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2장] – 모르는 것과 미루는 것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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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2장] – 모르는 것과 미루는 것 14


힌치오는 또 하늘누리에 가까이 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레콘들 또한 마찬가 지였기에 그들은 주로 엉겅퀴 여단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무도 하늘누리가 퍼부은 낙수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런 일 은 일어나지도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팔리탐 지소어는 힌치오가 딴청을 피우도록 내버려두 지 않았다. 야산의 완만한 사면을 따라 이리저리 피워져 있는 모 닥불을 바라보던 팔리탐은 고개를 돌려 힌치오에게 말했다. 

“하늘누리의 낙수를 또 견딜 수 있겠소?”

힌치오는 몸을 움츠렸다. 팔리탐의 말을 못 들은 척하고 싶었 다. 하지만 주위는 고요했고 팔리탐은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힌치오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래야 해?”

팔리탐은 대답하려다가 힌치오가 대답을 원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떠올렸다. 그는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다시 산 아래쪽을 보았다.

발케네군의 주둔지는 산 아래쪽, 꽤 떨어진 곳이었다. 십칠만 명이 주둔하고 있는 거대한 규모의 주둔지는 밤의 어둠 속에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곳곳에 피워져 있는 횃불과 화톳불 덕 분이다.

이제 사라티본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레콘들이 머물러 있는 곳은 주둔지에서 꽤 떨어진 야산이었다. 팔리탐은 왜 그렇 게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는지 묻지 않았지만 대충 짐작 할 수 있는 일이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 레콘들은 높은 곳 을 원했다. 힌치오가 앉아 있는 곳은 가장 높은 곳이었다. 그는 정상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옆에 이쑤시개를 꽂아 놓은 채 앉아 있었다. 그 거대한 칼은 바람에 떠밀리며 자라난 나무처 럼 비스듬하게 서 있었다.

팔리탐은 타고 온 말의 갈기를 쓸어 주고 말했다.

“소환군의 영주들은 꽤 놀라고 기뻐했소. 맹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군사를 이끌고 참전했지만 맹세에 대한 책임감이 제국군에 대한 두려움까지 몰아내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오늘 낮 당신 들이 보여 준 모습을 보고 그들은…….”

“도망치는 모습?”

“아니요. 제국군 4개 군단을 섬멸할 뻔했던 모습 말이오.” 

“인간들 깬 것은 자랑거리도 아냐. 네가 경고했던 것처럼 쥘칸 은 꽤 골치 아프게 굴더군. 팡탄이라는 녀석에게 걸렸을 때 나도 조금 아찔했어.”

“팡탄 하장군은 훨씬 더 무서웠을 거요.”

힌치오는 부리를 딱 부딪쳤다. 팔리탐은 계속 말했다.

“어쨌든 공작 각하의 봉신들은 이제 승리의 예감을 느끼고 있 소. 참전하는 대신 군량이나 군자금을 보낸 영주들에 대한 조롱 도 나오는 것 같더군. 몸 사리다가 영광을 얻을 기회를 놓쳤다는 거지. 모두 당신들 덕분이오. 어쩌면 더 많은 봉신들이 황급히 군사를 이끌고 참전할지도 모르겠소.”

“그 녀석들이 오면 또 하늘누리 아래로 가서 그걸 맞아야 하 나? 그 녀석들 기운 나게 해 주려고?”

“힌치오.”

“팔리탐, 너는 몰라. 나는 그때 죽었어.”

힌치오는 갑자기 옆으로 팔을 뻗었다. 이쑤시개의 칼몸을 때려 그것을 자기 쪽으로 쓰러지게 한 다음 그 칼자루를 붙잡았다. 힌 치오는 그것을 단단히 붙잡아 어두운 밤하늘을 겨냥해 보았다. 

“이놈이 아니었으면 나는 다시 살아나지 못했을 거야.”

레콘은 납병을 해야 노인이다. 노인은 죽음을 대비하는 사람이 다. 바꿔 말하면 레콘의 무기는 음식이나 수면처럼 죽음에 대항 하는 생명의 방어 수단인 것이다. 팔리탐은 힌치오의 말을 이해 할 수 있었다.

“그렇소. 그 칼을 쥐고 있는 한 당신은 죽지 않소. 최후의 대 장간에서 받은 한 자루 무기를 손에 쥐고 있는 이상 레콘이 두려 워할 것이 뭐가 있겠소?”

힌치오는 주춤했다. 그는 이쑤시개를 내려 그 칼끝을 땅에 짚 었다. 팔리탐이 말했다.

“당신은 저들을 이끌고 그 끔찍한 곳에서 무사히 빠져나왔소. 어떤 레콘도 그렇게 할 수 없소. 당신이 그 일을 해냈지.”

“무작정 달린 걸 가지고 흰소리는.”

“당신만 무작정 달릴 수 있었소. 이제 당신은 사라티본군의 구원자요.”

“얼씨구.”

“발케네의 구원자라고 할 수도 있지.”

“절씨구.”

“그리고 당신 자신의 구원자요.”

힌치오는 부리를 부딪쳤다. 팔리탐은 가면 뒤쪽에서 웃으며 땅 바닥에 주저앉았다. 힌치오의 곁에 앉은 팔리탐은 아래쪽에서 수 군거리는 레콘들을 바라보았다.

“사실 개소리였소.”

“잘 짖더라.”

“나의 주군께서는 사라티본군이 빠짐없이 귀환했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계시오. 그분에게 이제 사라티본군은 무엇이든 돌파할 준비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소.”

“락토가 기뻐한다고?”

“그렇소.”

“조금 이르군. 오늘 밤은 지난 다음에 기뻐해야 하는데.”

“오늘 밤?”

“이보라고, 팔리탐. 저기들 누워 있지? 불도 피워 놓고 이야기 도 나누고 있지? 하지만 밤이 오면 머리가 식는단 말이야. 저렇 게 누워서 차가운 머리로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는 거야. 그 러다가 더럭 겁이 나는 거지. 어이쿠, 그 꼴을 또 당하면 어쩐 다? 발케네 공이 나한테 뭘 해줬다고? 안 되겠다. 도망쳐야지. 그러면 내일 아침에 볼 수 있는 것은 타 버린 재뿐일 거야. 그때도 락토가 좋아할 수 있을까?”

팔리탐은 그것은 탈영이라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암살공 앞에 서 사라티본군의 레콘들이 아직 군인이 아니라고 말했던 것은 그 자신이었다. 군인이 아니라면 탈영도 성립되지 않는다. 힌치오는 수염병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렇게 도망친다고 해도 별 도리 없지. 그 꼴을 겪었으니.” 

“안 되오. 지금 레콘들이 도망치면 간신히 기세가 오른 봉신들 도 당황할 거요. 아무 희망도 없을 때보다 약간의 희망이 있었을 때 좌절이 더 큰 법이오. 그러면 우리 군은 자멸할 거요. 절대로 레콘들이 도망쳐서는 안 되오.”

팔리탐의 다급한 말에 힌치오는 수염볏을 벅벅 긁으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몇 놈 지키게 해 뒀어.”

“지키게? 무슨 말이오?”

“크락스, 파미, 야키보로, 그리고 또 누구더라? 아, 비시올. 그놈들에게 부하들 단속하라고 말해 놨어.”

팔리탐은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사라티본군의 레콘들 중 파 벌을 이룬 중심 인물들로 팔리탐이 마음속으로 대대장이라고 부 르는 자들이었다. 그들 모두는 나머지 셋을 싫어하고 힌치오에게 협조하기 위해 경쟁한다는 점에서 인간과 비슷하다. 하지만 힌치 오는 심드렁했다.

“하지만 거꾸로 그놈들 중 하나가 도망쳐야겠다고 결심하면 그 파벌 전체가 전부 사라질 거야. 무슨 소용이 있나 싶어.”

팔리탐은 소름이 끼쳤다. 힌치오는 단순한 전투력의 손실을 걱정하고 있었지만 팔리탐은 그렇게 분리된 자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알고 있었다. 인간들이 많은 예를 남겨 두었기 때문이다. 그들 네 명은 장악력이 강하기 때문에 우두머리들이 될 수 있었 던 자들이다. 분리된 무리는 간단히 해체되지 않을 것이다. 그 경우 그들이 제국군에 투항하는 것은 차라리 반가운 일이 될 것 이다. 이천 명쯤 되는 레콘 산적 떼가 생긴다면 발케네는 초토화 될지도 모른다. 발케네 공의 희망이었던 것이 발케네의 재앙으로 바뀌는 것이다. 직면한 위험을 인지한 팔리탐의 목소리가 조금 날카로워졌다.

“그들 네 명을 불러들이시오.”

“뭐? 이봐. 말했잖아. 부하들 지키게 해 뒀다니까.”

“아니. 불러들여야 하오. 하지만 동시에 불러들이지는 말고 한 번에 한 명씩 부르시오. 그렇게 네 명을 차례로 불러서 이야기를 나누시오. 그러면 모두들 내일 아침까지 남아 있을 거요.” 

“남아 있어 달라고 부탁하라는 거야?”

“그런 이야기는 꺼낼 필요도 없고 꺼내서도 안 되오.”

“이거야 원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그러면 뭐 하러 부르는 거야?”

“아무 이야기나 상관없소. 어디서 태어났냐거나 어떤 여자가 좋으냐, 무슨 술을 좋아하냐. 뭐, 아무 이야기라도 좋소. 내가 도와줄 테니 걱정 말고 웃기나 하시오.”

힌치오는 불가사의하다는 얼굴로 팔리탐을 바라보았다.

“웃어?”

“웃으시오. 내가 웃기는 이야기를 하면 그냥 마음 놓고 웃으면 되오.”

“쓸모 있는 일인 것 맞지?”

“어서 부르시오. 계명성으로.”

힌치오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외쳤다.

“크락스! 여기 좀 와 봐!”

조금 후 레콘 하나가 성큼성큼 달려왔다. 크락스가 가까이 오 자 힌치오는 막막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팔리탐이 약속대 로 그를 도와주었다. 팔리탐은 크락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잡담 을 늘어놓게 했고 힌치오도 거기에 동참하도록 했다. 힌치오는 팔리탐 지소어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수다스러운 인물임을 알고 놀라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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