는 주눅 든 기색도 없이 그들 사이에 놓여 있는 뭔가를 가리키며 말하고 있었다.

아실은 잠깐 동안 남자가 가리키는 것이 뭔지 알 수 없었다. 자세히 바라본 후에야 그것이 원래 얼룩곰이라 불리는 동물임을 알 수 있었다. 뚜렷한 얼룩무늬인데도 알아보기 어려운 것은 그 얼룩곰이 참 희한한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잔뜩 으스러 진 부위는 한참 본 후에야 머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네 다리 또한 온전한 것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갈비뼈는 부러진 채 피부 를 뚫고 튀어나와 있었다. 어떤 가공할 힘을 가진 작자가 그 얼 룩곰을 부서져도 별로 상관없는 장난감 취급을 한 듯했다. 그리 고 아실은 누가 그런 일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실의 짐 작을 뒷받침하듯 레콘 청년이 손을 내리며 말했다.

“네 말대로 칼 안댔잖아. 화살도 안 댔고, 한번 살펴보라고. 어디에 그런 자국이 있는지.”

무기는 어디다 뒀는지 젊은이는 빈손이었다. 젊은 레콘은 그 빈손으로 얼룩곰의 상당히 망가진 사체를 들어 넝마 조각처럼 흔 들었다. 위협적인 광경이었기에 인간은 뒤로 한두 걸음 물러나서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무기를 써선 안 된다고 말한 건 온전한 상태이길 원했기 때문 입니다. 하지만 이게 뭡니까? 다 뭉개지고 박살 났잖아요. 이런 꼬락서니로 어떻게 박제를 만든다는 겁니까?”

“젠장. 네가 이걸 구워 먹을지 튀겨 먹을지 알게 뭐야. 무기 쓰지 말라고 해서 때려잡았잖아. 너 하라는 대로 다했어. 그러니 내 돈 내놔.”

인간은 기어코 울화통이 터진 듯했다.

“말 좀 제대로 들으란 말입니다! 온전한 모습이 필요한 거라고 요. 이건 못씁니다. 돈은 줄 수 없어요.”

“이 조그만 날강도 새끼 같으니, 뭐? 돈을 못 준다고? 못 줘? 야. 이 조그만 새끼야. 네 녀석 뼈대가 이 얼룩곰보다 더 단단한 지 한번 확인해 볼까?”

인간은 섬뜩한 표정으로 손을 허리로 가져갔다. 거기에 칼이라 도 있나 생각했던 아실은 깜짝 놀랐다. 그곳에는 수통이 있었다. 아실처럼 수통을 확인한 레콘의 몸이 당장 부풀어올랐다.

“너, 거기서 손 안 떼면 네 엉덩이 볼 수 있게 해 준다.” 

“협박하지 마시오. 젠장. 날강도라니. 부리 함부로 놀릴 거요? 누가 누구한테 강도라는 거야? 어디서 제 놈 머릿속 같은 꼴을 한 얼룩곰 한 마리 가져와서는 돈 내놓으라고?”

“너 이 새끼, 진짜 끝까지 한번 가 볼래?”

비무장의 레콘이 있을 리 없다. 아실은 그 청년의 무기가 어디 에 있는지 알게 되었다. 레콘 청년은 등 뒤에서 자신의 병기를 꺼내어 들었다.

젊은 레콘이 꺼내어 든 것은 접칼이었다. 레콘이 익숙한 손놀 림으로 손목을 가볍게 던지자 새파란 칼날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그런데 칼날의 형태가 특이했다. 칼과 끝, 톱, 낫, 손도끼 등을 뒤 섞어 놓은 듯한 복잡한 모습에 아실은 놀랐다. 자세히 보자 접칼 의 손잡이 부분도 망치나 못뽑이, 지렛대 등으로 쓰일 수 있는 부 분들을 가지고 있었다. 어쨌든 그 크기는 레콘에게 맞는 거대한 크기였으므로 레콘이 그걸 앞으로 내밀자 꽤 무시무시했다.

“이 자식아, 이걸로 혀 좀 다져 준 후에도 그따위 소리를 지껄 일 수 있는지 한번 볼까?”

그 시점에서 지멘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접칼을 든 청년은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를 짚는 것을 느끼자 고개를 조금 돌렸다. 그리고 곧 머리 전체를 돌려 지멘을 바라보 았다. 지멘의 모습은 같은 레콘에게도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게 다가 거대한 도끼와 망치는 청년을 놀라게 했다. 지멘은 낮은 목 소리로 말했다.

“끼어들어 미안하지만, 좀 참지.”

레콘 청년은 주눅 든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어깨를 긴장시키며 말했다.

“댁이 무슨 상관이오?”

“그런 걸로 장난치면 저 사람 죽어. 이봐, 인간. 당신은 박제 할 얼룩곰을 이 친구에게 부탁한 것 같은데, 맞나?”

평생 한 번 볼까 말까 한 우악스러운 거병이 한꺼번에 두 자루 나 등장하는 바람에 넋이 나가 있던 인간이 황급히 고개를 끄덕 였다. 지멘은 나직하게 말했다.

“저걸로는 박제 만들기 어렵겠군. 그러니 당신은 돈 낼 필요 없어. 돌아가.”

레콘 청년이 벼슬을 곤두세웠다. 지멘이 곧 말을 이었다.

“저 곰은 내가 사지. 나는 박제용이 아니라 먹을거리가 필요한 거니 고깃값 정도는 쳐 줄 수 있어.”

“저놈은 은편 열 닢 내기로 했는데? 당신이 그 값쳐 줄 거요?” 

“인간 시체가 필요한 게 아니라면 다섯 닢 받고 나한테 팔아.”

레콘 청년은 조금 고민하다가 인간을 향해 말했다.

“너 이 자식, 이 어른이 끊어진 네놈 명줄 붙여 준 줄 알아라. 꺼져! 그리고 다시는 나한테 뭐 부탁할 생각하지 마!”

인간은 하늘이 두 쪽 나도 그럴 일은 없을 거라는 표정을 지었 지만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그는 투덜거리며 그 자리를 떠났 다. 접칼을 접어 어딘가로 집어넣은 청년은 어쩔 작정이냐는 듯 이 지멘을 바라보았다. 지멘은 얼룩곰을 가리켰다.

“들고 따라와.”

그리고 지멘은 소지품 챙겨들듯 아실을 배낭에 주워 담았다. 레콘 청년은 그 모양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는 얼룩곰을 주워 들었다. 지멘은 떠나왔던 주막에 돌아가 술 한 통을 구입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장터 외곽 쪽으로 빠져나갔다. 레콘 청년은 약간 의아해하며 그 뒤를 따라 걸었다.

반 시간쯤 걸어 상당히 한적한 곳에 도달한 지멘은 배낭과 망 치, 도끼, 아실, 술통 등을 내려놓았다. 그는 은편 다섯 닢을 꺼 내어 청년에게 건네며 말했다.

“보다시피 짐이 많아서 그것 들고 다닐 수 없어. 여기서 먹어 치우도록 하지. 자네도 좀 들게.”

“어, 저요?”

“그럼 이 술 나 혼자 다 마실까.”

지멘은 술통을 툭쳐 보였다. 레콘은 기분 좋다는 듯이 웃었다.

“아주 좋은 의견입니다! 아, 내 이름은 뭄토입니다.”

“후치야. 자네가 고기 다듬게 내가 땔감을 하지.”

뭄토는 자신의 접칼을 꺼내어 들었다.뭄토가 그 복잡한 칼날의 이곳저곳을 사용하여 가죽을 벗기고 뼈를 추리고 고기를 다듬는 동안 지멘은 나무를 몇 그루 부러뜨려 가져왔다. 평평한 돌을 찾아낸 두 레콘은 그것을 불판 삼아 모닥불 위에 얹었다. 그리고 썩썩 잘라 낸 곰 고기를 구웠다. 곰 고기가 익는 모습을 보던 뭄 토가 말했다.

“그런데 이 아가씨는 언제 소개해 줄 겁니까?”

지멘은 갑자기 하늘을 쏘아보기 시작했다. 아실은 빙긋 웃고는 손을 가슴에 얹고 스스로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뭄토. 저는 제미니라고 해요. 후치는 제가 없는 것처럼 굴 거예요. 좀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신경 쓰지 마세요.” 

“음? 서로 다투기라도 했나?”

“비슷해요.”

뭄토는 레콘과 인간이 다투고 말도 하지 않는다니 별 희한한 일도 다 있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지멘이 적절하게도 술 통을 따자 더 이상 따져 물을 마음이 없어졌다. 지멘은 배낭에서 두 개의 큼직한 그릇을 꺼내어 하나는 뭄토에게 주었다. 그리고 작은 그릇을 꺼내어 아실에게 건넸다. 세 사람은 술통에서 술을 떠 마시기 시작했다.

술은 그리 좋은 것이 아니었지만 풍경은 그럴싸했다. 아실에겐 좀 자극적인 풍경이었는데, 물을 쓰지 않는 뭄토는 해체한 곰에 서 흘러나온 피를 그냥 내버려뒀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잔째의 술을 들이켜자 그것도 별로 신경 쓰이지 않게 되었다.

대화의 주체는 처음부터 아실과 뭄토였다. 아실은 뭄토가 최근 에 들은 모든 풍문을 듣고 싶어했다. 뭄토는 지멘을 무시해도 되 는지 알 수 없어 조금 머뭇거렸지만 아실은 말주변이 좋았고 지 멘이 고요를 선호하는 쪽이라는 것은 분명했기에 곧 뭄토는 아실과 더불어 수다를 떨었다. 얼마 있지 않아 뭄토가 세상 돌아가는 일에 별로 관심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하지만 아실은 실망한 기색 없이 뭄토가 떠벌리는 모든 이야기를 경청하고 계속 이야기 를 끌어내었다. 결과적으로 아실은 뭄토가 최근까지 나포츠에 있 었다는 사실, 발케네로 가기 위해 그곳을 떠나왔다는 사실, 그리 고 떨어진 여비를 보충하기 위해 온갖 잡일을 하고 있다는 등의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아실이 알 수 없 었던 것은 뭄토의 숙원뿐이었다. 뭄토가 신부 탐색자가 아닌 숙 원 추구자라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뭄토는 자신의 숙원에 대 해서는 말을 얼버무렸다. 아실은 자기 숙원에 대해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 쓰지 않는 레콘의 성격으로 볼 때 꽤 독특 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다그쳐 묻지는 않았다.

어느새 고기도 사라지고 술도 없어져 술자리를 끝낼 때가 되었 다. 거의 대화에 참여하지 않던 지멘은 조용히 일어나 말했다. 

“즐거웠네, 뭄토. 난 이만 떠나야겠군.”

뭄토는 조금씩 꼬부라지려는 혀를 애써 진정시켰다. 지멘은 대 화에 참가하지 않은 것뿐만 아니라 술도 별로 마시지 않았기에 한 통의 술은 뭄토와 아실이 다 처리하다시피 했다.

“천만에! 나야말로 간만에 호호탕탕한 레콘을 만나 즐거웠습니 다. 되바라진 인간들하고만 어울리다 보니 사람 참 못쓰게 변하 는 것 같았어요. 아, 미안, 제미니. 아가씨 동포들을 도매금으로 비난할 생각은 아니지만, 주위에서 부딪혀 오는 것들이 좀 예의 없는 것들이라서.”

아실은 빙긋 웃으며 짐들을 배낭에 던져 넣었다. 뭄토는 허리 를 펴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지멘과 아실이 불을 끄고 다시 길 떠날 준비를 마쳤는데도 뭄토는 그대로 서 있었다. 지멘이 그의 주의를 끌어 볼까 하고 생각했을 때 뭄토는 비로소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지멘.”

지멘은 오른쪽 눈꺼풀을 조금 올렸지만 부리는 열지 않았다. 뭄토는 허리를 좀 숙이더니 눈에 띄게 긴장하고 있는 아실에게도 눈인사를 보내었다.

“잘 지내, 아실.”

“어, 저, 예. 고마워요.”

뭄토는 수염볏이 출렁일 만큼 활기차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 시 지멘을 쳐다보았다. 잠시 지체하던 뭄토는 곧 아무 상관 없다 는 투로 몸을 돌렸다. 약간씩 흔들리는 발걸음이었지만 불안하다 기보다는 흥겨운 발걸음으로 뭄토는 마을을 향해 걸어갔다. 오후 의 햇살을 성큼성큼 밟으며 멀어지던 뭄토는 곧 조그마한 점이 되었다. 주위가 탁 트인 위치였기에 지멘과 아실은 오랫동안 뭄 토의 흔들리는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실은 팔짱을 끼고 왼쪽 볼을 한껏 추켜올렸다.

“우리가 꽤 유명해졌나 봐요. 지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통 모르는 저 청년도 우리 정체를 짐작하는 걸 보니.”

지멘은 아무 말 없이 뭄토를 바라보았다. 아실은 다시 말했다. “저도 몇 가지는 짐작할 수 있어요. 아까는 일부러 나서 준 거 죠? 무기를 꺼내 들고도 말을 계속하는 레콘이라니, 뻔하잖아요. 누가 나서서 말려 주길 원했던 거예요. 하지만 그건 동포를 도와 주는 것이 아니에요. 지멘. 버릇 돼요. 결국 아무도 나서 주지 않는 날이 올 테고, 그때 저 얼간이는 참 곤란한 처지에 빠지게 될 거예요.”

아실에게 말을 걸 수 없는 지멘은 자신을 변호할 수 없었다.

그리고 변호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계속 이어진 아실 의 말은 지멘을 놀라게 했다.

“빨리 튀죠.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밀고할 것을 미리 알려 줬으니까.”

지멘은 고개를 숙여 아실을 내려다보았다. 아실은 오른팔로 왼 쪽 팔꿈치를 쥔 채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지멘과 눈이 맞은 아 실은 그 자세 그대로 지멘을 바라보며 말했다.

“헤, 몰랐어요? 뭄토는 오늘 밤이 오기 전에 가까운 제국군에 우릴 밀고할 거예요. 우리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을 알려 줬잖아요. 발케네로 갈 여비 벌겠네요.”

지멘은 고개를 들어 혼잣말처럼 말했다.

“뭄토는 자신이 못쓰게 변했다고 했지. 그렇다면……”

“그런 의미죠. 나쁜 자식. 뭐, 저 얼간이가 알아차릴 정도면 아까 그 장터에 있던 사람들 중 반은 짐작하고 있었을 거예요. 어차피 가만 있어도 다른 사람들이 밀고할 테니 자기가 먼저 해 서 현상금이나 벌자는 생각일 거예요.”

지멘의 벼슬이 약간 꿈틀거렸다. 지멘은 부리를 단단히 닫은 채 배낭을 둘러매었다. 아실을 집어 들어 배낭에 넣은 지멘은 도 끼와 망치를 양손에 움켜쥐었다. 아실은 지멘의 깃털을 움켜쥐며 충격에 대비했다. 하지만 지멘은 곧 몸을 돌리지는 않았다. 대신 뭄토가 사라져 간 방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멘의 오른팔이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그는 고기를 굽던 돌을 망치로 내리쳤다.

땅이 울리는 굉음과 함께 넓적한 돌이 자갈 무더기로 바뀌어 사방으로 날았다. 다시 망치를 들어 올린 지멘은 빈 술통을 후려 쳤다. 나뭇조각이 폭풍처럼 흩어졌다. 몸을 돌린 지멘은 모닥불 을 피웠던 자리를 걷어찼다. 사납게 날아간 잿더미가 앞쪽 수십 미터의 땅을 검게 뒤덮었다.

이우는 햇빛이 사물들을 전조하다가 스러져 갔다. 많은 그림자 들이 서로를 뒤덮은 가운데 지멘은 망치와 도끼를 늘어뜨린 채 똑바로 섰다. 그의 목 뒤에서 작은 한숨이 들려왔다.

지멘은 배낭에 담겨 있는 입이 매운 소녀가 아무 말도 하지 말 기를 원했다. 그는 만족했다. 아실은 동포의 배신에 분노하는 전 사에게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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