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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980화


군림천하 : 980화

“부친의 명을 거역하지 못하고 연인을 배반해야 했던 조심향은 용서를 빌기 위해 사라진 매종도를 찾았으나, 그의 행방은 찾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이 아이를 임신한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지. 그녀는 아이를 낳기 위해 중원을 떠나 멀리 남해로 내려갔다.”

묵묵히 조여홍의 말을 듣고 있던 진산월은 남해라는 말에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조심스러운 음성을 내뱉었다.

“그녀가 간 곳은 남해 청조각이로군요.”

“그래. 남해 보타산의 청조각 주인인 절음사태(絶音師)는 몇 안 되는 그녀의 지인이었으니, 그녀로서는 그곳이 남들의 눈을 피해 애를 낳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라고 할 수 있었지.”

절음사태는 조심향의 모친과 이종사촌 지간이었고, 어려서 출가했기에 그녀와 조심향이 이모와 조카 사이라는 것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조심향은 청조각에서 아들을 낳았고, 그에게 자신의 성인 조씨 성을 붙여 조관(趙觀)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관(觀)’은 불교적인 색채가 짙어서 사람의 이름에는 잘 쓰지 않는 글자였다. 그녀가 무슨 의도로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에게 그러한 이름을 붙였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에게 무염보와 난화지, 염화옥수, 칠음진기 등 자신이 완성한 무공들을 가르쳤다.

하나 칠음진기는 여인들이 익히기에 적합한 무공으로, 특히 절정에 이르기 위해서는 태음신맥을 타고 나야 했다. 조심향 이후 종남파에 칠음진기가 절전(傳)된 것도 그녀 외에 누구도 태음신맥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여인뿐 아니라 남자도 칠음진기를 익힐 수 있도록 연구를 거듭했으며, 결국 칠음진기의 위력에 못지않으면서도 그보다는 제약이 훨씬 덜한 하나의 신공을 창안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현음진기였다.

칠음(陰)에 칠음(七陰)을 더했다고 하여 현음(陰)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나, 그 자세한 사정은 현음진기를 익힌 자들만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 뒤로 조관과 그의 후예들은 모두 현음진기를 익혀 왔으며, 그것은 새로운 조씨 가문의 가장 큰 근간이 되었다.

조심향은 아들인 조관에게 오직 한 가지 지시만을 내렸다.

-태을검선의 행방을 찾아라. 그가 살아 있다면 반드시 모셔 오고, 만약 죽었다면 유진(遺塵)이라도 수습해야 한다.

조관은 그녀의 지시를 수행하기 위해 평생 동안 강호를 주유했으나 결국 죽을 때까지 매종도의 거처를 찾지 못했다.

조심향은 나이를 먹은 후에 불교에 귀의하여 불망신니(不忘神尼)라는 이름을 얻었으나, 평생 매종도에 대한 애증을 끊지 못했다고 한다.

청조각의 후예들이 몇 년에 한 번씩 강호에 출도한 것도 그녀의 유지를 수행하기 위함이었으며, 그 전통은 오랜 세월 동안 이어져 강호에서 말하는 ‘검후출세(出世)’의 전설이 되었다.

그동안 남해 청조각에서는 뛰어난 여제자들을 강호에 보내 삼 년의 수행을 쌓게 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그들의 모습을 협녀행(俠女行)이라 부르며 칭송해 왔는데, 그 진실한 내막은 한 여인의 한 서린 집념의 결과인 셈이었다.

묵묵히 조여홍의 말을 듣고 있던 진산월은 조심향에 대해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종남파의 몰락을 불러온 그녀의 행태는 실로 지탄받아 마땅했으나, 그 때문에 결국 자신은 몰론 자신의 아들까지 불운한 일생을 살게 되었으니 단순히 인과응보라고 하기에는 뭔가 어울리지 않았다.

조심향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간 지 벌써 이백 년이 가까운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녀가 남긴 여파는 아직도 강호를 뒤흔들고 있었다.

조여홍과의 대화로 진산월은 그 사실을 너무도 똑똑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조관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조관은 자신의 자식에게 자신과 똑같은 임무를 맡겼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아들도 아버지를 따라 매종도의 행방을 찾기 위해 천하의 구석구석을 뒤지고 다녔지.”

“조관의 사후라면 태을검선 또한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을 텐데, 그럼에도 태을검선을 뒤쫓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는 말입니까?”

조여홍의 얼굴에 한 줄기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은 조씨 일가에게는 천형(天刑)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모진 굴레를 끊기 위해서라도 태을검선의 흔적은 반드시 찾아야 했지.”

“그리고 그 노력은 마침내 보답을 받았군요.”

“그래, 결국 조관의 아들은 화산의 이름 모를 계곡에서 태을검선의 유진을 찾아낼 수 있었지. 태을검선이 모습을 감춘 후 거의 팔십 년만의 일이었다.” 

줄 수는 없었다. 조심향에서 조관을 거쳐 그의 아들에 이르기까지 삼 대(代)의 집요한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맺은 셈이었으나, 진산월로서는 그들의 결실을 축하해

그로 인해 종남파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마지막 남은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토록 간절하게 찾아 헤맸던 종남파의 후예가 아닌 종남파를 위기에 빠지게 했던 조심향의 후손이 테을검선의 유진을 찾아냈다는 것은 하늘의 심술이라고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을 것이다. 조심향과 그의 일가의 노력을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종남파로서는 정말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진산월은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조관의 아들은 누구입니까?”

지금까지 과거의 비사를 서슴없이 말해주던 조여홍이 웬일인지 잠시 말을 멈추고 어두운 밤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진산월은 독촉하지 않고 조용히 그녀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려 주었다.

한참 후에야 조여홍은 다시 고개를 내려 그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어둠 속에서도 훤히 볼 수 있을 만큼 다채로운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너는 참으로 방심할 수 없는 아이로구나. 진즉에 알고 있으면서도 가끔씩 놀라곤 하는 걸 보면 나도 이제 늙기는 늙은 모양이다.

“조대랑께서는 아직도 정정하십니다.”

조여홍의 얼굴에 그녀답지 않은 씁쓸하면서도 착잡한 표정이 떠올랐다.

“나도 그런 줄로만 알았지. 가슴 속에 열정이 남아 있는 한 언제까지고 건재할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부쩍 늙어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그러고 보니 가슴을 뜨겁게 했던 열정도 어느새 사라져 버린 것 같구나.”

그것은 아마도 아들인 석호의 죽음이 그녀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걸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는데, 네 물음에 순간적으로 망설였던 걸 보니 아직 마음 한구석에 내려놓지 못한 무언가가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제는 진실을 알아야 할 때가 되었지. 적어도 너에게는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여홍은 다시 정면의 텅 빈 허공을 바라보며 나직하면서도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조관의 아들은 어려서부터 혹독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조관은 결코 자상한 인물이 아니었으며, 모친의 유지를 잇지 못했다는 절박감 때문에 늘 쫓기는 인생을 살아왔지. 그는 그런 부담감과 울분을 아들에게 풀었다.”

그녀의 검은 하늘을 응시하는 그녀의 두 눈은 어느 때보다 무겁고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늘 폭력과 억압에 시달리면서도 조관의 아들은 부친의 명에 따라 어린 나이부터 험산준령을 뒤지고 다녔고, 단 하루도 몸이 멀쩡한 날이 없었지. 그런 그가 자신을 이런 처지에 몰게 한 원흉으로 종남파를 지목한 것은 그의 처지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진산월로서는 어이가 없는 일이었으나, 한편으로는 그 심정을 알 것도 같았다.

종남파에 대한 미안함과 매종도에 대한 애증이 없었다면 조심향은 자신의 아들을 평생 동안 떠돌아다니도록 내몰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모친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일생 동안 신기루 같은 꿈을 쫓아 천하를 뒤지고 다니던 조관이 자신의 아들에게 한풀이를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조관의 아들로서는 아버지나 할머니를 원망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이 모든 일이 종남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조관은 오십을 넘지 못하고 죽었다. 워낙 험지를 돌아다니느라 제 수명도 지키지 못한 것이지. 조심향이 불문에 귀의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른 다음 날, 조관의 아들은 스스로 종남산을 찾아가 종남파의 제자가 되었다.”

“……!”

“입문할 때부터 그는 뛰어난 재질을 선보여 문하생 사이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었고, 머지않아 장문인의 제자가 될 수 있었지. 장문인의 두터운 신임을 얻은 그는 머지않아 장문인의 중요한 비밀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장문인이 종남오선 중 유일하게 종남파에 남아 있던 취선 하정의의 암습해 쓰러뜨렸다.” 비전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장문인이 취선의 비전을 찾기 위해 땅속을 파헤칠 때, 그는 장경각에 불을 지르고 장문인에게 달려갔지. 그리고 장문인을

뿐이었다. 너무도 뜻밖의 말을 들었음에도 진산월은 의외로 크게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다만 어느 때보다 침중해진 표정으로 조용한 음성을 내뱉었을

“그 장문인은 본 파의 십오 대 장문인인 풍운신룡 담명이란 분입니다. 문파의 재건을 위해서 모든 힘을 바쳤으나, 후대에는 자신의 방랑벽 때문에 장문인 자리조차 내던진 사람으로 놀림을 받았지요.”

조여홍은 그런 속사정까지는 몰랐는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이미 짐작하고 있던 모양이구나. 담명의 죽음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조관의 아들 입장에서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다. 그때 조관의 수 있지.” 아들이 담명을 해친 수법이 바로 현음진기였다. 그가 무슨 심정으로 종남파를 찾아가 그런 짓을 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상징적인 것이라고 할

조관의 아들은 종남파의 제자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칠음진기에서 파생된 현음진기로 종남파 장문인을 살해하면서 무슨 기분이었을까?

단순한 농락이었을까?

아니면 자신과 자신의 부친을 평생 고통 속에 살게 했던 지독한 굴레를 벗어던지기 위한 나름의 처절한 몸부림이었을까?

그의 의도가 어찌 되었건 종남파는 풍운신룡의 죽음 이후 재기의 뿌리조차 완전히 뽑힌 채 급속하게 몰락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언젠가 당시의 일로 종남파를 떠났던 제자들의 후인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분이 말을 하더군요. 과거 담명 조사의 죽음에는 남들이 모르는 비밀이 숨어 있으며, 어쩌면 담명 조사는 암습을 당하고 치욕적인 누명을 쓴 채 돌아가신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이지요. 그때 그분이 담명 조사의 죽음에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한 사람의 이름을 말했습니다. 조화(趙華)라는 이름이었지요.”

조여홍은 한동안 아무 대답 없이 가만히 있다가 이윽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 이름을 사용했었나 보구나. 하지만 그게 본명은 아니다.”

“그의 본명은 무엇입니까?”

“그의 행적을 계속 들어보면 자연스레 알게 될 거다. 종남파를 나온 후 그는 발길을 돌려 화산파로 향했다. 원래의 정체를 숨긴 채 본명(本名)으로 전수받을 수 있게 되었다.” 화산파에 입문한 그는 이내 모든 화산파 고수들의 총애를 받게 되었고, 결국 십 년도 되지 않아 화산파 장문인의 직전제자가 되어 문파의 최고 비전을

스치고 지나갔던 것이다. 조관의 아들이 종남파를 나와 화산파로 갔다는 조여홍의 말에 처음으로 진산월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한 가지 충격적인 생각이 뇌리를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조여홍은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을 계속했다.

“그가 화산파에 입문한 것은 충동적인 결정이 아닌 나름의 심사숙고 끝에 행해진 것이었다. 그는 여전히 태을검선의 행방을 쫓고 있었는데, 최종적으로 태을검선이 몸을 숨길 곳은 화산파 근처일 것이라고 추측한 것이다. 외부인이 화산파 근처를 함부로 돌아다닐 수 없으니 그로서는 화산파의 제자가 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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