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1015화
군림천하 (1015)
진산월의 예측은 그대로 적중되었다.
아침 식사가 끝나고 사시(巳時) 무렵이 되었을 때부터 방문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남정(鄭) 하가보(何家堡) 보주 벽력수사(霹靂秀)하선중(何宣重) 배상.>
첫 방문객은 섬서성 남쪽의 남정 일대에서 최근에 상당한 위세를 떨치고 있는 하가보의 젊은 보주였다. 그는 삼십을 갓 넘긴 나이로 진령(秦嶺) 남쪽에서 가장 유명한 열 명의 고수 중 하나로 꼽힐 만큼 높은 명성을 자랑하고 있었다.
부친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보주에 오른 지 불과 오 년 만의 일이라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앞으로 진령 일대에서 그가 새로운 강자로 부상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 하선중이 진산월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오전부터 종남파를 찾아온 것이다.
하선중은 수려한 얼굴에 건장한 체구를 지닌 훤칠한 키의 미남자였다. 하관이 약간 길고 눈빛이 날카로워서 호락호락한 성격이 아닌 듯했으나, 진산월을 대하는 태도는 정중하면서도 예의를 다한 것이었다.
“하가보의 하선중이 진 장문인을 뵙습니다.”
“반갑습니다, 종남의 진산월입니다.”
진산월은 마주 답례를 하면서도 그의 인사가 조금 과하지 않나 생각했다. 한 가문의 가주에 나이도 더 많은 그가 진산월을 대하는 모습이 영락없이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대하는 것 같았던 것이다.
그 이유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하선중은 무거운 낯빛으로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제가 진 장문인을 찾아온 것은 한 가지 용서를 구하고 싶은 일과 한 가지 허락을 얻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산월은 짐작 가는 일이 없지 않았기에 조용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용서를 구하고 싶은 건 선친에 관한 일입니다.”
하선중의 부친은 신풍서생(迅風書生)하영후(何英厚)로, 신법이 빠르고 수공(功)에 능해서 나름 괜찮은 실력을 지녔다고 평가받는 인물이었다.
하나 남정 일대에서나 알려졌을 뿐, 섬서성 전체에서는 고수라고 내세울 수 없는 수준이었다. 더구나 십여 년 전에 근방에 새로 생긴 일선방(-旋幇)의 방주와 싸우다 패한 뒤로 집에 칩거하여 외부 출입을 전혀 하지 않았기에 그 이름을 아는 사람조차 거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런 하영후가 당시의 싸움에 대한 후유증으로 결국 오 년 전에 사망했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하영후의 사후에 그의 아들인 하선중이 스물여덟의 젊은 나이로 가문을 이어받게 되었는데, 그가 부친의 상(喪)을 모두 마치고 일선방주에게 도전했을 때 대부분의 무림인들이 무모한 싸움을 한다며 걱정했었다.
하나 하영후는 불과 십여 초 만에 일선방주를 격살하여 세인들을 놀라게 했다.
그 후로 일선방과 친분이 있는 세 개 문파의 연합을 격파하여 명성을 알리기 시작했고, 이후 삼 년 동안 열 번이 넘는 크고 작은 싸움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어 비로소 그 이름을 섬서성 전체에 드높이게 되었다.
사람들은 평범한 고수였던 하영후의 아들이 부친의 원수를 갚기 위해 대오각성하여 뛰어난 고수가 되었다고 판단했으나, 몇몇 사람들은 단순한 복수심 때문에 그리 길지 않은 시간에 그토록 무공이 높아지는 것이 가능한지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도 했었다.
그 진실은 하선중의 입을 통해 밝혀졌다.
“일선방주에게 패한 선친께서는 본 가의 무공만으로는 그를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무공을 얻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다 정군산(定軍山)의 깊은 계곡에 은거기인이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정군산 일대를 뒤지고 다니다 결국 은거기인의 거처를 발견했습니다. 그 기인은 이미 오래전에 고인이 되었지만, 선친께서는 그분의 유진을 수습하여 본 가로 귀환하셨지요.”
하선중의 음성은 어느 때보다 진중하고 묵직했다.
“그분의 유진은 연환벽력수(連環霹靂手)라는 무공이었습니다. 선친께서 그 비급을 제게 전해 주시면서 하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 무공은 본 가의 신뢰보迅雷步)에 너무도 잘 어울리는 최고의 수공이다. 뿐만 아니라 본 가의 무공이 가지지 못한 강맹하고 고절한 위력을 지니고 있어, 제대로 익힌다면 본가의 무공을 몇 단계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하나 이것은 사연이 있는 무공이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 무공은 연환십이산수(連環十二散手)와 질풍벽력권(疾風霹靂拳)의 장점만을 규합해서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 두 무공 모두 종남파에서 오래전에 절전되었던 무공들이다. 네가 연환벽력수를 익힌다면 언제고 종남파에 이 무공을 돌려주고 그들에게 용서를 구해야만 한다. 그것이 강호인의 도리이며 또한 숙명이다.
“정군산의 기인은 이름조차 남기지 않았지만, 선친께서는 아마 오래전에 종남파를 등진 분이 아닐까 추측하셨습니다. 그 기인이 어떻게 종남파의 무공 두 가지를 가지고 나왔는지는 모르지만, 그분은 평생 동안 정군산의 깊은 계곡에 틀어박혀 두 무공을 융합하는 일을 연구해 왔고 그 성과를 연환벽력수라는 새로운 절학으로 만들어 낸 것이지요.”
모든 사실을 고한 하선중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다소 홀가분한 표정이 되었다.
하선중이 연환벽력수를 완성하고 강호에 나온 후 선친의 원수인 일선방주를 제거하고 강호의 고수로 명성을 떨쳤으나, 마음 한구석에는 종남파의 무공을 허락도 없이 익혔다는 죄책감과 부담감이 무겁게 자리하고 있었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건 한 문파의 무공을 무단으로 익혔다는 건 강호에서는 쉽게 용서받기 어려운 중대한 범죄였다.
하선중은 진산월을 향해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종남파의 무공을 허락도 없이 익힌 점을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선친과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진산월은 묵묵히 하선중의 머리를 내려 보며 복잡한 상념에 잠겨 있었다.
연환십이산수와 질풍벽력권은 그도 어렴풋이 이름만 알고 있는 무공들이었다.
볼 수 없는 절학들이 되고 말았다. 풍운신룡 담명의 사후에 벌어진 혼란의 와중에 수많은 종남파의 절학들이 실전되거나 사라졌는데, 두 무공도 그때 이후로 종남파에서 두 번 다시
애매하고 까다로운 문제였다. 이제 백 년이 훌쩍 넘은 장구한 세월이 지나 그 무공들을 돌려받게 되었으니 마땅히 기뻐해야 할 일이었으나, 하선중에 대한 처우는 상당히
종남파의 무공인 줄 알면서도 익힌 것은 물론 잘못이었으나, 그렇다고 그 점을 꾸짖기에는 그동안 종남파의 상황이 몹시 좋지 않았다. 더구나 연환벽력수는 정체 모를 기인이 종남파의 두 가지 무공을 연구하여 새롭게 만들어 낸 것이라 순수한 종남파의 것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했다.
종남파의 무공을 찾은 공(功)과 허락도 없이 그것을 익힌 과(過)는 어느 것이 더 중(重)한지 쉽게 판단 내리기 힘들었다.
뿐만 아니라 그가 가주로 있는 하가보에 대한 처우도 문제였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진산월은 문득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조금 전에 한 가지 용서와 한 가지 허락을 얻고 싶다고 하셨는데, 허락은 어떤 걸 말하는 겁니까?”
하선중은 여전히 바닥에 머리를 댄 채 입을 열었다.
“사정이야 어찌 되었건 종남파의 무공을 익힌 이상 저는 종남파와 인연을 맺은 셈입니다. 청컨대, 저를 종남파의 제자로 허락해 주시기를 간곡히 바랍니다.”
진산월은 한동안 아무 대답이 없었다.
하선중은 머리를 조아린 자세로 그의 대답이 들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산월의 음성이 들려온 것은 그로부터 약간의 시간이 더 흐른 후였다.
“미안하지만, 하 보주의 청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선중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는 어엿한 한 가문의 가주라는 신분으로 스스로 머리를 조아려 종남파의 제자가 되기를 청했는데, 자신의 청이 거절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산월은 그 이유를 차분히 설명해 주었다.
“하 보주에게 따로 감정이 있거나, 본 파의 규율이 까다로워서는 아닙니다. 단지 하 보주와 아무런 사승(師承) 관계가 없는 상황에서 단순히 비급으로 인한 인연이 있다는 것만으로 본 파의 제자로 인정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진산월의 말마따나 하선중은 종남파의 고수에게 무공을 전수받은 것이 아니라 신분도 확실치 않은 고인의 유해에서 비급을 습득한 것이어서 배분을 정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그렇다고 그의 지위나 신분으로 이제 와서 진산월의 제자가 될 수는 없지 않겠는가?
하선중은 나름 큰 결심을 하고 스스로 종남파를 찾아왔건만 뜻을 이루지 못하자 실망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때 진산월이 조용한 음성을 덧붙였다.
“다만 하 보주께서 원한다면 하가보를 종남파의 속문으로 인정하는 일은 가능합니다. 하 보주의 의향은 어떠십니까?”
하선중은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고개를 숙였다.
“하가보를 종남파의 속문으로 받아 주신다면 기쁜 마음으로 승낙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하 보주께선 자식이 있습니까?”
돌연한 질문에 하선중은 다소 어리둥절한 얼굴이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 녀석이 둘 있습니다.”
“나이는 어떻게 됩니까?”
“큰 녀석은 아홉 살이고, 둘째는 일곱 살입니다.”
“큰 아이는 가문을 잇게 하고, 둘째는 열 살이 되면 본 파로 보내십시오.”
진산월의 말뜻을 알아차린 하선중은 이내 기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감사합니다, 진 장문인.”
비록 하선중은 종남파와 아무런 사승 관계가 없어 제자로 받아 주지 못했지만, 하선중의 아들은 정식으로 종남파에 입문하여 제자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준 것이다.
하선중은 조만간 정식으로 가문의 식솔들을 데려와 속문식을 열기로 하고 밝은 표정으로 돌아갔다.
하선중이 돌아간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진산월을 찾아왔다. 그들 중 상당수는 과거의 인연을 들먹이며 종남파로의 귀속을 원했다.
물론 단순히 친분 관계를 쌓기를 원하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진산월은 그들과 종남파와의 인연을 신중히 판단하여 진산무공을 잘 전승해 오고 사승 관계가 확실한 자들은 제자로 인정했고, 무시할 수 없는 인연으로 이어진 문파들은 속문으로 받아들였다.
하나 그 비율은 십 분지 일도 되지 않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별다른 성과 없이 돌아서야 했다.
그럼에도 그들 중 누구도 감히 불만을 표하거나 화를 내는 사람은 없었다.
진산월이 모든 전후 관계를 아무런 사심 없이 정확하게 판단하여 결정했을 뿐 아니라, 그들 중 누구도 감히 신검무적이 행한 일에 반기를 들만한 담력을 가진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아들이나 어린 후손들을 종남파의 제자로 받아 달라는 청탁은 일일이 세기도 힘들 정도로 꾸준하게 밀려 들어왔다. 그들 중 옥석을 가려서 제자로 받아들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이런 일은 진산월이 종남파로 돌아온 후 상당한 시일이 흘렀을 때까지도 계속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