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1012화
군림천하 (1012)
제408장 귀래종남(歸來終南)
멀리 푸른 산자락이 보이자 누군가가 짤막한 탄성을 토해 냈다.
“아! 종남산이다.”
말을 내뱉은 사람은 의외로 누산산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이제 이 지겨운 여행도 끝이 보인다는 반가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사실 그녀는 이번 여정이 통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같이 대화를 나눌 사람도 없고, 가슴이 뛰는 모험도 없으며, 멋진 남자와의 운명적인 조우도 없는 그야말로 심심하고 재미없는 여행이었다. 그 여행도 이제 종착점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그녀는 시들었던 꽃이 되살아나듯 몸속에서 절로 기운이 샘솟는 것 같았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커다란 탄성을 토해 냈던 것이다.
그녀의 신이 난 음성을 들었는지 마차의 창문 한쪽이 살짝 열리며 임영옥이 얼굴을 내밀었다.
푸르름으로 가득 찬 너무도 익숙한 산자락이 그녀의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그녀는 한동안 묵묵히 종남산의 전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표정은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복잡미묘한 것이었다.
어느 사이엔가 한 사람이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임영옥은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의 독특한 체취와 특유의 분위기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것이었다.
“변함없이 그대로지?”
그녀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진산월은 말을 몰아 그녀의 옆에 바짝 다가선 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담담한 음성을 내뱉었다.
“저 산처럼 우리도 변함없이 사매를 기다리고 있었지.”
“잘 돌아왔어.”
단순한 말이었으나,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의 눈에는 자신도 모르게 맑은 이슬방울이 고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돌아왔다.
청운의 꿈을 품고 사형제들과 함께 종남산을 떠난 지 무려 삼 년 십 개월 만이었다. 그때의 누구도 그 여정이 이토록 길고 험난하리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사형제들이 모두 돌아온 후에도 그녀는 돌아오지 못하고 거친 풍랑 속을 이리저리 휩쓸려 다녀야 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몸조차 제대로 가눌 수 없는 몸이 되어서야 비로소 돌아오게 된 것이다.
지금 그녀의 심정을 무어라고 해야 할까?
그녀 자신도 자기의 심정을 정확히 알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생각과 어지러운 상념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이리저리 떠다니고 있었다.
종남산에 바짝 가까워지며 넓은 대로가 점차로 좁아지기 시작했다.
전흠이 진산월을 돌아보며 난색을 표했다.
“마차를 더 끌고 올라가기 어려울 듯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길이 좁아지면서 가팔라지기도 해서 말을 모는 것은 괜찮지만 마차가 다니기에는 지나치게 협소했다. 게다가 임영옥이 타고 있는 것은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사두마차여서 산길을 가기에는 지나치게 거대했다.
“아마 선유사游寺)까지는 마차로 갈 수 있을 거다. 거기에서 말로 갈아타는 수밖에.”
선유사는 과거 수(隋)나라 때의 행궁(行宮)이 있던 자리로, 그래서 지형이 상당히 험한 곳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입구까지는 마차가 다닐 정도로 길이 넓은 편이었다.
전흠은 종남산에서 오래 살지 않았기에 이 일대의 지리에 어두웠다. 그래서 어디까지 마차로 갈 수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사저께서 말을 타실 수 있겠습니까?”
전흠이 조심스레 묻자 진산월은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내가 안고 타면 이동에 문제가 없을 것이다.”
전흠은 자신이 미처 생각지 못했던 방식에 눈을 번쩍 떴다.
“아, 그렇군요.”
말 한 마리에 여자와 함께 탄다는 생각 자체를 못했던 전흠의 모습이 우스운지 옆에서 듣고 있던 누산산이 실소를 터뜨렸다.
“정말 촌뜨기라니까.”
전흠의 거무스름한 얼굴이 검붉은색으로 변했다.
“그럼 소저는 그런 적이 있단 말이오?”
뜻밖의 반격에 누산산의 눈꼬리가 살짝 찢어지며 매서운 눈빛이 흘러나왔다.
“지금 나한테 남자와 끌어안고 다녔냐고 물은 거예요?”
이번에는 전흠도 만만치 않았다.
“소저의 모습이 이런 일에 경험이 풍부한 사람 같아서 물어본 거요. 그럼 소저는 자신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을 안 했다고 나를 촌뜨기라고 놀렸단 말이오?”
전흠의 날카로운 반격에 누산산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딱딱하게 굳어지더니 이내 냉기가 풀풀 나오는 표정으로 돌변했다.
“이제 보니 전 소협의 말솜씨가 제법이군요. 촌뜨기라고 놀린 건 사과하죠. 전 소협의 말과 행동이 너무 그래 보여서 나도 모르게 실언을 했네요.”
사과랍시고 내뱉은 그녀의 말에 전흠은 화를 내어야 할지 참고 있어야 할지 쉽게 판단이 서지 않았다.
다행히 때마침 조금씩 좁아졌던 길이 다시 넓어지며 멀리서 고색창연한 담장과 상당히 높은 석탑의 윗부분이 나타났다.
마침내 선유사에 도착한 것이다.
선유사는 수나라 문제 때 피서행궁으로 개발한 곳으로, 그 뒤로도 계속 증축하여 상당히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좌측의 공터에 세워진 석탑은 크고 웅장해서 멀리서도 그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법왕탑(法王塔)이었다.
선유사 경내로 막 들어서려는 진산월 일행 앞에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장문사형! 오셨군요!”
종이 울리는 듯한 커다란 음성과 함께 무리 중 한 사람이 쏜살같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휘익!
십여 장의 허공을 한 마리 비조처럼 날아 진산월의 앞에 떨어져 내린 인물은 다름 아닌 낙일방이었다.
낙일방의 준수한 얼굴은 흥분과 기쁨으로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고, 숨결마저 거칠어져 있어 금시라도 진산월의 몸을 끌어안을 듯한 기세였다.
진산월은 그를 향해 담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잘 있었느냐? 신태가 더욱 좋아 보이는구나.”
“저야 아무 탈 없이 잘 지내고 있지요. 장문사형께서 정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우리가 이쪽으로 오는 것은 어찌 알고 여기에 나와 있었던 것이냐?”
“장문사형이 섬서성에 들어설 때부터 세상이 온통 장문사형에 대한 이야기뿐이었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장문사형의 시시콜콜한 행적이 모두 귀로 들려오더군요. 그래서 어제부터 이곳에 와서 장문사형이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보다 사저는……………..
낙일방은 기대와 설렘이 가득한 눈으로 사두마차 쪽을 바라보았다.
그때 문이 열리며 마차 안에서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낙일방은 임영옥인가 하여 눈을 빛냈으나, 나타난 여인은 다름 아닌 엄쌍쌍이었다.
“상공.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엄쌍쌍이 낙일방을 향해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낙일방 또한 그녀를 보니 반갑고 기뻤으나, 그보다는 임영옥의 행방을 몰라 다급하고 불안한 마음도 있었다.
“쌍매. 다시 보니 반갑구려. 잘 지내셨소?”
그와 엄쌍쌍은 몇 번의 만남으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후로 호칭을 달리 부르고 있었다. 엄쌍쌍은 꿈에도 그리던 낙일방의 헌앙한 모습을 다시 보니 눈물이 나올 정도로 반가웠으나, 낙일방이 자신을 보면서도 연신 마차 안쪽을 기웃거리는 것을 알고 살짝 아쉽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자신에게만 집중하지 않는 것은 서운했으나, 그의 충성스럽고 우직한 모습이 그리 싫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때마침 다시 엄쌍쌍의 뒤로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낙일방은 이번에야말로 하고 기대 어린 눈빛을 보냈으나, 그녀가 천봉팔선자의 맏이인 백봉 정소소임을 알고는 실망 어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정소소는 그의 그런 모습에 살포시 미소 지었다.
“저는 낙 소협을 다시 보니 반가운데, 낙 소협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군요.”
낙일방은 계면쩍은 웃음을 흘렸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도 정 소저를 뵈어 반갑습니다.”
말을 하면서도 그의 시선은 그녀의 뒤편을 계속 힐끔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세 번째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하얀 옷자락만 보아도 낙일방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
파리한 안색에 초췌한 모습이었으나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자 온 세상이 환하게 밝아진 듯한 느낌이었다. 최소한 낙일방은 그렇게 생각했다.
“사저! 사저!”
낙일방은 다른 말은 하지도 못하고 사저라고만 외치며 그 자리에서 발을 굴렀다.
임영옥은 마차로 나오며 그늘진 입가에 조용한 미소를 머금었다.
“낙 사제의 그런 모습을 보니 본 파에 처음 들어올 때와 조금도 달라진 곳이 없는 것 같네.”
낙일방은 그녀의 등장에 기뻐하다가 그녀의 병색이 완연한 모습에 커다란 충격을 받은 듯 몸이 굳어졌다.
“사저…….”
임영옥은 창백한 안색이었으나 낙일방을 바라보는 눈빛은 그윽하면서도 한없이 부드러웠다.
“나는 괜찮아. 예전보다 기풍이 더욱 비범해진 걸 보니 사제도 잘 지낸 것 같군. 이제는 정말 강호의 절정고수로 손색이 없겠는걸.”
마치 막냇동생을 달래는 큰누나 같은 음성이었다. 그 목소리를 듣자, 낙일방은 억지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다행입니다. 사저를 지켜드리지 못해 정말 죄송했습니다. 장문사형이 사저를 모시고 올 것을 믿고 있었지만,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될까 봐 늘 가슴을 조였답니다.”
마치 누나에게 투정을 부리듯 말하는 낙일방을 임영옥은 조용히 미소 지으며 바라보았다.
“이제 내가 무사히 온 것을 보았으니, 마음을 풀어. 난 정말 괜찮아. 이렇게 든든한 사형과 사제들이 있는데 누가 감히 나를 해코지할 수 있겠어?”
“그렇지요. 이제는 누구도 본 파 제자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할 겁니다. 제가 꼭 그렇게 만들 겁니다.”
“정말 믿음직하군. 낙 사제를 보니 나도 마음이 놓이네.”
낙일방이 임영옥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누군가가 그들 사이로 뛰어들 듯 끼어들었다.
“사저! 마침내 돌아오셨군요.’
그 사람은 임영옥의 손을 잡고 펄쩍펄쩍 뛰었다.
임영옥은 그 사람을 보고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사매. 몰라보게 예뻐졌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더니 이렇게 예뻐졌구나.”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방취아였다. 방취아는 몇 년 만에 보는 임영옥의 손을 꼭 잡고 있다가 안색이 변했다.
“사저, 왜 이렇게 손이 차요? 몸도 얼음장 같고…….”
그녀는 임영옥의 몸을 여기저기 만져보다가 유난히 창백하고 핏기를 보기 힘든 얼굴을 보고는 금시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저. 왜 이렇게 됐어요? 정말 괜찮은 거예요?”
임영옥은 방취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난 괜찮아. 음기 때문에 잠시 진기에 손상을 입었는데, 얼마 전부터 장문사형이 칠음진기의 비결을 구해 줘서 그걸 수련한 뒤로는 점차로 좋아지고 있어.”
“정말 괜찮은 거죠? 그렇죠?”
임영옥을 붙잡고 몇 번이나 묻는 방취아의 모습은 몇 년 전에 종남파의 가장 어린 제자로 모든 사형제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녀에게 호통과 꾸지람만 당하던 서문연상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자신의 눈을 믿지 못했을 것이나, 아쉽게도 그녀는 이 자리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