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2권 : 제국의 대장군 [6장] – 바람 속의 돌 9
처용 산맥을 넘은 태양이 아라짓 제국의 동쪽 끝 자이아치를 비추었다. 하지만 하늘누리가 떠 있는 규리하는 아직 한밤중이 다. 규리하에서 일출은 앞으로 다섯 시간 후에나 일어날 사건이 다. 그리고 다섯 시간 후에도 비가 그치지 않으면 황제는 일출을 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라짓 제국의 지배자는 햇빛을 보고 있었다.
치천제는 앉거나 눕는 것 모두에 편한 의자에 반쯤 누운 채 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황제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건축학적으로도 말이 안 되고 황제의 방에 익숙한 사람들은 절대로 없다고 말 할 구조물이 놓여 있었다. 방 가운데 불쑥 솟아오른 그것은 일종 의 석비나 석벽처럼 보였다. 광장이나 황야 가운데 서 있다면 나 름대로 장엄한 풍모를 자아내었을 테지만 황제의 방 안에서 높이 는 천장에 닿을 듯하고 폭은 방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는 그 물건은 거북하고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황제의 집무실에 출입하는 이들이 전부 시력 이상을 가지고 있 어서 그런 거대한 물체를 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 물체는 황 제 외의 다른 이에겐 보이지 않으며 다른 이의 통행을 방해하지 도 않는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환상 계단과 똑 같은 물체였다. 환상 계단이 그것을 상상한 이에게만 영향을 주 듯 황제의 방에 놓여 있는 석비 또한 황제에게만 영향을 끼쳤다. 그것을 상상하여 만들어 낸 이가 황제이기 때문이다.
몇몇 사람들만 알고 있는 비밀스러운 역사에 의하면 일찍이 라 수 규리하는 이와 같은 환상벽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고 한다. 라수는 그 환상벽에 문장들을 떠오르게 하여 자신의 사고를 돕는 도구로 이용했다. 하지만 라수가 살아나서 황제의 환상벽을 보았 다면 대단히 놀랐을 것이다. 황제의 환상벽은 라수가 생을 통틀 어단 두 번만 창조할 수 있었던 모습을 띠고 있었다. 황제의 환 상벽에는 부조된 글이나 그림 대신 움직이는 영상이 있었다. 더 군다나 나가에게 익숙한 온도의 세계라는 형태로.
환상벽에 떠오른 영상 속에서 따스한 햇볕이 비치고 있는 것은 그것을 상상한 이가 나가인 치천제이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차가 운 나무껍질과 풀밭을 물결치게 하는 서늘한 바람의 움직임까지 재현되고 있었다. 다만 나가가 상상한 것이기에 소리는 별로 재현되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그런 정경을 대강 상상하는 것은 누구나 가능하다. 남달리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라면 상당히 세부적인 부분까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풍경을 한 점 빠트림 없 이 상상하여 움직이는 벽이라는 형태로 구현해 내는 것은 라수 같은 천재에게도 생에 단 두 번밖에 경험할 수 없는 상상력의 호 사다. 하지만 그 환상벽을 존재케 하고 있는 치천제의 모습은 편 안해 보였다.
황제는 환상벽에 떠오른 영상을 약간 조작했다. 그녀만 납득할 수 있고 다른 이에게는 설명할 수도 없는 방식으로, 그러자 환상 벽의 영상이 변화했다.
영상을 조작하고 있는 사람이 황제였지만 황제는 다음 순간 어 떤 영상이 나타날지 알지 못했다. 라수가 환상벽을 통해 사고할 수 있었던 것도 환상벽에 그가 예상하지 않은 글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 상황 전체는 꿈을 꾸는 것과 비슷하다. 도깨비들은 그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꿈을 만들어 내는 것은 자신이다. 하지만 꿈을 꾸는 동안에는 다음에 어떤 상황이 펼쳐 질지 모른다. 환상벽 또한 그렇다. 그것을 조작하는 자도 다음에 어떤 변화가 나타날지 모르는 것이다.
그런 예측 불가능성이 환상벽 스스로가 창조해 내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꿈과 마찬가지로 조작자의 무의식이 반영된 것인 지에 대해서는 죽은 라수도, 살아 있는 치천제도 대답할 수 없 다. 라수와 치천제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예측 불가능성을 통해 나타난 결과가 조작자의 의문에 대한 대답이라는 사실뿐이 다. 치천제가 환상벽을 만들어 내었을 때 그녀는 어떤 의문을 품고 있었다. 따라서 환상벽에 나타나는 변화는 그 의문에 대한 대답이다. 환상벽이 알려 준 대답인지 그녀의 무의식이 찾아낸 대 답인지는 알 수 없지만.
치천제는 호기심 속에 그 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변화가 끝났다. 황제는 그것을 응시했다.
그곳에 비치고 있는 영상은 기묘했다. 배경에는 도시의 폐허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 도시는 꽤 오래전에 엄청난 파국을 겪은 것 같았다. 하지만 도시를 덮친 재난이 무엇인지 일견하여 알기는 어렵다. 두껍게 깔린 화산재나 굳은 용암 같은 것이 없으므로 화 산 폭발은 아니다. 건물의 일부를 다른 건물의 윗부분에 얹어 놓 은 재난이 지진일 리는 없다. 지진은 건물을 날려 올리지는 않으 니까. 같은 맥락에서 화재도 아니다. 강력한 유체의 습격, 그러 니까 대해일이나 산사태 같은 것이라면 그런 식의 피해를 입히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영상 속에 비치는 도시의 폐허는 푸 른 밀림 한가운데 있었다. 해일이나 산사태가 일어날 장소가 아 니다. 그런데 재난을 일으키는 유체는 그 밖에도 하나 더 있다. 공기의 흐름, 바람.
어떤 물체를 그런 식으로 파괴하는 것은 바람뿐이다. 하지만 쟁룡열도의 태풍이라도 건물을 그런 식으로 날려 버리는 것은 불 가능하다. 상상할 수도 없는 바람, 신의 분노가 그대로 실현된 바람만이 도시를 그런 식으로 파괴할 수 있을 것이다.
환상벽의 가운데 부분에서 춤추는 대선풍 같은 바람만이. 무섭게 소용돌이치는 회오리가 영상을 비추는 환상벽을 부술 듯한 기세로 휘몰아쳤다. 하늘의 일부가 땅을 파고 들어가는 것 처럼 보이는 그 광경은 자신의 존재를 통해 신을 증거할 수 없는 자들을 위해 신이 준비해 둔 신성의 증거처럼 보였다.
모든 회오리의 할아버지쯤 될 법한 그 회오리는 압도적인 힘 외에도 독특한 특징이 세 가지 있었다. 그 회오리의 상공에는 거 대한 회오리에 필수적으로 동반되는 뇌우나 먹구름이 보이지 않 았다. 또한 그것은 이동하지 않았다. 모든 바람들 중 가장 변덕 스럽고 예측할 수 없는 바람이 회오리지만 대부분의 회오리는 한 자리에 오랫동안 머물지 않는다. 하지만 치천제가 보고 있는 대 선풍은 한자리에 뿌리내린 듯 이동하지 않았다.
치천제는 그 대선풍이 반백 년 동안 이동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쓸모없는 일임을 알고 있었지만 치천제는 대선풍 안쪽을 보려 했다. 이윽고 나타난 변화는 치천제를 약간 놀라게 했다. 영상 속의 대선풍이 실제로 불고 있는 현실의 장소를 찾아가면 관찰자 가 볼 수 있는 것은 규정할 수 없고 묘사할 수 없는 시커먼 힘뿐 이다. 하지만 환상벽은 치천제에게 대선풍 안쪽을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결과적으로 치천제는 비늘이 서는 기분을 맛봤다. 영상 은 대선풍에 점점 다가가는 모습을 띠었다. 환상벽 속의 회오리 가 당장이라도 치천제의 몸을 부술 것 같았다. 하지만 황제는 굳 건한 자제력으로 변화를 계속 이끌었다.
어느 순간 회오리가 사라졌다. 치천제는 비통한 만족감과 슬픈 경외감으로 그곳에 나타난 것을 바라보았다.
대선풍 안쪽에는 무너진 하얀 탑이 서 있었다.
그것이 대선풍의 세 번째 특징이었다. 일반적으로 거대한 회오 리 안쪽에서는 엄청난 끌어올려짐이 발생한다. 그 힘은 사람이든 동물이든 건물이든 닥치는 대로 끌어올려 내팽개친다. 하지만 대선풍 안쪽의 탑은, 비록 윗부분이 무너져 파괴된 모습이지만 평 온해 보였다.
대선풍은 탑을 중심으로 50미터쯤 떨어진 위치를 둘러싸고 있 었다. 불가해한 자기 파괴욕에 사로잡힌 새를 깃털 뭉치로 바꿔 놓고 맹목적으로 달리던 코뿔소를 차가운 고깃덩이로 바꿔 놓은 회오리는 안쪽의 탑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 것 같았다. 비 록 직접적인 접촉이 없다 해도 회오리의 진동음만으로도 탑은 치 명적인 피해를 입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170미터쯤 되는 탑의 외관 어디에도 균열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 탑이 입은 피해 는 윗부분의 파괴뿐이고 그것은 회오리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텐그라쥬의 심장탑이었다. 결코 움직이지 않고 멈추 지 않는 대선풍이 보호하는 탑.
50년 전, 제2차 대확장 전쟁의 실질적인 마지막 날, 냉혹의 도 시 하텐그라쥬의 모든 것을 파괴한 회오리는 윗부분이 파괴된 심 장탑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회오리는 그때까지 행 해 오던 파괴 대신 보호를 선택했다. 회오리는 상처 입은 탑을 둘러싸며 멈춰 섰다. 그 이후로 탑은 더 이상 상처 입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파괴력이 탑에 접근한 적도 없다.
비록 그녀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영상이지만 치천제는 대선 풍이 지키고 있는 금단의 땅을 침입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치천 제는 영상을 다시 조작했다.
환상벽은 대선풍에서 꽤 떨어진 위치를 비추었다.
하텐그라쥬의 폐허를 비추는 햇빛은 아름다웠다. 지금 이 시 각, 하텐그라쥬에는 아직 태양이 뜨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그 것은 현재의 모습이 아니다. 치천제는 굳이 현재를 바라지 않았다. 그녀가 원한 것은 시간이 아닌 장소였으니까. 그리고 그 장소가 어딘지 밝혀졌다. 바람 속에 갇혀 있는 돌탑.
황제의 의문이 사라졌다. 치천제는 환상벽을 없애려 했다.
그러나 그녀가 그것을 사라지게 하려 했을 때 무엇인가가 영상 속에 나타났다.
처음에 치천제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조금 후 황제는 환상벽에 나타난 것이 두 개의 다리라는 것을 깨달았 다. 그것은 왼쪽에서 나타나 오른쪽으로 사라졌다. 치천제는 낮 은 위치에서 걸어가는 사람을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사람의 모습을 추적하기 위해 환상벽을 조작하면서 치천제 는 환상벽의 불가사의함을 재인식했다. 그녀의 무의식이 걸어가 는 다리를 원했을 가능성이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환상벽은 스 스로 조작자에게 무엇인가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일까? 치천제는 대답이 없는 의문에 침잠하는 대신 다리의 주인을 확인하게 되기 를 기다렸다. 마침내 환상벽에 떠오른 영상은 어떤 사람의 뒷모 습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어떤 나가의 뒷모습이었다. 자세는 꼿꼿하고 걸음걸이 는 민첩했다. 치천제는 그 나가가 입고 있는 옷에서 재미있는 사 실을 발견했다. 약간 낡아 보였지만 손질이 잘되어 있는 그 옷은 옛날식의 화려한 옷이었다. 변온 생물인 나가들은 그들에게 가장 적합한 기후인 한계선 남쪽에 있을 경우 체온을 유지하는 의복이 필요 없다. 또한 심장을 적출한 나가는 쉽게 몸을 재생시키기에 피부를 보호하는 의복의 기능도 필요없다. 그래서 옛날 나가들 의 옷차림은 착용자의 미적 감각을 드러내는 것에 주된 목적이 있었다.
천일 전쟁이 끝나고 북부와 남부가 상당 수준의 교류를 이루게 된 이후 나가들의 옷은 북부의 견실함을 많이 받아들였다. 그리 고 북부의 옷차림 또한 나가들의 화려함을 많이 차용했다. 하지 만 그 나가가 입고 있는 옷은 순진성마저 느껴지는 고풍스러운 옷이었다. 단순해서 아름답고 무익하기 때문에 화려한 옷이었다. 치천제는 영상을 조작하여 그 예스러운 복장을 입고 있는 나가의 얼굴을 보려 했다.
그 순간 환상벽 속의 나가가 걸음을 멈췄다. 나가는 고개를 돌렸다.
치천제는 그 나가가 자신을 응시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치천제는 겁을 집어먹지 않았다. 견고한 이성의 대좌 위에 건 설된 그녀의 정신은 그런 감정을 거부했다. 치천제는 걸어가다가 고개를 돌린 그 나가의 모습 전부가 자신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환상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어쨌든 햇빛이 넘 치는 하텐그라쥬의 모습이 현재일 리는 없다. 치천제가 보고 있 는 나가는 하텐그라쥬의 폐허를 걸은 적도 없고 앞으로도 걷지 않을지 모른다. 치천제는 아무런 두려움 없이 환상벽 속에 있는 나가의 눈을 마주했다.
그 나가는 여자였다. 그리고 치천제가 아는 사람이었다. 치천제는 그녀가 혹 자신을 향해 니르지 않을까 기대했다. 물 론 치천제는 그녀를 니르게 할 수 있다. 그 영상을 만들고 있는 것은 치천제 자신이니까. 하지만 그녀에게 시킬 니름이 없었다. 그래서 치천제는 환상벽 또는 자신의 무의식에게 그 영상을 맡기 기로 했다. 치천제는 아무런 의식적 조작 없이 그 나가를 바라보 기만 했다.
약간 실망스럽게도 그 나가는 아무런 니름을 하지 않았다. 그 녀는 다시 고개를 돌렸고 걸어가던 방향으로 계속 걸어갔다. 치 천제는 주시해야 할 만한 모습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그래서 주저 없이 환상벽을 없앴다.
황제의 방은 그 방에 익숙한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모습으로 돌아갔다. 거추장스럽게 부피가 큰 벽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 다. 치천제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벽난로 쪽으로 다 가가 그곳의 불을 크게 일으켰다. 화르르 타오르는 불을 보며 치 천제는 환상벽 속에 나타났던 나가 여인을 생각했다. 일출은 아직 먼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