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1017화
군림천하 (1017)
진산월은 임영옥과 이야기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가 매일 자신의 진력을 불어넣어 주고 있기에 임영옥은 별다른 거부감 없이 그에게 손목을 맡긴 채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넘은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진산월은 정성을 다해 그녀에게 진력을 주입하고는 그녀의 몸을 조심스레 주물렀다. 얼마나 신경을 기울였는지 그가 다시 손을 뗄 때까지 반 시진
꼼짝도 않고 그의 치료를 받던 임영옥은 깊은숨을 내쉬고는 진산월의 뺨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고생했어요.”
“고생은 무슨. 사매도 보다시피 이마에 땀 한 방울 흐르지 않았는걸.’
진산월 같은 고수가 이마에 땀이 흐를 정도면 천하의 대적(大敵)이라도 상대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임영옥도 그 점을 잘 알고 있기에 말없이 그의 어깨에 머리를 갖다 대었다. 그녀의 몸은 아직도 차가웠으나, 조금 전보다는 한결 한기가 덜해서 미약하나마 따스한 기운마저 느껴졌다.
하나 이것이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것은 그들 두 사람이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진산월은 그녀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다가 조용한 음성을 내뱉었다.
“두 사제의 무덤에 갔다 왔어.”
임영옥의 눈이 활개 치듯 깜박거렸다.
“어디에 있어요?”
“조사전 뒤편 계곡의 양지바른 곳에. 소 사제가 좋은 자리로 잡아 두었더군.”
임영옥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조그만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나중에 나도 데려다줘요.”
두기춘이 묻힌 곳은 햇볕이 잘 들고 전망이 좋았으나, 그만큼 산세가 험해서 지금 그녀의 몸 상태로는 갈 수가 없었다.
하나 진산월은 서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때는 제자들도 데리고 가자고. 모두 본 파에 어떤 사숙이 있었는지 알아야 하니까.”
임영옥은 두기춘이 한때 종남파를 배신하고 화산파의 제자가 되었다는 걸 알고 있었으나, 그 점은 전혀 내색하지 않고 진산월의 손을 꼬옥 붙잡았다.
“두 사제도 무척 좋아할 거예요. 예전부터 두 사제는 본 파에 하루라도 빨리 새로운 피가 수혈되어야 한다고 말하곤 했었죠.”
진산월은 두기춘이 그 말을 한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나 그때 그가 말한 의미는 지금 그녀의 말과는 전혀 달랐다. 당시 두기춘은 실수를 연발하는 낙일방에게 화가 잔뜩 나서 어서 빨리 다른 제자들이 들어와 저 사고뭉치를 밀어내고 자신의 사제가 되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말했던 것이다.
추억이 미화된 것인지, 아니면 그녀가 그때에도 그렇게 받아들인 것인지는 모르지만 진산월은 굳이 그 점을 지적할 생각이 없었다.
대신 전혀 다른 문제를 거론했다.
“그래서 말인데, 사매도 제자를 한 사람 받아들이는 게 어때?”
임영옥의 지금 몸 상태를 생각해 본다면 제자를 둔다는 것은 무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나 임영옥은 거절하지 않고 오히려 눈을 빛내며 진산월을 돌아보았다.
“마땅한 사람이 있나요?”
“당신이 돌아오기 전에 받아들인 제자들 중 여자가 한 명 있어.”
“알아요. 서문연상이라고 했던가? 검보 보주의 여식이라고 했죠?”
“그래. 지금까지는 방 사매가 그녀를 맡았는데, 요즘 들어 어려움이 있다고 내게 하소연하더군.”
“그녀의 무공이 그 정도로 뛰어난가요? 그 나이 때의 여자를 취아가 감당하지 못할 리가 없는데?”
진산월은 사정을 설명해 주었다.
“그녀는 검보의 여식답게 검법에 나름 재주가 있나 봐. 방 사매가 그녀에게 월녀검법을 가르치고 있는데, 진경이 너무 빨라서 조만간 더 내놓을 것이 없을지 모르겠다고 하더군.”
임영옥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 반짝이며 얼굴 표정에도 밝은 빛이 감돌았다.
“그래요? 취아가 사형에게 그렇게 말했다면 상황은 훨씬 더 급할 거예요.”
“그래?”
진산월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임영옥은 조용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만 알고 계셔요. 사형 말대로 그녀는 제가 맡도록 하지요.”
진산월은 막상 그녀에게 제안을 해 놓고도 그녀가 승낙을 하자 오히려 걱정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괜찮겠어?”
“물론이에요. 그렇잖아도 본 파에 저 말고는 월녀검법을 제대로 익힌 사람이 없어서 우려했는데, 잘되었네요. 잠시 후에 그녀를 제게 보내세요.”
임영옥이 이렇게 말한 이상 진산월도 어쩔 수 없이 수긍을 했다.
“알았어. 하지만…….”
임영옥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는지 살짝 미소 지으며 그의 말을 막았다.
“절대로 무리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진산월이 임영옥의 방을 나왔을 때 누군가가 멀리 떨어진 곳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방금 전의 자신을 보는 듯해서 진산월은 실소가 나왔으나 내색하지 않고 그를 불렀다.
“중산, 무슨 일이냐?”
그 사람은 동중산이었다.
동중산은 진산월에게 다가와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쉬시는 데 방해가 되어 죄송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너를 부르려고 하려던 참이었다.”
뜻밖의 말에 동중산이 외눈을 빛냈다.
“제게 하명하실 일이 있으십니까?”
“그보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이냐?”
특별한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진산월이 임영옥의 방에 있는 것을 알면서도 동중산이 그를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유소응만큼이나 동중산 또한 병색이 완연한 임영옥을 보고 커다란 충격을 받은 사람 중 하나였다. 특히 동중산은 사 년 전의 일차 중원행 당시부터 임영옥을 지켜보았기 때문에 그녀와 진산월의 사이가 얼마나 애틋하고 각별한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임영옥이 돌아온 후 동중산은 수시로 그녀의 방 근처를 기웃거리며 그녀에게 불편한 점이 없는지 살펴보곤 했다.
동중산은 잠시 머뭇거리다 신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번에 장문인과 함께 온 일행 중 새롭게 본 파의 제자가 된 여인이 있지 않습니까?”
“왕옥지 소저를 말하는 것이냐?”
“예, 왕 소저의 신분 때문에 몇몇 제자들이 난처해하고 있습니다.”
왕옥지는 아직 정식으로 입문식을 치르지 않아 호칭을 바꾸지는 않았으나, 해조림의 제자인 왕도일에게서 직접 무공을 배웠기에 사승 관계가 분명해서 진산월과 같은 이십일 대 제자로 공인될 예정이었다.
모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들과 나이가 비슷한 여인이 한 항렬 위의 선배 고수로 등장하자 그런 쪽으로 민감한 몇몇 제자들이 동요를 일으키고 있는
동중산은 돌려 말했으나, 진산월은 문제가 되는 제자들이 누구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필시 콧대가 높고 자존심이 강한 서문연상이나 손풍, 두 사람 중 하나일 것이다. 아니면 둘 모두 일지도 몰랐다.
동중산이 진산월을 찾아왔을 정도면 그들과 왕옥지 사이에 가벼운 충돌이 벌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
진산월의 표정이 진중해졌다.
“본 파가 비록 문하제자들의 입출문(入出門)에 관대하다고 해도 그 규율은 엄정하다. 배분은 철저히 사승 관계로 판단하며, 같은 항렬은 입문한 순서대로 결정한다. 누가 감히 이 문규를 어기거나 불만을 토로한단 말이냐?”
좀처럼 화를 내는 일이 없는 진산월의 입에서 엄한 목소리가 나오자, 동중산이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송구스럽습니다, 장문인. 모두 제가 모자란 탓입니다.”
동중산은 일대제자들 중 가장 위 항렬이니 그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하나 단순히 그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기에는 현재 종남파의 상황이 그리 만만치 않았다.
동중산도 그 점에 대해 토로했다.
“본 파의 제자들은 아직 어리고 강호 경험이 없어서 사소한 칭호나 상하 관계에도 무척 예민한 편입니다. 더구나 최근에 본 파의 문하들이 급격히 같습니다.”
늘어나면서 새로운 사람의 항렬이나 배분이 어찌 되는지 다소 혼란스러워하고 있습니다. 더 늦기 전에 어떤 식으로든 이 점을 보다 분명히 해야 할 것.
확실히 최근에 종남파는 급격히 외연을 확장하면서 새롭게 늘어난 문하제자들의 수가 적지 않았다.
무너졌던 문파의 기틀을 세우고 다시 일어선 것이 얼마 되지 않아서 일대제자들은 물론이고, 진산월과 같은 이십일 대 제자들의 나이도 그리 많지 않았다.
비슷한 나이에 누구는 사숙이 되고 누구는 사질이 되니 나이 어린 제자들로서는 혼란스럽거나 다소 억울한 느낌이 들 수도 있었다.
이러한 혼란을 사소한 일이라고 방치했다가는 자칫 문호(門戶)가 흐트러지거나 문파의 기강이 해이해질 수도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내가 너를 부르려 했던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새롭게 본 파의 제자가 된 사람들과 속문이 된 문파들이 적지 않으니 이번 기회에 본 파의 체계를 정비하고 내실을 다질 필요가 있다.”
진산월의 말에 동중산이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장문인의 복안이 있는지요?”
“본 파에 속한 모든 인원들을 소집하여 소속감과 연대감을 심어 주고, 배분과 항렬을 분명히 해서 확실한 상하 관계를 정립하도록 할 생각이다.”
동중산의 외눈이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빛났다.
“그렇다면…….”
돌연 진산월은 어느 때보다 무겁고 진중한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중산!”
동중산은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렸다.
“하명하십시오.”
“대소집령(集令)을 발동하겠다. 한 달 후, 조사전 앞에서 모든 종남의 제자들이 집결하도록 하라!”
동중산은 커다란 목소리로 있는 힘껏 소리쳤다.
“봉명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