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1013화
군림천하 (1013)
오늘 진산월을 마중하기 위해 선유사에 온 사람들은 낙일방과 방취아 그리고 소지산이었다. 마중 나오고 싶은 사람들은 많았으나, 진산월이 정확히 언제 올지 몰라 꼭 와야 하는 인물들만 참석한 것이다.
진산월은 몇 달 만에 보는 소지산의 모습에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정말 경지에 도달한 느낌이 나는구나. 그동안 네가 본 파를 잘 이끌어 주었다고 들었다. 수고 많았다.”
소지산은 평소에는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어 속마음을 알기 힘든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누가 보아도 그가 마음 편히 웃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표정이 밝아졌다.
“노 사숙과 여러 제자들의 도움이 컸습니다.”
“화산파를 회람연에서 꺾었다는 말도 들었다. 화산파의 절정검객 세 사람을 연파해서 일절삼검(折三劍)이라고 불리기도 한다며?”
“떠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말일 뿐입니다. 그보다 장문사형.”
소지산은 돌연 진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본 산이 습격을 당한 일은 알고 계십니까?”
진산월의 얼굴에도 어느새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그 소식도 들었다. 검단현의 수작이었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검단현의 사주를 받은 일단의 무리가 본 산을 침입했습니다. 다행히 그들 모두를 물리치고 검단현 또한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했습니다만, 본 산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외적의 침입을 허용한 것은 명백한 저의 과오입니다.’
소지산이 금시라도 무릎을 꿇을 듯 고개를 떨구자 진산월은 정색을 하며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지산. 예전에 내가 무어라고 했는지 기억하느냐?”
소지산의 어깨가 한 차례 부르르 떨렸다.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일차 강호행에서 돌아와 실의와 좌절에 빠진 제자들을 두고 길을 떠나며 진산월은 어느 때보다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무너진 문파는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지만, 죽은 사람은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살아 있는 것이다. 살아만 있다면 문파는 얼마든지 재건할 수 있다.
소지산과 제자들은 그의 이 말을 뼛속에 새기며 험하고 거친 세월을 악착같이 버텨왔다.
진산월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기억하면 됐다. 중요한 것은 본 파의 제자들이 죽거나 다치지 않는 것이다. 외적의 침입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니, 그것을 막지 못했다고 너무 자책할 필요는 없다.”
소지산은 묵묵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영영 돌아오지 못하게 된 제자가 한 사람 있습니다.”
진산월은 모처럼 무겁게 굳은 눈으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래, 기춘, 그 녀석이 있었지.”
“두 사제는 비록 본 파의 규율을 어기고 기사멸조의 죄를 저질렀으나,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스스로의 몸을 불살랐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그는 본 파의 어엿한 제자입니다.”
평소에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열기를 가득 담은 소지산의 말에 진산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춘의 위패는 아직 치우지 않았습니다. 장문사형께서 그의 처우를 결정하실 때까지 저를 비롯해 모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조사전을 참배한 후 가 보도록 하자.”
“예, 그도 많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사 년 만의 해후는 짧았지만, 그 여운은 어느 때보다 길고 뜨거웠다.
선유사에서 마차의 말을 풀은 일행은 네 마리가 더 늘어난 말과 함께 종남파의 본산으로 움직였다.
전흠이 서인걸과 함께 제일 먼저 앞장선 가운데, 소지산과 방취아가 그 뒤를 잇고, 진산월이 임영옥을 안은 채 가운데에 자리했다.
낙일방은 엄쌍쌍과 다정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도 수시로 진산월과 임영옥을 살펴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뒤편에서 보고 있던 누산산이 끝내 참지 못하고 한마디를 내뱉었다.
“저 얼굴만 희멀건 자식은 자기 여자에게나 신경 쓸 것이지 왜 남의 여자를 자꾸 넘보는 거야?”
그녀의 옆을 조용히 따라오던 정소소가 넌지시 그녀를 꾸짖었다.
“형부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함부로 하는구나. 낙 소협은 임 소저의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이 자신이 그녀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여 그녀에게 더욱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당사자인 육매(妹)는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데 네가 왜 남의 남자에게 더 열을 내는 것이냐?”
“아니, 큰언니. 나는 그냥 여섯째 언니를 대신해서 말했을 뿐이에요. 이런 건 초장에 잡지 않으면 나중에 더 큰일이 될지 모른다고요.”
“낙 소협의 신분도 그렇고 강호에서의 위상도 이제는 네가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앞으로는 그에 대한 말을 할 때는 조심하도록 해라.”
정소소가 엄하게 대하자 누산산은 감히 그녀의 말을 반박하지 못하고 입술만 삐죽거렸다.
‘제길. 풋내기 시절부터 봐와서 내 눈에는 전혀 절정고수 같지가 않은데, 어떻게 고수로 대하라는 거야? 아무튼 종남파 놈들은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다니까.’
그 생각을 하자 문득 뇌리에 밉살스럽기 그지없는 종남파의 제자 한 명이 떠올랐다.
누산산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래, 이번에 만나게 되면 손풍인지 뭔지 하는 그놈을 단단히 골려 줘야겠다. 이번 기회에 그놈의 그 빌어먹을 버르장머리를 완전히 뜯어고쳐서 새 사람으로 만들어 주지. 이러면 종남파에도 쓸 만한 제자 한 명이 생기게 되는 셈이니까.’
누산산은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풀리는지 입가에 생글생글 미소를 매달았다.
정소소는 그녀가 그런 흉악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꿈에도 모르고 그저 그녀의 수시로 변하는 성격이 이번에는 좀 잦아들기를 기대했다.
그녀는 문득 고개를 돌렸다가 임영옥과 진산월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임영옥의 안색은 지금도 창백했고, 얼굴에는 혈색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파리하고 핼쑥했다.
게다가 산에 올라오면서 가끔씩 불어오는 산바람 때문인지 가끔 몸을 떨기도 했다.
하나 진산월의 건장한 몸에 푹 파묻히다시피 안겨 있는 그녀의 얼굴에는 추위나 고통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안온한 안락감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충족감이 어려 있었다.
정소소는 임영옥의 얼굴을 한동안 가만히 보고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행복해 보이는구나. 자신의 수명이 그리 오래 남지 않았다는 걸 알면서도 그와 같이 있기만 하면 저런 행복감이 느껴지는 것일까?’
그녀는 자신이 임영옥 대신 저 자리에 있어도 저런 행복감을 느낄 수 있을까를 잠깐 생각하다가 화들짝 놀랐다.
‘내가 무슨 이런 삿된 생각을……..?
그녀는 황급히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으나, 양쪽 뺨이 붉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진산월의 품에 안겨 있는 임영옥은 확실히 평온하고 행복해 보였다.
진산월은 태을신공을 운용해 그녀의 몸으로 한기가 침입하지 못하게 최대한 보호를 했으나, 그래도 가끔씩 예고 없이 불어오는 산바람을 완벽하게 막을 수는 없었다.
지금도 한 차례 차가운 바람이 계곡을 타고 불어오자 진산월은 그녀의 몸을 꼬옥 끌어안으며 낮은 음성으로 속삭이듯 물었다.
“바람이 점점 차가워지는데, 조금 속도를 올릴까?”
그녀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도리질을 했다.
“이대로 가요. 더 빠를 필요 없어요.”
“본 산을 빨리 보고 싶지 않아?”
“그렇긴 하지만・・・・・・ 사형 품속이 너무 아늑하고 좋은걸요.”
진산월은 살짝 미소 지었다.
“이제는 이런 낯 뜨거운 말도 할 줄 아는군.”
얼핏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는 임영옥도 살짝 웃는 것 같았다.
“나이를 먹으면 얼굴이 두꺼워진다더니 그런가 봐요.”
“나이를 먹긴. 사매나 나나 아직도 이십 대야. 우리에겐 정말 많은 날들이 남아 있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의 말을 완벽하게 수긍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진산월은 최대한 담담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지산과 취아를 다시 보니 어땠어?”
“두 사람이 그런 사이가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서로에게 너무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그들은 곧 정식으로 혼례를 치를 예정인가 봐.”
“그래서 그런지 두 사람 사이가 너무 좋아 보이더군요. 아까 소 사제를 볼 때의 사매 표정을 보고 많이 놀랐어요. 사매도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구나 하고.
“어떤 표정이었는데?”
“두 눈이 별처럼 반짝이면서 두 뺨에 살짝 홍조가 어려서 정말 예쁘고 사랑스러웠어요. 그녀를 보는 소 사제의 두 눈도 여느 때보다 훨씬 부드러웠고요.”
“나는 그런 표정을 자주 봤는데?”
“언제요?”
“당신을 볼 때면 늘.”
그 말에 임영옥이 나직하게 웃었다.
“뭐예요? 너무 엉터리 같잖아요.”
“진짜야. 날 볼 때의 사매 표정은 늘 그랬어. 그래서 아주 잘 알고 있지.”
“그런가요? 그럴지도…….”
임영옥은 낮게 소곤거리며 그의 얼굴을 살짝 올려다보았다.
진산월은 그녀를 내려 보며 조용히 웃었다.
“그래. 지금처럼 그런 표정이었어.”
“바보.”
임영옥은 참지 못하고 다시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다 잠시 후에 다시 조그만 음성으로 물었다.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흉보지 않을까요?”
진산월은 한 차례 주위를 둘러보고는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아무도 우리를 보고 있지 않아.”
그녀가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정말이요?”
“그래. 지산과 일방은 서로 자기 여자와 얘기하느라 정신없고, 전흠과 서 소협, 왕 소저는 앞에서 길을 인도하는 데 열중하고 있어.”
“선자들은요?”
“정 소저는 무언가 상념에 잠겨 있는 것 같고, 누 소저는………… 혼자 허공을 올려보며 웃고 있는데? 무슨 재미있는 생각이라도 하는 걸까?”
“다행이군요.”
“누가 봐도 상관없어. 이제는 사매를 놓치는 일은 없을 거야. 주위의 시선이나 방해 따위로는 절대 우리 두 사람을 떼어 놓을 수 없어.” 진산월은 임영옥의 차가운 몸을 꼬옥 끌어안았다.
숨이 막힐 법도 하건만, 임영옥은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그의 품속에 가만히 안겨 있었다.
잠시 후, 그녀는 문득 눈을 떠 주위를 둘러보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침내…….”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진산월은 고개를 들지도 않고 묵묵히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고운 뺨에 조금씩 물기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진산월은 그녀의 어깨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소리 없이 울고 있는 그녀를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넓은 소맷자락으로 덮어 주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 웅장한 산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산문 너머로 보이는 붉은색 기와지붕의 모습은 영롱하고 아름답기 이를 데 없었다. 그렇다.
마침내 그녀는 너무도 그리운 종남파의 본산으로 돌아왔다.
너무나 기나긴 외출이 마침내 마무리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