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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1001화


군림천하 (1001)

서해원은 자신을 따라 온 두 명의 장한들을 진산월에게 소개했다.

“이들은 내 사촌 동생들인데, 본가에서는 호가쌍위(護家雙衛)라는 직책을 맡고 있소.”

중년을 막 지난 듯한 두 사람은 나이도 같은 데다 얼굴이 비슷하게 닮은 것으로 보아 쌍둥이임을 알 수 있었다.

“서정원이라 합니다.”

“서명원(明遠)입니다. 신검무적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두 사람과 인사를 나눈 진산월이 마부석에 앉은 전흠을 소개해 주었다.

“저 사람은 내 사제인 전흠이라 합니다.”

급히 포권을 했다. 서해원은 단순한 마부인 줄 알았던 젊은 청년이 신검무적의 사제이며 요즘 강호에서 상당한 명성을 쌓고 있는 폭뢰검임을 알자 눈을 크게 뜨고

“이제 보니 폭뢰검 전 소협이셨구려. 미처 알아보지 못해 미안하오.”

전흠은 평소와는 달리 점잖은 모습으로 답례를 했다.

“전흠입니다. 명망 높은 서 가주를 뵈어 반갑습니다.”

서해원은 마부석에 앉은 인물조차 종남파의 고수인 것을 알게 되자 절로 기대에 찬 눈으로 누산산을 돌아보았다.

“저분 소저는…..”

누산산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누산산이라고 해요.”

서해원은 그녀의 이름을 입속으로 되뇌다가 이내 눈을 번쩍 빛냈다.

“혹시 천봉궁의 팔선자 중 한 분인 옥봉이 아니시오?”

누산산은 그가 어렵지 않게 자신을 알아보자 내심 흡족한 마음이 들어 절로 표정이 밝아졌다.

“역시 섬전추풍검의 명성은 그냥 얻어진 게 아니었군요. 서 보주님의 견식에 감탄했습니다.”

서해원은 강호 경험이 풍부한 인물답게 여인들의 심리에 상당히 능했다. 특히 누산산처럼 강호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젊은 여고수들이 얼마나 도도하고 자존심이 강한지 잘 알고 있기에 빙긋 웃으며 그녀를 추켜세웠다.

“천하에 이름 높은 옥봉을 직접 보게 되니 눈이 번쩍 뜨이는 것 같소. 미처 몰라보고 인사가 늦은 점을 용서해 주시오.”

“용서라니 당치 않아요. 그보다 서 보주께서 말씀하신 다관이 바로 저곳인가 보군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돌리니 멀지 않은 건물 앞에 서인걸과 그의 동생이 나와 있었다.

<단하다관(丹霞茶館)>

작은 간판이 붙어 있는 그 다관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여느 다관과 다를 바가 없는 듯했으나, 서해원은 그 다관을 극찬했다.

“저 다관은 낙수의 풍광을 한눈에 내려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특히 저녁 무렵에 창문 너머로 보이는 노을 지는 강변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이 일대에서는 가장 유명한 곳 중 하나요. 특히 주인의 입맛이 까다로워서인지 아주 훌륭한 차를 낸다오.”

진산월 일행이 다가가자 서인걸과 그의 동생이 재빨리 와서 머리를 조아렸다.

“마침 이 층 창가에 좋은 자리가 있습니다. 그곳으로 가시지요.”

진산월은 말에서 내려 마차로 가더니 안쪽으로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고는 전흠을 돌아보았다.

“사매와 두 소저는 마차 안에서 쉬겠다고 하는구나. 너는 어쩔 셈이냐?”

“지도 이곳에 있지요. 술은 몰라도 차는 별로 즐겨 하지 않습니다.”

“알았다. 누 소저는?”

누산산은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분위기로 보니 서 대협이 진 장문인과 긴히 나눌 이야기가 있는 모양인데, 제가 눈치 없이 낄 수는 없지요.”

진산월도 더 이상은 권하지 않고 혼자 다관 쪽으로 걸어갔다. 서해원이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걸 보니 누산산의 말이 틀리지 않은 게 분명했다. 

이 층으로 올라가니 확실히 풍경이 일 층과는 전혀 달랐다. 단지 한 층만 올라섰음에도 시야가 탁 트이며 멀리 낙수의 강변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그야말로 천 리까지 보기 위해 한 층을 더 올라갔다는 왕지환(王之渙)의 <등관작루(登鶴鵲樓)>라는 시가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이 층에는 서너 개의 창문이 뚫려 있었는데, 서인걸은 그중 가장 안쪽에 있는 커다란 창문 앞의 탁자로 진산월을 안내했다.

“저 자리가 낙수 강변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곳입니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그쪽 창문가에 앉으니 낙수의 푸른 강물과 풀로 덮인 강변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끝없이 창궐한 하늘 아래 구비 치는 강물과 드넓게 펼쳐진 풀밭은 보는 이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면서도 무언가 심금을 울리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진산월은 자리에 앉은 후 담담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상당히 넓은 다관의 이층에는 그들 외에 다른 손님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호가쌍위도 올라오지 않았고, 동경 어린 눈으로 줄곧 그를 보고 있던 서가보의 둘째 아들도 없었다. 

단지 서해원과 서인걸 부자만이 남아 진산월 앞에 조용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이해해 주시오. 오늘 어렵게 진 장문인을 모신 만큼 꼭 해야 할 이야기가 있어 외부인의 출입을 잠시 제한했소.”

진산월은 그들이 다관으로 그를 데려올 때부터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기에 전혀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차분한 음성을 내뱉었다.

“차 맛을 기대했는데 아쉽군요.”

“물론 차는 곧 나올 거요. 이곳의 차 맛이 좋다는 건 그냥 해 본 소리가 아니니, 기대하셔도 좋소.”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늙수그레한 노인이 찻주전자와 다기를 들고나왔다. 주름살이 가득한 노인은 신중한 동작으로 진산월과 서해원, 서인걸의 앞에 찻잔을 놓고 차를 따라 주었다.

은은한 차향이 실내에 감돌자, 노인은 꾸벅 인사를 하고는 나타날 때처럼 말없이 안으로 사라졌다.

“이곳의 주인인 하(夏) 노인은 귀가 어둡고 과묵해서 이곳에서 하는 이야기가 밖으로 새어 나갈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되오.”

서해원은 진산월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신이 먼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서인걸이 뒤따라 마신 다음에야 진산월은 천천히 찻잔을 들었다. 

차는 과연 서해원의 장담대로 무척 훌륭했다.

진산월은 지금까지 적지 않은 차를 마셔 왔지만, 지금의 이 차는 열 손가락 안에 충분히 꼽고도 남을 만큼 맛과 향이 탁월했다.

“정말 좋은 차로군요. 이름이 무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진산월의 말에 서해원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진 장문인의 입맛에 맞는다니 다행이오. 나도 궁금해서 예전에 물은 적이 있었는데, 하 노인은 몇 가지 차를 섞어서 만들었을 뿐 특별한 이름 같은 건 없다고 하더구려. 그래서 나 혼자만이라도 그럴듯한 이름을 붙여 주고 싶어 고민하다가 만들어 놓은 이름이 있소.”

“그게 무엇입니까?”

“하노수예(夏老手藝)라는 것이오. 어떻소?”

“하 노인의 솜씨라. 아주 적절한 이름 같군요.”

서해원은 껄껄 소리 내어 웃으며 즐거워했다.

“하하. 진 장문인이 좋다고 하니 이제부터는 무조건 그 이름으로 불러야겠소. 하 노인도 아마 반대하지 않을 거요.”

담소를 나누며 차를 마시는 광경은 누가 보기에도 화기애애했다. 다만 한쪽에 앉아 있는 서인걸만은 웬일인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다. 서해원이 그 모습을 보고 나직하게 혀를 찼다.

“쯧. 즐길 수 있을 때 즐기지 못하는 자는 해야 할 일을 앞에 두고도 하지 못한다고 그렇게 말해 왔거늘. 진 장문인이 이해해 주시오. 아직 젊은 녀석이라 자신의 마음을 좀처럼 다스리지 못하는구려.”

“저는 솔직한 모습이 오히려 마음에 드는군요.”

두 사람의 말을 듣자 서인걸은 얼굴이 붉어지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서해원은 그런 모습을 보고도 서인걸을 나가라고 하거나 내쫓지 않았다. 대신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는 것이었다.

“후우. 이 녀석이 내 뒤를 이어 본 가를 이끌어 나갈 사람인지라 이 자리에 동석시킬 수밖에 없었소. 이놈이 이토록 조급해하니 나도 더 이상 시간을 끌지 않고 진 장문인에게 용건을 말하도록 하겠소.”

이어 진산월을 바라보는 서해원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진중하고 무거웠다.

그는 다시 한 모금의 차를 마시고는 묵직한 음성을 내뱉었다.

“본 가가 이천에 자리를 잡은 것은 백 년이 조금 넘었소. 당시에 서지경(徐智經)이란 분이 몇몇 식솔들을 이끌고 와서 작은 가문을 세웠는데, 처음 몇십 년간은 무가(武家)라는 이름도 내걸지 못할 정도로 조용하고 한적한 장원이었다고 하오. 그러다 그분이 돌아가시고 삼십 년이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강호에 정식으로 출두했는데, 단기간 내에 하남성에서 적지 않은 명성을 쌓아 무림의 가문으로서 자리 잡을 수 있었소.”

서해원이 서가보의 내력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진산월은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했으나, 조용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무엇보다 말을 하는 서해원은 물론이고 듣고 있는 서인걸의 표정이 너무나 심각하고 진지해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였다.

“진 장문인께서는 혹시 본가가 왜 서지경 시조(始祖)님의 사후 삼십 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활동을 시작했는지 짐작하실 수 있겠소?”

진산월은 별생각 없이 가볍게 대꾸했다.

“그분의 유지(志)라도 있었습니까?”

그런데 서해원은 탄복했다는 듯 냉큼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그렇소. 진 장문인의 생각이 깊고 지모가 놀랍다고 하더니 과언이 아니었구려.”

서해원의 극찬에 진산월은 고소를 금치 못했다.

“당치 않습니다. 그보다 그분께서 그런 유지를 내리신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지요?”

“그것이 바로 오늘 내가 실례를 무릅쓰고 진 장문인의 앞길을 막으면서까지 시간을 내어 달라고 청한 이유요.”

진산월은 이제야 비로소 서해원이 서가보의 연역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분의 유지가 무엇입니까?”

“그분은 자신의 사후 삼십 년 동안은 절대로 본 가의 비전무공을 외부로 공개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소. 그래서 본 가가 정식으로 무림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가문이 세워진 후 무려 오십 년이 지난 후였소. 거의 두 대(代)에 걸쳐 본 가는 봉문(封門)과도 같은 상황 속에 살아야 했소. 당시의 기록을 보면 그때 본 가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고민과 고통 속에 살아왔는지를 여실히 알 수 있소.’

그것은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남성의 십 대 가문에 속할 정도로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무공을 외부로 노출시키지 못하고 오십 년이란 장구한 세월을 지내야 했으니, 평생 동안 강호에 나가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대체 서지경은 왜 그토록 엄격한 족쇄를 자신이 만든 가문에 내린 것일까?

그리고 그가 굳이 자신의 사후 삼십 년이란 세월을 콕 짚어 제한을 풀어 준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의문이 뇌리에 떠올랐지만, 진산월은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분의 유지가 본 파와 관련이 있습니까?”

서해원은 진심으로 탄복했다는 듯 감탄 어린 시선을 보냈다.

“확실히 진 장문인과는 이야기를 나누기가 수월하구려. 그분의 본명은 서지명(徐明)이라 하고, 원래 섬서성 사람이었소. 그 분께는 형님 한 분이 계셨는데, 그분의 함자는 서문명(徐文明)이라 하셨소.”

서문명이란 이름에 진산월은 자신의 추측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오래전에 들은 이름이었으나, 워낙 중요한 사건에 관련된 이름이라 지금까지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문명이란 분은 본 파의 십육 대 제자이셨습니다.”

서해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렇소. 두 분 형제는 원래 종남파의 소속이셨소. 그런데 당시의 종남파 장문인이 뜻하지 않은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고, 뒤이어 형님인 서문명 이름을 바꾸고 본 가를 세우신 것이오.” 

그분은 하남성에 와서 정착하여 조사께서 비명에 쓰러지자 서지명 시조께서는 급히 남은 식솔들을 이끌고 종남파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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