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1권 : 황제 사냥꾼 [제4장] – 묻은 것과 믿은 것 2
엘시 에더리와 정우 규리하는 참관자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논 쟁을 벌였다. 그 참관자 중에 놓친 식사를 하고 몸을 씻기 위해 물러난 파노 긴시테는 제외되어 있었는데, 그가 있었다 하더라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참관자들은 그것이 논쟁인지 도 알 수 없었다. 엘시 에더리와 정우 규리하는 한마디씩 말한 다음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물러가라는 명령을 받지 못했기에 어쩔 수 없이 한심한 참관자 대열에 속해 있던 틸러 달비가 두 사람이 니름을 나누고 있다는 가설을 거의 믿게 되었을 무렵, 엘시가 겨우 입을 열었다. 하지 만 엘시의 발언은 참관자들에게 신선함을 주진 못했다. 그가 꺼 낸 말은 앞서의 말과 같았다.
“안 됩니다.”
“가고 싶어요.”
정우 역시 같은 말로 대답했다. 참관자들은 또다시 침묵이 재개될까 두려웠다. 다행히 엘시는 그러지 않았다.
“왜 안 되는지 말할까요?”
“안전 문제나 제 포로 신분에 대한 이야기 외의 이야기라면 환영하겠어요.”
엘시는 씁쓸하게 웃었다.
“당신이 그런 이유 정도는 이미 예상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침묵한 것은, 아마도 내가 제시할 이유들에 대한 적절한 반론을 준비할 수 없었기 때 문이라고 짐작합니다. 맞습니까?”
“맞아요.”
참관자들은 그제야 침묵의 이유를 알았다. 그러나 새로운 지식이 그들을 즐겁게 하진 못했다. 결국 두 사람은 할 말이 없어서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던 것이다. 엘시가 말했다.
“적절하지 않은 이유라도 말해 주십시오.”
“들어주지 않으실 테니 말하지 않겠어요. 그냥 부탁해요. 가게 해 주세요.”
엘시는 정우가 고집을 부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지금껏 우는 수락되지 않을 요구로 심술을 표현한 일은 없었으므로 엘시 는 정우가 정말로 아스캄에 가길 원한다고 생각했다. 쉽게 판단 할 수 없었던 엘시는 자신이 확실히 아는 사실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일단 한 가지 오류를 정정해야겠습니다. 규리하 공, 당신은 포로 신분이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어제 말씀드렸듯이 당신은 군정 자문 위원회의 자문 위원입니 다. 따라서 당신은 규리하 시찰을 위해 출장을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정우는 분명히 그 말을 전해 들었다. 하지만 엘시가 원하는 방식으로 들은 것은 아니다.
“어, 그건 포로를 좀 고상하게 부르는 말이 아니었던 건가요?”
“당신이 규리하의 재건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 중 한 명으로 등 록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자문 위원회는 규리하의 유력 인사들 중 많은 분이 소속되어 있는 뜻깊은 위원회이며 그 임무는 규리 하를 원활하게 재건할 수 있도록 군정 당국을 자문하고 보좌하는 것입니다. 포로와는 완전히 의미가 다릅니다.”
“그런가요. 죄송해요. 그런데 왜 제가 그곳에 소속되어 있는 거지요?”
“당신이 소속되어 있으면 규리하 가문에 호의적인 유력 인사들 을 끌어들이기 쉽기 때문입니다. 나는 당신이 그런 사정을 이해 하고 자문 위원직을 수락한 거라고 알고 있었습니다만, 지금 보 니 이해를 못하셨군요. 결과적으로 당신의 동의 없이 당신의 이 름을 무단으로 이용한 꼴이 되어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이제 이 해하셨으니, 만일 사임하고 싶다면 그러셔도 무방합니다.”
“그 자문 위원이라는 것을 계속하면 아스캄에 갈 수 있나요?”
“가능성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럼 하죠.”
그런 평가가 어려웠던 경우는 별로 없지만, 틸러 달비는 엘시 와 정우를 영리하다고 보아야 할지 멍청하다고 보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대화의 전반부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말을 미리 짐작 하는 영리함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후반부는 틸러가 아는 최고의 멍청이 한 쌍, 그러니까 그의 여동생과 그녀의 천생 연분인 매제를 떠올리게 할 만큼 형편없었다. 편리할 것 같아서 당신 이름을 이용했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엘시와 이름을 이용하는 대신 아스캄에 보내 달라고 말하는 정우에게서 고도의 정치적 감각 같은 것을 찾기 어렵다는 것은 분명했다. 엘시가 말했다.
“그렇다면 자문 위원의 자격으로 위원회에 아스캄 현지 시찰을 요청할 겁니까?”
“네.”
“위원장의 허락이 필요하겠군요.”
“그게 누구죠?”
“여기 있는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입니다.”
시허릭 마지오는 낭패감을 느꼈다. 임기응변을 좋아하는 사람 이라도 이런 상황은 달갑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은 순발력보다 신중함을 선호하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말 을 끝낸 엘시가 몸을 돌렸을 때 시허릭은 자신이 그곳에 없었으 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정우는 시 허릭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질문했다.
“위원장님. 이렇게 부르면 되죠? 아스캄에서 뭔가가 잘못되고 있는 것 같으니, 그곳을 시찰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싶은데요. 허락하시겠어요?”
시허릭은 골치가 아팠다. 그는 엘시가 자신에게 거절하는 곤혹 스러움을 떠넘긴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승낙하는 어려움을 떠넘 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정우의 아스캄행은 온갖 위험 요소를 무릅쓰는 일이다. 하지만 엘시가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줄 리는 없다. 아니면 그저 사실을 숨기고 싶지 않은 솔직성인 것일까? 결국 시허릭은 평소의 생활 태도와 배치되는 행동을 했다. 그는 직관적으로 판단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군요. 그렇게 하세요, 규리하 공.”
시허릭은 말을 끝내자마자 엘시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엘시는 그에게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았다. 엘시는 그저 무표정하게 정우에게 필요한 주의 사항을 말했고 자문 위원의 출장을 보좌할 수행인을 결정할 때도 무표정한 얼굴은 바뀌지 않았다.
“엉겅퀴 여단 1대대로 하여금 당신을 수행하게 하겠습니다. 규 리하 공, 바로 출발하십시오.”
정우는 엘시의 마지막 말에 놀랐다.
“바로 출발하라고요?”
“그렇습니다. 가시기로 결정되었다면 이 정보가 다른 곳으로 새어 나가기 전에 바로 출발하는 것이 위험을 줄이는 방법일 겁 니다. 곧장 출발하여 아스캄에서 일을 처리하고 바로 돌아오십 시오.”
“하지만 무슨 준비가 필요하지 않나요? 가까운 곳도 아닌데.”
“수행인들이 모든 준비를 해 줄 겁니다.”
정우는 그런가 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보좌에서 일어나 틸러와 함께 방으로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엘시가 그녀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정우는 잠깐 동안 생각하다가 말했다.
“지금이오?”
“예.”
정우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스스로를 내려다보았다.
“지금 이대로 그냥 출발하라고요? 그래도 돼요?”
“예. 달비 부위, 마차로 규리하 공을 모시도록 해라. 밤이 오면 불을 크게 피우도록.”
틸러는 싱긋 웃으며 우물쭈물하는 정우에게 허리를 숙였다. 정우는 한 번 더 의아한 표정으로 엘시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어서가라는 듯 고개만 끄덕였다. 정우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대전을 나섰다. 그녀의 뒤에서 틸러가 따라왔다.
틸러는 근처의 병사들에게 몇 마디를 중얼거린 것 외에는 별다 른 말 없이 마구간까지 정우를 안내했다. 마구간 앞에 선 정우는 다시 한번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방에서 나온 모습 그대로였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공무 수행을 위해 도보로 열이틀 거리나 떨 어져 있다는 곳으로 출발하는 모습은커녕 산책 나가는 모습도 되 지 못했다. 정우는 엘시가 혹 아주 괴팍한 방법의 거절을 시도하 는 것이 아닌가 의심해 보았다. 하지만 그 의심은 곧이어 일어난 일들 때문에 더 체계화되지 못했다.
세 가지 사건이 거의 시간 차 없이 일어났다. 먼저 틸러가 마 구간에서 육두 마차를 끌고 나타났고, 그 직후 커다란 바구니 두 개를 든 하전사 한 명이 숨이 턱에 닿아 달려왔으며, 마지막으로 목욕 도중에 끌려왔는지 아직까지도 김을 모락모락 피워 올리는 파노 긴시테 노인이 나타났다. 정우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시 간이 조금 흐른 후에야 자신이 파노와 함께 마차 안에 타고 있다 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그 상황에 익숙해지려 애쓸 때 마차가 튕겨 나가듯 출발했고, 그래서 정우는 도대체 누가 마차를 몰고 있는지조차 몰랐다. 꽤 시간이 흐른 후에야 정우는 틸러 달비와 하전사 한 명이 마차를 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몇 달 만에 처음으로 규리하 성을 빠져나왔지만 정우는 그 사 실에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정우는 나라님과 같은 마차 에 탔다는 사실에 잔뜩 긴장한 파노 노인을 달래기에 바빴고 마 차의 속도에도 공포를 느꼈다. 분명 도로를 달리는 것이었지만 정우와 노인은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기 힘들었다. 바퀴는 천둥 같은 소리를 내뿜었고 튀어나가는 돌이 내지르는 비명은 소 름 끼쳤다. 힘이 남아 있는 동안 정우와 파노는 마차 벽을 부여 잡고 버텼지만 곧 두 사람은 마차가 선회할 때마다 좌우로 튕겨 나갔다. 결국 정우와 파노는 마차나 자신들 중 하나가 부서질 거 라 믿으며 울먹거렸다.
저녁 무렵이 되었을 때 겨우 질풍 같은 질주가 멎었다. 오후 내내 계속된 공포에서 해방된 정우와 파노는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정우는 곧 당혹감을 느꼈다. 마차 문을 열고 기다리던 틸러가 의아한 표정으로 마차 안을 들여다보았을 때 정 우는 울상이 되어 자신의 무릎을 가리켰다.
“일어설 수가 없어요.”
틸러는 씩 웃고는 하전사를 불렀다. 정우와 노인은 두 사람의 도움을 받아 마차 밖으로 나왔다. 후들거리는 무릎을 짚은 채 정 우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을씨년스러운 풍경이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산도 최소 10킬로미터는 떨어진 것 같은 광 막한 황야였고 어디에도 초록빛은 보이지 않았다. 움직이는 것이 라곤 바람을 타고 출렁거리는 흙먼지뿐이었다. 저물어 가는 햇빛 속에서 흙먼지의 꿈틀거림은 그림자의 춤처럼 보였다. 우울해지 는 광경이라 생각했을 때 정우는 마차가 구르는 소리를 들었다. 자신들을 태우고 온 마차가 떠나고 있었다. 틸러가 데려온 하전 사가 마차를 천천히 몰고 있었다.
정우는 걱정스러웠다. 사방 어디에도 불빛이 보이지 않는 이런 벌판에 세 사람만 남겨졌으니 겁을 집어먹어도 당연하겠지만 그 것은 도깨비가 느낄 감정은 아니었고, 정우가 느낀 것은 걱정이었다. 그녀는 틸러나 엘시가 뭘 제대로 알고 일을 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잘 움직여지지 않는 무릎을 힘겹게 움직여 정우는 틸러에게 다가갔다.
틸러는 모닥불을 일으키고 있었다. 풀 한 포기 찾기 힘든 황야 였기에 정우는 틸러가 쌓아 놓은 땔나무를 보고 놀랐다. 어렵게 모닥불을 피운 틸러는 정우와 파노를 불 주위에 앉혔다. 파노는 모닥불 옆으로 오자마자 쓰러져 코를 골았다.
정우 또한 그대로 잠들고 싶었다. 하지만 윗분들이 알아서 잘 할 거라고 믿는 파노와 달리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자 신의 시선에 압박감이 담기길 기원하며 틸러를 바라보았다. ‘자,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말해요.’
정우의 시선을 느낀 틸러는 빙그레 웃으며 바구니를 내밀었다. 바구니를 받아 든 정우는 자신의 시도가 실패했음을 알았다. 그 것은 음식물이 담긴 바구니였다. 어쨌든 정우는 땔감이 어디서 났는지 알게 되었다. 또 다른 바구니에는 불 피울 것이 들어 있 었던 것이다. 도무지 식욕을 돌볼 상태가 아니었던 정우는 바구 니를 내버려둔 채 이번에는 말로써 질문했다.
“틸러, 왜 여기에 온 거죠?”
틸러는 불을 더 크게 피우려 애쓰며 말했다.
“여기서 엉겅퀴 여단 1대대 병사들을 기다릴 겁니다. 규리하공 아가씨. 이 불빛을 보고 올 겁니다.”
“예? 여기로 병사들이 온다고요?”
“예. 우리가 출발한 직후 대장군께서 뱀단지로 연락하셨을 겁 니다. 불빛을 보기 쉽도록 밤이 될 때까지 기다린 겁니다.”
정우는 규리하 성을 떠나기 직전을 떠올렸다. 몇 시간 전의 일이지만 마치 며칠 전이나 되는 것 같았기에 한참 생각해야 했다.
겨우 정우는 엘시가 밤이 오면 불을 크게 피우라고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기다린 것이 아니라 달린 거잖아요. 왜 그렇게 달린 거죠? 죽 는 줄 알았어요.”
“죄송합니다, 규리하 공 아가씨. 당연히 안전 문제 때문이지 요. 규리하 공 아가씨가 규리하 성을 떠났다는 소식보다 더 빨리 달려야 했으니까요. 그리고 이곳으로 찾아올 병사들과 거리를 좁 히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정우는 감탄했다.
“이런 일이 일상사인 것처럼 말하네요? 혹시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아스캄으로 가겠다는 말을 하신 것은 규리하 공 아가씨인걸요.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께서 가도 좋다고 말하기 전까지는 저도 오늘 밤 이곳에 와 있을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저부터 좀 먹어도 될까요?”
틸러는 바구니를 가리켰다. 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들어요. 그렇다면 당신도 제가 아는 것 정도밖에 모른다는 것이죠? 우리가 떠난 다음에 뱀단지로 연락이 가리라는 것, 그리고 아스캄까지 우리를 수행할 병사들이 이곳으로 오리라는 것은 당신이 짐작한 것이지요?”
“예. 다르게 짐작할 수 없지요.”
정우는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님이 진 것도 당연하군요. 제국군이 모두 당신처럼 밤에 불을 크게 피우라는 말만 듣고도 알아서 척척 행동할 수 있는 병사들로 이루어져 있다면.”
틸러는 씹던 음식을 삼키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규리하 공 아가씨. 전투가 벌어졌을 때 지레짐작이 나 개인적인 판단은 절대 금물입니다. 지휘관은 명확하게 명령해 야 하고 병사들은 받은 명령만 정확하게 시행해야 합니다. 만약 이것이 전투 행동이었다면 상황은 전혀 달랐을 겁니다. 대장군께 선 시각을 말씀해 주시고, 장소를 말씀해 주시고, 교환해야 할 암호를 알려 주시고, 제가 소대 지휘권을 잠시 이양하도록 하셨을 것이며, 전체 계획서를 여러 부 만들어 필요한 모든 곳에 보 내도록 하셨을 겁니다. 그리고 규리하 공 아가씨는 빨라도 열흘 뒤에나 출발할 수 있었겠지요.”
“와 “
“예. ‘와’죠. 하지만 이것은 전투 행동이 아니고 남작을 빨리 해치울수록 안전한 규리하 성으로 빨리 돌아갈 수 있기 때문에 대장군께선 간단하게 처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대장군님 이 뱀단지로 수행병들을 보내 주실 거라 짐작하고, 제가 떠난 뒤 에 제 직속 상관인 데시마스 수교위님에게 제 소대 지휘를 잠시 대행하라고 전달해 주셨을 거라 짐작하는 겁니다. 또한 저는 데 시마스 수교위님이 놀라지도 않으리라는 것까지 짐작합니다. 노 는 부위를 돌리는 일이야 자주 있는 일이니까요.”
“그렇군요. 그런데 남작을 해치워요? 당신도 남작의 피를 원하
는가요?”
술병을 들어 올리던 틸러는 그것을 잠시 내버려두고 정우를 바라보았다.
“저도 원한다고요? 무슨 말씀인가요, 규리하 공 아가씨?”
“대장군님은 남작을 사형시키겠다고 하셨잖아요.”
“아아. 저는 그저 점심을 해치운다거나 일을 해치운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말한 겁니다. 남작을 어떻게 처리할지는 규리하 공 아가씨가 결정할 문제입니다.”
“그럼 당신은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 것 같나요?”
틸러는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술병을 끌어당겼다. 그는 잔에 술을 부어 정우에게 건넨 다음 마차를 모는 동안 떠올렸던 가설 을 말했다.
“규리하 공 아가씨, 혹 남작을 사형시키고 싶지 않으셔서 직접 오신 건가요?”
정우는 말없이 술잔 속을 들여다보았다. 틸러는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골케 남작이 알면 정말 고마워하겠군요. 하지만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지요. 때리지 않아도 철없는 짓을 스스로 피하 는 사람과 때려야만 철없는 짓을 포기하는 사람. 그런데 전자는 참 드물지요. 그래서 때론 폭력이 유일한 해결책이 될 때도 있습 니다. 물론 남달리 비폭력적인 환경에서 자라나신 규리하 공아 가씨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드시겠지만요.”
정우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약간 짜증스럽다는 얼굴로 말했다.
“당신도 그 사실을 모르는 척하는군요, 틸러.”
“네?”
“틸러, 유사 이래 최대의 학살극을 벌인 건 나가도 킴도 레콘도 아니에요.그건 도깨비였어요.”
틸러는 낭패스러웠다. 정우의 말대로였다. 페시론 섬과 아킨스로우 협곡에서 일어난 참극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 이 도깨비가 저지른 일이라는 사실도. 하지만 사람들은 그 지식 과 자신이 아는 도깨비를 쉽게 연결 짓지 못한다. 정우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무릎을 바라보았다.
“저 강대한 레콘들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죽지 않는 나 가들은? 못 가는 곳이 없는 킴들은? 전부 불가능하죠. 하지만 도 깨비들은 더 이상 웃을 일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거라는 사실이 분명해지면 그렇게 할 수 있어요. 당신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사 람들이 도깨비의 어진 성품과 싹싹한 태도 때문에 쉽게 그 사실 을 망각하지요. 아니, 망각하고 싶은 것일 거예요. 미안하지만 도깨비들이 피를 무조건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아니에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규리하 공 아가씨.”
고개를 끄덕이던 틸러는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 곧 깨달았다.
“어, 그런데 여쭙고 싶은 것이 있군요. 규리하 공 아가씨는 도깨비들 사이에서 자라셨는데. 그 말을 잘하시는군요?”
“그 말?”
“도깨비들은 입에도 담지 않는 말이 있잖습니까?”
“네? 아, 피요? 저는 괜찮아요. 매달 보니까.”
틸러는 술잔을 깨물 뻔했다. 가까스로 술을 삼킨 틸러는 그것 을 내려놓는 일에 모든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면 정우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틸러의 사정을 눈치 채지 못한 정우 는 태평하게 말을 이었다.
“그 문제에 관해서는 주위의 어떤 도깨비들도 도와줄 수 없어서 제가 직접 처리해야 했지요.”
틸러는 절대로 더듬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그, 그, 그렇겠군요.”
“물론 즈믄누리에서는 저도 그 말을 하지 않아요. 하지만 당신에겐 피 이야기를 해도 괜찮겠지요? 킴이니까.”
“괘, 괘, 괜찮습니다.”
“절대로 괜찮지 않다는 말투군요. 이상하네요. 당신 설마 킴처럼 생긴 도깨비인가요?”
틸러는 얼굴을 잔뜩 붉힌 채 가까스로 말했다.
“아, 저, 피이야기라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규리하 공 아가씨. 음. 다른 사람들도 그렇겠지만, 저는 상대방의 옷 아래에서 일어나는 신체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 것이 예절이라고 배웠습니다.”
“옷 아래에서 일어나는 신체 활동?”
“예. 옷을 입는 이유가 없어지는 일이니까요.”
“아하, 그거. 이해했어요. 고마워요.”
틸러는 숨쉬기가 좀 쉬워졌다. 정우가 말했다.
“다시 말하죠. 도깨비들은 큰 소리로 웃을 줄밖에 모르는 바보 들이 아니란 말이에요. 도깨비들도 폭력을 쓸 수 있어요. 하지만 누군가의 생명을 빼앗으려면 페시론 섬에 상륙했을 때 유리 기픈 골 무사장이 그랬던 것처럼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해요.”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그러면 등기부 위조는 사형의 합당한 이유가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예.”
“붓한 자루 놀려서 어떤 사람이 평생에 걸쳐 이룩한 것을 뺏는 것은 가혹한 일입니다.”
“칼 한 자루 놀려서 어떤 사람의 평생을 뺏는 일은?”
“그러면 어떻게 판결하실 생각이십니까?”
“가서 그러면 안 된다고 가르쳐 주고 앞으로 안 그러겠다는 약속을 받아야지요.”
틸러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규리하 공 아가씨, 그렇게 설득해서 들을 사람 같으면 애초에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그래도 할 수 없죠. 남의 피를 마시면 오래 살 수 있지만 결 국 지독한 피 냄새를 풍기게 되니까.”
틸러는 눈을 끔뻑거릴 수밖에 없었다. 틸러의 표정을 본 정우 가 활짝 웃었다.
“아, 미안, 미안해요. 이건 저를 귀여워해 주셨던 어르신이 들 려주신 이야기지요. 당신도 어쩌면 그분의 성함을 알 거예요. 비 형 스라블이라는 분인데, 알아요?”
“물론입니다. 굉장히 유명한 분이지요. 승천한 티나한의 친구 분이잖습니까.”
“비형 어르신은 해몽서를 쓰고 계세요. 그 일 때문인지 모르겠 지만 온갖 옛이야기를 많이 수집하셨어요. 어르신은 언젠가 제게 키탈저 사냥꾼의 옛이야기를 들려주신 적이 있지요.”
“무슨 이야기입니까?”
정우는 새카만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옛날에 네 마리의 형제 새가 있었어요. 네 마리의 식성은 모 두 달랐지요. 한 마리는 눈물을, 한 마리는 피를, 한 마리는 물 을, 그리고 한 마리는 독을 마셨어요. 그중 가장 빨리 죽는 것은 눈물을 마시는 새였대요. 눈물은 도저히 몸 안에 둘 수 없어서 밖으로 흘려보내는 것이니까. 그런 해로운 것을 마시기 때문에 눈물을 마시는 새는 가장 빨리 죽지요. 그렇다면 가장 오래 사는 건 어떤 새일까요?”
“글쎄요. 말씀하신 것들 중에 장수에 도움이 되는 것이 있나 의심스러운데요. 어떤 새지요?”
“피를 마시는 새. 아무도 흘리고 싶어하지 않는 것을 마시니까 요. 하지만 그 피비린내 때문에 아무도 피를 마시는 새에겐 가까이 가지 않아요.”
그럴듯하다고 생각한 틸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우가 계속 말했다.
“비형 어르신께서는 그 이야기를 해 주시고 나서 제게 질문하 셨지요. 피는 누구도 흘리고 싶어하지 않는 귀중한 것인데, 왜 몸 밖으로 나오면 누구도 좋아하기 힘든 피비린내를 풍기냐고. 틸러, 당신은 대답할 수 있겠어요?”
“모르겠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몇 달 동안 저는 그날이 올 때마다 피를 마시는 새가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어머, 미안 해요. 옷 아래 이야기는 금기지요. 사과했으니 그렇게 제가 못 볼 물건이나 되는 것처럼 외면하는 일은 삼가 주세요. 고마워요. 저도 그 답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피를 마시면 오래 살 수 있 어도 피비린내를 풍긴다는 것은 이해했어요.”
틸러는 하품이 나올 만큼 평범한 윤리관이라고 생각했다. 이득 을 위해 타인을 괴롭히지 말라. 모든 도덕의 기초가 될 수 있는 내용이지만, 그렇기에 거기에는 자극적인 면이 전혀 없었다. 틸 러는 조심스럽게 웃었다.
“어떤 사람은 피비린내를 풍기더라도 오래 살고 싶어합니다. 그런 사람은 알고서 그러는 거니 설득할 수 없습니다.”
정우는 물끄러미 틸러를 바라보았다. 틸러는 그녀의 얼굴에 떠 오른 것이 무슨 표정인지 생각하다가 그것이 실망감에 가까운 것 이라고 판단했다. 틸러는 자신의 현실적인 말이 정우의 이상주의 를 상처 입힌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해였다.
“틸러, 당신도 시카트처럼 저를 가르치려고 드는군요.”
“예?”
“물론 즈믄누리를 나와서 만난 모든 사람들이 저를 가르치려고 드는 것에 익숙해졌어요. 하지만 자기가 확실히 아는 것만 가르 쳐 주는 대장군님 같은 분은 정말 드물군요. 저는 당신도 대장군 님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당신도 다른 사람들처럼 잘 모르면서 가르치려고 하네요. 전 그게 싫어지기 시작했어요.” 틸러는 불쾌함을 느꼈다.
“규리하 공 아가씨, 죄송합니다만 전 잘 모르는 것을 아는 척 한 적은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제가 어떤 점에서 그랬습니까?”
“틸러, 당신은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안다고 믿겠죠. 미안하 지만 당신은 잘못 알고 있어요. 저는 어린애가 아니에요. 나쁜 짓 하지 말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서 이렇게 길게 말한 것은 아니란 말이에요.”
틸러는 당황했다. 그리고 그 당황 때문에 사과할 기회를 놓쳤 다. 스스로도 원하지 않는 논쟁에 뛰어들고 마는 자신의 버릇이 자존심 때문인지 호승심 때문인지 고민하며 틸러는 말했다.
“규리하 공 아가씨께서 말씀하시려는 것을 미처 짐작하지 못한 제 우둔함에 대한 질책은 얼마든지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짐작한 의미가 아니라면 규리하 공 아가씨께서는 무슨 이야기 를 하신 겁니까? 골케 남작은 오래 살고 싶어서 파노의 피를 마 셨습니다. 아가씨는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 것 아닌가요?”
“아니죠. 저는 골케 남작이나 파노 영감님 때문에 길을 나선 것이 아니에요.”
틸러는 완전히 어리둥절해졌다. 그는 그러면 누구 때문에 길을 나선 거냐고 정우에게 묻고 싶었다. 하지만 끝내 질문하지 못했 다. 먼 곳에서 그가 기다리던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 소리는 파노를 깨웠고 정우를 벌떡 일어나게 했다. 정우는 소리의 방향을 가늠하려 애쓰며 캄캄한 어둠을 바라보았다.
얼마 후 정우는 그녀의 시대에 속한 것들 중 후대에 전설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들 중 하나를 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