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3장] – 비밀의 불씨 1
“말에서 떨어진 사람은 말에 탄 사람이다. 패배한 장수는 전쟁에 참가한 장수다. 익사한 레콘은 물에 들 어간 레콘이다……….. 모든 패배자는 패배하기 직전까 지승리를 거듭한 자다. 삶은 패배하기 위한 긴 여정이다. 삶은 승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패배하기 위해 서 사용해야 한다.”
– 원시제 그리미 마케로우
비밀의 불씨
이레 달비는 의심의 눈으로 앞쪽의 나무를 바라보았다. 나무 중간쯤에 진흙이 발라져 있었고 거기엔 무엇인가로 긁은 듯한 자국이 나 있었다.
자취와 흔적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능숙한 사람이 아니라도 평 균적인 추리력만 가지고 있다면 그 자취를 남긴 존재에 대해 몇 가지 사실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자취를 남긴 것이 동물 일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동물이 동그라미 같은 자국을 만들기 는 어려울 테니까. 바닥에서의 높이로 미루어 보건대 아주 어린 레콘이나 도깨비, 또는 성인 인간이나 나가의 크기를 가진 사람 일 것이다.
그리고 전설적 몸종인 이레는 몇 가지 사실을 더 알 수 있었 다. 신장은 190센티미터가량, 왼손잡이일 것이며 인간이다. 깊은 발자국을 남기는 무거운 체중, 따라서 상당한 신장이지만 휘청거 리지 않는 체형, 남자이며 이십 대 후반, 검은 머리, 그리고 이 름은 이레 달비다. 모든 수수께끼를 풀고 나니 자신의 추리력을 칭찬할 수가 없었다. 대신 욕설을 잘근잘근 씹었다.
자신이 남겨 둔 표식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 자리에 있어서 는 안 되는 것이었다. 주위를 한참 둘러본 이레는 겨우 묵직해 뵈는 돌멩이 하나를 찾아낼 수 있었다. 이레는 그것을 앞으로 집어던졌다.
첫 번째 돌멩이는 주위의 빽빽한 나무에 부딪혀 이레가 원하던 방향으로 날아가지 않았다. 이레는 한 번 더 시도했다. 다행히 두 번째 돌멩이는 똑바로 땅에 부딪혔다. 그러자 땅이 출렁하다 가 위로 솟구쳤다.
위로 뛰쳐나온 것은 악어였다. 악어는 허공을 물어뜯고 제 성 질을 못 이겨 몸을 뒤틀었다. 처음 보는 일이었다면 질겁했겠지 만 이레는 차분하게 도망쳤다. 좌절감마저 느끼며. 그곳은 이레 가 표시해 둔 것처럼 늪이었다.
악어에게서 안전한 거리까지 떨어진 이레는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지난 며칠 동안 집어던진 돌멩이가 몇 개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의 표현인데, 모 두 늪과 수렁이 삼켜 버렸기 때문에 셀 수가 없다. 빠져나갈 길 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길은 분명히 있어야 한다. 그들에게 식량을 가져다주는 수레가 늪 위를 굴러오는 것은 아닐 테니까. 수레바퀴가 굴러왔으니 분명히 바퀴 자국이 남아야 하는데 이레 는 그 자국도 찾지 못했다. 결론은 간단하다. 분명히 어딘가에 이레가 찾지 못한 길이 있을 테고 그 길에는 바퀴 자국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해결책은 간단하지 않다.
이레는 이곳이 자신의 고향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탈진할 것 같은 더위였다. 밀림은 바람을 고사시켰지만 태양에게는 협조적이었다. 내리 찌르는 햇 살 때문에 머리에 구멍이 날 것 같다. 위쪽만 빼고 모든 방향으 로 자라고 있는 듯한 나무들은 균형 감각을 왜곡시킨다. 극히 짧 은 시계 때문에 이곳에서 지형을 관찰하는 것은 지난한 일이었다. 처음 얼마 동안 자신의 기억에만 의지하던 이레가 결국 나무에 표시를 남겨 두기로 한 것이 벌써 며칠 전이었다. 하지만 이 제는 자신의 표시도 믿을 수 없는 처지다.
그는 머리를 싸매고 싶은 기분으로 몸을 돌렸다. 길이라고 부 를 수도 없는 곳을 따라 힘겹게 레콘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레콘들을 본 순간 동정심보다 혐오감이 들었다. 이레는 자신을 억누르며 레콘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주테카는 사지를 펼친 채 땅에 드러누워 있었다. 그는 루시닌 이 점점 더 많은 술을 가져오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분노 때문에 주테카는 술을 줄일 수 없었다. 그것은 함께 갇혀 있는 동료들에 대한 배려이기도 했다.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선 레콘들은 사소한 일에도 죽일 듯한 시선 을 교환하곤 했다. 누군가를 다치게 하느니 차라리 자신이 망가 지기로 결정한 주테카는 깨어 있는 동안 계속 술을 마셨다. 주테 카의 주변에는 빈 술병이 가득했고 그의 진득진득한 부리 주변에 는 파리들이 윙윙거렸다.
론솔피는 말없이 밧줄을 꼬고 있었다. 벗겨 낸 나무껍질과 넝 쿨을 이용하여 론솔피는 이레의 팔뚝보다 더 굵은 밧줄을 꼬고 있었다. 이레는 그 밧줄의 용도를 누차 질문했지만 론솔피는 한 번도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레는 그 밧줄이 레콘을 매달아 도 됨 직한 굵기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몸을 좀 움직이거나 그냥 부풀리기만 하더라도 낡은 깃털이 빠질 테지만 론솔피는 앉 아서 꿈쩍도 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의 모습은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론솔피에 비하면 준람은 꽤 통이 큰 편이다. 준람은 거대한 규모의 구조물을 만들고 있었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이동교가 될 그 구조물은 만약 완성된다면 토목공학의 전설이 될 물건이 다. 준람은 들고 다닐 수 있는 다리를 만들어 늪지를 빠져나갈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 결심을 처음 들었을 땐 이레도 반신반의 했다. 실제로 그런 물건은 존재하는데, 이동식 공성탑이 바로 그 것이다. 공성탑은 수직적 간격을 극복하는 물건이고 준람의 이동 교는 수평적 간격을 극복하는 것이지만 그 기본 개념은 비슷하 다. 그래서 이레는 약간의 희망을 가지고 준람의 대역사를 관찰 했다. 하지만 지금은 준람의 고안품에 어떤 희망도 품지 않았다. 준람은 적절한 연장 없이 두 손과 부리만 쓸 수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이동교는 완성된다 해도 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로 거북한 물건이 될 처지다. 이레는 이동이 가능할 정도로 가볍게 만들라 고 조언했지만 물 위에 놓일 구조물을 경량화하는 것은 레콘에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보급품을 가져다놓던 자들도 이레와 같은 결 론을 내린 듯 준람의 작업에 아무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애써 한심하다는 심정을 억누르며 레콘들을 보던 이레는 쵸지 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준람, 왕벼슬은 어디 있죠?”
준람은 말없이 손을 들어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이레는 그쪽 으로 걸어갔다. 몇 분쯤 걸어가니 쵸지의 커다란 몸이 보였다. 쵸지는 땅에 앉아 앞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이 며칠 동안 가장 많이 보여 준 모습이다. 그리고 이레는 그 모습 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계속 취해 있는 주테카나 밧줄을 꼬는 론솔피는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지 않으려고 그러는 것이다. 그리 고 어쩌면 준람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 누군가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 불가능한 작업에 매진하고 있으리라.
하지만 쵸지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누 군가에게 시비를 걸거나 벼슬을 세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레 달비는 그가 고도의 정신 노동 속에서 다른 세 명의 레콘처 럼 자신을 통제할 방법을 찾아낸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렇다 면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는 그의 모습은 설명된다. 또한 그가 누군가를 공격하지 않는 것도. 하지만 이레는 도대체 레콘을 바 닥에 가만히 앉아 며칠씩 사유하게 할 수 있는 주제가 무엇일 지 알 수 없었다. 이레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를 방해해 보기로 했다.
“왕벼슬?”
쵸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 이레, 그만해.”
이레는 당황했다.
“뭘 그만하라는 거죠?”
“응? 그거. 아, 이런. 미안해.”
이레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애쓰며 두 걸음 더 물러났다. 쵸지가 말했다.
“쓸데없는 짓이니까….. 그렇잖아?”
“그런가요?”
“그렇지. 아, 너도 알아차렸나? 그러면 왜 그러지?”
이레는 자신이 왜 그런 가설을 세우지 못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것 또한 광증의 증상일 수 있다. 그리고 사방이 늪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레콘보다 더 미치기 쉬운 레콘도 없을 것이다. 이레는 도망치는 것이 나을지 주테카와 준람을 불러들이는 것이 나을지 고민했다. 쵸지가 다시 말했다.
“왜 그러냐고 물었잖아.”
“아…… 저, 그러니까………….”
“다른 길을 찾고 있는 거야? 우리도 데리고 나가려고? 그런 건 있을 리 없지.”
“없다고요?”
“그래. 다른 길이 있을 리 없잖아. 혼자 가도록 해.”
“어디를요?”
“글쎄. 어디라도 여기보다는 낫지 않겠어?”
이레는 혼란 속에서 쵸지를 바라보았다. 쵸지가 말했다.
“일단 밖으로 나간 다음에 우리를 구할 방법을 생각해 봐.”
이레는 눈을 부릅떴다. 헛된 희망을 갖지 않으려 애쓰며 이레가 말했다.
“밖으로 나갈 방법이 있어요?”
“어? 몰랐어?”
“예. 무슨 방법이죠?”
“다리로 가면 되잖아. 수레 들어오는 다리 말이야.”
“다리라뇨? 다리가 어디 있다는 거죠?”
“그야 저기 있지.”
쵸지는 앞쪽을 가리키다가 손을 옆으로 뻗었다. 그러고는 기다 란 나무 작대기 하나를 집어 이레에게 건넸다.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든 이레는 묻는 눈으로 쵸지를 바라보았다. 쵸지가 말했다.
“저기 가서 찔러 봐.”
이레는 다시 작대기를 보다가 쵸지를 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무엇인가를 떠올렸다. 이레는 화들짝 놀라서 쵸지를 보다가 황급 히 그가 가리킨 방향으로 달려갔다. 얼마 후 이레가 몇 번이나 지나쳤던 늪이 나타났다. 주위에는 이레가 남겨 둔 표시가 몇 개 보였다. 이레는 쵸지가 준 작대기로 흙탕물을 때렸다.
대여섯 번 정도 찔렀을 때 손목이 홱 젖혀지는 충격이 있었다. 이레는 작대기를 들어 올렸다가 좀 더 조심스럽게 수면을 찔렀 다. 확실한 감촉이 있었다.
“제기랄, 이런 방법이었군!”
이레는 작대기를 팽개치고는 팔을 수면 아래로 집어넣었다. 한 시간 후, 이레는 팔다리를 깨끗이 닦아 내고 쵸지에게 돌아 왔다. 쵸지는 한 시간 전과 같은 자세로 앉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레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왜 제게 알려 주지 않으셨지요?”
“난 네가 이미 찾아냈을 거라고 생각했어. 너는 그 속에 조금 들어가는 것이 어렵지 않잖아.”
“어렵습니다. 악어 때문에 물에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악어? 아아, 악어. 그 생각을 못했군.”
“그리고 악어가 없었다고 해도 설마 다리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습니다.”
“수레가 날아오는 것이 아닌 바에야 다리는 당연히 있어야 해. 수레바퀴와 여기 오는 녀석들 발이 항상 젖어 있는 것 못 봤어?”
이레는 사람들이 자신에 대한 평가를 재조정해야 한다고 생각 했다. 빈틈없는 전설적 몸종이라니, 말도 안 된다.
“보긴 봤습니다만 늪지라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솔직히 상상하기 어려웠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리를 수면 아래 10센티미 터에 만들겠습니까?”
수면 아래에 있는 돌다리를 만져 보았을 때 이레는 그 건설자 에게 진심으로 경의를 보냈다. 누구인지 모를 그 건설자는 다리 가 물 위를 건너게 해 주는 물건이라는 상식을 뒤집음으로써 평 범한 다리를 놀라운 비밀 통로로 바꿔 놓았다. 대장군의 몸종이 보내는 경의를 받을 만하다. 쵸지가 말했다.
“김군.”
얕군을 잘못 말했다고 생각하던 이레는 곧 상대가 레콘임을 깨달았다.
“상관없습니다. 당신들은 20미터 정도는 뛰실 수 있지요?”
“20미터?”
“예. 다리 길이는 그 정도입니다. 그 너머는 난로처럼 메말라 있습니다. 바로 떠나도록 하지요. 시모그라쥬까지만 가면 됩니 다. 저는 그 도시 출신입니다. 지금도 거기는 손바닥처럼 훤합니 다. 숨어들 수 있을 겁니다. 거기서 가주님을 구출할 방법을 찾 든지 제국 정부에 현 상황을 알릴 방법을 찾아보지요. 아무래도 남쪽의 제국군은 신뢰하기 어려우니까……….”
이레는 쵸지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말끝을 흐렸다. 쵸지는 깊은 고뇌에 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20미터라.”
“도움닫기를 하면 그 정도는 뛰실 수 있잖습니까. 좀 짧긴 하 지만 도움닫기 할 만한 공간도 있습니다.”
“한번 가 보자.”
이레는 활기차게 쵸지를 안내했다. 숲을 헤치고 돌다리가 있는 곳까지 걸어간 이레는 그 위를 찰박찰박 뛰어갔다. 발목이 잠기는 깊이여서 조금 힘들었지만 이레는 곧 다리 건너편의 땅에 도달했다. 그곳에서 이레는 늪 반대편을 돌아보았다.
쵸지가 보이지 않았다.
이레는 당황하여 다시 다리를 건너갔다. 온갖 생각과 상상을 하면서 수풀을 헤치고 걸어간 이레는 원래 자리로 돌아와 있는 쵸지를 발견했다. 그는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큼직한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이레는 난처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왕벼슬?”
“못 보고 있겠다. 젠장. 왜 그렇게 철벅거리는 거냐? 꼭 빠져 죽는 것처럼 보이잖아.”
자신이 물 위를 달리는 것처럼 보이리라 믿었던 이레는 당황했다.
“아, 죄송합니다. 다리가 튼튼하다는 것을 보여 드리기 위해서 그랬습니다. 다시 가시죠.”
“됐어. 보고 싶지 않아. 혼자 가.”
“예?”
“혼자 빠져나가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세요. 여러분은 여기 더 계셔서는 안 됩 니다. 같이 가셔야 합니다.”
쵸지는 말없이 땅바닥만 바라보았다. 두 손으로 머리 양쪽을 누르고 있는 모습은 마치 떨어뜨리면 깨지는 물건을 조심스럽게 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레는 레콘이 자기 합리화를 하는 성격이었으면 좋겠다고 생 각했다. 쵸지가 타인에게 이해되고 싶다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면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말문을 열 테고 그러면 이레는 대화를 이 끌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쵸지는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보건 신경 쓰지 않는 레콘의 태도로 침묵한 채 앉아 있었 다. 의기소침해진 레콘은 도대체 어떻게 다뤄야 할까.
“저는 주인님을 구해 드려야 합니다. 왕벼슬. 도와주십시오.” 쵸지의 머리가 조금 움직였다. 그는 수풀과 나무 사이로 먼 곳 을 바라보았다.
“다 버린 줄 알았는데.”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이레는 간절한 눈으로 쵸지의 옆 모습을 바라보았다. 쵸지가 웅얼거렸다.
“이레, 우리끼리 여기 남겨 두면 서로 때려죽일까 봐 걱정돼서 함께 가자는 거지?”
“아닙니다.”
“거짓말하지 마. 레콘 네 명이 몰려다니면 장님도 알아차릴 수 있을 거다. 어떻게 숨어 다니겠다는 거야?”
“어렵긴 하겠지요. 하지만 주인님을 구출하려면 망고 군단 전 체를 상대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거기엔 나가들이 많습니다. 소드락 먹은 나가들을 상대하려면 여러분이 반드시 계셔야 합니 다.”
“소화차만 나타나면 꼼짝 못하는데 무슨 쓸모가 있다고?”
“그러면 돌아가면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소화차도 앙감 질하는 레콘보다는 느립니다.”
쵸지는 신음을 흘리며 일어섰다. 이레는 기운 없는 걸음으로
걸어가는 그를 재빨리 따라갔다. 쵸지는 조금 전 도망쳤던 돌다 리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건너 봐.”
이레는 물을 철벅거리지 않으려 애쓰면서 다리 위를 천천히 걸 었다. 열대의 햇살을 담뿍 빨아들인 물은 미지근했다. 이레는 몇 걸음 걷고 나서 뒤를 흘끔 돌아보았다. 쵸지는 나뭇가지에 팔을 얹은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긴장한 그의 벼슬이 꼿꼿하게 서 있었다. 이레는 다시 걸어갔다. 발목에 감기는 물이 거추장스러 웠지만 물방울이 튀지 않도록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뒤쪽에서 거 대한 것이 움직이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이레가 다리 끝까 지 다가섰을 때였다.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밀림의 새들이 일제히 날아오르고 원 숭이들이 꺅꺅거리며 나뭇가지 사이를 뛰었다. 이레는 기겁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쵸지가 보이지 않았다. 이레는 포악한 욕설을 중얼거리며 뒤로 돌아 달려갔다. 쵸지는 없었다. 거대한 것이 정 신없이 달려간 자취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레는 머리끝까지 치솟은 분노를 그대로 둔 채 다른 레콘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 다. 달려가는 동안에도 계속 꽝꽝 하는 소리가 들렸다. 공터에 도달한 이레는 큼직한 통나무를 망치 삼아 나무를 때리고 있는 준람을 보고 잠시 살해 충동을 느꼈다.
“준람!”
준람은 돌아보지 않았다. 쓰레기 더미처럼 보일 뿐 절대로 효 용이 있어 보이지 않는 그의 고안품을 쾅쾅 때리는 준람을 보다 가 이레는 고함을 빽 질렀다.
“집어치워요, 준람! 물 끼얹어 버리기 전에!”
준람은 휘두르던 통나무를 놓치고 말았다. 론솔피는 고개를 들 어 올리다가 얼굴로 날아온 통나무를 낚아채서 으스러뜨렸다. 그 나무 조각들이 일어나던 주테카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복잡한 의식 같은 행동을 끝낸 세 레콘은 험상궂은 얼굴로 이레를 노려 보았다. 준람이 말했다.
“너, 방금 뭐라고 했냐?”
주테카는 말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는 벌떡 일어 나서 이레에게 다가갔다. 이레는 꽉 움켜쥔 주테카의 주먹을 보 곤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흠. 주정뱅이에게 죽을 운명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뭉개질래?”
“해 보시죠.”
주테카는 부리를 딱 부딪치고는 주먹을 폈다. 때렸다간 죽을 테니 손가락으로 허리나 튕겨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주테카는 이 레의 허리 쪽으로 손을 뻗었다.
주테카가 손가락을 튕긴 순간 이레는 몸을 홱 비틀었다. 이레는 주테카의 손가락 끝을 왼손으로 떠받쳤다. 그리고 오른 쪽 팔뚝으로는 손가락 윗부분을 내려치며 그대로 쓰러졌다. 손가 락이 위로 꺾인 주테카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떨어 지는 주테카의 위험한 부리를 피하기 위해 이레는 두 손으로 땅 을 짚으며 훌쩍 자반뒤집기를 했다. 론솔피가 눈을 껌뻑였다. “저놈 봐라?”
론솔피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이레는 세차게 몸을 돌렸다. 그 는 두 팔을 옆으로 던져 둔 채 몸을 최대한 낮추었다. 만약 이레 에게 꼬리가 있었다면 그것은 굵게 변해서 하늘을 찔렀을 것이 다. 그것이 싸움을 대비하는 자세임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 았고 레콘인 론솔피는 당연히 흥분했다. 론솔피는 벼슬을 세웠다. 그때 준람이 외쳤다.
“그만해. 똑바로 봐. 인간이다.”
론솔피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준람을 돌아보았다. 주테카는 손 을 세차게 흔들었다. 손가락이 부러지지는 않은 듯하다. 하긴 주 테카의 손가락을 부러뜨리려면 이레가 몇 명 더 있어야 할 것이 다. 충격을 받은 손가락을 주무르며 주테카가 말했다.
“제법인데.”
“저한테 손대지 마십시오. 당신하곤 다릅니다.”
“무슨 소리지?”
“제 몸은 주인님을 구해야 할 몸입니다. 당신처럼 한가롭게 망가뜨릴 수 없단 말입니다.”
“이 자식이 보자보자 하니까………..”
이레는 주테카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준람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준람.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익하다는 점에서 당 신의 그 물건은 주테카의 술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어요. 당신도 거기에 취해 있죠. 그리고 취기가 사라질 때쯤 되면 술처럼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겁니다.”
준람은 벼슬을 뻣뻣하게 경직시켰다. 론솔피가 사납게 말했다.
“나한테도 한마디해 보시지그래, 요 꼬마야. 죽을 각오를 한 것 같으니까.”
“당신의 그 밧줄에 대해서는 말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은 레콘도 아닙니다.”
“뭐야, 이 자식아?”
“자살하고 싶으면 늪에 몸을 던지세요. 그게 훨씬 간단하니까. 또 그렇게 하면 오해받을 일도 없을 겁니다. 나 사고 칠지도 모르는 놈이니까 신경 써 달라고 떼쓰는 걸로 말입니다.”
론솔피는 격노로 벼슬을 벌겋게 물들였다. 준람은 이레가 죽을 작정을 한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난폭한 레콘 세 명을 동시 에 적대하는 행동은 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자살 기도다. 하지만 이레의 말대로 주인을 구해야 하는 몸이라면 그런 행동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어쨌든 이레는 죽고 싶어하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 았다. 그는 세 명의 레콘을 동시에 보기 위해 포식 곤충처럼 빠 르게 머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사람은 별것 아닙니다. 죽을 만큼 배가 고프면 어린애 손에 있는 음식도 뺏어 먹습니다. 목에 칼을 겨누고 바지를 까라고 하 면 누구나 허리띠를 풉니다. 그게 사람입니다. 당신들이 자기 수 준을 떨어뜨리고 있는 거야 놀랄 일도 아닙니다. 이 땅은 당신들 에겐 죽을 것 같은 허기나 목을 찌르고 있는 칼 같을 테지요. 그 리고 아무리 힘세고 튼튼하다 해도 당신들도 사람이죠. 좌절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세 명의 레콘은 이레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레도 자기 말이 좀 헷갈린다고 생각했다. 급하게 말을 쏟아 낸 탓만은 아니다. 감히 하기 어려운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이상의 혼란은 진의 전달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될 것이라는 판단 하에 이 레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곧장 꺼냈다.
“당신들이 레콘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겁니다.”
세 레콘은 몸을 약간 부풀렸다. 이레는 말했다.
“동정해 줄 벗이 필요합니까? 레콘이? 당신들은 혼자 일어서서 혼자 걸어가잖습니까. 좌절은 할 수 있어요. 좌절은 절대로 나쁜 것도 아니고 창피한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레콘이 혼자 일어나지 않으면 나쁜 일이고 창피한 일입니다. 제가 이렇게 다그쳐야 한다는 것 자체가 우습습니다. 이런 꼴을 피하려고 지금까지 당 신들을 내버려둔 제가 불쌍합니다. 당신들이 레콘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주려 했던 것이 후회스럽습니다.”
“혀 때문에 죽은 자들의 묘지에 네 자리를 예약해 뒀나 보구나.”
험악한 경고를 중얼거렸지만 주테카의 말에는 미심쩍어 하는 기운이 섞여 있었다. 이레가 응수했다.
“제발 그러기를 바랍니다.”
“뭐?”
“저를 죽여 보세요. 그러려면 저를 따라와야겠지요. 당신들이 그럴 수 있을까요?”
론솔피는 갇혀 있는 처지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 냐고 되물으려 했다. 그러나 이레가 고함을 질렀다.
“쵸지! 저는 떠나겠습니다! 함께 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안 되는군요. 또 만나길 바랍니다!”
세 레콘은 당황했다. 선언을 마친 이레는 그대로 뒤로 두어 걸 음 물러나다가 몸을 홱 돌렸다. 정신없이 뛰어가는 이레의 모습 을 걸맞은 것으로 만들려면 세 레콘이 그 뒤를 추적해야겠지만 준람과 론솔피, 주테카는 서로의 당혹한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 다. 그때론솔피가 벌떡 일어섰다.
“떠난다고 했지?”
론솔피의 말과 행동 중 어느 것에 자극받았는지는 불분명하지 만 주테카와 준람도 따라 일어섰다. 그들은 바람 같은 속도로 이 레의 뒤를 따랐다. 주테카가 자신을 망치고 있다는 이레의 비난은 사실과 약간 다른 것인지도 모른다. 긴 시간 동안 폭음을 일삼았던 주테카도 다른 두 레콘과 마찬가지로 민첩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지상 최강의 종족 레콘인 것이다.
그래서, 이레의 모습을 목격한 세 사람은 얼어붙었다.
이레는 몸 일부를 물에 담근 채 전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몸 일부가 물속에 있다 해서 그것을 수영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웠다. 당혹스러웠지만 세 사람은 그것이 물 위를 걷는 것이라고 받아들 여야 했다.
날카로운 햇빛 속에서 이레는 흙탕물 위를 죽죽 걸어갔다. 준 람이 만들어 내던 소음도 사라진 한낮의 밀림은 고요했다. 그악 스러운 곤충의 울음이나 쾌활한 새 노래도 들려오지 않았다. 밀 림은 무겁도록 고요했다. 그리고 이레는 물 위를 소금쟁이처럼 가볍게 걸어갔다.
넋 빠진 세 사람이 바라보는 가운데 이레는 건너편 뭍으로 올 라섰다. 그는 뒤돌아서서 세 사람과 눈을 마주했다. 이레는 피로 감에 가까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피곤함이 아니 었다. 주테카와 론솔피, 준람은 어쩐지 그 표정을 해석하고 싶지 않았다.
이레의 모습이 나뭇가지와 덩굴 사이로 사라졌다.
준람은 나발칸 출신답게 눈을 비비는 전통적인 방법을 사용했 다. 주테카는 물을 의심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어쨌든 물이 사람을 떠받친다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일이다. 론솔피는 한 발 더 나아가서 주테카를 물 위에 집어던지면 어떨까 하는 생각까지 해 보았다. 지나치게 끔찍한 일이라서 곧 포기하긴 했지만, 그렇 게 세 사람이 각자의 방식으로 당혹감을 표현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스르르 나타난 초지가 세 사람을 구해 주었다.
“아래에 다리가 있다.”
“다리? 다리라고?”
“그래. 수레가 들어오는 다리다.”
“다리가 왜 저 아래에 있는 거야? 그게 다리야?”
“숨은 다리지. 여긴 감옥이잖아.”
주테카는 쵸지가 이곳의 관리자인 양 거듭 질문했다.
“그러면 저기만 건너면 빠져나갈 수 있는 거야?”
“해봐.”
주테카는 다리가 있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오랫동안 집념에 찬 눈으로 수면을 응시하던 주테카는 심호흡을 하고 움직였다.
뒤쪽 방향이었다. 아무도 정의를 사랑하는 그들의 동료를 야유 하지 않았다. 주테카는 수염볏을 꽉 움켜쥐었다. 네 사람을 비추 는 햇살이 참 투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