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3장] – 비밀의 불씨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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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3장] – 비밀의 불씨 6


루시닌 수교위는 주테카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주테카 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루시닌의 손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레에 게 잘렸던 손은 이제 조금씩 자라나고 있었다. 아직 손가락이라 부를 만한 것은 없었지만 조막손이라고 할 만한 것이 팔목 아래에 달려 있는 것은 분명했다. 주테카는 진심으로 말했다.

“거참 편리하겠네.”

루시닌은 비늘을 부딪치며 옆으로 손을 뻗었다. 그 손이 물통 을 들어 올리는 모습을 본 주테카는 벼슬을 뻣뻣하게 세웠다. 루 시닌은 물이 출렁 넘치도록 물통을 세차게 내려놓고 나서 말 했다.

“편리하지요. 완전히 부숴 놓지 않으면 기어코 재생합니다. 저 를 겁줄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런데 저는 제가 당신을 겁줄 수 있 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주테카는 도저히 물러날 수 없었다. 깃털을 부 풀리는 주테카를 보며 루시닌이 말했다.

“언제 도망쳤습니까?”

주테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부리를 꽉 닫은 채 루시닌을 바라볼 뿐이었다. 루시닌은 압박의 강도를 높이기로 했다. 그는 허리를 굽혀 물통을 집어 들었다. 다시 허리를 폈을 때 수교위는 레콘이 두 명으로 늘어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주테카의 곁에는 왕벼슬 쵸지가 서 있었다. 쵸지는 팔짱을 낀 채 루시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놀라운 일이었다. 주테카가 물러서지 않는 것보다 더. 루시닌은 당혹감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쵸지를 바라보았다. 쵸지가 조금 쉰 목소리로 말했다. 

“해봐.”

“예?”

쵸지는 주테카의 어깨를 붙잡아 뒤로 슬쩍 밀었다. 주테카가 비틀거리며 물러나자 쵸지는 그 앞을 가로막듯이 섰다. 주테카는 부리를 벌린 채 쵸지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쵸지가 말했다.

“해 보라고. 내가 그 꼴을 당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어졌 어. 미친다면, 뭐 미친 사람이야 자기가 미쳤다는 걸 모르니 상 관없겠지. 안 미친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지. 어느 쪽이라도 상 관없을 것 같으니 해 볼 만한 가치가 있어.”

쵸지는 자신의 초조감과 두려움을 구태여 숨기지 않았다.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수염볏을 내버려둔 채 말을 이었다.

“그런데 네게도 가치가 있을지 모르겠군. 미친다면 내가 너를 어떻게 할지는 나도 몰라. 하지만 안 미친다면 나는 너를 하나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딱 백 토막 내겠어.”

루시닌은 비늘이 빠질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다. 그런 두려움 은 이레에게 손을 잘린 이후 처음 느껴 보는 것이었다. 통제할 수 없는 공포 속에서 루시닌은 자신이 지상 최강 종족과 마주하 고 있다는 사실을 갑작스럽게 자각했다. 한 그릇의 물에도 두려 움에 젖지만 맨손으로 소의 머리를 뽑아 낼 수 있는 자들. 이 기 묘한 불균형. 비록 좋아하는 예술 양식은 많이 다르지만 나가도 다른 종족들도 미학에 대해서는 같은 관념을 공유한다. 균형은 아름답다. 불균형은 아름답지 않다. 아름답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혐오스럽고 때론 무섭다. 레콘에게는 극단의 나약함과 강인함이 공존한다. 그들은 무섭다.

루시닌은 말했다.

“가치가 없겠군요.”

쵸지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루시닌은 물통을 들어 다시 수레 위에 올려놓았다. 그의 주변에 있던 병사들은 이 결과에 만족해 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 광경은 루시닌이 패배한 것처럼 보였지만 레콘에게 물을 뿌리고 미치는지 그렇지 않은지 실험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루시닌은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헛된 시도를 했다.

“차라리 잘된 일이군요. 이 손목의 빚을 갚아야 하는데, 갇혀 있는 자를 괴롭힐 수는 없지요. 그를 추적하면서 빚을 갚을 수 있겠군요.”

나가의 목소리는 아름답지만 루시의 말에서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었다. 그 말에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는가 하는 루시 닌 자신의 의심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루시닌은 그만두고 물 러나기로 했다. 그는 소리 없이 손으로 명령을 내렸고 병사들은 빈 수레를 챙겨 물러났다. 하지만 떠나는 방향은 지금까지와 달 랐다. 루시닌은 다리가 있는 방향으로 곧장 떠났다. 이레가 이미 다리를 찾아낸 이상 다리의 위치를 감추기 위해 돌아가는 것은 의미가 없다.

루시닌과 빈 수레, 병사들이 떠난 것을 확인한 주테카는 조심 스럽게 쵸지의 앞으로 다가섰다. 쵸지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수교위가 떠난 방향을 노려보았다. 주테카가 말했다.

“젠장. 누가 너에게 도와달라고 했어?”

쵸지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테카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아냐. 너 도와주려고 한 게 아냐. 나는 진짜 궁금해졌어.” 

쵸지가 허풍을 친 거라고 믿고 있었던 주테카는 기가 막히다는 눈으로 쵸지를 바라보았다.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것을 궁금해할 까닭이 있는가. 주테카는 쵸지의 위아래를 죽 훑어보고는, 다시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쵸지는 주테카의 가슴을 살짝 밀어내고 메 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주테카, 난 안 미쳤어.그 사실이 아쉽긴 하지만.”

“뭐?”

“길은 있어. 분명히 있어. 이레가 떠난 길, 그리고 저놈들이 떠난 길.”

“왕벼슬, 그건 길이 아냐.”

“미치면 지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약간만 미치면.”

주테카는 고개를 강하게 가로저었다. 그가 부정의 말을 하려 할 때 쵸지가 말했다.

“주테카, 세상에 나늬가 있다고 믿어?”

“나늬?”

“저 바깥에 나늬가 있을까?”

쵸지는 그 질문을 준람에게도 한 적이 있다. 준람은 그것이 전 설이라고 일축했다. 하지만 정의를 사랑하는 동료의 의견은 달 랐다.

“있어.”

“있어? 어떻게 확신하지?”

주테카는 부리를 딱 부딪치고는 루시닌이 가져다 놓은 수레로 다가갔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술병을 꺼내어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어떻게는 필요 없어.”

“필요 없다고?”

“필요 없어. 이봐, 세상이 완벽하게 정의로워질 거라고 내가 진짜 믿는 줄 알아? 그런 상태가 올 것 같아? 현실 감각이 전무 한 몽상가나 그런 걸 믿어. 하지만 나는 정의가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에 그걸 추구하고 있어. 네가 대답해 봐. 네게 나늬가 중요해?”

“중요하다고 생각해.”

“그러면 네 나늬는 있어.”

주테카는 술병을 단숨에 비웠다. 쵸지는 그 병이 비는 것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주테카는 빈 술병을 휙 집어던지고 투덜거렸다. 

“젠장. 쓸데없는 소리를 했더니 술맛도 별로군…… 응? 이봐, 뭐 해?”

“뭐 하는 것처럼 보여?”

주테카는 대답할 수 없었다. 쵸지가 갑자기 물통으로 다가가 그것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대신 주테 카는 몸을 확 부풀렸다. 쵸지는 중얼거렸다.

“나늬는 있어.”

쵸지의 손이 물통으로 뻗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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