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2권 : 제국의 대장군 [6장] – 바람 속의 돌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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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마시는 새 2권 : 제국의 대장군 [6장] – 바람 속의 돌 8


정우는 두 손으로 뺨을 토닥이며 할 말을 열심히 정리해 보았 다. 하지만 흥분 때문에 가다듬은 말들이 머릿속에서 마구 뒤엉 켜 버렸다. 밤중에 갑자기 찾아온 틸러가 탈해가 왔다고 알려 주 었을 때부터 그녀는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우 성주의 조 언을 직접 전하기 위해 탈해가 찾아온다고 알려 주었을 때 정우 는 손쓸 수 없을 만큼 흥분해 버렸다.

어떻게 잠자리에서 나왔는지, 어떻게 옷을 입고 어떻게 몸단장 을 끝냈는지 기억나지도 않았다. 자신이 아직도 잠옷 차림이라고 생각한 정우는 깜짝 놀라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옷을 정확하게 차려입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기억상실증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흥분하고 허둥대고 혼란스러워하던 정우는 결국 자신의 상태 를 인정하고 그것을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눈을 감 고 호흡에 집중했다.

호-하-호-하-. 정우는 자신의 숨소리가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숨소리에 대해서도 잊었다. 편안한 어둠만 남았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어 왔다.

‘외로웠구나, 정우.’

정우는 조금 놀랐지만 정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탈해를 만나 게 된 것은 기쁘고 행복한 일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흥분하 는 것은 도깨비를 너무 오래간만에 보기 때문이다. 다른 시간과 다른 장소에서 탈해를 기다릴 때에는 해야 할 말을 궁리하거나 하지 않았다. 대신 문을 열고 들어서는 탈해를 본 순간 가장 먼 저 떠오른 농담을 할 것이다. 탈해 또한 농담으로 응수할 테고, 그러면 두 사람은 요란하게 웃을 테고, 아마도 두 사람 모두 용 건이 뭔지 까먹었다는 사실에 낭패감을 느낄 것이다. 그것이 탈 해와 정우가 보통 만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태어난 이래 가장 긴 시간 동안 도깨비와 헤어져 있어 야 했던 정우는 그 옛날의 방식에 생경함을 느꼈다. 그래서 정우 는 탈해를, 좋은 친구 탈해를 마치 어려운 손님처럼 기다린 것이 다. 자신이 탈해를 여전히 친구로 여기고 있고 그를 만나게 되어 서 기쁘다는 사실을 강조해 보이고 싶어 안달하는 것이다. 눈 깜 빡임을 규칙적으로 정확하게 하려 애쓰는 사람처럼.

‘이런 거 그만두자. 옛날처럼 하자.’

정우는 결심했다. 감정을 강조해 보일 필요는 없다. 아마 탈해 는 그것을 가지고 정우를 마구 놀릴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정 우는 웃고 싶어졌다.

‘와! 큰일날 뻔했네, 탈해. 나를 비웃게 놔두진 않을 거야.’

정우는 긴장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엘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시 에더리입니다. 탈해 머리돌과 함께 왔습니다. 들어가겠습니다.”

정우는 눈을 떴다. 갑자기 어둠에서 빠져나온 정우는 문이 열리고 엘시가 들어서는 모습을 보았다. 그 순간 그녀는 조금 전의 결심을 깡그리 잊고 자신이 이곳에 없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녀 의 몸은 조각가가 열정을 잃고 방치해 둔 미완성 조각품처럼 볼 품없는 모습으로 굳었다.

정우의 정신 상태를 알 리 없는 엘시는 정중한 동작으로 비켜 섰다. 정우는 엘시가 비켜난 자리를 통해 커다란 도깨비가 들어 서는 것을 보았다. 탈해 머리돌이었다.

빗속을 날아온 탓인지 탈해는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 다. 하지만 그 얼굴은 단순히 젖은 것 이상으로 후줄근해 보였 다. 정우는 탈해가 아픈 것이 아닌가 하고 깜짝 놀랐다. 탈해는 의기소침해 보였고 불편해 보였다. 그는 자기 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탈해는 얼굴 을 일그러뜨렸다. 정우는 그것이 아마도 미소일 거라고 생각했지 만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받아들일 거라 자신할 수는 없었다. 탈 해가 말했다.

“어, 안녕, 정우?”

‘안녕?’ 정우는 멍한 얼굴로 탈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정우 는 탈해가 자신에 대해 깜짝 놀랐다는 것을 알았다.

정우는 깨달았다. 탈해 또한 이 만남 때문에 흥분해 있었고, 자신의 기쁨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싶어했고, 적절한 말들을 고르 느라 끔찍한 시간들을 보냈고, 결국 흥분 때문에 그 말들을 다 까먹고 아무 말이나 꺼냈다는 것을. 정우는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커다랗게 미소 지었다. 구월의 해바라기 같은 미소를 짓는 정우를 보며 탈해의 얼굴 또한 서서히 부드러워졌다. 정우는 두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정우는 온화하게 말했다.

“나 아줌마 되는 거야?”

부드러워지던 탈해의 얼굴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물결이 치는 것 같았다. 마침내 탈해는 폭소를 터뜨렸다. 그 모습을 보던 정 우의 입에서도 기묘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풋, 푸풋. 입술을 떨 며 애써 버티던 정우는 결국 항복했다. 그녀는 허리를 확 꺾으며 미친 듯이 웃었다. 정신없이 웃는 도깨비와 인간을 보며 엘시는 자신의 정서에 중대한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에 빠 졌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엘시는 탈해와 정우의 웃음을 이해 하게 되었다. 그들이 명쾌하게 설명해 준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왜 웃었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엘시는 대충 이 해했다. 그것은 서로 굉장히 익숙해서 어떤 벽도 세워 둘 필요가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나곤 하는 웃음이었다. 탈해에게 수건 을 건네는 정우를 보며 엘시는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했다. 

“난 아직 꽃을 피우고 싶지 않으니까 물은 그만 뿌려도 돼.” 

“미안. 빗속을 날아오다 보니 엉망으로 젖었어. 근처에 레콘 없지?”

탈해는 머리와 어깨를 대충 닦아 내었다. 그는 수건을 탁자 위에 내려놓다가 생각났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정우, 앉아, 각하도 앉으시지요. 성주님의 전언을 전하겠습니다.”

정우는 기대한다는 얼굴로 앉았다. 엘시는 전언을 전하는 것이 왜 이렇게 거창한가 생각하며 앉았다.

두 사람이 앉자 탈해는 손을 들어 올렸다가 가볍게 뿌렸다. 그 의 손에서 물방울과 함께 불방울들이 튕겨 나왔다. 그것은 허공 에 엉겨 꿈틀거리다가 바우 성주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와!”

정우는 비명 같은 탄성을 지르며 손뼉을 쳤다. 엘시 또한 꽤 놀랐다. 도깨비들이 도깨비불로 이런저런 형태를 자유로이 만들 수 있다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 형태는 어린애의 낙서 비슷한 수준이다. 하지만 탈해가 도깨비불로 만들어 낸 성주의 모습은 완벽에 가까웠다. 물론 그 도깨비불을 사람으로 착각할 수는 없겠지만 바우 성주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착각할 수도 없 었다.

바우 성주는 먼저 엘시와 정우에게 인사했다. 다음 순간 엘시 는 피식 웃었다. 바우 성주가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를 낸 것은 탈해였다.

“좋은 꿈 꾸셨나, 대장군? 그리고 정우, 좋은 꿈 꿨니?”

도깨비불로 하는 꼭두각시놀음이라고 할 것이다. 도깨비불을 향해 고개를 꾸벅하며 인사하는 정우를 보며 엘시는 다시 미소를 머금었다.

“좋은 꿈 꾸셨어요, 성주님?”

“그렇지 않아도 요즘은 좋은 꿈 좀 꾸려고 노력하는 중인데, 잘 안 되는구나. 해몽서 쓰고 있는 비형이 지배자들의 꿈에 대해 조사하고 싶다고 나를 아주 못살게 굴고 있거든.”

“저, 성주님은 이미 살아 있지 않은데요?”

“정말이야? 결국 비형이 해냈나 보군. 어쨌든 비형이 아는 범 위 내에 지배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나뿐이다 보니 아주 각다 귀처럼 달려들고 있어. 얼빠진 도깨비 한 놈 붙여서 제국 순례라 도 보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이자에게 최근에 꾼 꿈을 좀 알 려 주시면 고맙겠다는 소개장 써서.”

정우는 다시 웃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가 아는 사람들의 안부를 나누었다. 엘시는 그것을 탈해와 정우의 대화라고 해야 할지 바우 성주와 정우의 대화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물론 사실 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탈해와 정우의 대화다. 하지만 정우는 바 우 성주를 대하듯 말했고 탈해 또한 그것에 맞추어 말했다. 그런 혼란은 어쩐지 도깨비에게 어울리는 것이다.

그렇게 무심하게 관찰하고 있던 엘시에게 갑자기 도깨비불이 몸을 돌렸다.

“그런데, 엘시?”

엘시는 몸가짐을 바로하며 탈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탈해는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엘시는 못말리겠다는 심정으로 도깨비불 을 보았다.

“자네는 내게 조언을 청한 적이 없지만 한마디하고 싶은데 괜찮을까?”

엘시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바우 성주의 용건이 정우에게 있을 거라 생각했다. 탈해에게 말해 보라고 하려던 엘시는 생각 을 바꿔 바우 성주에게 말했다.

“말씀 듣겠습니다.”

“결코 신념을 잃지 않도록 조심하게. 가장 위험한 순간은 신념이 부족할 때가 아니라 신념으로 충만하다고 생각할 때야.”

깊은 의미가 있음 직한 말이었지만 엘시는 그 의미를 알 수 없 었다. 어쩐지 노인들이 좋아하는 삶의 지혜 같은 것과 비슷한 말 이었다. 지나치게 여러 번 우려내어 더 이상 국물도 나오지 않는 지혜. 그것을 우려내었던 기억만 가지고 있는 노인이 선의로 젊 은이에게 그것을 주는 광경은 한 편의 익살극이다. 그리고 일상 사이기도 하고. 하지만 엘시는 시뻐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경의 를 담아 말했다.

“감사합니다.”

바우 성주의 꼭두각시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엘시는 탈해의 관찰력과 표현력, 도깨비불 다루는 솜씨가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도깨비들이 반드시 관철하기로 한 정의를 실행해야 하 는 즈믄누리의 무사장은 도깨비불 다루는 기술을 남다른 수준으 로 익혀야 하는지도 모른다.

바우 성주의 꼭두각시는 정우를 돌아보았다. 엘시는 다시 감탄 했다. 바우 성주의 얼굴에 풍부한 감정이 나타났다. 안쓰러움과 동정심, 그리고 희망을 주고 싶다는 느낌. 엘시는 혹 그것이 탈 해의 감정이 아닌가 의심해 보았다. 바우 성주가 말했다.

“정우야.”

“예, 성주님.”

“그럴 때도 되었으니, 결혼하는 것이 좋겠구나.”

정우는 손가락을 깍지 껴 입술을 눌렀다. 그러다가 갑자기 엘 시 쪽을 살짝 훔쳐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엘시는 무슨 할 말이 있느냐고 물어보려다가 입을 닫았다. 엘시는 그녀도 하늘누리에 파다한 소문을 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엘시는 거북함과 난처함이 뒤섞인, 약간 씁쓸하면서도 달뜨는 기분을 느꼈다. 정우도 엘시가 자신의 시선을 느낀 것을 깨닫고 어색하게 이곳저곳 바라보았다. 이곳을 떠나 있어서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는 탈해는 두 사람의 표정 변화를 보곤 의아해했다. 그 사태를 타개하기로 결심한 것은 정우였다. 그녀는 도깨비들이 라면 하지 않을 말, 그러니까 즈믄누리의 성주가 한 말에 대해 이유를 요청하거나 반론을 개진하는 말을 하는 대신 곧장 다른 의문을 표시했다.

“성주님, 제 결혼 상대에 대해서도 조언해 주실 수 있으세요?” 

엘시는 헛기침을 하듯 주먹으로 입을 가볍게 막았다. 대답이 걱정되는 질문이긴 하지만 말릴 수도 없는 질문이다. 한편 엘시 는 바우가 자신과 정우가 결혼해야 한다고 말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가 어떤 논리를 짜내기도 전에 바우 성주가 말했다. 

“네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야겠지. 아, 물론 그 사람도 널 사랑해야 할 테고.”

엘시는 자신이 왜 말도 안 되는 고민을 했나 하고 허탈했지만 동시에 안도감 같은 것도 느꼈다. 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어쨌든 즈믄누리로 돌아가는 대신 이곳에서 결혼을 궁리해 보라는 건가요?”

탈해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는 지금 하려는 말이 자신의 말이 아닌 바우 성주의 말임을 확실하게 해 두고 싶은 것 같았 다. 바우 성주의 꼭두각시가 말했다.

“네가 돌아온다면 물론 기쁘겠지. 하지만 네가 대호왕처럼 독 신으로 살 것을 결심한 것도 아니잖느냐? 너는 언젠가 킴 남자와 결혼해야겠지. 그런데 즈믄누리에서는 킴 남자를 보기 어렵지. 킴 남자를 찾으려면 그곳이 좋을 거야.”

바우 성주가 하는 말은 퍽이나 상식적이고 평범했다. 정우나 탈해는 그런 평범함에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았지만 엘시는 그 정도 조언을 구하기 위해 즈믄누리의 무사장이 대륙을 횡단할 필 요까지는 없지 않았나 생각했다. 그런데 바우는 엘시가 그런 생 각을 하리라는 것을 짐작한 것처럼 말했다.

“탈해가 너를 도와줄 거다.”

“예? 탈해가요?”

“물론 탈해가 네 신랑감을 찾도록 도와줄 거라는 말은 아니다. 나는 네 인생을 망치고 싶지 않으니까.”

정우는 웃음을 터뜨렸고 엘시 또한 어정쩡한 미소를 지었다. 엘시는 그 자신에 대한 악담을 한 점 흔들림 없이 전달하는 탈해 의 모습을 장인 정신이라고 불러야 할지 예술가 기질이라고 불러 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엘시의 웃음은 곧 사라졌다.

“네 신랑감은 네가 스스로 결정하도록 해라. 탈해가 할 일은 예비 신부를 보호하는 것이 될 거다. 즈믄누리의 무사장이라면 웬만한 맹견보다는 좀 나을 거야.”

엘시는 어이가 없었다. 모든 도깨비들 중 유일하게 사람을 직 접 태워 죽일 수 있는 도깨비에 대한 평가치고는 폄하가 심하다. 비록 유사 이래 즈믄누리의 무사장이 자신의 의무를 수행한 예는 단 한 번뿐이지만 그 공포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정우도 즈 믄누리의 무사장이 보호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깨달았다. 탈 해가 말했다.

“그럼 언제나 네 행복과 건강을 기원하겠다.”

“예? 아, 예. 고맙습니다. 바우 성주님.”

탈해는 도깨비불을 사라지게 했다. 정우는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은 얼굴을 엘시에게 돌렸다.

“대장군님, 전에 말씀드린 대로 제 혼례식은 아주 무시무시한 것이 되려나 봐요.”

엘시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즈믄누리의 무사장은 도깨비 들이 가진 유일한 전투력이다. 하지만 도깨비들에게 왜 두 번째 나 세 번째 전투력을 강구하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은 없다. 사람을 상대로 도깨비불을 쓸 수 있는 도깨비는 한 명이면 충분하다. 바우 성주는 그 끔찍한 전투력을 파견하여 정우의 결혼을 보호 하게 했다. 엘시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싫었다. 한숨을 내쉬려 던 엘시는 탈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음을 발견했다. 탈 해는 엘시에게 말했다.

“무시무시한 혼례식이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결혼해 본 적 은 없지만 저는 결혼식이 아름답고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요. 제가 뭘 잘못 알고 있었던 겁니까?”

“그런 것은 아냐.”

엘시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했다. 결국 엘시는 그 설명 을 정우에게 맡기기로 했다. 도깨비에게 뭔가를 설명해 주는 것 이라면 그보다 정우가 나을 것이다. 그리고 엘시에게 그날 하루 는 지나치게 길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우에게 듣도록 하게. 오래간만에 만났으니 나눌 이야기가 많겠지. 나는 하늘누리로 올라갈 테니 편히 이야기를 나누도록 해. 너무 늦지는 말고. 자네가 이야기에 취해서 두 시간 후에도 나오지 않으면 끌어내라고 명령해 두겠어. 물러가겠습니다, 정우.”

“괜찮다면 세 시간으로 해 주시면 좋겠는데요.”

이야기에 취할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엘시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대장군님. 좋은 꿈 꾸세요.”

정우는 인사했고 탈해는 문까지 백작을 배웅했다. 백작이 돌아 가고 문이 닫힌 다음에 탈해는 정우에게 돌아왔다. 그는 몸의 물 기가 꽤 마른 것을 느끼고 꾸깃꾸깃해진 옷자락을 펴며 의자에 털썩 걸터앉았다. 탈해는 뻐끔이를 꺼내어 피워 물고는 정우를 바라보았다. 그는 정우가 무시무시한 혼례식이라는 기묘한 이야 기에 대해 설명해 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기대를 무너뜨렸다.

탈해는 왜 정우가 즈믄누리의 사정이나 다른 도깨비들의 안부를 묻는 대신 그녀 곁에 있었던 사람인 엘시에 대해 설명해 달라 고 요청하는지 의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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