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2권 : 제국의 대장군 [6장] – 바람 속의 돌 5
엘시 에더리는 걱정스러워 하는 눈빛으로 부냐 헨로의 안색을 살폈다.
“정말 괜찮은 겁니까?”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요. 기뻐서 기절한 거예요.”
부냐는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래서 대신 엘시의 오른손을 붙잡았다. 기분 같아서는 그의 무릎에 앉고 싶었지만, 그리고 약혼자의 목을 끌어안고 싶 었지만 부냐는 가까스로 자신을 억누르며 말했다.
“정말 기뻤어요, 엘시.”
부냐의 떨리는 눈매를 본 엘시는 고개를 조금 숙였다. 백작은 왼손으로 부냐의 손등을 덮어 꼭 쥐었다.
“그러시다면 안심하겠습니다만, 혹 노역 조건이나 환경에 대 해 하실 말씀은 없으십니까? 보복을 두려워할 필요는 조금도 없 습니다.”
“아뇨. 그런 것 없어요. 설령 있다 해도 말하지 않을 테지만.”
엘시는 고개를 조금 갸웃하다가 벌을 받는 죄수의 신분으로 처 우의 개선을 요구할 수는 없기에 말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 다. 그러나 부냐의 의도는 달랐다.
“이곳을 지내기 좋은 곳으로 바꾸고 싶진 않아요. 여기에 계속 있으려는 것처럼 보이니까.”
엘시는 부냐의 눈을 바라보다가 투박한 동작으로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흥분 때문에 민감해져 있던 부냐는 엘시의 반응이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것에 약간 당황하여 말했다.
“죄수가 감옥을 좋아할 수는 없잖아요?”
“예,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부냐는 그 말이 마치 따귀를 맞는 것 같았다. 문득 부냐는 이곳을 지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는 거부감이 엘시에게도 적용되어야 함을 깨달았다. 노역 조건이나 환경에 대한 엘시 의 질문은 부냐가 이곳에서 계속 지내야 한다는 말과 같다. 부냐 는 그 의미에 충격을 받았고, 그래서 그것을 외면했다. 부냐의 입이 자신도 모르게 수다스러워졌다.
엘시는 조용히 부냐의 말을 경청했다. 특이한 일이었다. 부냐 자신도 스스로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 염사 보조인 모씨는 바깥에 있는 아들을 보고 싶어해요. 동생이 그 아 들을 맡아 기르고 있는데 그 동생은 모씨의 말에 따르면 선인장 을 맡겨도 말라죽게 할 만큼 무성의한 사람이래요. 그래서 몹시 걱정하고 있지요. 염사 모씨는 자신의 동상을 숨기려고 해요. 그 는 계속 일해야 하거든요. 유수부에서는 모씨에게 수도 요금을 내지 않으면 물을 끊겠다고 했대요. 그런데 모씨에게는 어린 아 기가 있거든요. 얼마나 물이 많이 필요하겠어요. 하늘누리의 물 값은 너무 비싸요. 물론 이곳에 우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강이 있는 것도 아니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여기서 원추리문에 다 닐 때 알던 여자의 시체를 봤어요. 그리 잘 알던 사람은 아니고 그저 면식이 있는 정도였지만 기분이 정말 이상했어요. 그 여자 를 잘 알지 못했다는 것이 굉장히 미안한 일처럼 느껴졌어요. 그 냥 같은 수업을 하나 들었을 뿐인데. 부위였어요. 학교 다닐 수 있었던 걸 보니 가세가 그럭저럭 괜찮았나 봐요. 하긴 그래서 가 족들에게 돌아갈 수 있는 것이겠지요………….
부냐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열패감에 손끝을 떨며 그녀는 엘 시를 바라보았다. 엘시는 한결같이 부드러운 얼굴로 그녀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를 구출해 낼 방도를 아직 찾지 못하셨어 요” 부냐는 그 말이 입천장에 진득하게 달라붙어 있다고 느꼈다. 혀로 누르면 그 말이 팍 터질 것 같다.
부냐는 입술을 핥았다.
“얼마 전에 성채매장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엘시의 평온한 얼굴에 갑자기 금이 갔다. 황제의 대장군은 다 시 웃음을 머금었지만 웃기까지 걸린 시간은 다른 곳을 보고 있 던 사람도 깨달을 수 있을 만큼 길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셨습니까?”
“예. 염사들은 바깥에 들락날락하니까요. 그리고 염사들과 사 이가 좋은 보조인들도 있고요. 성 하나를 통째로 파묻은 분이 있 다던데, 사실인가요?”
“그렇습니다. 규리하 공 비셀스 규리하입니다. 아이저 규리하 의 장녀지요.”
“옛날에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여자들끼리 모이 면 간혹 그녀의 이야기가 나왔거든요. 인상이 깊었어요. 도깨비 들 사이에서 자랐다지요? 그러면 그 여자도 도깨비불을 쓰나요?”
“아닙니다. 그것은 도깨비만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딱정벌레는 잘 탄다고 하더군요.”
“그런가요. 아랫사람의 잘못을 꾸짖기 위해 성을 묻었다기에 아주 무서운 여자일 거라 생각했어요. 아주 어릴 때부터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했으니 성격이 괴팍할지도 모르잖아요. 그래서 불 을 쓰면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했지요. 정말 무서운 분인가요?”
“도깨비 같은 사람입니다. 당신은 도깨비를 무서워하지 않으시
겠지요.”
부냐는 천장이 무너질 것을 걱정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면 어질고 착한 분인가요? 남자들이 좋아할까요?”
“저는 비셀스 규리하에 대한 남자들의 평이 어떠한지 알지 못 합니다. 사람들은 그녀가 성을 묻은 사실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럴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녀가 어떤 여성인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부냐는 언니의 초대를 받아 처음 헨로 가를 찾아왔을 때의 엘시를 떠올렸다.
그 이전까지 그녀가 들었던 엘시에 대한 이야기는 엄청난 것이 었다. 상상할 수 없는 전공을 세운 사람, 술김에 기적을 만든 사 람, 복무 연한에 대한 제국군의 불문율을 모조리 깨트린 사람. 자신이 군인의 동생이며 낭만적인 소녀가 아니라고 믿고 있던 부 나는 엘시에 대해 실망할 거라고 예상했다. 거칠고 투박한 전사 가 성큼성큼 들어와 손으로 음식을 집어먹고 술을 퍼마시고 고함 을 질러도 상심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어쨌든 그녀는 만질 수 있 게 된 전설은 환멸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알 만한 나이였다.
하지만 그날 엘시는 칼리도의 백작만 데려오고 무례한 전사는 데려오지 않았다. 그것은 충격이었다. 엘시가 돌아간 다음 부냐 는 자신의 일부가 엘시와 함께 떠났다고 느꼈다.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부냐의 느낌은 정말 그러했다. 언니인 니어엘마저도 그렇 게 표현했으니까.
‘너 여기에 다 있는 거야?’
니어엘이 그렇게 물었을 때 부냐는 아스화리탈의 날개를 쓰다 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지금, 부냐는 자신이 도대체 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알 수 없었다. ‘바보. 당신도 남자잖아요! 왜 다른 남자의 평이 필요해요? 당신이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 달라는 거예요.’
엘시는 자신이 남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아차리기 어려운 사실은 아니니까. 하지만 자신이 정우를 평가하는 남자가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부냐 외의 다른 여자에게는 관심 없 다는 투로 말한 자신에 대해 부냐가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 자 엘시는 약간 초조했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엘시는 정우의 단점으로 파악될 만한 말들을 꺼냈다. 그녀의 무모함, 그녀의 무례함, 그녀의 무지함, 정우가, 정우는, 정우의, 정우에게, 정우를.
엘시가 계속해서 꺼내 놓는 정우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부냐 는 미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부냐는 무의식적으로 정우를 변 호하기 시작했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가엾은 여자다, 도깨비의 사회에 익숙한 여자다, 원하지도 않는 낯선 세상에 갑자기 떨어 진 여자다. 비셀스가, 비셀스는, 비셀스의, 비셀스에게, 비셀스 를, 비셀스를, 비셀스를………….
“비셀스를 도와주세요.”
“예?”
“비셀스를 도와주세요.”
엘시는 불편한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기분으로 부냐를 바라보 았다. 부냐는 하얗게 변한 얼굴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손이 언제 엘시의 손에서 빠져나왔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그녀의 주위에는 그녀를 도와줄 사람이 없어요. 당신은 도깨 비 무사장과 친하지요. 당신도 비셀스처럼 도깨비에게 익숙한 인 간이에요. 많이 바쁘신 것은 알아요.하지만 조금만 도와주신다 면 그녀는 크게 기뻐할 거예요. 의지가지없는 처지니까……… 약간의 도움도 큰 힘이 될 거예요.”
엘시는 부냐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 이전까지 그가 들었던 부냐에 대한 이야기는 오직 그녀의 언니가 내린 평가뿐이었으므로 엘시는 그것이 객관적일 리 없다 고 믿었다. ‘우리 부모님께서는 작품을 두 개 만드셨습니다. 그 런데 무턱대고 만든 첫 번째 작품보다는 경험을 좀 쌓은 후에 제 작한 두 번째 작품의 완성도가 더 높습니다.’ 엘시는 그것이 그 저 동생에 대한 애정의 증거이자 농담이며 겸양의 표현이라고 생 각했는데, 그가 보기에 니어엘은 이미 훌륭한 ‘작품’이었던 것이 다. 니어엘보다 더 우수한 작품이라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던 엘 시는 귀염 받고 자란 응석받이가 맵시를 부리느라 어색한 걸음으 로 나타나 모든 관심이 자신에게 주어져야 마땅하다는 투로 징징 거린다 해도 당황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어쨌든 엘시는 자신의 여성관은 모친이나 니어엘 헨로 또는 치천제 같은 여인들에게 높 은 점수를 주는 쪽이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 부냐는 자작가의 영애로 행동했을 뿐 응석받이는 동석시키지 않았다. 엘시는 감탄했다. 헨로 가를 떠날 때 엘시는 결심을 굳혔다. 쥐딤에 가까운 칼리도를 다스렸기에 그것이 자신의 의무라 믿고 참전한 전쟁이었다. 운이 좋아 전공을 세웠으니 귀향해도 무방할 거라 믿었던 엘시는 ‘어머님의 며느릿감과 함께 돌아갈까 합니다.’ 라는 편지를 썼다.
그 약속의 이행은 아직까지 보류되어 있다.
그리고 엘시는 지금 그 약속을 영원히 지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엘시는 갑자기 자신이 왜 여기에 와 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특별한 용건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 부냐를 석방할만한 계기도 만들지 못했다. 엘시는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이유 가 분명히 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윽고 그 이유가 떠올랐다. 엘시는 이곳에 확인하러 온 것이 다. 그와 부냐의 변함없는 애정을. 스카리 빌파가 무엇이라 말하 든, 사람들이 무엇이라 말하든 그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엘시는 그것이 괴이한 농담 같았다.
“그것을 원하십니까.”
“예?”
엘시는 옅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정우 규리하를 돕기를 원하십니까?”
부냐는 피곤한 듯 눈을 비볐다. 그리고 손가락에 묻어 나온 눈물을 엘시에게서 감췄다.
“당신만이 그럴 수 있어요. 그녀를 도와주세요.”
“무슨 이야기를 들으셨는지 알 것 같습니다. 제가 당신과 파혼 하고 정우와 결혼할 거라는 이야기를 들으셨겠지요.”
부냐는 깜짝 놀랐다. 그 단도직입적인 태도에 놀란 것이 아니 라, 그렇게 말한 사람이 엘시라는 사실에 놀랐다. 니어엘은 군의 일을 처리할 때 엘시가 파악, 결단, 실행이 모두 빠르다고 이야 기했지만 부냐는 그런 엘시를 본 적이 없었다.
부냐가 처음 보는 엘시가 말했다.
“제가 당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세 가지입니다. 그중에 당 신이 요구한 일은 애석하게도 없습니다. 저는 폐하께 당신의 방 면을 계청드리지 않겠습니다.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대신 저는 폐하께 더 많은 것을 드리려 시도할 수 있습니다. 폐하라는 호수에서 물을 퍼낼 수는 없지만, 대신 거기에 더 많은 물을 부어 넣 어 황은이라는 물결이 넘치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저는 필요한 만큼의 무장 병력을 동원하여 방해되는 모든 것을 제압하는 방식으로 백화각을 장악하여 당신을 구출할 수 있습니 다. 저는 제국 만병장이니까요.”
부냐는 질릴 것 같았다. 엘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결국 그녀는 군인의 동생이고 엘시의 약혼자니까. 통제 할 수 없는 압박 속에서 그는 자신이 가장 잘 취할 수 있는 태도 를 돌파구로 선택한 것이다. 엘시는 군인으로 말하고 있었다. ‘상정된 전략적 목표에 적용할 수 있는 전술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엘시가 무감정하게 사실을 열거하는 군인의 역할을 수 행하고 있다는 사실은 엘시의 다음 말에서 잘 드러났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약혼을 파기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제약 혼자이기 때문에 방면되지 않는 것이라는 풍문이 사실이라면, 비 록 저는 거기서 타당함을 느낄 수 없지만, 약혼 파기를 통해 당 신의 방면을 꾀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부냐는 긴장 때문에 바들바들 떨리는 왼손을 꼭 움켜쥐었다. “세 가지가 있는데, 그래서요?”
“저는 지금껏 첫 번째 방법만 고집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원 한다면 다른 방법들을 고려하겠습니다.”
“왜죠?”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짙은 말리 향.
부냐는 코끝을 찌르는 것 같은 말리 향을 느꼈다. 이상하다.
말리는 없는데.’부냐는 자신이 지어 준 옷을 입고 있는 남자를 당혹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 남자는 누굴까? 나를 사랑한 다는 이 남자는 부냐는 세 번째 엘시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약혼자였던 남자도 아니고 군인으로 말하고 있는 남자도 아닌 남 자였다. 그 낯선 남자가 말했다.
“심지가 심지로 남고 초가 초로 남아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 습니다. 불꽃을 피우기 위해 심지는 검게 타고, 초는 촛농으로 변해 녹아내려야 합니다. 부냐, 당신은 그 때문에 제가 타고 녹아도 상관없다고 결정한 사람입니다. 당신과 함께 변하고 싶습니 다.”
부냐는 기묘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당신이 꼰 실이 시커멓게 타고 당신이 정제하여 굳힌 밀랍이 녹아내리길 바란다고?
“당신, 엘시 에더리 맞아요?”
“제가 원한다면, 바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이라도 하시겠다는 건가요?”
엘시는 약간 슬픈 표정을 지었다.
“저는 희생을 감수하겠다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건 가식이 되고 위선이 될 가능성이 높겠지요. 제가 말씀드린 세 가지 방법 은 전부 제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바르지 못한 일은 하지 않습니다.”
충격 속에서 부냐는 눈을 크게 떴다. 거기에 낯익은 사람, 엘 시 에더리가 있었다. 부냐는 갑자기 웃고 싶었다. 하지만 웃음을 터뜨리면 틀림없이 울게 될 거라는 확신도 느꼈다.
“그렇게 이성적이어야 하나요?”
“예?”
“도대체 변하고 싶다는 것이 무슨 말씀이죠? 당신은 조금도 변하지 않을 작정인데.”
부냐는 자기 손목을 부러뜨리고 싶은 사람처럼 보였다. 엘시는 낭패감과 의심 속에서 약혼자를 바라보았다. 부냐가 말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만 하겠다면, 당신은 그대로 당신이잖아 요. 곰도 가끔은 두 발로 서요. 그럴 수 있으니까. 그래도 곰은 곰이죠.”
“부냐, 그렇다면 제가 위선자가 되길 바랍니까? 당신을 위해 저 스스로 바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기를 바랍니까? 저는 당신이 그런 것을 바란다고………….”
“그만하세요!”
엘시는 입을 다물었다. 부냐는 괴물 보듯 엘시를 바라보았다. “저요? 제가 당신에게 뭘 바라냐고요? 모르겠어요. 당신을 존 경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건 아주 중요한 거라고 믿었지요.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의 짝이 되는 것이오. 그런데 지금은 아무 것도 모르겠어요. 바보가 된 것 같아요. 당신은 왜 아주 미친 짓 을 하지 않느냐고 묻고 싶어요. 당신은 왜 그렇죠? 엘시, 당신은 왜 취했을 때조차 강한 거죠?”
부냐는 자신의 말에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깜짝 놀란 눈으로 엘시를 보던 그녀는 두려움 섞인 의심 속에서 말했다.
“엘시, 왜 당신의 친구는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는 도깨비 뿐이죠?”
엘시는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탈해 머리돌이 그의 친우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의 친구가 탈해뿐인 것은 아니 다. 그러나 부냐의 질문은 끝나지 않았다.
“저를 정말 사랑하세요?”
“사랑합니다.”
“그럼 저를 당장 여기서 꺼내 주세요.”
엘시는 일어서면서 칼을 뽑았다.
칼날의 새파란 빛에 놀란 부냐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밀었다.
엘시는 칼을 든 오른손을 부냐의 반대편으로 오게 한 다음 왼손을 내밀었다.
“나갑시다.”
“예?”
엘시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 허리를 굽힌 엘시는 부냐의 손목 을 붙잡아 당겼다. 부냐가 비틀거리며 일어서자 엘시는 그대로 문 쪽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발로 문을 걷어찼다.
문이 부서지는 소리에 부냐는 질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몸이 뒤로 당겨진 것을 느낀 엘시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저를 당기지 마십시오. 위험합니다.”
그리고 엘시는 부서진 문을 통해 나갔다. 부냐는 끌려가듯 걸 어가야 했다. 그녀는 엘시의 뒤통수를 향해 다급하게 말했다.
“엘시, 도대체 지금 무엇을………..”
그때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문 부서지는 소리를 들 은 사람들이 오는 것을 깨달은 부냐는 겁에 질렸다. 그제야 부냐 는 이것이 탈옥임을 깨달았다. 아니, 탈옥인가? 부냐는 잠시 생 각을 정리할 여유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엘시는 부냐의 손목 을 쥔 채 성큼성큼 걸어갈 뿐이었다.
모퉁이를 돌자마자 누군가가 나타났다. 놀란 표정으로 뛰어온 것은 두 명의 염사였고 그들은 칼을 보자마자 기겁하며 물러섰 다. 그러나 그들은 곧 공포보다 더한 의문을 느꼈다.
“각하? 지금 뭐 하시는…………….”
엘시는 대답 대신 칼을 세차게 좌우로 휘둘렀다. 통로 양쪽 벽 에 칼이 부딪히며 타당 소리와 불꽃이 튕겼다. 부냐는 그만 비명 을 질렀고 염사들은 넋 빠진 얼굴이 되었다. 엘시는 두 걸음 걸 은 다음 다시 같은 일을 반복했다. 탕, 타당! 염사들이 물러섰 다. 엘시는 세 걸음 걸은 다음 또 양쪽 벽을 후려쳤다.
의미가 분명한 행동이었다. 염사들은 비명인지 신음인지 구분 하기 어려운 소리를 내고 머리를 싸쥔 채 도망쳤다. 엘시는 그 뒤를 따라 성큼 걸어갔다. 엄청난 사태에 질린 부냐는 한참 후에 야 겨우 소곤거리듯 말할 수 있었다.
“엘시, 지금 뭐 하는 거죠?”
“이곳을 나가고 있습니다.”
“탈옥? 탈옥인가요? 지금 탈옥하는 거예요?”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저는 출옥이라고 표현하 고 싶습니다.”
부냐는 엘시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때 엘시가 갑 자기 걸음을 멈췄다. 관성 때문에 두어 걸음 걸어간 부냐는 엘시 의 옆에 섰다. 그녀는 앞쪽의 광경을 보고 숨이 멎을 듯한 충격 을 받았다.
부냐가 처음 이곳으로 들어왔을 때 통과했던 커다란 문이 보였 다. 장의 기관이긴 하지만 죄수들이 노역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 기 때문에 백화각의 보안 태세는 감옥에 가깝다. 그들의 앞을 가 로막고 있는 것은 두께가 30센티미터는 될 커다란 문이었고 그 앞에는 무장한 경비병들이 창을 꼬나든 채 도열해 있었다. 얼핏 보아도 그 수가 열다섯 명은 되어 보였다. 그리고 양쪽의 통로와 그들의 뒤편에서도 발소리가 들려왔다. 부냐는 뒤를 돌아보았다. 경비병들이 창끝을 겨눈 채 다가서고 있었다. 엘시는 뒤쪽의 상 황을 흘끔 보고는 다시 앞을 막고 있는 경비병들을 노려보았다. 경비병들은 계속 충원되고 있었고 이제 그 수는 서른에 육박했다. 여기저기서 문 닫히는 소리와 창살문 떨어지는 소리 등이 쾅쾅 들려왔다. 먼 곳에서 고함과 욕지거리가 들려오고 비명처럼 들리 는 소리도 웅웅 울렸다. 염사나 경비병들이 동요할지 모르는 죄 수들을 거칠게 다루는 듯했다. 그러나 엘시와 부냐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태풍의 눈 가운데 서 있는 것 같았다.
부냐가 주저앉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엘시가 말했다.
“문을 열어라.”
경비병들이 욕설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 욕설의 대상은 엘시나 부냐가 아닌 경비병들 자신인 것 같았다. 그들은 엘시의 요구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분노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못했다. 상황에 변화 가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 때까지 기다린 다음, 엘시는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부냐는 기겁하여 그의 팔에 매달렸다.
엘시는 멈춰 서서 부냐를 돌아보았다.
부냐의 눈과 눈썹, 떨리는 볼, 부푼 아랫입술, 경직된 턱은 한 편의 선언문이었다. 하지 마세요. 우리는 죽을 거예요. 저 사람 들이 그럴 거예요. 당신이 만병장이라고 해도 지금 당신은 혼자 예요. 수십 개의 창날이 몸 곳곳을 후벼 팔 거예요. 여기서 죽자 는 건가요? 함께 죽자고요? 그 모든 선언을 읽은 엘시는 차분하 게 말했다.
“나갑시다, 부냐.”
“제발…….”
“각하! 멈추십시오!”
부냐는 자신이 쓰러지리라 확신했다. 그녀의 다리에서 힘이 빠 져나가는 순간 엘시도 그것을 깨달았다. 그는 재빨리 부냐를 끌 어당겨 왼팔로 끌어안았다. 그리고 칼끝으로 외침이 들려온 쪽을 겨냥했다.
염사장 두이만 길토가 달려오고 있었다. 창끝을 나란히하고 있 는 경비병들 앞으로 뛰어나온 그는 백작을 향해 다시 외쳤다.
“각하, 뭐 하시려는 겁니까?”
“이분과 함께 여기서 나가려고 한다.”
두이만 길토는 고양이를 안고 있는 소녀를 본 맹견처럼 으르렁거렸다.
“각하께선 그러셔도 됩니다. 하지만 그 여자는 죄수입니다. 저는 그 여자를 이곳에 가둬 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나는 자네가 그 명령을 지킬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각하, 이러지 마십시오.”
“스스로 그 명령을 무시하겠나, 그렇지 않으면 무시하게 해 주 기를 바라나? 어느 쪽이 좋겠나?”
무뢰배 같은 협박을 하는 엘시의 목소리는 부냐를 소름 끼치게 했다. 부냐는 황급히 엘시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도저히 빠져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백화각 경비병들의 창끝에 죽을 것 을 알기에 자포자기 상태에 빠진 대장군의 얼굴을 보는 것이 두 려웠지만 다른 곳을 볼 수도 없었다.
엘시는 무표정했다. 연인과 함께 맞이할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사형수들은 마지막에 어떤 표정을 지을 까? 부냐는 그런 것을 구경할 수 없었다. 정문의 모습 때문에 원 추리문이라 불리는 데오늬 달비 여성 기숙학원에 다니던 시절, 부냐의 동기생 중에 처형장의 모습을 구경했다는 학우가 있었다. 부냐와 다른 동기생들은 어딘가의 남작 영애라는 그녀를 존경할 뻔했다. 상급생들조차 그녀를 좀 어려워한다는 인상을 받았을 때 부냐는 그 사실에 우쭐함을 느꼈다. 결국 부냐와 다른 동기생들 은 그녀를 존경하지 않기로 결정했지만, 그것은 재미 삼아 사소 한 물건들을 훔치는 그녀의 손버릇 때문이었지 그녀의 처형장 참 관이라는 것이 몇 십 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잠깐 훔쳐본 것일 뿐 이라는 사실 때문은 아니었다.
부냐는 엘시의 감정 없는 얼굴이 자신이 상상 속에서만 그려 봤던 사형수의 마지막 표정이 아니기를 애타게 기원했다. 그때 두이만이 손을 들어 올렸다.
경비병들이 창끝을 전율시켰다.
부냐는 엘시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엘시의 표정 없는 얼굴에서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부냐는 애원하는 시선을 염사장에게 옮 겼다. 하지만 염사장은 엘시를 노려볼 뿐이었다.
갑자기 염사장은 코끝으로 웃었다. 피식피식 웃던 그는 손을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옆으로 비
켜라.”
경비병들은 움찔하여 염사장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움직이지 않자 염사장은 투덜거리며 가까이 있던 경비병의 창을 빼앗아 들 었다. 그리고 창을 거꾸로 쥔 채 창대를 경비병들 사이에 집어넣 어 좌우로 흔들었다. 경비병들은 성난 소리와 당황한 소리를 내며 좌우로 비켜섰다. 그렇게 길을 만든 염사장은 창을 바닥에 짚으며 말했다.
“라호친가히 같은 놈들. 꼭 손을 대야 명령을 알아먹나. 빨리 좌우로 비켜!”
경비병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서로를 쳐다보며 문 앞에 서 비켜섰다. 문이 완전히 노출된 것을 확인한 염사장은 자신도 옆으로 비켜서며 외쳤다. “문을 열어!” 경비병들은 다시 당혹한 표정으로 염사장을 바라보았지만 염사장이 다시 창을 들어 올리 는 것을 보고는 머리를 내저었다.
부냐는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거대한 문은 돌을 깎는 듯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칼날 같은 빛에 부냐는 눈을 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