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988화
군림천하 (988)
많은 사람들 앞에서 무공을 시연하는 것에 대한 거리낌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검보에서 자라면서 주변에서 많은 검객들을 보아 왔기에 검을 다루는 데 상당히 능숙했다. 더구나 성격상 원래 남들의 주목을 받는 걸 좋아하기에 이런 자리를 마련해준 노해광에게 고마운 마음까지 들 정도였다.
중인들의 시선이 쏠린 가운데 서문연상은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녀가 월녀검법에 입문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하나 막상 월녀검법을 배우기 시작하자 그녀의 진경은 상당히 빨라서 가르치는 방취아가 몇 번이나 놀랐을 정도였다. 입문무공인 월녀보를 익히는데 제법 고생했던 걸 생각하면 쉽게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했었다. 방취아는 월녀검법을 배운 지 며칠 되지도 않아 자신이 가르친 초식을 능숙하게 펼치는 서문연상을 한참 동안 보고 있다가 한숨을 내쉬기도
“사람을 홀리는 여우짓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검에 저런 재주를 가지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구나. 너무 빨리 밑천이 떨어질지도 모르겠는걸.”
사실 방취아는 월녀검법을 완벽하게 익히지 못한 상태였다. 그녀는 신법과 보법에 재주가 많았고, 수법과 암기술에도 조예가 깊었으나 검에는 썩 소질이 없었다. 그런데다 초가보와의 싸움 때문에 제대로 무공을 수련하기 힘든 상황이 계속되면서 월녀검법에 대한 경지는 정체된 상태였다.
지금까지는 종남파의 무공에 대해 전혀 무지한 서문연상을 가르치는 입장이어서 그리 어렵지 않았으나, 서문연상이 일정 수준 이상에 도달하면 그녀를 감당할 수 있을지 확실한 자신이 없었다.
방취아는 이런 고민을 노해광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노해광은 그다운 해법을 내놓았다.
“어차피 장문인이 돌아오면 다 해결될 문제다. 그동안은 월녀검법의 새로운 초식들을 가르치는 속도만 조금 조절하도록 해라. 아무리 그래도 몇 달 버티지 못하겠느냐?”
그때 방취아는 별다른 대답 없이 웃기만 했는데, 그 웃음이 상당히 씁쓸해 보여서 노해광은 방취아가 몇 달도 견디지 못할 정도로 서운연상의 발전 속도가 빠른가 하고 놀란 적이 있었다.
노해광이 오늘 서문연상에게 월녀검법을 시전하게 한 것도 자신의 눈으로 직접 그녀의 경지를 확인해 보고자 하는 마음에서였다.
스윽!
미약한 소리와 함께 검집에서 검이 뽑혀 나오며 시연이 시작되었다.
그녀의 검법은 그다지 빠르지 않았다.
월녀검법 자체가 빠른 속도보다는 다양한 변화와 섬세한 검로를 장점으로 내세우고 있는 무공이었다. 하나 그만큼 검의 움직임은 다채로웠고, 변화무쌍한 가운데 날카로움을 숨기고 있어 일반 사람들이 보기에는 더욱 화려하고 놀랍게 느껴졌다.
파파파팍!
그녀의 교구가 유연하게 움직이며 사방이 온통 검 그림자에 뒤덮이자 사방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우와! 대단하다!”
“꽃 같은 외모에 신묘한 검술까지! 종남파에 정말 제대로 된 여검객이 나타났구나.”
사람들의 환호성 소리를 들으며 서문연상은 더욱 신이 나서 검을 휘둘렀다.
그녀의 검은 자유자재로 허공을 수놓았고, 움직임은 앞을 예측하기 힘들 정도로 변화막측했으며,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절세 검객의 그것에 못지않았다.
모두들 입을 벌린 채 장내를 종횡하는 하나의 검과 한 명의 여인에게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그녀의 검무를 보고 있던 노해광이 슬쩍 성락중을 향해 물었다.
“자네가 보기엔 어떤가?”
성락중은 물처럼 고요하면서도 한 줄기 신광이 어른거리는 눈으로 그녀를 주시한 채 조용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녀가 월녀검법에 입문한 지 얼마나 되오?”
“내가 알기로는 석 달이 채 되지 않았네.”
“그녀가 검보 보주의 여식이라고 했소?”
“그렇네. 자네의 눈으로 보는 그녀의 검이 어떤지 말해 주게. 아무래도 내가 보는 것보다는 정확할 테니 말일세.”
성락중은 한동안 가만히 그녀를 응시하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검끝은 교만하고, 검로는 중구난방이며, 발걸음은 거칠고 투박하오.”
노해광은 항상 차분하고 온유하던 그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독설에 눈을 살짝 치켜떴다. 서문연상의 시연이 그런대로 괜찮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놀라움마저 들었던 것이다.
“그 정도로 형편없나?”
“오히려 그 반대요. 내가 말한 단점들만 고친다면 그녀에게서 완벽한 월녀검법을 볼 수 있을지 모르오.”
“단점치고는 너무 크지 않나?”
“검끝이 교만한 것은 자신의 무공에 과도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니, 몇 번 따끔한 가르침을 받으면 자연스레 없어질 거요.”
“검로가 중구난방이란 건?”
“이제 입문한 지 삼 개월도 되지 않았다니 월녀검법에 내재된 진실한 묘용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는 게 당연한 일일 터. 꾸준히 검을 연마하다 보면 검로가 어지러운 문제점은 고쳐질 거요.”
노해광은 그와의 문답이 흥미로운지 다시 질문을 던졌다.
“발걸음은 어떠한가? 기본이 되는 월녀보는 제대로 배웠던 것 같은데.”
“그게 제일 문제요. 월녀보가 월녀검법을 익히기 위한 기본 보법인 것은 맞지만, 단순히 월녀보의 움직임만으로 검법을 펼쳐서는 안 되오.”
노해광은 월녀검법을 익히지 않았기에 그 검법의 세세한 점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성락중의 말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서 그런가?”
“월녀검법은 월녀보로 움직이며 검을 휘두르기만 하면 되는 단순한 무공이 아니오. 월녀보의 움직임 자체가 검을 들고 있지 않았을 때의 기본동작이기에 검법을 펼치기 위해서는 월녀보의 움직임에도 적절한 변형이 필요하오. 빈손으로 걷는 것과 검을 휘두르며 걷는 것에 분명한 차이가 있듯이 말이오. 그런데 그녀는 그냥 월녀보로 움직이며 검법을 시전하고 있소. 그러니 발걸음과 검이 따로 놀고 있는 것이오.
그제야 노해광은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렇군. 그녀가 펼치는 월녀검법이 내가 알고 있는 것과 어딘가 달랐다고 느꼈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겠군.”
“그런 잘못된 움직임은 몇 번 자세한 설명을 들으면 어렵지 않게 고쳐질 거요.”
“그래서 자네가 말한 세 가지 단점이 그리 크지 않다고 한 거로군.”
“그렇소. 충분히 교정이 가능한 문제점들이고, 그녀의 재질로 보아 제대로 된 월녀검법을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된다면 다른 사람의 지적이나 가르침 없이 스스로 터득할 수 있을지도 모르오.”
“문제는 그 정도로 월녀검법을 익힌 사람이 없다는 것일세. 방 사질녀도 권장이나 보법은 몰라도 검법에는 아직 경지에 이르지 못했네.”
성락중은 별로 당황하거나 흔들리지 않고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한 사람 있소. 내가 아는 월녀검법의 최고 고수가.”
노해광은 급히 물었다.
“그 사람이 누군가?”
“임영옥. 그녀의 월녀검법은 아마 본 파 사상 최고의 경지에 올라 있을 거요. 무당산에서 그녀는 월녀검법만으로 형산파 비성흔의 원공검법을 격파했소.”
노해광의 눈꼬리가 가늘게 떨렸다.
항상 침착하고 담대한 모습만 보였던 그로서는 드물게 보는 격동에 찬 표정이었다.
“임영옥. 그 아이의 무공이 그 정도였단 말인가? 소문으로 듣기는 했지만…….”
노해광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있곤 했다. 그의 뇌리에 있는 임영옥은 항상 수심에 가득 차고 조용한 소녀였다. 모친이 죽고 나서는 더욱 말이 없고 늘 우울한 표정으로 혼자 멍하니 앉아
그가 오랜 방황 끝에 다시 서안으로 돌아왔을 때에도 그녀를 제대로 보지 못했고, 그녀가 바로 중원행을 떠나서 그 뒤로 종남파로 돌아오지 않았기에 지금까지도 그녀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기억에는 항상 조용하고 말 없는 어린 소녀의 모습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무당산에서 벌어진 악산대전에서 형산파의 절영검 비성흔을 물리쳤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는 반신반의 하는 심정이었고, 한편으로는 그녀가 운이 좋았던 게 아닐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성락중의 지금 말을 들으니 그녀는 예전과 전혀 다른 고수가 되어 있는 게 분명했다.
“비성흔의 원공검법은 정말 대단한 경지에 올라와 있었고, 그의 기세 또한 무섭도록 강력해서 솔직히 내가 나섰다 해도 승리를 자신할 수 없었을 거요. 그런데 그녀는 성치 않은 몸으로 그런 비성흔을 꺾고 귀중한 승리를 쟁취해 냈소. 내가 아는 한, 그녀가 바로 당금 무림의 여중제일검(女中第一劍)이오.”
성락중의 단호한 말에 노해광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힘껏 움켜쥐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버럭 소리라도 내지를 것만 같았던 것이다.
‘임 사형. 당신의 딸이 어떤 일을 해냈는지 아시오? 당신은 이런 딸을 두고도…………’
이렇게 자랑스러운 딸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임장홍이 못 견디게 생각나는 노해광이었다.
억울하고 비통한 일을 당해도 늘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만 짓고 있던 임장홍이 종남파와 임영옥의 현재 모습을 본다면 어떠한 표정을 지었을까를 생각하니 평소에는 강철처럼 한 점의 흔들림도 찾기 힘들었던 노해광도 자신의 눈빛이 흐려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때마침 서문연상이 화려한 마무리와 함께 월녀검법의 시연을 마쳤다.
그녀는 한 차례 멋들어지게 검을 휘둘러 깔끔하게 마무리하고는 검집에 집어넣으며 활짝 미소 지었다.
사방에서 우레와 같은 환호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와 금륜장 전체가 흔들릴 정도였다.
“와! 최고다!”
“정말 아름답고 멋진 검무였다! 저게 바로 종남의 검인가?”
“무슨 검법이지? 종남파에 저렇게 우아하면서도 화려한 검법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는데.”
서문연상은 포권을 하여 환호에 답하고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노해광의 얼굴을 빤히 보며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사숙조님. 지시를 완수했습니다.”
그녀는 노해광의 입에서 나올 칭찬을 잔뜩 고대했으나, 노해광은 별반 표정 없는 얼굴로 고개만 까닥거릴 뿐이었다.
“수고했다. 앞으로 좀 더 노력하도록 해라.”
그녀는 기대에 어긋난 말에 순간적으로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뭐야? 칭찬은 고사하고 더 노력하라니? 내 솜씨가 그렇게 시원찮았단 말이야?’
성질 같아서는 한바탕 수선을 피우고 싶었으나, 자리가 자리인지라 그녀는 머리를 조이라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하나 불만족스러운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나서 누가 보기에도 건드리면 터질 것만 같았다.
방화가 곱게 접은 손수건 한 장을 내밀었다.
“수고했어, 시매. 정말 멋진 솜씨였어.”
서문연상은 버럭 소리라도 내지르려다 간신히 눌러 참으며 그의 손에서 빼앗듯 손수건을 집어 들었다.
“흥! 이 정도를 가지고 수고는 무슨. 다음에 이런 일이 있으면 그때는 사형이 나가도록 해요.”
방화는 그녀의 심기가 좋지 않은 것을 보고는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인가?”
“뭐라고요? 누군 나가고 싶어서 나간 줄 알아요?”
“그러니까. 그런 자리가 나가고 싶다고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방화는 더 입을 열려다 서문연상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서문연상은 애꿎은 그에게 화풀이할 수도 없어서 잔뜩 심통 난 표정으로 씩씩거리고만 있었다.
그때 한 사람이 날렵한 신법으로 장내에 내려섰다.
“잠시 드릴 말씀이 있소.”
건장한 체구에 눈빛이 형형한 젊은 청년 한 사람이 중앙의 자리에 우뚝 선 채 사방으로 포권을 해 보였다.
본인은 탕평검(蕩平劍) 국일호(鞠一浩)라 하오. 조금 전에 종남파 여협의 눈부신 솜씨를 보니 감흥을 참을 수 없어 나오게 되었소. 무례하다고 꾸짖지 말고, 잠시 내 말을 들어 주셨으면 하오.”
그 말에 여러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국일호라면 쌍하보 보주인 철혈수사의 아들 아닌가?”
“그러고 보니 오늘 철혈수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싶었는데, 아들을 대신 보낸 것인가?”
쌍하보는 금륜장과 함께 한때 서안에서 가장 강맹했던 세력이었다. 초가보의 등장으로 타격을 받긴 했으나, 그래도 지금까지 백 년 넘게 서안에서 굳건히 자리를 잡아온 명문세가라고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