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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977화


군림천하 (977)

제397장 비인비사(秘人秘史)

진산월은 문득 눈을 떴다.

처음에는 이곳이 어딘지 몰라 잠시 몇 차례나 눈을 깜박였다.

정갈한 방이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은은한 색상의 비단으로 이루어진 천정이었다. 귀한 주단을 서까래 사이에 늘어뜨려 자연스레 천정을 이루었는데, 그 모양이 우아하면서도 정취가 있어 절로 편안함을 느끼게 했다.

벽에 걸린 그림과 장식들 중 어느 것 하나 예사로워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결코 과하거나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모든 물건들이 꼭 필요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진산월은 상당히 넓은 침실 안에 가구라고는 침상 외에 단출한 의자와 작은 탁자 하나만이 있는 것을 보고는 이 방의 주인이 어떠한 성격인지 약간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허영과는 거리가 먼 실용적인 면이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이 필요한 것에는 기꺼이 비용을 지불하는 사람일 것이다.

진산월은 다시 한 차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시야가 좀 더 분명해지며 점차 의식이 명료해지자 그는 자신의 몸부터 점검을 했다.

몸에 특별한 통증은 없었다. 진기의 수발도 자유로웠고, 신경이나 팔다리 어느 한 군데 이상한 곳이 없었다.

그날의 격전을 생각해 본다면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의 부상은 아무리 좋게 보아도 상당 기간 동안 요양을 해야만 겨우 회복될 수 있을 정도로 극심한 것이었다. 특히 위지립의 장공과 정면으로 부딪쳤던 오른손과 감종간의 검에 당했던 왼쪽 가슴의 상처는 치명적인 것이었는데, 오른손은 당장 검을 쥐어도 상관없을 만큼 거의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고, 심맥이 크게 손상된 줄 알았던 왼쪽 가슴 또한 별다른 후유증은 보이지 않았다.

진산월은 잠시 누운 채 조심스레 진기를 운용해 보았다. 전신의 기맥에 아무런 막힘이 없이 진기가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을 확인하고도 한동안 그는 그 자리에 가만히 누워있었다. 허공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천천히 침상에서 일어났다.

그때까지도 아무도 방에 들어오거나 인기척을 내는 사람이 없었다.

진산월은 주위를 둘러보다 침상 옆에 용영검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용영검을 뽑아서 검날이 상하거나 검신에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진산월은 허리춤에 용영검을 차고는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날은 저녁이어서 짙은 노을이 하늘을 온통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방문 밖을 나서고 나서야 진산월은 자신이 있던 곳이 동떨어진 한 채의 아담한 모옥임을 알 수 있었다.

모옥 주위는 형형색색의 다채로운 꽃들로 된 화원이 둘러싸고 있었는데, 그 화원이 어찌나 넓었던지 다른 건물들은 잘 보이지 않았다.

노을에 물든 화원은 마치 선계(仙界)의 어느 한 장면을 보는 듯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진산월은 자신의 처지도 잠시 잊고 한동안 우두커니 선 채로 노을에 젖은 화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세상을 취하게 할 것 같은 붉은 하늘 아래 그림처럼 펼쳐져 있는 화원을 보고 있노라니 무겁게 마음속을 짓누르고 있던 모든 근심과 시름이 잠시 잊힌 듯했다.

누군가의 조용한 음성이 들려온 것은 붉게 물든 노을이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오늘따라 석양이 정말 붉구나. 저걸 보는 네 심정이 어쩌면 나와 비슷할지도 모르겠구나.”

진산월은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계속 검붉은색으로 변해 가는 하늘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미 근처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다만 그는 지금 느끼는 감흥을 굳이 깨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 사람도 아마 비슷한 생각이었을 것이다. 진즉에 진산월이 나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노을이 점차로 사라질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말을 걸어온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노을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검게 물들어 가는 하늘만이 시야에 가득 들어오자 진산월은 한숨을 내쉬었다.

의미를 알기 힘든 한숨이었다. 너무도 빨리 사라지는 노을이 아쉬운 건지, 아니면 자신의 마음만큼이나 짙은 색으로 물들어 가는 어둠이 싫은 건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진산월 자신도 왜 이 순간 한숨을 내쉬었는지 알지 못할지도 몰랐다.

진산월은 천천히 몸을 돌려 모옥의 옆으로 돌아갔다.

모옥 옆에 제법 넓은 공터가 자리하고 있고, 그 공터의 중앙에 작은 의자가 놓여 있었다. 한 사람이 의자에 앉은 채 조금 전까지만 해도 타는 듯한 노을로 물들었던 검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진산월이 자신의 지척에 이르자 그 사람은 심유한 시선으로 진산월을 돌아보았다.

노란색 저고리에 풍성한 남색의 치마를 입은 절세의 미녀였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진산월은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대랑!”

그녀는 다름 아닌 철혈홍안 조여홍이었다.

조여홍은 물처럼 고요하고 얼음처럼 차가운 눈으로 진산월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물었다.

“몸 상태는 어떠하냐?”

“덕분에 쾌차할 수 있었습니다. 조대랑께서 남겨 주신 한 줌의 진기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알고 있겠지만, 내가 사용한 현음진기의 원형은 종남파의 칠음진기다. 허락도 없이 얻은 걸 늦게나마 원주인에게 갚아 준 셈이니 고마워할 필요없다.” 

진산월은 침상에서 진기를 운용해 보고 이질적인 진기 한 가닥이 자신의 심맥과 부상 부위를 보호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 기운이 칠음진기와 유사하다는 것을 깨닫자 그 진기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칠음진기와 유사하면서도 내상을 치유하는 데 탁월한 위력을 발휘하는 무공은 오직 하나뿐이다.

현음진기!

진산월의 상세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회복한 것은 조여홍이 그의 몸속에 현음진기를 넣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내상을 치료하는 데는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효능을 지닌 현음진기 덕분에 진산월은 치명적인 부상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현음진기가 칠음진기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은 예전에 강일비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하나 막상 조여홍의 입에서 그 사실을 다시 듣게 되자 진산월로서는 입맛이 씁쓸할 수밖에 없었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종남파의 오랜 비전이 남의 손에 들어가 제멋대로 변형되었다는 것은 문파의 장문인으로서 쉽게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목숨의 구원까지 받은 상대에게 그 점을 추궁할 수도 없었다. 예전 북망산에서 만났던 모용단죽의 말마따나 이제 와서 따지기에는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나가 버린 셈이었다.

조여홍은 힐끗 진산월을 쳐다보더니 그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칠음진기의 후반부 요결이다. 전반부는 받았겠지?”

진산월은 무심결에 그녀가 내민 작은 책자를 받아들었다.

<칠음진기>

표지에 적힌 네 글자를 보는 진산월의 심정은 그 자신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복잡했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칠음진기의 완벽한 요결을 이제야 비로소 얻게 된 것이다.

칠음진기는 임영옥의 상세를 치료하는 데 꼭 필요한 무공이었으며, 또한 종남파의 육합귀진신공을 이루는 마지막 열쇠이기도 했다.

이제 칠음진기의 요결은 모두 찾았지만, 아직도 임영옥의 행방은 알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 실전되었던 종남파의 비전 신공들을 모두 구했음에도 그가 기뻐하지 않은 것은 그런 연유에서였다.

오히려 그 기묘한 뒤틀림에 진산월은 마음 깊숙한 곳에서 진한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그가 솟구치는 노화를 참을 수 있었던 것은 분노가 사태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진산월은 한 차례 한숨을 내쉬었다. 의미를 알 수 없었던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한숨이었다.

조여홍은 그의 얼굴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기에 그의 표정 변화를 두 눈으로 모두 지켜보았다. 그래서 그가 지금 내쉰 한숨의 의미를 나름대로 분석할 수 있었다.

‘마음속에 들끓었던 격동을 숨 한 번 내쉬는 동안 완벽하게 가라앉혔구나.’

진산월 수준의 고수는 쉽게 흔들리지도 않지만, 일단 마음이 뒤흔들리면 쉽게 가라앉히기도 불가능에 가까웠다. 작은 대야의 물은 가벼운 흔들림에도 대야 밖으로 넘쳐 버리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이내 다시 조용해진다. 하나 고요했던 바다가 성이 나기 시작하면 좀처럼 쉽게 진정되지 않는 법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조여홍은 진산월의 평정심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정심안을 버틸 때도 느꼈지만, 마음의 수양이 정말 대단하구나. 네 나이에 너와 같은 정력(定)의 소유자는 본 적이 없다. 그들이 네 반만 닮았어도…….”

그녀의 마지막 말은 입속으로 웅얼거리는 것이어서 제대로 들리지 않았으나, 진산월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유일한 피붙이인 오빠와 믿었던 남편의 싸움을 평생 동안 지켜봐 왔던 그녀로서는 무공에 눈이 뒤집혀 동생과 아내를 소홀히 하고 투쟁만을 일삼아 온 조익현과 석동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네가 내 아이의 시신을 잘 수습해 주었다는 말은 들었다. 더불어 그 아이의 복수까지 대신해 주었더구나. 쾌의당주, 그놈이 공가장에 있다는 것은 언제 알았느냐?”

조여홍의 물음에 진산월은 차분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공가장에 가서야 알았습니다.”

조여홍의 물처럼 고요한 시선에 한 줄기 날카로운 빛이 번득였다.

“그게 정말이냐?”

진산월은 담담하게 말했다.

“이런 일로 조대랑께 거짓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조여홍은 한 차례 더 진산월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렇다면 나로서는 그저 운이 없었던 거로군. 내 자식의 복수를 남의 손에 맡긴 꼴이 되었으니.”

“저는 그곳에 위지립과 사효심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한두 명이 더 그들에게 가세할 것은 짐작했지만, 설마 그중에 쾌의당주가 있으리라고는 미처 몰랐습니다.”

조여홍도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쾌의당주와 세 명의 용왕이 도사리고 있는 줄 알았다면 아무리 진산월이라도 선뜻 공가장으로 향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진산월이 그들의 무시무시한 공세에서 살아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운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문득 조여홍의 입에서 그녀답지 않은 가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래서 진인사대천명이라고 하는 것인가? 네가 보낸 자가 나에게 연결될 때까지 불필요한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 버렸다. 정말 아쉽구나, 아쉬워.”

그녀는 쾌의당주를 자신의 손으로 처단하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지 몇 번이나 탄식을 토해 냈다.

진산월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이정문은 괜찮습니까?”

“네가 보낸 자가 다행히 늦지 않게 이정문을 데리고 왔더구나. 팔 한쪽이 불구가 되긴 했지만,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이정문이 한쪽 팔이 불구가 되었다는 말에 진산월은 살짝 얼굴이 굳어졌다.

진산월은 추동생이 빈사 상태로 자신의 앞에 나타났을 때부터 그 모든 것이 자신을 유인하기 위한 위지립의 술수임을 직감했다.

그들이 공공연하게 공가장으로 자신을 유인한 것은 오히려 이정문이 그쪽에 없다는 의미라고 판단했다. 그들로서는 공연히 걸리적거리는 이정문을 그쪽까지 끌고 갈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진산월이 몇 번이나 이정문에게 손을 쓴 사람이 쾌의당주가 아니라 위지립이라는 걸 확인하려 했던 것도 그 점을 분명히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낙양에서 무림맹주가 이정문의 수하들 눈을 피해 사람을 숨길 수 있는 공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마침 진산월은 적당한 곳 한 군데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전흠으로 하여금 위지립과 사효심이 머물렀던 만화루의 별실을 뒤져 보게 했던 것이다.

진산월의 짐작대로 그곳에는 위지립의 수하인 사겁 마씨(馬氏) 형제가 의식을 잃은 이정문을 사로잡고 있었다.

전흠은 그들로부터 이정문을 구하자마자 진산월의 지시대로 석가장으로 조여홍을 찾아갔다. 그녀 외에는 달리 도움을 청할 곳이 없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전흠이 조여홍을 만날 때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어 조여홍이 공가장으로 달려왔을 때는 이미 쾌의당주와 진산월의 싸움이 끝나 버린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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