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2권 : 제국의 대장군 [8장] – 아는 것과 우는 것 10
스카리 빌파는 서류를 확인하지 않았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바둑판에 신묘한 포석을 남겨 두고 떠났던 율 형부사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는 이를 갈았다.
“사라말 아이솔이 장난을 친 것이군.’
틸러는 싱긋 웃었다.
“제 권고는 이렇습니다. 각하. 목검을 버리고 마루에 앉으십시오. 지필묵을 대령할 테니 나루터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해산 하라는 통지문을 쓰십시오. 그리고 규리하 공 비셀스 규리하에게 보낸 청혼서를 취소하며 앞으로 다시는 같은 일을 벌이지 않겠다 는 내용의 각서도 한 장 부탁합니다. 협조해 주신다면 위엄을 지 켜 드리겠습니다.”
많이 연습한 듯한 매끄러운 말투였다. 다시 오지 않을 기회를 붙잡았으니 연습이 많았을 것임은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스카리는 격분 때문에 고통스러워 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발케네 공을 이렇게 대하고 너와 사라말이 무사할 거라고 믿는 것은 아니겠지.”
“폐하의 사자패주를 협박하는 겁니까?”
“내가 왜 사자패주의 명령을 들어야 하나! 내 죄가 뭔지 말해봐.”
“사자패주의 명령을 안 들은 죄입니다.”
스카리는 우습지도 않다고 생각했지만 유료도로당원들은 껄껄 웃었다. 압도적으로 유리한 위치 때문에 그들은 어떤 시시한 농 담에도 선선히 웃어 줄 수 있었다. 그리고 스카리가 목검을 바닥 에 떨어뜨리자 그들은 더욱 즐거워했다.
스카리는 목검을 내려놓으며 손을 허리쯤으로 가져갔다가 재 빨리 들어 올렸다. 스카리가 마침내 포기한다고 믿었던 틸러와 유료도로당원들은 그 동작에 대처하지 못했다.
스카리의 손이 머리 근처를 스친 순간 그의 모습이 싹 사라졌 다. 틸러는 목이 졸린 소리를 냈다.
“발케네 공!”
스카리는 다시 나타나서 대답할 만큼 예의 바르지는 않았다. 틸러는 자신이 어처구니없는 여유를 부리고 있음을 깨닫고 황급 하게 외쳤다.
“모두 서로 붙어! 도깨비감투다.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해!”
그리고 틸러는 스카리가 사라진 방향으로 손을 거칠게 휘두르 며 뛰어들었다. 경악에 빠져 있던 유료도로당원들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서로의 간격을 좁혔다. 그러나 조금 후 틸러가 정말 원하지 않았던 비명이 들려왔다.
“아이고, 내 코!”
한 유료도로당원이 얼굴을 움켜쥔 채 앞으로 고꾸라졌다. 몸을 홱 돌려 그쪽을 본 틸러는 두 팔로 얼굴 근처를 가리며 달려갔 다. 그때 담장 저편에서 무엇인가가 쿵 하는 소리를 냈다. 틸러 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제기랄! 벌써 빠져나갔군. 모두 9번 나루터로………… 나를 따라와!”
하늘누리의 지리를 잘 모르는 유료도로당원을 위해 틸러는 앞 장서서 달려야 했다. 스카리의 병력이 집결해 있는 9번 나루터로 달려가면서 틸러는 암살공의 아들이 도깨비감투를 가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떠올리지 못한 자신을 저주했다.
스카리의 진로를 알았다면 틸러는 그나마 자부심을 느낄 수 있 었을 것이다. 틸러의 추리대로 스카리는 자기 사람들이 모여 있 는 나루터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무엇인가가 달려가는 소리는 나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광경은 수도 시민들을 어리둥절하 게 했다. 좌우를 두리번거릴 뿐 비켜서지 않는 사람들을 보며 스 카리는 짜증을 느꼈다. 그들을 떠밀어 버리고 싶었지만 쫓아오는 이들에게 나 여기 있소 하는 꼴이 될 터인지라 스카리는 분노를 억눌렀다.
스카리의 억제된 분노는 나루터에 도착하면서 폭발했다. 나루 터에는 위험해 보일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외침이 충분히 들릴 거리에 도달한 스카리는 주저 없이 외쳤다.
“스카리 빌파가 말한다. 돌격!”
스카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더라도 그 목소리가 들리면 곧 행동에 돌입하기로 몇몇 사람들과 미리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런 약속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스카리가 어디에 있나 둘러보았지만 언질을 받은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시간 낭비를 하고 있도록 내 버려두지 않았다.
“돌격이다!”
외침과 함께 나무 몽둥이를 든 남자가 몸을 뒤로 돌렸다. 그리 고 나루터 밖으로 몸을 던졌다. 아주 잠깐 동안 중력의 영향만 받으며 떨어지던 남자는 곧 보이지 않는 어떤 구조물의 도움을 받아 이동 방향을 바꿨다. 그는 허공을 빠른 속도로 미끄러졌다. 그러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른 남자가 외쳤다.
“가자! 뒤처지지 마!”
몇 명의 남자들이 뒤쪽으로 몸을 던졌고 그들 또한 허공을 비 스듬하게 미끄러져 내려갔다. 곧 나루터 위에 모여 있던 사람들 모두가 아래로 몸을 던졌다. 그들은 어떤 환상 계단을 만들 것인 지도 미리 결정해 두었다. 계단 난간을 타고 놀아 본 사람은 모 두 이해할 수 있는 계단이다. 좁고 매끄러운 긴 경사로, 거기에 배를 대고 두 다리와 손으로 양쪽을 붙잡아 속도를 조절한다. 엉 덩이부터 아래로 향하는 그 모습은 그다지 품위 있는 것이 아니 지만 꽤 괜찮은 방법이었다. 다른 사물에 영향을 받지 않는 환상 계단에서 속도를 조절하려면 자신의 손바닥이나 발을 사용할 수 밖에 없으니까. 가장 먼저 뛰어내렸던 사내는 다른 사람에게 보 이지 않는 환상 계단을 두 허벅지와 손으로 꽉 붙잡아 속도를 늦 추고 있었다. 곧 그는 규리하 성 뒷마당에 내려섰다. 뒤이어 다 른 사람들도 차례로 내려섰다.
나루터에 도착한 틸러는 아래로 미끄러지는 스카리 측 사람들을 보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는 스카리와 그 동료들이 어떤 환상 계단을 만들어 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것을 유료도로 당원들에게 설명해 줄 수가 없었다. 그렇더라도 당원들과 함께 승강기를 이용할 수도 없었다. 도깨비감투를 쓰고 있는 공격자가 있다는 것을 한시라도 빨리 아래쪽에 알려야 했으니까. 틸러는 결정을 내렸다.
“우리 올라왔을 때 이용했던 승강기 알지? 그걸 타고 내려와서 합류해라! 나는 환상 계단으로 먼저 내려가겠다.”
그리고 틸러는 뒤로 돌아 엉덩이를 죽 뺀 볼품없는 자세로 섰 다. 머릿속에 그린 경사로가 현실이 되었고 틸러는 그것을 따라 미끄러졌다. 규리하 성을 향해 빠르게 미끄러지면서 틸러는 데시 마스 수교위가 자신과 달리 스카리 빌파가 도깨비감투를 가지고 있을 경우를 가정하기를 기원했다.
틸러의 기원이 니름이 되어 데시마스 수교위에게 전달된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쟈마 데시마스라는 남자가 수교위라는 계급에 부족함이 없는 노회한 인물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사실적 이다. 그가 보기에 신부를 훔치러 오는 자가 발케네 공이라면 도 깨비감투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안전했다. 그래서 쟈마 데시마스 수교위는 몇몇 병사들에게 좀 특별한 종류의 무기를 준 비하도록 했다.
규리하 성에 난입한 공격자들은 채찍을 휘두르는 병사들의 모 습에 당황했다.
채찍은 살점을 뜯어낼 만큼 무서운 무기지만 치명적인 무기는 아니다. 채찍이 입히는 상처는 찰과상이며, 따라서 뼈를 부술 수 도 있는 몽둥이에 비하면 오히려 온건한 무기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병사들은 도깨비감투를 쓰고 몸을 숨기고 있을 스카리를 찾아내기 위해 사람이 없는 빈 공간으로 채찍을 휘둘렀다. 하지 만 공기를 찢는 무서운 굉음과 사나운 기세는 공격자들을 당황시 켰다. 그들은 꽤 긴 시간 동안 채찍을 피해 다녔다. 우연히 대처 법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그들은 병사들과 승강기를 타고 내려온 유료도로당원에게 포위되어 순식간에 자멸했을 것이다.
공격자들을 구한 우연은 어떤 몽둥이에 감겨 버린 채찍이었다. 몽둥이의 주인은 당황하여 몽둥이를 왈칵 끌어당겼고 그러자 채 찍 소지자는 얼떨결에 그것을 뺏기고 말았다. 그 모습은 많은 공 격자들에게 목격되었고 공격자들은 즉각 채찍의 궤적에 몽둥이나 목검 등을 쑤셔 넣었다. 병사들은 속절없이 채찍을 놓치거나 또 는 채찍을 끌어당기며 당혹한 얼굴로 물러났다. 공격자들의 기세가 드높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