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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982화


군림천하 (982)

“나는 석동에게 천양신공과 취와미인상 하나를 보여 주었다. 석동은 뛸 듯이 기뻐하며 어쩔 줄 몰라 하더구나. 나와 살면서 그토록 기뻐하던 그의 알지 못했어.”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내 기분은 나도 알지 못할 정도로 묘하게 헝클어졌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지만, 그때는 그게 무언지

조여홍의 음성에는 쓰디쓴 후회와 고통의 감정이 짙게 배어 있었다.

“석동이 조익현처럼 수련에 본격적으로 빠지기 시작한 것은 내게서 물건을 받은 후 불과 닷새만의 일이었다. 처음에는 천양신공에 빠져 있듯 하던 그는 취와미인상을 붙잡자 미친 듯이 몰입하기 시작했지. 그건 영락없이 폐관 직전의 조익현과 비슷한 모습이었어. 그때 깨달았지. 그에게 절대 건네서는 안 되는 걸 건넸다는 걸. 그런 무공에 미친 인간들에게 취와미인상 같은 걸 보여 줘서는 안 되었던 거야.’

그녀의 동공에는 진한 미련인지 알알이 맺힌 아쉬움인지 모를 감정들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다.

“석동은 며칠에 한 번씩 밖으로 나와 간단히 요기만 하고는 다시 먹을 것만 챙겨서 수련실로 사라졌지. 난 그 모습이 너무 한심하고 얄미워서 하나 남은 취와미인상을 천룡궤에 숨겨 버렸다. 나중에 석동은 이를 알고 무척 화를 냈는데, 그가 나에게 그런 모습을 보인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와 살 때는 매사에 진중하고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던 그가 남들처럼 기뻐하고 화를 내기도 하는 것에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속이 상해서 무척이나 심란했지. 그 감정들이 모두 내가 아닌 한낱 미인상 때문이라는 게 나를 견디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럽게 했다.”

진산월은 그녀의 말만으로도 그녀가 얼마나 힘들어했을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 그녀로서는 아버지와 오빠에 이어 유일하게 남은 남편마저 미인상에 뺏겨 버렸다는 생각에 극심한 좌절감과 허탈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 마음에 불을 지핀 것은 백모란이었다.

그녀는 석동이 잠시 수련실을 벗어날 때마다 갖은 이유를 들어 그를 만났고, 어인 일인지 석동도 그녀와의 만남을 피하거나 망설이지 않았다.

조여홍도 처음에는 두 사람 사이를 남들처럼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석동에 대해서는 나름의 신심(信心)을 가지고 있기에 두 사람의 만남에 시작했다. 크게 개의치 않았다. 하나 그들의 만남이 잦아지고 나중에는 그녀의 눈을 피해 밀회를 하는 듯한 정황마저 보이자 철석같던 그녀의 마음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마침 조익현이 폐관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의 등장으로 파국은 예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조익현은 취와미인상 하나가 석동에게 가 있음을 알자 일찍이 보지 못했던 분노를 터뜨렸으며, 그 성난 화살은 조여홍을 지나 석동에게로 향했다. 목숨처럼 소중하게 생각한 취와미인상을 허락도 받지 않고 남편에게 준 조여홍에 대한 실망감보다는 제멋대로 취와미인상의 절학을 파헤치려 한 석동에 대한 증오심이 더욱 컸던 것이다.

그때 등장한 백모란은 조익현에게 파혼을 요구했고, 그제야 그녀와 석동 사이에 무언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조익현은 더 이상 솟구치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취와미인상 때문인지 백모란의 변절 때문인지는 아마 조익현 자신도 정확히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타오르는 분노에 온몸을 맡긴 채 서동을 향해 거침없는 살수를 전개했고, 석동도 피하지 않고 그의 공격에 맞서기 시작했다.

“그들의 싸움은 정말 무서웠지. 갑작스럽고 충동적이었던 만큼 말려야 마땅했으나, 나를 비롯한 누구도 그들의 싸움에 끼어들 수가 없었다. 그만큼 살벌하고 처절한 싸움이었다. 우리의 거처는 물론이고 그 넓던 석가장 후원 대부분이 파괴되어 버렸을 정도였으니까.”

조여홍은 모처럼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채 그들의 싸움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러면서 두 가지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았지. 첫째는 그들이 정말 무림에서 두 번 다시 보기 힘든 절세의 천재들이라는 사실이었다. 그건 그들을 본 누구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내 아버지인 신검 조일화조차도 그들만큼 빛나지는 않았었다. 두 개의 빛나는 별이 서로 부딪쳤으니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느냐?”

진산월은 조용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둘 중 하나가 부서지기 전까지는 충돌을 멈추지 않겠지요.”

“그래. 내가 깨달은 두 번째 사실은 나를 비롯한 누구도 절대 그들의 싸움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오늘이 아닌 언제라도 그들은 부딪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고, 둘 중 하나가 쓰러질 때까지 결코 투쟁을 멈추지 않으려 할 것이다. 취와미인상이건 백모란이건 그건 단지 도화선에 불과할 뿐이고, 그들의 충돌은 필연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떤 이유에서든 그들은 반드시 부딪쳤을 것이다.”

그 싸움의 결과는 진산월도 몇 사람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그들은 양패구상하여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들의 부상이 어찌나 심각했는지 조익현은 물론이고 석동조차 스스로의 힘으로는 제대로 운신하지도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조익현은 자기 발로 석가장을 떠났고, 자신이 다시 돌아올 때는 자신을 옭아맨 모든 매듭을 잘라 버리겠다고 공언했다.

그 매듭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으나, 조여홍을 비롯한 장내의 모든 사람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석동 또한 병상에 누워 있다가 거동할 수 있을 때가 된 어느 날 홀연히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염치 불고하고 석가장을 부탁하오.

짧은 서신 한 장만이 그가 조여홍에게 남긴 유일한 흔적이었다.

가장 이해하기 힘든 것은 백모란의 행동이었다.

백모란은 조익현이 떠난 날 저녁에 홀연히 조여홍을 찾아왔다.

“원망 따위는 받아 주지 않겠어요.”

그녀가 대뜸 조여홍을 향해 내뱉은 말에 조여홍은 어이가 없어서 한동안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당신 오빠가 내게서 가문을 빼앗았으니, 나도 당신에게서 남자 하나를 가져왔을 뿐이에요.”

“오빠가 백가장을 없앴다고 생각하느냐?”

“조익현은 자신이 완벽하게 일을 마무리했다고 믿었겠지만, 오빠의 가솔 한 사람이 살아남았어요. 그는 오빠가 조익현이 가진 미인상에 대해 물었고, 그날 밤 참변이 일어났다고 말했지요. 그날 그는 장모의 생신에 참여하기 위해 길을 떠나느라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어요.”

조여홍으로서는 퉁명스럽게 대꾸할 수밖에 없었다.

“오빠답지 않은 실수를 했군.”

“그는 비록 실수했지만, 나는 실수하지 않을 거예요.”

조여홍은 싸늘한 눈으로 백모란을 쏘아보았다.

“너는 어찌하려느냐?”

“평상시의 조익현이라면 내가 도저히 넘볼 수 없지만, 지금의 그라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어요.”

“그 말을 나에게 하는 이유는?”

“당신 남자를 돌려받고 싶다면 내 일을 막지 마세요.”

조여홍은 냉소를 날렸다.

“나보고 오빠와 남편 중 한 사람을 택하란 말이냐?”

그때 백모란은 의미를 알기 힘든 묘한 눈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

“선택은 남자들보고 하라고 하지요. 우리는 서로 침범하지 않은 채 각자의 길을 가면 되는 거예요.”

조여홍은 한동안 백모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천하제일이라는 세간의 칭송처럼 그녀의 얼굴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은 무심한 얼굴임에도 조여홍은 새삼 그녀의 미모가 얼마나 뛰어난지 다시 한 번 뼈저리게 깨달았다.

이런 얼굴을 몇 번이나 보았는데 남자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리 없었다.

조여홍은 한참 동안이나 복잡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단호한 음성을 내뱉었다.

“너는 너의 길을 가라. 네가 어떤 길을 가든 나는 막지 않겠다. 대신 너 또한 나의 길을 침범하지 마라. 만약 이를 어긴다면.

백모란은 조용한 목소리로 단언했다.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훗날 천봉궁과 신목령 사이의 천목지약은 이날 시작된 것이었다.

“머지않아 나는 그녀가 부상당한 조익현을 암습했다가 실패하고 물러났다는 말을 들었다. 그녀는 조익현이 익힌 현음진기가 자신의 칠음진기보다

내상에 더욱 뛰어난 효과가 있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지. 그 때문에 가장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만 것이다.”

“백모란이 어떻게 칠음진기를 익히게 된 것입니까?”

조여홍의 얼굴에 한 줄기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조익현이 백모란과 혼인을 약조한 날에 그녀에게 두 가지를 예물로 내주었다. 하나는 영롱비라는 것으로, 천하에서 가장 예리한 극음의 신병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칠음진기로군요.”

“그렇다. 조익현은 백모란이 태음신맥을 타고났다는 것을 알고 그녀에게 가장 적합한 무공을 선물한 것이다.”

백모란이 태음신맥의 주인이니, 칠음진기와 영롱비는 가장 어울리는 선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롱비는 천봉궁주의 신물로, 서안 취미사의 혈겁 당시 등장하여 흉수가 굉지 선사를 살해할 때 사용한 병기였다. 호신강기도 종잇장처럼 찢어 버리고, 금석을 두부처럼 가르는 희대의 기병인데다 스치기만 해도 상흔을 얼려 버리는 지독한 극음의 기운을 담고 있었다.

하나 진산월은 그보다 종남파의 비전무공이었던 칠음진기가 종남파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타인에 의해 주고받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가슴 아팠다.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그 칠음진기의 요결은 당연히 종남파로 되돌아왔을 것이다.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얼마나 많은 일들이 달라지게 되었을까? 적어도 임영옥이 태음신맥의 음기를 다스리지 못해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일은 없었을

그렇다고 이제 와서 조여홍에게 당시의 일을 추궁할 수는 없었다.

조여홍은 그런 진산월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시 담담해진 음성으로 백모란과 헤어진 이후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 이후 백모란을 만난 적은 없었다. 단지 그로부터 상당한 시일이 흐른 후 그녀가 천봉궁이라는 단체를 조직했다는 말을 들었지. 그녀뿐 아니라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석동이 제자를 두어 성숙해를 만들고, 조익현 또한 쾌의당이라는 이상야릇한 살수집단을 거느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되자 나도 하나의 단체를 만들었다.”

“그래서 신목령을 세운 거로군요.”

“그래. 몇 번이나 망설였지만, 석가장을 함부로 비울 수 없었던 나로서는 대신 강호에 나가 그들의 행동을 지켜볼 조직이 필요했다. 그래서 내 아들 중 무공에 관심이 많고 소질도 뛰어났던 석호를 내세워 신목령이란 이름하에 고수들을 모으게 된 것이다.”

결국 이들 네 남녀가 세운 네 개의 조직이 지난 수십 년간 강호무림을 좌지우지하는 거대 세력이 되었고, 암중에서 때로는 힘을 합치고 때로는 배척하면서 크고 작은 사건들을 만들어 낸 것이다.

진산월은 한 가지 조심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석동은 그 뒤로 석가장에 온 적이 있습니까?”

조여홍은 그가 묻는 의도를 알아차리고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씁쓸하면서도 복잡한 상념이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그가 나를 찾아왔었느냐는 말이지? 아쉽게도 오지 않았다.”

진산월은 내심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익현과의 싸움 이후 석가장을 뛰쳐나간 석동은 대체 어떤 심정이었기에 끝까지 조강지처는 물론 자신의 본가까지 등한시한 채 돌아오지 않았을까? 

“다만 편지를 보낸 적은 있었다. 이십 년 전쯤이었던가? 그에게서 시신 하나가 도착했다.”

“무어라고 쓰여 있었습니까?”

“그동안 너무 오랜 세월이 흘렀다며, 이제 사태를 마무리 지으려 조익현을 찾아갈 예정이라고 하더군. 일이 예상대로 잘 마무리된다면 돌아오겠다고 했지.”

“만약 잘못되었다면?”

조여홍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그 편지를 보냈을 때는 나름대로 조익현에게 승리할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실패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았고, 설사 염두에 두었다 하더라도 편지에 구구절절하게 그런 걸 쓸 리는 없지.”

“그런데 그는 돌아오지 않았군요.”

“그래. 대신 얼마 후에 나는 그가 심각한 부상을 입었으며, 치료를 위해 백모란의 곁에 머물러 있다는 말을 들었지.”

진산월은 잠시 망설였으나,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내상을 치료할 목적이라면 현음진기가 더욱 뛰어난 효과가 있을 텐데, 그는 왜 백모란을 선택했을까요?”

조여홍의 입가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그의 의중을 내가 어찌 알겠느냐? 서신까지 보내 큰소리쳐 놓고 조익현을 이기지 못한 게 부끄러웠던지, 아니면 그녀의 품이 나보다 더 포근했던지, 그게 아니라면…… 무언가 필유곡절이 있었겠지.”

미소 띤 얼굴과는 달리 그녀의 음성은 너무나도 무겁게 가라앉아 있어 진산월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다만 그는 지금까지 막연하게 들어왔던 네 사람 사이의 비화가 조금은 색다르게 느껴졌다.

그는 예전에 단봉공주와 조익현에게서 각기 과거의 비사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조여홍의 이야기는 그들이 했던 말과는 미묘하게 차이가 있었다. 

석동이 무공에 빠져 아내를 등한시했고, 결국 조익현과 취와미인상을 두고 대결을 벌여 가정을 파탄에 이르게 했다는 큰 줄기는 비슷했지만, 사소한 작은 부분에서는 조금씩 내용이 달랐다.

그것은 단순한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니면 다른 무엇이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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