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2권 : 제국의 대장군 [10장] – 바람 속에 던진 돌 1
병리학적 연쇄 살인자 파델 미호린의 문제점은 그가 지나친 부자였다는 점이다. 각자 정의와 법, 복수 심의 응원을 받는 추적자들의 추적은 매서웠으나 파 델 미호린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준마를 타고 힘껏 달 렸다. 그러나 파델 미호린은 도로에 도달하자마자, 즉 전속력으로 달릴 수 있는 여건이 되자마자 추적자들 이 보는 앞에서 말에서 내렸다. 추적자들은 미호린이 도주를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호린의 환희 에 찬 선언은 추적자들을 절망에 빠트렸다. 미호린이 딛고 있는 것은 유료도로당의 도로였다. 유료도로당 원들은 자신의 도로에 있는 여행자인 미호린을 보호 하기 위해 출동했고 미호린은 추적자들의 분노를 조 롱하며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추적자들이 내뱉은 폭 언과 욕설, 설득의 외침들은 유료도로당원에게 아무 런 영향도 주지 않았다.
이 사건은 곧 관계된 모든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관계되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억울한 죽음에 슬퍼하는 유가족들로부터 법의 지엄함 과 도덕의 존엄함을 믿는 많은 상식인들이, 그리고 존 경받는 지식인들이 보낸 항의가 유료도로당에 산처럼 쌓였다. 그러나 유료도로당은 자신의 원칙만 되풀이 할 뿐이었다. ‘여행자들의 안전한 도로 이용을 위해 유료도로 위에서는 어떤 종류의 폭력도 허용하지 않 는다.’ 그동안 파델 미호린은 막강한 재력으로 유료도 로당의 도로와 여숙 시설을 이용하며 유유히 여행했 다. 그는 도로 위에 있을 때만 유료도로당의 완전한 보호를 받는다는 것을 결코 잊지 않았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 사건을 고귀한 도덕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였지만 황제의 정부에서는 조 금 다른 의미의 위기로 파악했다. 제국의 체제 내에서 법 위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황제 한 사람뿐이 다. 제국 관리들이 보기에 유료도로당의 행태에서는 그들이 자신들의 규칙을 제국법 위에 놓으려 한다는 혐의가 엿보였다. 유료도로당에 대한 하늘누리의 여 론은 악화되었다. 물론 그 악평의 상당 부분은 자유무 역당의 선동에 힘입은 것이겠지만 자유무역당과 별다 른 이해 관계가 없는 이들도 유료도로당의 행태에 격 렬한 비난을 보내며 황제에게 유료도로당의 처벌을, 심지어 그 해산을 간원했다. 그러나 어떤 여론과 간원 에도 황제는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황제는 형부사 에스커 헬토를 불러들였다. 황제의 명령은 잘 알려져 있다. “가서 그 일을 해결해라.” 율형부사 에스커 헬토는 그 일이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 부사는 젊은 율형부차사 사라말 아이솔을 불러들여 모종 의 지시를 내렸다. 사라말 아이솔은 장검 한 자루를 챙겨 하늘누리를 떠났다.
여드레 뒤, 에시올 산맥 남단의 자흐 – 로세이즈 유 료도로를 걷고 있던 파델 미호린은 길 앞쪽에서 기다 리고 있던 율형부차사 사라말 아이솔을 발견했다. 상 대의 정체를 알게 된 미호린은 젊은 차사를 희롱하고 황제의 법을 조롱했다. 사라말 아이솔이 묵묵히 칼을 뽑아 들 때까지. 당황한 미호린은 동행하던 유료도로 당원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유료도로당원의 대답은 청천벽력 같은 것이었다.
“당신이 조금 전 지나친 이정표부터 다음 이정표까 지 2킬로미터 구간은 저기 계신 율형부차사 사라말 아이솔께서 동편 한 닢을 지불하고 구매하셨습니다. 따라서 이곳은 당의 도로가 아닙니다.”
유료도로당원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라말 아이솔의 칼이 번뜩였다. 파델 미호린은 머리가 땅에 떨어질 때 까지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은 유료도로당의 도로가 외부에 판매된 유일한 예다. 사람들은 유료도로가 팔렸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 가격이 동편 한 닢이라는 것에 또 한번 놀랐다. 하 지만 사람들이 놀랄 일은 한 가지 더 남아 있었다. 사 라말 아이솔은 동편 한 닢을 주고 산 도로를 금편 오 백 닢을 받고 유료도로당에 되판 것이다. 사람들은 이 폭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사람들 의 당황이 해소된 것은 젊은 차사가 도로 판매금 전액 을 유가족에게 전달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였다. 금 편 오백 닢은 유료도로당이 유가족들에게 보내는 위 로금이었다. 그러나 엄격한 유료도로당원은 그 금액 에서 동편 한 닢을 빼야 한다는 사실을 언제나 지적 한다.
-하르체 도빈의 「우리는 길을 준비한다」 중
바람 속에 던진 돌
세상에는 어린 땅, 사춘기에 걸린 땅, 미친 땅 등과 함께 조로 증에 걸린 듯한 땅이 있다. 창조되자마자 늙어 버려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않는 이런 땅 중에는 황금해를 향해 달리는 에시올 산 맥이 아직 바다에 대한 피상적인 꿈을 꾸는 곳, 실드파이 봉우리 아래의 벨쟈고 고원이 포함된다. 디네에서 남쪽으로 300킬로미터 가량, 로세이즈에서 북으로 500킬로미터가량 떨어져 있고 슈라도 스와 자흐로부터도 800킬로미터쯤 떨어져 있어 육상의 고도(孤 島)라 할 수 있는 이 땅은 종말이 올 때까지 살 자신이 없는 사 람들이 그 모습을 미리 보기 위해 찾아옴 직한 땅이다.
수억 년 동안 태양에 그을린 칼날 같은 바위와 붉은 모래들. 그 따스해 뵈는 빛깔에 어울리지 않게 쟈고 고원은 차갑다. 모 래 틈에 있는 무수한 미세 암흑들이 날과 달과 해를 한량없이 삼 키지만 시간에 대한 이 땅의 굶주림은 끝이 없을 것 같다. 따라 서 비탈을 구르는 레콘의 몸이 날려 올린 것은 태양에 그을린 모 래와 흙만이 아니다. 그곳에서는 이 땅에 삼켜져 반쯤 소화되었 던 시간들이 파드득거리며 날아올랐다.
급한 경사를 따라 몇 십 미터쯤 신나게 구른 주테카는 자신의 분노보다 더 빠르게 일어났다. 그래서 분노는 조금 뒤늦게 일어 나 그의 뒤통수를 때렸다. 주테카는 눈이 뒤집힐 만큼 화가 나 고함을 질렀다. 확 부푼 그의 몸에서 피어오른 흙모래가 주테 카의 부리에서 터져 나온 바람을 타고 빙글빙글 대류했다. 정신 사나운 모습이다. 그러나 주테카의 격분은 길지 못했다. 호리병 하나가 빠른 속도로 날아왔기 때문이다.
주테카는 승천한 티나한을 찾아가려는 것이 아닌가 싶게 도약 했고 그가 있던 자리에서는 호리병이 폭발했다. 파편들이 사방으 로 튀어올랐다.
조금 떨어진 언덕 위에서는 론솔피가 도끼창을 쥔 손을 떨며 땅에 떨어지는 지멘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론솔피는 지멘이 땅에 내려설 때 그의 허리를 잘라 놓겠다고 결심하고 있었지만 공중에서 지멘이 던진 물건을 보고는 두 다리가 땅에 붙어 버렸 다. 론솔피는 저거 봤냐는 표정으로 멀리 있는 준람을 쳐다보았 지만 그가 본 곳에는 준람이 보이지 않았다. 준람은 자신의 감정 에 솔직했다. 그는 지멘과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맹렬하게 도망 치고 있었다.
실드파이 봉우리 중턱에서 딱정벌레의 등 위에 걸터앉은 채 아 래를 내려다보던 이레 달비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디네에서 지멘이 호리병을 대량으로 구입했다는 정보를 입수 했을 때 이레는 그것이 추적자들을 동요시키기 위한 허위 정보일 거라 믿었다. 그의 상전과 네 명의 레콘 또한 전적으로 동의했는 데, 그들은 지멘이 물병을 만질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 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벨쟈고 고원에 들어섰을 때 지멘은 지척 까지 다가온 론솔피에게 호리병을 집어던졌다. 론솔피는 거의 디 네까지 되돌아갈 뻔했다. 지멘이 집어던진 것이 빈 호리병이었음 이 밝혀졌을 때 추적자들은 자신이 지멘에게 농락당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 모든 호리병이 비어있을까? 호리병 판매자가 알려 준 또 다른 정보는 그들의 의욕을 대폭 저하시키는 것이었다. 지 멘은 호리병을 구입하면서 그중 몇 개의 병에 물을 채운 다음 단 단히 밀봉하고 겉에 표시를 해 달라는 복잡한 주문을 했다는 것 이다.
물론 지멘은 오래전에 표시가 된 병을 모두 버렸을 수도 있다. 그것이 상식적이다. 하지만 판매자가 실수로 표시를 하지 않은 것이 있을 수도 있다. 우연의 장난은 때론 치명적이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그 두 가지 경우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이 정말 염려하는 것은 가장 믿기 어려운 경우, 즉 지멘이 표시가 된 병들을 가지고 있을 경우다. 이 경우 추적자들은 지멘의 전투 능력 외에 그의 정신 상태에 대해서도 고민해 봐야 할 것이다. 이레는 지멘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하 나뿐인 사례는 정의를 내리는 데 부족하지만 이 경우엔 지멘에게 정신 질환의 판정을 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분노한 주테카가 철저로 바위를 몇 개 때려부수며 외쳤다. 소 지품 관리에 좀 더 주의를 기울여 줄 것을 요망한다는 의사가 악 랄한 비속어로 표현되었다. 자신의 의사가 관철되지 않을 경우 지멘을 상대로 해부학적 도전이 될 만한 실험에 돌입하겠다는 경 고도 뒤를 따랐다. 지멘은 가장 효과적인 반응을 보였다. 주테카 와 그의 독설을 한자리에 남겨 두고 도망친 것이다. 청자가 무시 할 경우 독설은 화자의 심사를 뒤집어 놓는다. 주테카는 화가 나 서 땅에 드러누워 버렸다. 상처 입은 정의 구현자의 비명이 벨쟈 고 고원을 진동시켰다.
“쿠아아아악!”
주테카가 개미처럼 보이는 먼 거리였지만, 그리고 빛이 사그라 드는 황혼 녘이었지만 비명의 절절함은 이레에게 남김 없이 전달 되었다. 이레는 고개를 내저으며 그의 상전을 바라보았다.
엘시 에더리는 바위에 걸터앉아 아래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 찬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뒤집어 불꽃처럼 떠오르게 하고 있지 만 그 사이로 보이는 눈은 차분하다. 엘시가 말했다.
“왕벼슬, 당신이라면 다급한 처지에 빠지면 저런 재주를 부릴 수 있겠습니까.”
그날 엘시와 이레를 경호하던 쵸지가 수염병을 주무르며 말했다.
“너라면 그래야만 하는 상황에서 똥을 먹을 수 있겠나?”
이레는 이 반문에 화를 내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엘시는 화 난 기색이 없었다.
“어려운 질문이군요. 아마 강력하게 거부하거나 다른 방법을 찾기 위해 애쓸 겁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지멘이 저 짓거리를 하는 이상 다루기 까다로워.”
“야리키가 와 줬다면 좋을 텐데 아쉽군요.”
“뭐 하는 사람인데? 그을린발은 알지만 그 사람은 모르겠군. 군대 출신은 아닌 것 같은데.”
이레는 무예의 달인이나 투사 병기를 다루는 레콘에 관한 이야 기를 듣게 될 거라 예상했다. 이레의 예상은 당혹스러운 방식으 로 빗나갔다.
“조인(人)입니다.”
“뭐? 생선 사냥꾼?”
“보통은 낚시꾼이라고 합니다.”
“미쳤어?”
“마지막으로 봤을 때 정신에 하자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정상적인 레콘이, 음. 거기서 그걸 보면서 생선 사냥을 한다고?”
“그러기를 바랍니다.”
“무슨 말이야?”
엘시는 손목을 꺾으며 말했다.
“최후의 대장간에서 조간을 받은 이후로 야리키가 낚은 고기는 한 마리도 없습니다. 그가 나설 때마다 항상 뭔가 부족하거나 잘 못된 점이 있었지요. 사람들이 지나치게 붐빈다거나, 좋은 고기 가 없어 보인다거나, 날씨가 지나치게 좋다거나, 혹은 지나치게 나쁘다거나, 낚시질보다 더 급한 용건이 갑자기 생기거나.”
이레는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쵸지 또한 웃음을 머금어 보였다.
“감당할 수 없는 숙원을 택해 버렸군. 사는 것이 팍팍하겠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낚시는 그 안에 들어갈 필요가 없는 일이니까 어쩌면 가능할 것도 같습니다. 지멘은 배도 탔습 니다.”
쵸지는 그 말을 못 들은 척했다. 엘시가 계속 말했다.
“그에 비하면 야리키가 하려는 일은 조금 난이도가 낮다고 할 수 있겠지요. 야리키의 조간은 레콘의 체구에 맞춘 것이라 굉장 히깁니다. 꺼림칙한 장소에서 거리를 두고 낚시를 할 수 있지 요. 마지막으로 봤을 땐 아직 한번도 시도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그가 그 일에 성공했다면 지멘의 저런 공격에도 상당한 저항력을 보여 주겠지요.”
“내기를 할 돈은 없지만 다른 걸 걸어도 된다면 그 사람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에 걸고 싶군.”
“그랬을지도 모르겠군요. 성공하면 어탁을 떠서 내게 보내 준 다고 했지만 아직 받지 못했습니다. 어쨌든 나는 그가 성공하길 바랍니다. 숙원에 도전하는 모든 레콘들에게 보내는 것과 똑같은 응원을 보내며.”
이레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문득 쵸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나 그의 주인보다 훨씬 높은 곳에서 쵸지는 기이한 눈길로 별 이 반짝이는 저녁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레는 주인만큼 레 콘에게 익숙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쵸지의 표정을 읽기 어려웠다. 엘시가 말했다.
“왕벼슬, 저 사람들에게 돌아오라고 전해 주십시오.”
쵸지는 고개를 숙였다. 쵸지는 론솔피와 주테카, 준람에게 들 리도록 계명성을 내질렀다. 론솔피는 도끼창을 어깨에 맨 채 풀 쩍풀쩍 뛰어 산 위로 달려왔고 저 멀리서 지평선을 건드리고 있 던 준람도 돌아왔지만 주테카는 그때까지도 땅에 드러누워 괴성 을 지르고 있었다. 엘시는 자신을 위로하는 주테카의 방식을 존 중하기로 했다. 그는 주테카를 내버려둔 채 말했다.
“수고했습니다. 저녁 먹고 다시 추적하도록 합시다.”
론솔피가 약간 어색해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말 하고 싶진 않지만, 밤중에 저 녀석에게 다가가고 싶지 않은데.”
엘시는 왜 그러냐고 묻지 않았다.
“오늘 밤엔 가까이 다가가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어디로 가는 지만 확인해 두지요.”
론솔피는 한결 안심한 얼굴이 되었다. 간단한 식사가 끝나고 횃불을 만든 다음 준람과 쵸지가 엘시와 함께 출발했다. 그리고 이레와 론솔피, 조금 늦게 산을 올라온 주테카는 아무렇게나 쓰 러져 잠시 눈을 붙였다. 그들은 이렇게 세 명씩 교대로 지멘을 추적해 왔다. 따라서 그들은 교대로 쉴 수 있지만 지멘은 그렇지 못했다.
추적자들의 바람처럼 지멘은 극심한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고원 귀퉁이의 산자락에 몸을 숨긴 채 지멘은 사지에서 전해 오는 비보들을 무시하려 애썼다. 하지만 졸음이나 허기와 마찬가 지로 통증은 무시하기 어려운 것이다. 특히 무시하기 힘든 것은 준람에게 찔린 허리 쪽의 고통이었다. 레콘 추적자들에게 쫓기는 도망자에겐 곤란하기 짝이 없는 상처다. 해 저물 무렵 치렀던 일 전의 흥분이 사라지며 지멘은 부리가 떨어질 것 같은 한기와 통 증을 느꼈다. 옆구리를 만져 본 지멘은 상처가 벌어졌음을 확인 했다. 뭄토에게 찔린 오른팔의 상처도 격심한 움직임 때문에 다 시 악화되는 것 같았다.
지멘은 뜨거운 숨을 토해 내며 차가운 흙 속에 머리를 비벼 넣 었다. 이대로 땅 속에 묻혀서라도 추적자들의 눈을 피해 쉬고 었다. 지멘은 아실이 그토록이나 엘시를 두려워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엘시가 아냐.’
지멘은 왼손으로 수염볏을 비틀며 생각했다.
‘엘시가 아냐. 나는 레콘들에게 쫓기고 있는 거야. 레콘들만 없다면 엘시는 아무것도 아냐.’
보다 안정된 상태였다면 지멘은 자신이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펴고 있음을 스스로 깨달았을 것이다. 그런 논리가 성립한다면 지멘은 치천제를 공격할 수 없다. 치천제가 타이모를 손수 쟁룡 해에 집어던진 것은 아니니까. 타이모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 치천제이듯 그를 괴롭히고 있는 것은 엘시 에더리다. 그러나 혹 독한 상태에 빠져 있는 지멘에겐 그 정도의 사유도 버거웠다.
‘충분한 난폭함을 가지고 있다면, 네 삶을 시련으로 만들어라.’ ‘왜 시련을 선택해야 합니까, 타이모? 시련을 선택해서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완전한 실패입니다. 혹 힘겹게 시련에 서 벗어난다 해도 그것은 애초에 시련을 선택하지 않은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충분한 난폭함을 가지고 있다면, 네 삶을 시련으로 만들어라.’ ‘타이모, 같은 말을 자꾸 반복해서 어쩌겠다는 겁니까?
‘충분한 난폭함을 가지고 있다면, 네 삶을 시련으로 만들어라.’ 죽은 자의 말은 계절과 같다. 언제나 같은 것이 되돌아온다. 삶과 죽음의 차이는 거기에 있다. 아니, 그럴까? 살아 있는 것도 똑같은 것의 반복이다. 니어엘 헨로는 그에게 아기살을 쏘았고 뭄토는 접칼을 휘둘렀으며 준람은 창을 내찔렀다. 그 일은 계속 될 것이다. 열 살만 넘어도 알 수 있는 일이지만 내일은 단 한 가지 사실 외에 아무것도 담보하지 않는다. 오늘과 똑같이 한심 할 수 있다는 것. 가까스로 해결한 모든 고민이 형태를 바꿔 끝 없이 돌아온다. 더 이상 해결할 수 없는 최종적 고민 아래 쓰러 지면, 그것이 죽음이다. 그리고 그것이 삶이다. 삶과 죽음의 차 이는 없다. 숙원만이 가치 있다.
‘죽은 황제는 돌아오지 않는다.’
황제에게 죽음을. 철저하고 무참하고 회복 불가능한 죽음을. 지멘의 손이 무의식중에 움직였다. 그 손은 허공에서 누군가의 사지를 찢어 내는 동작을 그려 보였다. 팔을 비틀어 어깨에서 떼 어 내고 무릎을 분지르고 등을 찢어 척추를 끄집어내는 섬세하고 집착에 찬 동작.
그것이 가치 있는 일이기에.
그것이 가치 있는 일이기에?
퇴락한 땅에 몸을 누인 채 지멘은 밤이 동에서 서로 날아가는 소리를 들었다. 손을 뻗어 만져 보면 손끝에 검댕이 묻어날 것 같은 시커먼 밤. 바람은 시퍼런 쇳냄새로 가득하고 그의 몸 안에 서는 비비 꼬인 열기가 꿈틀댄다.
지멘은 상체를 일으켰다. 다리가 어디 있는지도 제대로 떠오르 지 않는 현기증을 느꼈다. 예상과 조금 다른 위치에 있는 땅을 겨우 찾아내어 짚은 지멘은 고원 사이에서 일어났다. 추적자들에 게 발각되지 않으려면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할 테지만 지멘은 아 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땅을 힘껏 박차며 뛰어올랐다. 그 소리는 꽤 먼 곳까지 전달되었다. 곧 저 먼 곳에서 레콘들이 달 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지멘은 그 소리를 무시했다. 망치의 목을 단단히 움켜쥐고 구릉을 뛰어넘었다.
지멘을 먼저 포착한 것은 쵸지였다. 조금 전까지 소리를 따라 달리던 쵸지는 조금 후 묽은 어둠 속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검은 덩어리를 발견했다. 쵸지는 지체 없이 횃불을 빙글빙글 돌린 다 음 그 검은색을 추적했다. 저 먼 곳에서 딱정벌레가 날아오는 소 리가 들렸다. 얼마 후 준람도 그에게 합류했다. 그들은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은 채 지멘을 뒤따라 달렸다. 지멘은 전속력으로 달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쵸지와 준람 역시 어둠 속에서 무리한 체포를 감행하다가 곤경을 겪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그들은 지 멘의 기운을 빼놓기로 했다. 지멘이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는 거 리를 유지하며 쵸지와 준람은 꾸준히 달렸다.
밤을 달리는 세 레콘의 발소리가 작은 장단을 만들었다. 비탈 을 내려가는 약간 가벼운 소리, 능선을 따라 달리는 무거운 소 리, 좁은 협곡 사이에서는 발소리가 왕왕 울린다. 쌓인 자갈들이 구르며 내지르는 아우성은 여운이 퍽 길다.
하늘이 제비꽃 빛깔로 물들었을 때 쵸지와 준람은 안도하며 동 시에 의혹을 느꼈다. 주위가 밝아져서 이제 지멘의 모습이 잘 보 였지만 그 속도는 지난밤과 똑같았다. 지멘은 걷거나 멈추지 않 았다. 그는 계속 성큼성큼 달렸다.
횃불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 쵸지는 그것을 옆으로 늘어뜨려 땅 에 긁었다. 불티가 날리다가 불이 꺼졌다. 홰를 다시 회수하려던 쵸지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홰로 바닥의 돌을 튕겨 올렸다. 그의 진로 앞에 동실 떠오른 돌을 왼손으로 붙잡은 쵸지는 계속 달리면서 그것을 관찰했다. 잠시 후 쵸지는 옆에서 달리는 준람 에게 돌을 던져 주며 중얼거렸다.
“죽으려고 작정하는군.”
돌을 받아 든 준람은 쵸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돌에 는 피가 묻어 있었다. 그는 부리를 꽉 닫은 채 돌을 어깨 너머로 집어던졌다.
“우리가 몇 시간째 뛰고 있는 거지?”
“열 시간쯤? 졸리는군.”
“엘시의 딱정벌레가 안 보이는군.”
“딱정벌레는 그렇게 오래 못 날아. 어디서 쉬고 있겠지.”
낭떠러지가 나타났다. 두 사람은 동시에 뛰어내렸다. 땅에 떨 어진 준람이 무릎을 펴며 말했다.
“이제 좀 훤해졌는데, 한번 붙어 볼까.”
쵸지는 지멘과의 거리를 가늠했다. 그들은 약간 경사진 땅을 따라 평야 지대로 들어서고 있었다. 쵸지는 평야 반대편에 떨어 져 있는 바위산을 보았다. 10킬로미터쯤 되는 것 같았다. 지멘 이 높은 곳에 올라가면 싸우기가 좀 어려울 것이다. 쵸지는 결 정했다.
“좋아. 산에 도달하기 전에 따라잡자.”
준람과 쵸지는 속도를 높였다. 비탈길을 내려가던 중이라 속도 는 급상승했다.
밤새 계속되던 장단이 갑자기 변경되자 지멘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도 준람과 쵸지의 움직임에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 었다. 지멘은 앞쪽의 바위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두 개 로 보인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지멘은 펄쩍 뛰어올라 평야 이곳 저곳을 빠르게 둘러보았다. 도움될 만한 것을 찾던 지멘은 동쪽 으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시선을 끄는 것을 발견했다. 땅에 내려설 때까지 지멘은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저것을 뭐라고 하더라.
두 발이 쾅 하며 바닥에 닿았을 때 지멘은 가까스로 자신이 본 것의 이름을 떠올렸다. 그것은 평야를 따라 곧게 뻗어 있는 도로 였다. 지멘은 갑자기 그곳으로 가야 한다고 느꼈다. 합리적인 이 유는 댈 수 없었지만 지멘은 자신의 직감을 믿기로 했다. 그는 진로를 동쪽으로 조금 수정했다. 그동안에도 준람과 쵸지는 질풍같은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지멘은 몸을 부풀리며 전속력으로 달렸다.
지멘은 마음먹은 것처럼 속도가 올라가지 않는다는 것에 당황 했다. 그의 몸은 밤새도록 계속된 속도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리 고 누적된 피로 또한 지멘의 발목을 붙잡았다. 지멘의 뒤를 따라 달리던 준람과 쵸지가 무기를 뽑아 드는 소리가 들릴 지경이었 다. 지멘은 호리병을 꺼내 들었다. 재빨리 몸을 돌린 지멘은 절 망을 느꼈다.
준람과 쵸지는 서로 상당한 거리를 두고 달려오고 있었다. 한 쪽을 향해 호리병을 집어던질 수는 있겠지만 다른 쪽이 쇄도하는 것은 막을 수 없다. 선택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까다롭기 짝이 없는 쌍창을 떠올린 지멘은 준람에게 호리병을 집어던졌다.
다급하게 발목을 돌리느라 준람은 하마터면 다리를 부러뜨릴 뻔했다. 그 다리는 얼마 전 지멘에게 호되게 맞은 다리였다. 준 람은 어쩔 수 없이 다른 발로 겅중겅중 뛰었다.
“쵸지, 잡아!”
쵸지는 대답 대신 커다란 벼슬을 빳빳하게 세웠다. 쵸지가 단 병을 쓰며 또한 그것이 날붙이가 아님을 확인한 지멘은 몸을 거 대하게 부풀리며 망치를 집어 올렸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지멘 은 쵸지가 평생 함께할 무기를 아무렇게나 고르지는 않았을 거라 는 생각을 떠올렸다.
‘설마 저것이 칼일까?
달려오는 쵸지의 자세는 아무리 보아도 칼잡이의 것이었다. 지멘은 길게 잡았던 망치를 재빨리 손 사이로 미끄러트려 짧게 잡았다.
지멘의 예상이 맞았다. 쵸지는 칼을 쓰듯 삼각 철봉을 내찔렀다. 망치 자루로 쵸지의 철봉을 쳐 내린 지멘은 지체 없이 쵸지의 정수리를 쪼려 했다. 그러자 쵸지는 왼손을 주먹 쥐어 지멘의 부 리와 머리가 연결된 부분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머리가 홱 돌아 가는 타격에 지멘은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쵸지 또한 아픔에 쩔 쩔매며 왼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싸움의 규칙에 더 능한 것은 지 멘이었다. 지멘은 비틀거리면서도 품속에서 호리병을 꺼냈다. 호 리병을 집어던지려던 지멘은 깜짝 놀랐다. 그때까지도 손을 흔들 던 쵸지는 지멘의 동작을 보지 않았다. 쵸지가 병을 피할 수 없음 이 분명하지만 지멘은 이미 휘두른 자신의 손을 멈출 수 없었다. 호리병은 쵸지의 부리에 부딪혔다.
놀랄 만큼 많은 생각이 순식간에 쵸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렇군. 난 제대로 싸운 적이 없어.’
신부 탐색자에겐 어울리지 않는 일이지만 쵸지는 그러했다. 쵸 지는 싸워서라도 얻고 싶은 여인을 발견한 적이 없었고, 또 다른 레콘 남자가 뺏어갈 여자를 가진 적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다른 레콘들과 싸운 적이 없다.
‘서툴 거라곤 생각했지만 이 정도였나?
자신의 가슴을 무방비하게 노출시켰다는 사실에 더 놀랐기 때 문에 쵸지는 잠깐 동안 호리병에 대해서는 생각지 못했다. 불행 중 다행이라 할 것이다. 조금 후에야 쵸지는 자신이 물이 들어 있을지도 모르는 병에 맞았음을 깨달았다. 쵸지는 떨어진 호리병 파편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욕설이나 비명을 질러야 할 것 같 았지만 어쩐지 어색했다. 쵸지는 화를 내야 하나 생각하며 지멘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지멘은 여전히 그보다 능숙했다. 쵸지가 볼 수 있었던 것은 도망치는 지멘의 뒷모습이었다.
“이봐! 괜찮아?”
준람은 쵸지의 어깨를 확 잡아당겼다. 쵸지가 호리병에 맞는 모습을 똑똑히 본 준람은 그가 선 채로 기절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쵸지는 놀랍도록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난 괜찮아.”
“정말?”
“정말.”
“그럼 빨리 쫓아가지 않고 뭐해?”
“그래.”
준람은 그때까지도 의심스러운 눈으로 쵸지를 바라보았다. 그 러나 쵸지는 지금까지와 같은 모습으로 태연히 지멘의 뒤를 쫓았 다. 그가 지멘을 추적하는 것을 거부하거나 미적거릴 것을 염려 한 준람은 그 침착한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두 사람이 그렇게 지체하는 동안 지멘은 도로에 도달했다. 지 멘은 도로를 따라 달렸다. 그리고 자신이 왜 도로에 들어왔는지 생각해 보았다. 한 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발자취를 없애기 위해 물속에 들어갈 수 없는 그의 입장에서 잘 정비된 도로는 물 의 대용이 될 수 있다. 단단한 노면에는 지멘의 발자국이 남지 않았다. 그러나 지멘이 그 생각에 만족하려 했을 때 해가 떠올랐 다.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앞으로 하루 종일 동안 쵸지와 준 람은 그의 모습을 보면서 추적할 수 있다. 발자취가 남지 않는다 는 것은 그들에게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멘은 자신의 멍 청함에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쵸지는 지멘의 현명함에 씁쓸해했다.
그토록 잘 정비된 도로가 자연스럽게 생길 리는 없다. 쵸지는 약간 초조한 기분으로 도로가 이어진 바위산 쪽을 응시했다. 조 금 후 말에 탄 일군의 사람들이 나타났을 때, 그 모습을 볼 것을 예상하긴 했어도 쵸지는 언짢았다. 자신을 애써 달래며 그는 속 도를 높였다. 조금 후 준람도 도로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사람들 을 보았다. 준람은 그들이 지멘의 인질이 될 것을 염려했다.
“다가오지 마! 위험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늦추기는커녕 그들은 말에 박차를 가했다.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말들을 본 준람과 지 멘은 모두 의아했다. 그러나 쵸지는 만사가 틀렸다는 생각을 했 다. 준람이 다시 외친 후에야 사람들은 말고삐를 잡아챘다. 질주 의 흥분을 이기지 못한 말들은 발길질을 해댔다. 민첩하게 말들 을 진정시킨 사람들 중 하나가 가까이 다가온 지멘과 준람, 쵸지 에게 외쳤다.
“유료도로당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멈추시오! 유료도로당의 도 로에서는 어떤 분쟁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준람은 당혹하여 쵸지를 돌아보았다. 쵸지는 못마땅한 얼굴로 수염볏을 탁 쳤다.
“젠장. 여기는 유료도로다.”
두어 시간 뒤, 휴식을 끝낸 엘시와 그들의 뒤를 따라오던 론솔 피와 주테카, 이레가 합류했을 때 쵸지는 같은 말로 설명을 시작 했다.
“엘시, 어떻게 하지? 여기는 유료도로야. 여기서는 싸우면 안되는 걸로 아는데.”
현상금 사냥꾼인 주테카는 쵸지의 말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 다. 붙잡은 현상범을 데리고 도로를 이용하는 것에는 아무런 제 약도 가하지 않고 오히려 편의를 돌봐주면서 유료도로상에서 체 포 행위를 하는 것은 결사적으로 허락하지 않는 유료도로당에 대 해 주테카는 항상 애정과 짜증이 뒤섞인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주테카는 유료도로상에서는 절대로 싸울 수 없 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유료도로당과 그런 문제로 분쟁을 일 으킨 적이 없었던 론솔피는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웠고, 그래서 번뜩이는 눈으로 자신들과 지멘 사이를 걷고 있는 유료도로당원 들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길은 폭력으로 사태를 해결하는 것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레콘의 눈길이었기에 대담한 유료도로당원들 도 질린 낯빛을 감추지 못했다. 소동을 일으키고 있는 여행객들 을 발견하고 급히 달려왔지만 그들은 그 여행객이 네 명의 사나 운 레콘과 대장군이 될 거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다.
엘시는 앞쪽에서 걷고 있는 당원들과 그 앞에서 뒤를 흘끔흘끔 돌아보는 지멘을 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보기에 따라 꽤 우스꽝 스러운 모습이다. 가장 앞쪽에는 지멘이 걷고 있었다. 지멘은 허 리에 손을 얹고 힘겹게 걷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당장 쓰러지는 편이 좋을 것 같은 모습이다. 하지만 지멘은 쓰러지지 않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하고 있었다. 물론 유료도로당원들은 노상에서 쓰러진 여행자도 보호한다. 하지만 간단한 물리적 난제가 있는 데, 지멘의 거대한 몸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추적자들 같은 레콘뿐이라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유료도 로당원들은 지멘의 몸을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지멘을 효과적으 로 보호하기 힘들다. 그 때문에 지멘의 뒤쪽, 이십 미터쯤의 거리를 두고 따라가고 있는 유료도로당원들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지멘과 추적자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 진귀한 행렬의 말미에 는 물론 추적자들과 딱정벌레들이 걷고 있었다. 그 행렬에서 가장 화가 나 있는 무리가 제일 뒤편에서 속도를 죽이며 걷고 있는 것은 꽤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연출했다.
그 모습을 타개하기 위해 나름대로 고심해 본 이레 달비가 조 심스럽게 말했다.
“가주님, 제가 알기로 사라말 아이솔 율형부사님이 예전에 범 죄자를 처형하기 위해 유료도로당에게서 도로를 구입한 적이 있습니다.”
엘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도로가 바로 그 도로다.”
이레는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주인이 해당 사례를 잘 알고 있 다는 것을 안 이레는 입을 다물고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엘시는 이레와 레콘들을 위해 설명했다.
“율형부사 사라말 아이솔이 차사였던 시절 유료도로상에 있는 악질적인 범죄자를 처형하기 위해 유료도로를 구입한 적이 있습 니다. 자흐-로세이즈 유료도로였으니 아마 이 근방일 거라 생 각합니다. 그는 자신이 구입한 도로 위에서 범죄자를 처형했습니 다. 재치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우리는 같은 방법을 쓰기 어렵습니다. 당시 유료도로당은 도로를 팔았지만, 내막을 따진다면 결국 자신의 고객을 당 외부에 판 것입니다. 도 로 이용자들의 안전과 편의를 지상 과제로 여기는 유료도로당의 입장에서는 감내하기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유료도로당은 같은 일을 두 번 저지르는 것에 공포마저 느끼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 이후로 당에게 도로를 사겠다는 제안이 몇 번 있었습니다. 제국 정부뿐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구매 요청도 있었던 걸로 알고 있습 니다. 짐작하겠지만 개인적인 복수나 사리사욕을 위한 것이지요. 유료도로당은 그런 요청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고 있습니다. 아마 도로를 팔지는 않을 겁니다.”
이번에도 주테카는 이해했고 론솔피는 이해하지 못했다. 론솔피가 말했다.
“저놈은 황제 사냥꾼이잖아.”
“유료도로당은 여행자들의 목적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누구는 유료도로를 걸어도 되고 누구는 걸을 수 없다는 판단 을 내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저들은 길을 준비할 뿐입니다.”
“웃기는 소리야. 길이 왜 있는 건데? 길은 사람이 서로 만나라 고 있는 거지 서로를 죽이라고 있는 것이 아냐. 서로를 죽이는 사람들 사이에는 길보다는 담이 있어야지. 저 녀석들이 담 대신 길을 만들었다면 그건 저 녀석들이 사람들이 서로 만나게 도와주 기로 했다는 거잖아. 하는 짓이 앞뒤가 안 맞아.”
이레는 의외라는 얼굴로 론솔피를 바라보았다. 론솔피의 커다 란 목소리를 들은 유료도로당원들도 당혹하여 서로 수군거리거나 론솔피를 돌아보았다. 준람은 고개를 갸웃거렸고 주테카와 쵸지 는 수염볏을 주물럭거리며 론솔피의 말에 대해 생각했다. 그런데 유료도로당원을 변호한 것은 엘시였다.
“서로 만나서 무엇을 하건 그건 두 사람의 일입니다. 길은 책 임이 없습니다. 살인을 저지른 칼에 책임이 없는 만큼.”
“에잇! 젠장. 어렵기도 하다. 그래서 어쩌자는 거야?”
엘시는 앞쪽의 바위산을 바라보았다. 유료도로당의 징수소와 숙박 시설이 있을 만한 곳이었다.
“일단 이 도로를 관리하는 당 책임자를 만나 봐야겠습니다. 그 에게 도로를 판매하거나 대여할 의사가 있는지 물어보겠습니다. 하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엘시는 대답하려다가 다시 입을 닫았다. 그는 앞쪽에서 힘겹게 걸어가는 지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듯 지멘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말을 탄 유료도로당원들이 사 이에 있었지만 남다른 장신 때문에 지멘은 어렵잖게 엘시와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엘시는 그 눈길을 똑바로 마주했다.
지멘이 걸음을 멈췄다. 그에 따라 유료도로당원들도 말을 멈췄 고 추적자들도 뒤이어 걸음을 멈췄다. 중간에 끼인 유료도로당원 들은 별다른 지시 없이도 무기를 움켜쥐었다. 대비하는 자세는 훌륭한 것이지만 이 경우엔 마음속으로 대비하는 것이 좋았을 것 이다. 유료도로당원들의 긴장한 모습은 레콘들의 신경을 건드렸 다. 추적자들의 우악스러운 거병들이 폭력을 수행하기 좋은 위치 로 이동하는 것을 본 유료도로당원들은 사색이 되었다. 그 와중에도 엘시와 지멘은 서로의 눈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지멘이 꿈틀거리듯 부리를 열었다. 뭔가 말을 하려던 지멘은 다시 부리를 닫고 의혹에 찬 눈으로 엘시를 바라보았다. 지멘은 엘시에게서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공포를 억누르고 있는 경 직된 얼굴이나 자신감을 과장하는 수다스러운 손짓 등 지멘이 익숙한 모습은 엘시에게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엘시가 자신감으로 충만한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엘시는 현 상황을 걱정하고 있었고 타개책을 골몰하는 것처럼 보였다.
문득 지멘은 엘시가 국수로 불리는 기사임을 떠올렸다. 아실이 들려준 온갖 정보들 중에 그런 내용이 있었다. 대장군의 책무에 바빠 바둑을 자주 두지는 못하지만 엘시의 기력은 상대할 자가 없으며 도시 연합의 대수호자마저도 그 기력을 높이 평가한다는 것이 아실의 설명이었다. 지멘은 바둑을 알지 못하지만 지금 엘 시가 그를 바라보는 눈은 국수의 집중력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 고 생각했다. 기사는 왜 싸워야 하는지, 왜 이겨야 하는지 고민 하지 않는다. 그는 이기는 것만 고민한다. 하지만 아무리 이기고 싶어도 기사는 두 개의 돌을 동시에 내려놓을 수 없다. 기사는 상대에게도 똑같이 이길 기회를 제공한다. 따라서 상대의 착점에 대해 노여워하거나 분노할 수 없다. 그 자신이 제공한 기회이기 때문에 지멘은 엘시가 유료도로에 뛰어든 ‘자신의 수’에 대해 분노하는 대신 적절한 응수책을 찾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그리고 엘시가 반드시 그런 방법을 찾아내리라는 확신도 느 꼈다.
지멘은 진저리를 쳤다. 그가 익숙한 싸움은 그런 것이 아니었 다. 상대에게 어떤 기회도 제공하지 않는 것이 지멘의 싸움이었 다. 지멘은 엘시가 자신과 다른 방법으로 세상을 보고 있음을 갑작스럽게 깨달았다. 당연한 일인데도 그 자각은 지멘을 놀라게 했다.
지멘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유료도로당원들은 죽었다가 살아 난 표정으로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추적자들은 약간의 아쉬움 을 분명히 드러내며 엘시를 바라보았다. 엘시가 말했다.
“갑시다. 우리는 지멘을 꼭 잡을 겁니다.”
한 시간 뒤 엘시는 그 말을 질문으로 바꿔 자신에게 던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