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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981화


군림천하 (981)

제398장 사인사정

조관의 아들은 화산파의 비전 무공을 수련하면서도 계속 태을검선의 행방을 찾아 화산의 깊숙한 계곡을 뒤지고 다녔고, 마침내 화산파에 입문한 지 십오 년 만에 태을검선의 거처를 찾을 수 있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마흔두 살이었고, 결혼하여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두고 있었다.

삼대에 걸쳐 팔십 년이란 장구한 세월이 만들어 낸 결과였지만, 그는 결코 만족할 수 없었다. 단순히 태을검선의 유진을 찾은 것만으로는 지난 세월에 대한 보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태을선거에서 얻은 세 개의 취와미인상을 연구하여 본격적으로 태을검선의 무공을 익히려 했다.

하나 태을검선이 남긴 취와미인상의 무공은 너무도 심오막측하여 천부의 재질을 지닌 그로서도 좀처럼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다.

무려 십 년 동안 그는 침식을 잊고 취와미인상을 연구했으나, 겨우 그중 하나에서 얼마의 심득(得)만을 얻었을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자신의 무공이 천하를 오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때 이미 그는 화산파가 배출한 최고의 고수로 인정받았으며, 취와미인상을 연구하면서 무공에 대한 경지는 더욱 높아져서 당대의 누구도 견줄 수 있는 자가 없었다. 

-태을검선이 갔던 길이라면 나도 갈 수 있다.

그는 과거 종남오선 시절에 천하를 석권했던 종남파의 영광을 화산파의 이름으로 재현하는 것이 자신의 가문에 드리워졌던 무거운 굴레를 벗는 진정한 보상이라고 확신하고, 하나의 깃발을 만들어 구대문파를 순회하기 시작했다.

<화산천하제일문(華山天下第一門).>

일곱 개의 글자가 쓰인 그 깃발을 본 모든 사람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것은 너무도 광오한 의미를 담고 있으며, 무림인의 정서상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유명무실해진 종남파를 제외하고 점창파와 공동파, 청성파를 거치면서 그는 숱한 고수들을 격파했으며, 자신이 내건 깃발이 결코 허언이 아님을 증명했다. 

결국 그가 섬서성과 사천성 일대를 휩쓸고 호북성의 무당산으로 향했을 때, 무당산에는 소림사와 무당파, 아미파의 최고 고수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주저 없이 그것을 승낙했다. 단신으로는 누구도 그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던 그들은 자신들 세 사람의 합공을 이겨 내면 그 깃발을 인정하겠다는 제안을 했고, 하나 절대의 경지에 오른 그의 무공으로도 삼대일의 결전은 너무 벅찬 것이었다.

반나절을 꼬박 싸운 끝에 결국 그는 내공의 부족으로 패퇴하고 말았고, 그가 만든 깃발 또한 갈가리 찢겨 버렸다.

이것이 바로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강호인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신검산화’의 전설이었다.

강호제일지자 해수 모인풍은 지난 백 년간 강호에서 벌어진 사건들 중 가장 중요하고 큰 의미를 지닌 세 개의 사건을 말하면서 그중 하나로 신검산화를 지목했다.

그만큼 당시 그의 행동은 이후 강호무림에 엄청난 여파를 불러일으킨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신검이라 불렀으며, 지금까지도 대부분의 무림인들은 종남오선 이후 최고의 고수라고 평가했다.

조관의 아들이며, 한때 종남파의 촉망받는 제자였고, 화산파 사상 최고의 고수로 불리며 신검산화의 주인공이 된 인물.

그의 이름은 조일화였다.

한동안 장내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상념에 잠겨 있었다. 진산월은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여러 가지 생각들과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고, 조여홍 또한 나름의 깊은

한참 후, 조여홍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것처럼 여느 때보다 낮게 가라앉은 음성을 토해 냈다.

“우리 남매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그리 많지 않았다. 항상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밖으로만 내돌며 집에는 거의 들어오지 않았지. 가끔 얼굴을 볼 때면 얼마나 무공을 수련했는지만 확인했을 뿐, 단 한 번도 따스한 말을 해주지 않았다.”

조여홍은 자신의 부친이 누구인지 따로 말하지 않았으나, 진산월은 그가 조일화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말을 하는 조여홍의 표정에는 아무런 감정의 빛도 담겨 있지 않았다. 어찌 보면 더 이상 과거의 일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의미 같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쓰디쓴 추억을 되새기기 싫어하는 모습 같기도 했다.

“내가 결혼하는 날에 그는 정말 모처럼 활짝 웃었는데, 그건 사위인 석동을 보고 난 직후였지.”

“정말 쓸 만한 녀석이군.’

조일화는 석동을 보고는 눈을 빛내며 그렇게 말했다. 그건 아들인 조익현에게도 하지 않던 칭찬이었다.

조익현은 옆에서 아무 말 없이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고만 있었으나, 조여홍은 그때부터 석동과 조익현 사이의 관계가 결코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진한 예감이 들었다.

조일화는 그녀가 결혼한 지 삼 년도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때 그는 소림과 무당, 아미의 최고 고수들과의 싸움에서 패한 후유증으로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오랫동안 고통스러워했었는데, 매일 피를 토하면서도 조익현을 향해 당부하는 걸 잊지 않았다.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미인상의 절학을 익혀야 한다. 셋 중 하나만 익혔어도 나는 결코 실패하지 않았을 것이다. 너는 나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명심해라. 그 미인상의 절학을 얻기 전까지는 절대로 강호에 나가서는 안 된다…….”

그때마다 조익현은 묵묵히 고개를 조아렸다.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져 가면서도 조일화는 끝까지 취와미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억울함을. 이 분노를…………… 이 괴로움을.

“그 미인상의 절학은 온전히 우리 집안의 것이다. 그걸 익혀 강호에서 독존(獨尊)해야만 비로소 우리 집안의 무거운 굴레를 벗을 수 있다. 이 너는 결코 잊지 마라.”

조익현은 핏기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조일화의 두 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이윽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잊지 않겠습니다.”

조일화는 그 대답을 듣고 나서야 숨을 거두었다.

그때 그의 나이 불과 쉰여섯 살이었다.

생각해 보면 조일화의 일생은 파란만장하기 그지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부친의 억압과 핍박에 가까운 강요로 천하의 외진 곳을 떠돌아다녀야 했고, 홀로 설 수 있을 만큼 커서는 복수에 눈이 멀어 종남파의 장문인을 살해하고 종남파를 몰락의 구덩이로 집어넣었으며, 집요한 노력 끝에 마침내 태을검선의 유진을 얻게 되었다. 화산파의 최고고수가 되어 과거 종남오선의 영광을 다시 재현하려 깃발을 일으켰다가 결국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하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되었으니, 한 사람이 거쳐 온 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기구하고 굴곡진 인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일화가 죽은 후 조익현은 미친 사람처럼 취와미인상에 빠져들었다. 그가 세 개의 취와미인상 중 하나에서 작은 실마리를 얻고 보다 깊게 연구하기 위해 폐관에 들어간 것은 부친의 죽음 이후 이 년이 훌쩍 지난 후였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조익현의 약혼녀가 조여홍을 찾아왔다.

그녀의 등장은 석가장은 물론이고 낙양을 온통 뒤흔들어 놓았다. 그만큼 그녀의 미모가 가히 독보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녀를 경성홍안이라 불렀고, 그 이름은 이내 전 중원으로 퍼져나가 천하제일미녀를 나타내는 상징처럼 되어 버렸다. 조익현의 약혼녀는 조익현이 폐관수련에 들어간 것을 알고 상심하여 잠시 석가장에 머물렀었는데, 어느 날 우연히 석동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로부터 수많은 일이 벌어졌고, 천룡객과 봉황인의 신비로운 이야기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석동과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너도 들었겠지?”

조여홍의 물음에 진산월은 부인하지 않았다.

“당시 낙양 일대가 그녀 때문에 소란스러웠다고 알고 있습니다.”

“백모란은 정말 예뻤지. 그녀를 보고 넋이 나가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그건 누구도 부인 못할 사실이었다. 그래서 모두들 석동이 한눈에 그녀에게 반해서 조강지처를 팽개치고 그녀에게 달려갔다고 알려져 있지. 너도 그렇게 알고 있느냐?”

조여홍에게서 직접 이런 질문을 받자 진산월은 순간적으로 난처했으나, 이내 그녀의 말 속에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의미가 담겨 있음을 깨달았다. “진실은 어땠습니까?”

“석동이 비록 정인군자라고 할 수는 없지만, 본처를 두고 다른 여자에게 함부로 한눈을 팔 정도로 막되어 먹은 자는 아니다. 그 일에는 남들이 모르는 깊은 내막이 숨겨져 있지.”

조여홍은 한때 섬서성 일대를 떠들썩하게 했던 백모란과 석동의 열애설에 얽힌 이야기를 해 주었다.

원래 백모란은 섬서성 낙남(南)의 백가장 출신이었다.

백가장은 화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서 화산파의 고수들과 왕래가 잦았다. 그래서 자연히 조일화도 백가장의 장주인 백선(宣)과 친분이 생겼고, 각자의 자식인 조익현과 백모란을 혼약시키기로 한 것이다.

조익현은 뛰어난 재질의 일대기재였고, 백모란은 어려서부터 경국지색으로 소문이 날 정도의 미녀였으니 누가 보기에도 두 사람은

천생배필이었다.

조익현은 백모란 때문에 백가장을 출입하다 백모란의 아들인 백지(白志承)과 친해졌다. 백지승 또한 드물게 보는 인재여서 두 사람은 쉽게 의기투합했으나, 우연히 백지승이 조익현의 거처에서 취와미인상을 보면서 비극이 일어났다.

백지승은 별생각 없이 조익현에게 취와미인상에 대해 물었는데, 취와미인상에 대해 강박에 가까운 애착을 가지고 있던 조익현은 그 비밀을 숨기기 위해 백지승을 몰래 살해해 버린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그는 나중에라도 이 사실이 발각될까 두려워 백가장 자체를 멸문시키고 말았다.

때마침 백모란은 무공을 수련하기 위해 다른 곳에 가 있느라 참변을 면했다. 뒤늦게 가문이 없어진 것을 알고 대경실색한 그녀는 흉수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했으나 이미 몇 달의 시간이 지나간 후인지라 진상을 알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한 사람에게 의혹의 시선을 보냈다. 바로 자신의 약혼자인 조익현을 의심한 것이다.

당시 혈겁의 유일한 생존자인 백지승의 하인에게서 자신의 오빠인 백지승과 제일 마지막까지 함께 있던 사람이 조익현임을 어렵게 알아낸 그녀는 마음속으로 칼을 품고 그를 찾아 낙양으로 향했다.

하나 조익현은 이미 취와미인상 하나를 들고 폐관에 들어간 후였다.

조익현에 대한 복수심에 사로잡혀 있던 백모란의 눈에 석동이 들어온 것은 그녀에게는 하늘의 계시 같은 것이었다.

그때 석동은 조여홍과 결혼한 지 사 년째로 접어들면서 약간은 권태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무공에 관심이 많으면서도 거대한 석가장을 운영하느라 수련에 집중할 수 없었던 석동은 당시 정서적으로 상당히 불안한 상태였는데, 그 사실을 알아차린 백모란이 은근히 그를 충동질했던 것이다.

“장주께선 천하의 이름난 무공을 보면 반드시 수집하려 한다고 들었어요.”

그녀가 석동을 찾아가 차를 마시며 물었을 때, 석동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소소한 취미일 뿐, 별로 대단한 일은 아니오. 게다가 기껏 모은 무공이라고 해 봐야 겨우 삼류를 벗어난 수준일 뿐이오.”

“장주의 재력이라면 아무리 뛰어난 무공이라도 어렵지 않게 모을 수 있었을 텐데요.”

석동은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그게 그렇지 않소. 일정 수준 이상의 무공비급은 구하기도 어렵고, 전통 있는 명문가의 무공은 단순히 돈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이오. 그녀는 가볍게 웃었다.

“장주께선 옆에 천하의 보물을 두고도 엉뚱한 곳을 찾고 계시군요.”

석동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녀를 향해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천하의 보물이라니?”

그녀는 기이한 빛이 어른거리는 봉목(鳳目)으로 석동의 얼굴을 지그시 응시했다.

“모르셨어요? 소고(小姑)에게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천하의 절학이 담긴 물건이 있어요. 조 가가(哥哥)가 폐관을 들어간 이유도 그 무공 중 하나를 익히기 위해서랍니다.”

소고란 남편이나 배우자의 여동생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석동은 처음에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으나, 호기심에서 조여홍에게 물어보고는 그것이 사실임을 알게 되었다.

석동은 조여홍에게 그 물건을 볼 수 있느냐고 물었고, 조여홍은 단호하게 거절을 했다.

그때부터 백모란은 거의 매일 석동을 찾아갔다. 석동 또한 아내에게 거절당할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왠지 모를 서운함에 허전해 있다가 자신의 의중을 잘 알아주는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그리 싫지 않아서 몇 번의 만남을 가졌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정분이 났다는 소문이 낙양 일대에 퍼지기 시작했고, 이내 사실처럼 알려지게 되었다.

조여홍이 처음의 생각을 접고 석동에게 취와미인상을 보여주기로 결심한 것도 그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직후였다. 그녀로서는 흔들리는 석동의 마음을 사로잡을 유일한 기회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것이 천추의 한(恨)이 될 줄은 정녕 몰랐다. 세상일이란 정말 사람의 뜻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나이를 먹어도 만사불여의(萬事不如意)로구나.”

그 말을 하는 조여홍의 씁쓸한 표정에 진산월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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