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2권 : 제국의 대장군 [10장] – 바람 속에 던진 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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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마시는 새 2권 : 제국의 대장군 [10장] – 바람 속에 던진 돌 2


마리번 도빈 징수소장의 작은 방을 장식하고 있는 것은 온통 산양에 관련된 것뿐이었다. 엘시는 벽에 걸린 산양 그림과 문에 부조된 산양 무늬, 책상에 놓인 산양 모형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 지만 산양 모양의 의자는 좀 지나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다행 히 엘시는 산양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묻지 않을 정도의 교양은 있었다. 유료도로가 시구리아트 유료도로 하나밖에 없던 시절 유 료도로당의 상징은 산양이었다. 산양이 가르쳐 준 길을 따라 시 구리아트 유료도로를 만들었다는 초대 당주의 전설은 당 바깥의 사람들에게도 유명하다. 하지만 당의 유료도로가 제국 모든 곳에 뻗어 있는 지금 산양의 상징은 다른 지방의 당원들에게 낯선 것 이 되었다. 시구리아트 유료도로 이외의 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산양 애호로 미루어 보건대 마리번 도빈 징수소장은 당내에서 상 당히 전통적인 파에 속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대화가 시작되자마자 엘시는 자신의 추측이 사실임을 알았다. 마리번은 율형부차사에게 일시적으로나마 도로를 판 과거사에 대 해 격분하고 있었다. 마리번의 강력한 성토에 질린 엘시는 자기 소개를 다시 하고 싶은 충동마저 느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사라말 아이솔이 아니라 칼리도 백 엘시 에더리다.’ 

하지만 마리번은 황제 사냥꾼을 쫓아온 대장군이 사라말 아이솔 의 옛일을 재현해 볼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굉장히 우스꽝스러울 거라는 요지의 말로 엘시의 항의를 원천봉쇄했다.

도저히 도로 구매나 대여의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엘시는 대화를 끝내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화를 가라앉힌 마리번이 꺼낸 말은 엘시를 얼어붙게 했다.

“그게 무슨 말이지?”

마리번은 단조롭게 자신의 말을 반복했다.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대장군님. 발케네 공 스카리 빌파가 백화각을 파옥하고 부냐 헨로를 탈옥시켰습니다.”

“잠깐. 그는 규리하 공 비셀스 규리하에게………… 청혼서를…….” 말을 하던 엘시는 사태를 파악했다. 마리번이 그의 추측을 확인해 주었다.

“위장이었습니다, 백작님. 모든 사람들의 주의를 규리하 공에 게 돌려놓으려는 발케네 인다운 교활함이지요. 발케네 공이 모 아들인 공격자들 중에는 백화각 경비원들이 상당수 포함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경비가 느슨해진 차에 도깨비감투를 쓴 발케 네 공이 들이닥쳤으니 막을 수가 없었지요.”

“그렇다면 그는 발케네로 갔나?”

“예. 그와 그녀 모두.”

설명하면서 마리번은 의아했다. 입수할 수 있는 정보들에 의거 하여 그녀가 내린 판단에 따르면 엘시 에더리는 비셀스 규리하와 결혼하여 규리하 변경백령을 획득하게끔 되어 있었다. 무향 규리 하를 온전히 지배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그것을 실제로 정복한 사람보다 나은 대안은 별로 없다. 또한 황제의 대장군인 엘시가 규리하를 지배한다면 그것은 황제에게 공손함을 보이려 굳이 애 쓰지는 않는 발케네 공을 압박하는 효과적인 재갈이 될 것이다. 마리번은 황제의 고려가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고려에서 유일한 문제점은 엘시가 이미 약혼했다는 것뿐이다. 따라서 마리 번이 보기에 엘시는 처리가 곤란한 약혼녀가 원하지 않는 연적과 함께 사라지는 행운을 얻은 것이다. ‘어쩌면 그걸 바라고 일부러 자리를 비운 것인지도 모르지.’ 마리번은 그런 가능성까지 예측 에 포함시켜 두었다. 따라서 겉으로 드러내기는 어렵겠지만 엘시 는 기뻐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마리번이 보기에 엘시가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는 것은 기쁨이 아니라 절망인 것 같았다. 그’ ‘희소식’이 엘시를 마구 성 토했던 것에 대한 사과가 될 것이라 생각했던 마리번은 조금 당 황했다. 마리번은 상식적인 말을 선택했다.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백작님. 약혼자를 도둑맞은 셈이니.” 

말을 끝낸 마리번은 자신의 말이 사실에 닿아 있음을 알고는 놀랐다. 엘시는 실제로 그렇게 여기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 있어야 했던 것이었나 보군.”

마리번은 또다시 놀랐다. 엘시를 직접 만나기 전까지 그녀는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대장군에게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뛰어난 무용은 물론이거니와 그에 어울리는 고도의 정치 적 감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전자는 이미 공개적으로 확인 된 것이지만 후자는 아무래도 잘못된 예측인 듯했다. 마리번은 그다지 고상하지 않은 충동을 느꼈다. 황제의 대장군이 설마 바 보일까? 확인해 보지.

“이런 말이 어떻게 들리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세상에는 대장군 에게 범법자 배필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 니다. 그 사람들은 대장군에겐 좀 더 나은 조건의 처자가 어울린 다고 말하더군요.”

“규리하 가문의 비셀스 같은?”

마리번은 그 대답이 엘시의 지적 능력 추정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엘시 에더리가 자신의 결혼 문제에 대 한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을 이 렇게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은 섬세한 행동이라 하기 어려웠다. 

“그분도 좋은 배필이 될 수 있겠지요.”

마리번 도빈이 어떤 의혹을 느끼든 엘시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데라시가 펼친 공작이 도대체 어디까지 펼쳐져 있는지 확인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규리하 가문의 비셀스라는 말에 그다지 놀 라지도 않는 마리번의 모습은 엘시에게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시련의 나가들도 내가 정우 규리하와 결혼하는 걸로 알고 있 겠군.’

예전부터 엘시는 데라시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지만 그 평가는 데라시를 귀하게 쓰는 황제의 견해를 따른다는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이제 엘시는 데라시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내릴 수 있었 다. 봉토를 떠나 있으며 차가운 북방에서는 자신의 방도 나오기 힘든 사람치고 비스그라쥬 백 데라시는 기적적인 영향력을 가지 고 있었다. 세 사람의 말은 없는 용도 만들어 낼 수 있다지만, 데라시의 경우에는 혼자서도 용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엘시가 말했다.

“사람들이 여러 가지 견해를 가지는 것은 자유다. 하지만 사실 은 하나다. 아직 내 약혼녀는 부냐 헨로이고 그녀의 약혼자는 나 다. 그것이 사실이다. 다른 사람의 혼례 문제에 참견하는 것이 무례라는 것을 모르는 이들이 그렇게 많다면 나는 유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마리번은 부분적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엘시가 보낸 경고는 ‘참견하지 마.’ 보다는 섬세한 것이었다. 마리번은 그 경고를 수용했다.

소장실을 나온 엘시를 텅 빈 공허감이 습격했다.

엘시는 무엇을 해야 할지도 알 수 없는 허탈감 속에 잠시 서 있었다. 낯선 복도와 낯선 벽은 그를 안정시키지 못했다. 그래서 엘시는 방을 나오기 직전에 확인한 사실을 잠시 곱씹었다. ‘비스그라쥬 백. 그대인가?

그가 데라시의 영향력을 확인한 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엘시는 스카리 빌파가 데라시에게 조종당했다는 가설을 뿌리칠 수 없었다.

사람들은 부냐를 훔쳐 낸 스카리의 책략을 발케네 인다운 교활 함의 증거로 해석할 것이다. 엘시는 받아들이기 쉽다는 그 사실 이 의심스러웠다. 누군가가 받아들이기 쉽게끔 주도면밀하게 연 출한 상황 같았다. 그리고 그런 의심은 타당했다. 엘시가 조금 전 파악한 데라시의 막강한 영향력을 고려해 보면 스카리는 자신 도 모르는 사이에 조종당했을 수 있다.

만일 그렇다면 엘시는 데라시에게 아주 멋지게 한 방 먹은 셈 이다. 데라시는 한 손으로는 황제 사냥꾼을 체포하기 위해 떠나 겠다는 대장군을 전송하면서 다른 손으로는 스카리 빌파에게 연 결된 실을 잡아당긴 것이다. 결과적으로 엘시는 자연스럽게 파혼 하게 되었다. 지금쯤 데라시는 엘시 에더리와 정우 규리하의 결 혼식 준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내가 이곳에서 하고 있는 일은 무엇이지? 비스그라쥬 백에게 시간을 벌어주고 있는 건가?”

엘시는 분노를 느꼈다.

약혼녀를 구하기 위해 황제 사냥꾼을 잡겠다는 엘시의 뜻은 데 라시에게 충분히 전달되었다. 자신이 직접 그 의사를 전달했으니 까. 그런데 데라시는 제멋대로 그 추적행을 엘시의 파혼을 위한 도구로 바꿨다. 엘시의 진정은 무참하게 무시되었다. 엘시는 그 사실에 분노했다. 그러나 엘시를 정말 참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따로 있었다.

데라시는 사욕을 위해 그런 것이 아니다. 왜 그랬냐는 질문에 데라시가 내놓을 답은 황제와 제국을 위해 그랬다는 것일 테고,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엘시는 서로 처 지가 바뀌었다면 데라시가 주저 없이 정우 규리하와 결혼했을 것 임을 도저히 의심할 수 없었다. 데라시의 의도와 동인(動因)은 엘시가 온전히 납득할 수 있는 것이었고, 따라서 엘시는 그것에 화를 낼 수 없었다. 그것이 엘시의 고민이자 엘시를 처참한 기분 에 젖게 만드는 원인이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엘시를 미치도 록 분노하게 하는 이유였다.

데라시에게 분노하기 힘들었던 엘시는 스카리에게 분노의 방 향을 바꿔 보았다. 당장 거부감이 일어났다. 스카리의 행동 어느 부분에도 찬성할 수 없었지만 엘시는 조종당한 스카리에게 화를 낼 수 없었다. 엘시는 자신의 주위에 싫어하지만 증오할 수 없는 사람으로 가득한 것 같다고 느꼈다. 심지어 지금 그가 쫓고 있는 지멘조차도. 엘시는 지멘을 싫어하지만 숙원을 추구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화를 낼 수 없었다. 레콘이 숙원을 추구하는 것은 고양 이가 쥐를 추구하는 것만큼 당연하다.

‘분노할 수 있는 대상이 아무도 없다면, 도대체 이 분노는 무엇인가. 어디에도 없는 신이여. 이 불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무엇이 제 살을 태우고 뼈를 그을리는 것입니까. 신이여, 신이여, 신이여! 저는 타는 냄새를 맡을 수 있습니다!’

엘시는 움켜쥔 주먹으로 이마를 짓눌렀다. 어금니를 꽉 깨물어 귀 주위가 뜨거워졌다. 엘시는 차가운 돌벽에 몸을 기대고 헐떡 였다.

“엘시?”

대장군을 불렀던 쵸지는 호흡 기관을 하나 더 얻을 뻔했다. 던지는 것 같은 속도로 날아온 제국검이 쵸지의 수염볏 아래에 멈췄다. 쵸지는 그 칼날을 보다가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는 엘시를 보았다. 엘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쵸지는 대장군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엘시가 눈을 몇 번 깜빡이자 그 반짝임은 사라졌다. 엘시는 쵸지를 알아보았다.

“왕벼슬? 미안합니다. 좀 놀랐나 봅니다.”

‘설명이 안 돼, 이 친구야.’ 칼을 도로 집어넣는 엘시를 보며 쵸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설명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사과하겠습니다. 많이 긴장했나 봅니다.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

“아니, 괜찮아. 그런데 너는 괜찮아?”

괜찮다고 대답하려던 엘시는 그런 질문을 받을 정도라면 괜찮다는 대답은 별로 의미가 없을 것임을 깨달았다.

“내 모습이 어떻게 보였습니까?”

“다리 부러진 말 같더군.”

“다리 부러진 말이라. 알 것 같군요. 징수소장에게 하늘누리에 관련된 안 좋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그럼 다행이군. 지멘이 너 좀 보자는데.”

“나를?”

“그래. 휴게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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