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1권 : 황제 사냥꾼 [제2장] – 돌과 바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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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마시는 새 1권 : 황제 사냥꾼 [제2장] – 돌과 바람 3


문 안으로 들어서는 엘시를 보며 데라시는 흡족한 기분을 느꼈 다. 엘시가 선택한 평복은 그가 데라시의 요구를 정확히 이해했 음을 웅변적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데라시는 만족한 기분으로 정 우를 쳐다보았다. 데라시의 얼굴을 정신없이 바라보던 정우는 그 의 눈길을 마주치고는 황급히 외쳤다.

“좋은 꿈 꾸셨습니까, 데라시 백작님! 규리하 공 비셀스 규리 하입니다! 정우라고 불러 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비스그라쥬 백 데라시입니다. 고함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정우는 데라시의 목소리에 크게 놀랐다. 그리고 고함칠 필요가 없다는 말에 다시 놀랐다.

“이 정도로 말해도 들리세요?”

“예.”

“그럼 이 정도로 말해도…………….”

“들립니다만 조금 전의 높이가 좋군요. 앉으시지요.”

정우가 자리에 앉자 데라시는 엘시에게도 의자에 앉도록 권했 다. 나가들의 예법상 호위자가 있어야 하는 곳이 어딘지 알지 못 했던 엘시는 그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데라시는 두 사람의 맞은편에 앉아 탁자 위에 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여전히 밀도 높은 관찰을 하고 있는 정우에게 미소 지었다.

“나가를 처음 보십니까, 규리하 공?”

“예, 백작님. 제가 자란 즈믄누리도 이곳 규리하도 비늘 덮인 분들께는 추운 곳이니까요.”

“그 점을 이해하신다면 영빈각이 아닌 이곳에서 맞이한 점, 그 리고 제가 저렇게 벽난로에 불을 피워 두는 점 등을 양해해 주실 수 있겠군요. 하늘누리가 좀 더 남쪽으로 내려가기 전까지 저는 이 방에 유폐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 처지인지라 손님이 두 분이나 찾아 주시니 대단히 즐겁군요. 그래서 오랫동안 이야 기하고 싶습니다만 두 분께는 이 방이 좀 더우시겠지요.”

데라시는 곧장 본론에 들어가겠다는 의미로 말했다. 하지만 정 우는 자신이 받은 감명을 표현하고 싶어했다.

“백작님의 목소리는 정말 아름답군요. 다른 나가들의 목소리도 다 아름다운가요?”

“우리들의 목소리가 다른 세 선민 종족의 목소리와 좀 다르다 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가가 목소리의 미추에 대해 잘 아는 척하면 우스꽝스러운 일이겠지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름답게 들려요. 그래서 좋은 말씀을 해 주실 거라고 생각되어요.”

“저도 그렇게 되면 좋겠습니다. 그럼 시작할까요.”

그리고 데라시는 시작했다.

“현재 제국 형법은 개별 인격체임이 분명한 직계혈족의 연좌 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국 형법 제87조 내란죄에 의하 면 내란 범죄자에게 수여된 작위는 몰수됩니다. 상실이 아니라 몰수인 까닭은 작위가 원래 황제 폐하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 입니다. 그런데 기왕의 사실들을 놓고 볼 때 내란죄에 소추되지 않은 작위 계승권자의 계승권은 그대로 인정된다는 유권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 점은 아라짓력 4년 황은에 의해 반포된 ‘친권에 대한 원시제 그리미 폐하의 칙령’에 의해서 뒷받침됩니다. 계승 권은 피계승자의 권리로 이해되어야 하는 거지요. 이것은 또한 제국 민법의 상속법이 상속권자에게 부여하는 상속 포기권에 관 한 조항을 통해서도 유추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해하셨습니까?” 정우는 생글생글 웃었다. 그 웃음을 보던 데라시는 문득 익숙 함을 느꼈다. 곧 데라시는 그 웃음이 도깨비들이 특정한 경우에 짓곤 하는 웃음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당신이 아버님의 작위를 계승하는 것에 법적인 문제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폐하의 결정이 중요할 뿐입니다. 이해하셨습니까?”

“이해했습니다. 죄송해요. 목소리가 대단히 고우신 데다 말씀 이 어려워서 음악 듣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 계승 이야기는 이 미 여기 계신 대장군님께서 제안하셨고 저는 그걸 사양했어요.” 

“알고 있습니다. 그럼 두 번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있으십니까?”

예상치 못한 질문에 정우는 당황했다. 그리고 그 당황은 도깨비 식으로 표현되었다.

“부족한 제게 주신 마음은 대단히 감사합니다만 저와 백작님 사이엔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있군요.”

“농담하시는 걸 보니 당황하셨군요. 죄송합니다. 좀 갑작스러 웠지요? 천천히 대답하셔도 좋습니다.”

“음, 음. 결혼을 마음에 둔 상대는 없어요. 아시겠지만 저는 즈믄누리에서 자라서…………… 아주 어릴 적엔 도깨비와 결혼해도 되는 줄 알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아버님은 제 결혼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시지 않으셨고요.”

“결혼에 거부감이 있으십니까?”

“그렇지는 않아요. 아이를 가지고 싶으니까. 저는 아이를 좋아해요.”

데라시는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좋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잘 들어 주십시오. 대장군은 당신이 변경백위 계승을 거부할 경우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이미 설명드 렸습니다. 들으셨지요?”

정우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또 당신은 결혼에 거부감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저는 이렇게 제안하겠습니다. 결혼해서 남편에게 변경백위를 이양하라고. 어떻습니까?”

정우는 눈을 크게 뜬 채 데라시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 눈 이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데라시는 재빨리 손사래를 쳤다.

“아뇨, 아닙니다. 규리하 공. 그런 의심을 하고 있으신 것 같 습니다만 당신을 강제로 누군가와 결혼시키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면?”

“당신이 그런 제안에 관심 있다면 당신의 아버지가 해야 할 일 을 대신하겠다는 겁니다.괜찮은 배우잣감을 물색하고 청혼서를 보내고 결혼식을 치르는 모든 일을 말입니다. 물론 배우자를 선 택하는 것은 당신이 해야겠지요. 당신이 이미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겠습니다. 물론 당신의 연인이 즈믄누리의 잘생긴 도깨비라면 좀 난감하겠지요.”

데라시의 농담에 정우는 큰 웃음을 터뜨렸다. 별것 아닌 농담 이었지만 감정적으로 동요해 있던 그녀는 배를 잡고 웃었다. 한 참 후 정우는 가까스로 허리를 펼 수 있었다. 그녀는 눈 주위를 훔치다가 갑자기 힘이 빠진 듯 손을 내렸다. 그리고 무릎 위에 두 손을 얹고 바짓자락을 조몰락거렸다.

“저는 즈믄누리로 돌아가고 싶어요.”

데라시는 손끝을 마주한 채 참을성 있게 정우의 말을 기다렸 다. 지금은 정우가 말할 때였다. 과연 그녀는 입을 열었다. 하지 만 그 말은 데라시가 예상한 말이 아니었다.

“왜 꼭 규리하에 지배자가 있어야 하지요?”

“예? 무슨 말씀입니까?”

“폐하의 행정관이 이 땅을 다스리면 안 되나요?”

“아아, 예. 제국령으로 귀속시키면 어떠냐는 말씀이군요.”

데라시는 이 정치적 순진함에 미소를 머금었다. 황제에게 규리 하를 황제령으로 삼으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던 데라시마저도 규리 하를 제국령으로 귀속시킨다는 생각은 차마 하지 못했다.

“규리하 공,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하지는 않겠지만, 매 우 어려운 일이며 많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일이라고는 할 수 있을 겁니다.”

“누가 불행해지지요?”

데라시는 정우가 즈믄누리에서 자랐음을 다시 되새겼다. 그래서 어린애에게 설명하듯 말했다.

“춘부장께 봉토를 받은 소영주들이지요.”

“아아.”

“물론 그 소영주들 중 많은 수가 아이저 규리하의 소환에 응해 반란군에 가담했습니다만,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습니다. 변경백 령을 제국령으로 귀속시킨다면 그들 전부에게서 재산을 몰수해야 합니다.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소영주들의 입장에선 부당하기 짝 이 없는 일이겠지요.”

“모르겠어요. 제가 혹 무례한 말을 하더라도 잘 몰라서 그런 것이니 탓하지 마세요. 그 소영주들은 의리를 저버렸어요. 아버 님께서는 당신께서 필요로 할 때 그들이 도와주길 바랐기 때문에 그들에게 영지를 나눠 준 것이잖아요? 아버님의 소환에 응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자기가 받은 땅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없을 텐데요.”

“아닙니다. 춘부장께서 그들에게 봉여한 땅 자체가 이미 폐하 께서 춘부장께 봉여한 땅입니다. 춘부장께서는 폐하께 봉여받은 영지를 그들에게 재봉했을 뿐입니다. 그들의 처신은 틀리지 않았 습니다. 하인이 집사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주인을 해칠 수는 없 잖습니까.”

“그렇군요. 그렇다면 황제 폐하께서는 그들에게 새 집사를 주 려는 것이군요.”

“맞습니다. 그것이 새 하인들을 데려와서 처음부터 다시 일을 배우게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일이기도 합니다.”

데라시의 설명은 순수하게 원론적인 것일 뿐, 영주에게 봉여된 영지를 제국령으로 귀속시키는 일에는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미 묘한 문제들이 개입되어 있었다. 데라시는 그 모든 것을 다 설명 해 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결혼하기 전까지 규리하의 지 배자 노릇을 해야 하는 정우에겐 그런 사실들을 알고 있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데라시는 정치적인 감각이 나은 남편감을 주선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정우의 정치적 감각은 데라시가 예측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정우가 말했다.

“시카트는 안 되나요?”

“네? 시카트 규리하 말씀입니까?”

“예. 저와 함께 체포되었어요. 시카트는 저와 달리 규리하에서 자랐으니 규리하에 대해서도 더 잘 알 거예요. 시카트가 변경백 위를 계승하면 어떨까요.”

데라시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엘시를 쳐다보았다. 엘시에게 감정적 동의를 얻고 싶어서 취한 동작이지만 엘시는 벽난로 쪽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다. 데라시는 정우를 바보 취급하지 않으려 애쓰며 말했다.

“시카트 규리하는 반란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습니다. 당신의 경 우와는 다르지요. 그런 그가 변경백위를 계승한다는 것은 불가능 한 일입니다.”

“그렇겠지요. 하지만 시카트는 열다섯 살이에요. 미성년자이고 자식이 부모를 거역하기는 어려우니까 시카트의 죄는 상당히 경감되지 않을까요? 그렇다 해도 시카트의 죄가 쉽게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닐 거예요. 하지만 제게 제안하셨던 해결책을 시카 트에게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시카트는 어리니 시카 트만큼 어린 아내에게 규리하를 맡기긴 어렵겠지요. 하지만 시카트가 어느 덕망 있는 분의 양자가 된다면 어떨까요?”

데라시는 정우를 바보 취급하지 않으려 애쓸 필요가 없다는 것 을 알았다. 정우는 바보가 아니었다. 실제로 시카트 규리하는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규리하 토벌령에 그 이름이 올라 있지 않다.

그 사실을 생각하며 데라시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규리하 공, 시카트는 당신을 살해하려 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제가 미워서 그런 것은 아닐 거예요. 그래서 저도 시카트가 한 일을 미워하지 않아요.”

“저는 시카트가 혈육을 죽이려 한 악한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이 넓은 제국에 그런 악한을 양자로 들일 사람이 있을진 모르겠 지만, 그런 자에게 유서 깊은 규리하를 넘겨준다는 것은 역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시카트의 계승권 순위는 당신보다 낮습니다.”

정우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멍청하게 보일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만 저는 그 순위라 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도깨비들은 그런 것을 따지지 않 아요. 단지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더 현명할 거라 믿을 수는 없잖아요?”

“도깨비들은 사망 후 어르신이 됩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후손 들을 지도할 수 있습니다. 바우 성주님께서도 어르신이 된 지금 까지 즈믄누리를 통치하고 계시잖습니까? 그래서 도깨비들은 승 계 순위 같은 것에 큰 관심이 없는 겁니다.”

바우 성주의 이름을 들은 정우는 애틋한 그리움과 터져 나오려 는 웃음을 동시에 느꼈다. 데라시가 말했다.

“하지만 인간이나 나가들은 그렇지 못하니 순위를 따져야 합니 다. 나이가 많은 자가 더 현명하진 못하더라도 경험은 더 많지 않겠습니까. 최연장자에게 우선적으로 가문을 맡겨 온 저희 나가 들은 대체적으로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다는 말로 계승권 순위에 대한 변호를 대신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계승권을 포기하면 어떻게 되지요?”

“포기하신다고요?”

“예.”

“그럴 경우 다음 계승권자는 이이타 규리하지만, 이이타는 춘 부장과 함께 도주했지요. 그리고 미성년자가 아니므로 반역죄는 유효합니다. 따라서 시카트가 다음 계승권자이긴 합니다. 당신이 계승권을 포기하면 이론상 폐하께서는 시카트 규리하에게 규리하 의 통치권을 위임하실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소년은 지금껏 지배자의 자질 대신 비행 청소년의 자질만 잔뜩 보여 주었습니 다. 따라서 여전히 당신 이외엔 합당한 계승권자가 없습니다. 규 리하 공, 시카트를 돕고 싶으시다면 오히려 당신이 규리하를 계 승하는 편이 낫습니다. 당신이 규리하의 통치자로서 시카트의 교 육을 책임진다면 폐하께서는 그것을 허락하실 겁니다.”

정우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혼란을 느꼈다. 그러자 그녀에게 보다 익숙한 도깨비다운 감성이 대신 말했다.

“성주님께 물어볼 수 있을까요?”

“바우 성주님께 말씀입니까?”

“백작님께서 하신 제안에 대해 저는 결정을 내리기 어려워요. 미처 생각해 보지 못한 거라서. 그러니 성주님께 조언을 청해도 될까요? 탈해가 여기에 있다고 알고 있어요. 틀림없이 번뜩이를 타고 왔을 테니, 금방 즈믄누리에 다녀올 수 있을 거예요.”

데라시는 탈해가 즈믄누리의 무사장 탈해 머리돌을 말하는 것 임은 짐작했지만 번뜩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 것이 탈해의 딱정벌레 이름이라는 정우의 설명을 듣고는 미소를 머금었다.

“글쎄요, 규리하 공. 이 제안이 수치스러운 것은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공공연히 말할 성질의 것도 아닙니다. 아는 사람이 적었으면 하는데요.”

“도깨비는 그럴 경우 아는 사람이 많으면 도와줄 사람도 많다고 말해요.”

“그리고 도깨비가 아닌 사람들은 훼방을 할 사람도 많을 거라 고 대꾸하지요. 저도 그런 의견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이 건에 크고 작은 영향을 받는 사람은 아주 많습니다. 하지만 바우 성주 님은 당신의 후견인이라 할 수 있는 분이니, 좋습니다. 서한을 보내십시오.”

“감사합니다. 백작님.”

“물론 서신 전달자가 서신을 열어 보거나 하는 일은 없어야 합 니다. 피봉에 친전이라고 쓰십시오.”

도깨비에 대한 보안 수단으로 데라시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정우는 가혹하다고 생각했으며 괴로워하게 될 탈해를 동정했다.

“바우 성주님께 조언을 구하고 당신 스스로도 이 제안에 대해 생각해 보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좀 필요하겠지요. 두 달 후 다시 만나서 당신의 결정을 말해 주면 어떻겠습니까?”

즈믄누리까지의 거리와 딱정벌레의 속도를 고려한 데라시는 그 정도의 기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우의 대답은 그를 놀라게 했다.

“한 달이면 충분해요.”

데라시는 눈을 크게 떴다.

“무사장의 딱정벌레가 제국을 보름만에 횡단할 수 있다는 겁니까?”

“여기에 올 때 그 정도 걸렸어요. 그때 아버님은 최대한 빨리 오라고 하셨거든요. 그래서 탈해가 태워 줬어요.”

“놀랍군요. 그렇다면 여유를 좀 두어서 사순 정도면 어떻겠습니까?”

“말씀대로 하지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여쭐 것이 있습니다. 규리하 성 지하에 있는 금고방에 대해 아십니까?”

“라수의 방 말씀인가요?”

“예. 규리하 사람들은 그렇게 부른다지요. 아시는가 보군요.”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그것이 있다는 것은 알아요. 제가 열다 섯 살 되던 해에 아버님께서 장녀이니까 알아야 한다시면서 서신 으로 알려 주셨어요.”

“그럼 그걸 여는 방법도 아십니까?”

“예. 거기 들어가려면……………”

“말하지 마십시오.”

정우와 데라시는 모두 깜짝 놀라서 황제의 대장군을 돌아보았 다. 그들은 침묵과 대화 중이던 엘시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벽 난로를 바라보고 있던 엘시는 어느새 데라시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데라시는 그 시선에 불안감을 느꼈다. 눈길을 비스그라 쥬 백에게 고정시켜 둔 채 엘시는 정우에게 말했다.

“정우, 당신에겐 그 방의 비밀을 말할 의무가 없습니다.”

정우조차도 그 말이 터무니없다고 느꼈다. 승리자가 패배자의 것을 뺏는 것은 상식이다. 승패가 이미 갈린 상황에서 비밀을 지켜 주겠다는 엘시의 발언을 정우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데라시의 충격은 정우보다 더 컸다.

“아니, 엘시?”

이름을 듣자 엘시는 데라시에게 말했다.

“비스그라쥬 백, 그러잖아도 올라오기 전에 보고를 받았습니 다. 규리하 성 지하의 금고방으로 통하는 통로에 자물쇠 전문가 를 들여보내도록 허락해 달라고 하셨지요. 거기에 대해 나는 아직 작전 구역이니만큼 민간인의 출입을 허락할 수 없다고 답했습 니다.”

“엘시, 그 안에는 반역자들의 중요 물건들이 들어 있을 겁니 다. 반역자들의 재산과 서류 등에 대한 완벽한 조사를 하는 것은 총지휘관인 당신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충고 감사합니다만 내 의무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습니다. 비스그라쥬 백. 하지만 내가 비셀스 규리하에게 지하 금고방 개방 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바르지 못한 일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권리는 비셀스 규리하가 선의로써 지하 금고방을 공개할 경우 그 걸 구경할 정도의 권한뿐입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반역자의 사유재산……”

“아니요.반역자의 사유재산은 그 방으로 이어진 통로까지입니다.”

“예?”

반문한 데라시와 달리 정우는 그제야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우가 말했다.

“대장군님의 말씀이 맞아요. 데라시 백작님. 라수의 방은 즈믄누리의 재산이에요.”

데라시는 어처구니없는 심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정우의 설명을 들었다. 그 결과 데라시는 지하 금고방이 원래 는 즈믄누리의 일부였으며 과거 정우의 종증조부인 라수 규리하 의 요청에 따라 규리하의 지하로 옮겨진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방의 이름이 그렇게 불리는 것은 그런 사실에 기인한다.

“즈믄누리의 방 하나를 통째로 떼서 옮겨 지었다는 겁니까?” 

“예. 그렇게 해도 즈믄누리와 같은 효과가 날지는 알 수 없었 지요. 아마 바우 성주님도 그것이 궁금해서 종증조부님의 요청을 받아들이셨을 거예요. 그리고 실제로 같은 효과가 났지요. 제 생 각엔 어두운 지하이기 때문에 다섯 따님의 도움이 여전히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어쨌든, 킴 자물쇠 기술자는 거기 내려가 봐야 어떻게 여는지 알 수 없을 거예요.”

데라시는 성 안 어디에서든 모퉁이를 오른쪽으로 세 번만 돌면 대식당으로 이어지고 동쪽탑 꼭대기에 서서 왼쪽으로 두 바퀴를 돌면 반드시 성주의 서재에 엉덩방아를 찧게 되는, 그 짝을 찾을 수 없을 만큼 해괴한 성을 생각했다. 그러자 반갑지 않게도 기운 이 빠졌다.

“그 방이 여전히 즈믄누리의 재산이라는 말입니까?”

“예. 규리하 성에 있지만 소유주는 즈믄누리로 되어 있어요.”

“하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규리하 가문의 사유재산일 텐데요.”

정우는 주춤했다. 엘시가 대답했다.

“그 안에 반역자의 사유재산이 들어 있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 다면 머리돌 성주에게 방의 개방을 요구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나는 그런 증거를 찾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까?”

데라시는 이것이 키탈저 사냥꾼의 저주라는 것을 알았다. 규리하의 사유재산이 들어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면 금고방을 열 수 없다. 그런데 금고방에 들어가기 전에는 그 안에 규리하의 사 유재산이 들어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 엘시는 계속 말했다. 

“당신이 증명하지 못한다면 규리하 공 비셀스는 당신에게 즈믄 누리의 비밀을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모르고 있었던 것을 보니 그건 즈믄누리와 규리하만 알 고 있었던 일인 것 같은데, 엘시 당신은 그것이 즈믄누리의 일부 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엘시는 무감동하게 대답했다.

“내 의무를 수행하던 도중 알게 되었습니다. 변경백령의 문서 를 조사하다가 그 방을 옮긴 날짜와 동원된 인원, 소요된 경비 등을 기록한 의궤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 의궤에는 지하 금 고방이 즈믄누리의 소유임이 명백히 기록되어 있더군요. 규리하 가문은 기록을 대단히 꼼꼼하게 하는 가풍을 가졌던 것 같습 니다.”

정우가 말했다.

“그건 과텔과 케나린 이후로 가문이 지켜야 할 의무였어요. 물 론 가문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상무지요.”

엘시의 말에 정우는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금 후 그녀는 정면 대결로 규리하의 상무를 격파한 사람에게 고개를 끄 덕인 것이 잘한 일인지 궁금해졌다. 데라시는 턱을 쓸며 말했다. 

“믿을 수 없군요. 거기서 여기까지 거리가 얼마인데 방 하나를 통째로 옮기다니…………….”

“종증조부님께는 레콘 친구들이 많이 있었지요.”

교양 수준의 역사 지식만 가지고 있는 데라시도 라수 규리하가 제2차 대확장 전쟁과 천일 전쟁 당시 북부군의 참모장이었으며 대호왕의 사도로 봉직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우의 말대로 라수 규리하에겐 그런 니름도 안 되는 일에 동원할 수 있는 레콘 지인들이 분명 많이 있었을 것이다. 데라시는 항복하는 기분으로 말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이 건은 즈믄누리의 바우 성주에게 부탁 해 봐야 할 문제군요. 반란자의 사유재산이 있다는 증거를 제시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엘시 백작의 말대로 바우 성주가 선의로 그 문을 열어 줄지도 모르니까요.”

데라시의 말에는 대화를 끝내자는 분위기가 담겨 있었다. 정우 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데라시는 회담 종결을 선언 하는 대신 다른 요청을 했다.

“규리하 공, 혹 황궁 미술실을 구경할 생각이 있으십니까?” 정우는 데라시를 바라보다가 엘시를 돌아보았다.

“대장군님과 나눌 말씀이 있으세요?”

“예. 제가 이 방에서 나가는 것이 지나치게 번거롭다 보니 무 례한 부탁을 할 수밖에 없군요.”

“아뇨. 괜찮아요. 그 미술실이라는 곳에 가 보죠. 그림을 못 보 시는 폐하께 미술실이 있다는 게 굉장히 재미있게 느껴지네요.” 

“나가의 시각에 대해 알고 계시는군요. 하긴 나가 잡는 것은 도깨비라는 속언이 있지요. 예, 폐하께선 회화를 즐기지 않으십 니다. 하지만 조각품들이 있습니다.”

“아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데라시는 시종을 불러 정우를 안내하게 했다. 방문까지 정우를 배웅한 데라시는 다시 엘시 앞으로 돌아왔다. 엘시는 고개를 숙 인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의자에 앉은 데라시는 잠시 그런 엘시를 바라보았다.

탁자를 향하고 있는 엘시의 눈엔 쓸쓸함이 가득했다. 데라시는 그 모습에 동정심을 느꼈다.

<엘시, 당신은 참 바보입니다.>

인간인 엘시는 들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데라시는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내용을 마음껏 닐렀다.

<당신은 무향(鄕) 규리하를 거꾸러뜨렸습니다. 폐하를 기쁘 게 해서 대사면령을 유도하기 위해. 당신은 반역자의 딸을 규리 하의 지배자로 만들고 싶어합니다. 그렇게 될 경우 실수로 반역 자를 도운 다른 여자 또한 용서받는 것이 공평하니까. 고달픈 사 람. 당신은 떡이 먹고 싶어지면 농업을 번창시킬 사람입니다. 농 민들은 즐거워하겠지요. 하지만 당신은 떡을 먹지 못할 수도 있 습니다.>

“옳은 이야기입니다.”

다른 성인 나가들과 마찬가지로 스물두 살 되던 해에 심장을 적출했기에, 데라시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느끼지는 않 았다. 하지만 심장이 있는 자들이 느끼는 기분과 거의 똑같은 기분을 느꼈다.

“예?”

엘시는 고개를 들어 데라시를 바라보았다. 데라시는 공포 속에 서 엘시의 말을 기다렸다.

“옳은 이야기일 거라 믿습니다, 비스그라쥬 백. 하지만 니르셨기에 아쉽게도 나는 듣지 못했습니다.”

“아, 미안합니다. 엘시, 말로 해야 할 것을 실수로 니르고 말 았군요. 그런데 들리지 않았다면 당신은 내가 닐렀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당신은 시간 낭비를 좋아하지 않으니 무슨 말이든 했을 텐데, 그게 내 귀에 들리지 않았다면 니름일 수밖에 없습니다. 번거롭 겠지만 당신의 고견을 말로 다시 들려주길 바랍니다.”

“고견이랄 것은 없습니다. 엘시. 사실 말하기 어려운 것이라 저도 모르게 닐렀습니다. 금군 즈라더가 사망했습니다.”

엘시는 충격을 받았다.

“즈라더가요?”

“예. 보고된 정황을 보니 예상대로 일대일로 붙었나 봅니다. 제발 그러지 말라고 부탁했습니다만 지금 생각해 보니 부탁이 부 족하지 않았나 후회스럽군요. 즈라더는 제가 그의 용맹을 못 미 더워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싸움이라는 것은 불확 실한 것이잖습니까.”

“레콘은 그렇기에 싸울 이유가 있다고 말할 겁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저는 지고 돌아오는 것 은 백번이라도 용서하지만 이기고 죽어 버리는 것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하셨던 대호왕 폐하의 말씀이 떠오르는군요. 쉽게 하 는 말로 최선을 다한 사람은 모두 승리자라지요. 즈라더는 당연 히 최선을 다했을 겁니다. 그는 승리자입니다. 하지만 죽은 승리 자입니다.”

엘시는 거부감을 느끼며 몸을 약간 뒤로 젖혔다.

“비스그라쥬 백, 나는 아까운 이의 죽음 앞에서 희언을 나누고 싶지 않습니다. 즈라더가 승리자였는지 패배자였는지를 그토록 성급하게 규정하고 싶다면, 그런 것을 참아 주는 사람을 찾아가 십시오. 내게는 바르지 못한 일로 여겨집니다.”

데라시는 두 손을 조금 펼쳐 보였다.

“엘시, 나는 왜 당신들이 죽은 자들을 다루기 까다로운 인물처 럼 대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불쾌하다면 그만두도 록 하겠습니다. 실용적인 이야기를 하지요.”

“좋습니다.”

“즈라더의 순직에 대해 제국 정부는 정당한 예우를 갖출 것입 니다. 물론 레콘이라서 유가족이 없다는 점이 문제이긴 합니다만 율형부에서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아내겠지요. 아마도 충무나 충 장의 시호가 증시될 것 같습니다. 백작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그 살해자를 체포하는 문제입니다. 이미 하늘누리를 침입하기까 지한 그 극악무도한 자가 이제 제국 공신을 살해했습니다. 마땅 히 잡아들여 주살해야 할 것입니다.”

엘시는 눈끝을 약간 찌푸렸다.

“지멘의 체포를 군에 정식으로 요청하는 겁니까?”

“아니요. 그럴 수는 없지요. 한 명의 레콘을 붙잡기 위해 제국 군이 움직인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리고 현실적인 문제도 있습니다. 그 영리한 자는 걸핏하면 봉신들의 영토로 달아납니 다. 즈라더는 금군이기에 추적에 나설 수 있었지만 제국군은 그 땅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당신에게 부탁하는 겁니다. 엘시. 지멘을 잡기 위해서는 역시 레콘이 아니면 안 됩니다. 조금 전 레콘들을 많이 알던 라수 규리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당신도 레콘들 사이에서 많은 인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다지 많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폐하의 조신들 중엔 당신을 따를 자가 없지요. 제국군 에서 예편한 레콘들 중 많은 이들이 아직 당신과 친교를 나누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들 중 추적대를 조직할 만한 사람들이 없습니까?”

엘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대답하긴 어렵군요. 당신 도 짐작하겠지만 그들은 숙원에 도전 중이거나 신부 탐색 중입니 다. 그리고 그 일은 레콘에게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들이 제 국군에 입대했던 것도 그 일에 필요한 기술을 익히고 자금을 얻 기 위해서지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일단 알아보기는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수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두 번째 이야기를 하지요. 조금 전 거론된 비셀스 규리하의 결혼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것은 비셀스 규리하 자신이 결정할 문제이지 내 생각은 중 요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의견을 말해 줄 순 있겠지요.”

엘시는 잠깐 침묵했다가 말했다.

“나는 찬성합니다. 굴도하 남작 부인이나 세퀴라도의 지테를 당주는 이번 전쟁에서 침묵을 지켰지만 끝까지 침묵하진 않을 겁 니다. 그들 모두를 잠잠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비셀스가 변경백위를 계승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결혼을 통해 남편에게 이양하는 것도 괜찮은 차선책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외의 경우라면 분란의 소지가 많습니다.”

“굴도하 남작 부인과 지테를 당주에 대해서는 크게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데라시의 말에서 자신감을 읽은 엘시는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비스그라쥬 백, 당신은 과거에도 그렇게 말했지요. 이제 전쟁 이 끝났으니 말해 주십시오. 아이저 규리하의 여동생과 장인이 끝까지 침묵한 이유가 뭡니까?”

“이젠 말해도 되겠지요. 그들 각자는 거부하기 힘든 제안을 받 았습니다. 굴도하 남작 부인이 꿈에도 원하는 것은 강병의 육성 이지요. 이 전쟁에서 한 발 물러나 있는 대신 남작 부인은 예비 역 수교위 열 명을 지원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신분을 감춘 채 남작에게 고용되어 1년 동안 교관으로 복무할 겁니다.”

“지테를 당주는?”

“자유무역당은 연초를 취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엘시는 이해했다.

“아이저 규리하의 팔다리를 잘라 놓고 전쟁을 시작한 셈이군요.”

“그렇다 해도 당신의 전과는 대단한 것입니다,엘시,당신이 이렇게 빨리 전쟁을 끝냈으니 설령 그들을 내버려뒀다 해도 아이 저를 배후 지원할 시간은 없었을 겁니다. 나는 오히려 그런 배려 를 조금 후회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호의를 얻어 두었으니 만족해야겠지요.”

“알겠습니다. 그들이 규리하에 참견하지 않기로 했다면 비셀스 규리하가 결혼해야 하는 이유는 많이 줄어드는군요.”

“하지만 두 사람 이외에도 규리하 가문과 직간접적으로 연관 있는 사람은 많지요. 워낙 유서 깊은 가문이니까요. 예를 들어 살 인 기사棋士)같은 이의 흉중이 어떤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예상외의 이름에 엘시는 고개를 갸웃했다.

“제이어 솔한 말입니까?”

“예, 그 사람 말입니다. 제이어가 철저한 야인으로 행세하고 있지만, 저는 즈믄누리에서 유혈 사태가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전 해 들으면 정황을 듣기도 전에 제이어가 그곳에 체재 중이라고 단정해 버릴 겁니다.”

엘시는 제이어 솔한에 대한 데라시의 우려를 이해할 수 없었 다. 그래서 솔직하게 감상을 말했다.

“그가 벼락을 끌어내리는 능력이 대단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 하겠지만 벼락의 빛으로는 책 한 줄도 읽을 수 없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파괴적이지만 순간적입니다. 제이어는 그 무엇에도 한 달 이상 집중할 수 없는 성격입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 니다.”

“동감입니다. 저도 제이어가 한 달쯤 폭음을 일삼으며 아이저 규리하의 몰락에 바치는 장시라도 쓸 거라는, 그러다가 실수로 우리 시대의 명작을 내놓을지도 모른다는 쪽이 훨씬 있음 직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작은 위험도 감수하고 싶지 않습니 다. 따라서 일족의 최우선 계승권자인 비셀스가 결혼하여 남편에 게 변경백위를 이양하는 것은 여전히 매력적인 제안입니다. 당신 이 그 계획에 찬성한다면, 부탁 한 가지 하고 싶습니다.”

“무슨 부탁입니까?”

“눈치 챘겠지만 나는 나가입니다.”

엘시는 미소 비슷한 것도 짓지 않았다. 기대하지 않았기에 데라시는 실망하지 않았다. 

“많이 노력하고 있지만 난 여전히 당신들의 결혼이라는 것에 대해 머리로만 알 뿐입니다. 그러니 비셀스의 혼례를 주관하는 일은 아무래도 인간이 맡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겠군요.”

“예.”

“내가?”

“그렇습니다.”

“역시 잘 모르는군요. 그런 일은 연만하시고 경험도 많으신 분 이 맡는 편이 좋습니다. 귀족원의 원로들이나 규리하 가문의 어 른들에게 맡기십시오. 그것이 어렵다면 바우 성주가 할 수도 있 겠지요. 하지만 나는 안 됩니다.”

“당신이 거론한 사람들 중 광대한 규리하의 지배권이 걸린 일 에 휘둘리지 않고 소신 있게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문 형편입니다. 엘시. 나는 혼례 주관자가 자신의 친족들을 우선적 으로 신랑 후보에 올리거나 경쟁자의 아들들을 우선적으로 제외 시키는 추태를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바우 성주는? 도깨비와 인간의 혼례식은 비슷합니다. 그리고 바우 성주가 고른 신랑감이라면 비셀스도 쉽게 받아들일 겁니다.”

데라시는 두 손을 펼쳐 보였다.

“엘시, 그 경우 비셀스를 만족시킬 수는 있겠지만 신랑 측을 만족시킬 수는 없을 겁니다. 이 결혼은 쉽지 않은 결혼입니다. 친 규리하 세력과 서약 지지파 측으로부터 미움을 살 수도 있는 신랑 측에서는 당연히 안전 보장이 필요할 겁니다. 황제의 대장군이 혼례를 주관한다면 그보다 더 큰 보증은 없습니다.”

엘시는 데라시의 말을 이해했다.

“알겠습니다. 그녀가 결혼하기로 결정한다면 내가 그것을 주관하겠습니다.”

데라시는 만족감 속에서 짧은 유혹을 느꼈다. 그는 엘시에게 라수의 방에 출입하는 방법까지 알아내라고 하면 어떨까 하고 생 각했다. 하지만 데라시는 곧 그런 유혹을 억눌렀다. 세 번째 용 건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도저히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없지 만 달갑게 수행할 수 없는 용건이.

“그럼 마지막 용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엘시. 당신의 대사면 요청 말인데, 불가능합니다.”

나가는 네 선민 종족 중 가장 독특한 시각을 가지고 있다. 물 론 네 종족은 모두 개성적인 방식으로 세상을 본다. 하지만 나가 는 독자적인 세계관에 덧붙여 실제적인 시각차도 가지고 있다. 나가들은 사물의 뜨겁고 차가움을 본다.

그것은 때론 불편하고 때론 유리한데, 치천제의 미술실을 보면 알 수 있듯 회화를 즐기기 어렵다는 것은 불편함에 해당한다. 하 지만 나가들이 상대방의, 특히 나가가 아닌 종족들의 감정 변화 를 독특한 방식으로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은 유리함에 속한다 할 것이다.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것에 능한 이들도 감정의 변화 에 따른 체열 변화까지 조절할 수는 없기에 인간이나 레콘, 도깨 비에게 충분히 익숙한 나가는 상대방이 무표정한 것인지 무표정 을 가장하는 것인지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도 데라시는 엘시에게서 아무런 변화도 느낄 수 없었다.

데라시는 엘시가 이미 예상하고 있었기에 심적 충격을 느끼지 않 은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그가 인간에게 익숙한 것만큼 엘시 또 한 열을 보는 나가에게 익숙해서 자신을 잘 감추는 것인지 판단 할 수 없었다. 데라시는 니를 수 없는 상대에 대한 아쉬움 속에서 말했다.

“큰 승리의 영광을 많은 이와 나누고 싶은 당신의 뜻은 저도 존중합니다만 아무래도 여건이 좋지 않습니다.”

엘시는 무표정한 얼굴만큼이나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지막 대사면이 있었던 것은 6년 전입니다. 지나치게 빠르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늦은 것은 아니지만 빠른 것도 아니지요. 시기적 으로 크게 무리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내용이 좋지 않습 니다. 6년 전 분리주의자들의 난과 규리하 정벌은 경우가 다릅니다. 대사면과 같은 행사는 오히려 당신이 거둔 승리의 효과를 반 감시킬 수 있습니다.”

“효과라고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원론적으로 따져 본다면 분리주의자들은 제국에 대항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 승리의 기쁨은 모든 제국민과 나눌 수 있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아이저 규리하는 황제 폐하께 대항 했습니다. 이 전쟁은 폐하의 위엄을 보이는 전쟁이었습니다. 그 런데 폐하의 위엄을 보인 직후에, 그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기도 전에 폐하의 자비를 보여 준다면 결국 위엄도 자비도 전달되지 않을 겁니다.”

엘시는 잠시 아무 말 없이 데라시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나는 폐하의 위엄과 자비를 폐하 아닌 누군가가 관리해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데라시는 몸을 뒤로 조금 젖혔다. 그는 무거운 눈길로 황제의 대장군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저를 싫어하시죠?”

엘시는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설명을 요청했다. 데라시는 방 어적으로 팔짱을 꼈다.

“아무런 지위도 없고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 주제에 모든 것에 머리를 내미는 황제의 첩이 황제의 대장군과 대등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이런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겠지요. 더군다나 그자가 감히 폐하를 관리하는 듯이 말한다면.”

엘시는 데라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같은 인간이라도 엘시 의 얼굴에서 어떤 의미가 담긴 표정을 읽어 내긴 어려웠을 것이다. 엘시는 차분하게 말했다.

“내 아버님께서는 지위란 칼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싸우는 이가 쥔 칼, 요리하는 이가 쥔 칼, 조각하는 이가 쥔 칼은 모두 쓰임이 다릅니다. 따라서 칼을 보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는 당신 이 폐하와 제국의 복리를 위해서만 행동하는 사람이며 또한 그럴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당신의 지위나 신분 같은 것은 내게 큰 의미가 없습니다.”

데라시는 정말이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엘시가 먼저 말했다. 

“또한 내가 당신을 싫어한다는 사실도 큰 의미는 없습니다.”

데라시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즐겁지 않게.

“저를 싫어하지만 그 때문에 제 쓸모를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말씀입니까?”

“내가 당신과의 대화에 두고 있는 확고한 진정성을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군요.”

“좋습니다. 저도 당신이 저를 멸시하건 말건 상관하지 않겠다 고 오래전에 결심했으니까요. 당신이 저를 대등한 대화 상대로 인정하고 있다니 오히려 기쁘군요. 그런데 폐하의 위엄이나 자비를 다른 사람이 관리하는 것을 거부하십니까?”

“내 말은 자비를 아끼기로 한 결정이 당신의 것인지 폐하의 것 인지 알고 싶다는 의미입니다.”

데라시는 대답했다.

“폐하의 뜻입니다.”

물론 엘시는 진짜냐고 묻는 바보짓은 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모처럼의 제안이신데, 서운하시겠군요. 아마 폐하께서는 당신 의 봉사를 다른 방식으로 치하하실 겁니다. 틀림없이 무향의 정복자에게 합당한 방식으로요.”

“나는 상을 바라서 폐하를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데라시가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절대로 오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기도 한 순간이었다. 자기 모순의 흔적을 조금도 드러 내지 않으며 데라시는 차분하게 말했다.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 주변에는 폐하의 은총이 필요 한 누군가가 있을 수도 있지요.”

데라시의 말을 듣자 엘시는 갈망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주 조금이지만 황제의 대장군 엘시는 더듬으며 말했다.

“그…………..럴 수도 있지요.불민한 나로 말미암아 폐하의 은총이 더 널리 퍼진다면 더할 나위 없는 광영일 겁니다.”

“물론이겠지요. 규리하 공이 많이 기다릴 테니 이만 이야기를 끝내도록 하지요.

엘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라시는 기대감 속에서 엘시가 걸 음을 멈추고 다시 말하길 기다렸지만 엘시는 그러지 않았다. 쉽게 기대감을 버리기 어려웠던 데라시는 문을 닫은 후에도 엘시가 돌 아와 문을 열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데라시는 빙긋 웃으며 따스한 난롯가로 다가갔다. 몸을 뜨겁게 하며 그는 엘시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비스그라쥬백 데라시는 자고 있을 때조차도 양심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만약 엘시가 부냐에 대한 이야기를 한마디라도 꺼냈다면 데라시는 기분이 좋진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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