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1권 : 황제 사냥꾼 [제2장] – 돌과 바람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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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마시는 새 1권 : 황제 사냥꾼 [제2장] – 돌과 바람 8


깊은 밤, 갈바마리 로를 따라 걷고 있는 두 남자가 있었다. 그 걷고 있는 모양새가 꽤 독특했다. 보폭이 채 한 뼘이 될까 말까 했고 발 디딤은 한없이 조심스러웠다. 쇠못을 잔뜩 뿌린 바닥을 걷는다면 비슷한 모습일 테지만 갈바마리 로에는 쇠못은커녕 보 행자들에게 긴장을 요구하는 가축의 배설물조차 없었다. 따라서 그 걸음걸이를 수상하게 여긴 유수부의 야경꾼들이 계속 접근하 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접근했던 야경꾼들은 더 큰 의문 만 가지고 물러났다. 그 묘한 걸음걸이의 주인공들은 자신들의 걸음걸이가 국정의 미묘한 운영에 의해 발생한 부득이한 결과라 고 설명했다. 야경꾼들은 도무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들 중 율형부의 수장과 산공부의 수장을 의심할 수 있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다섯 번째의 야경꾼들이 예를 표하고 물러나자 산공부사 파라말 아이솔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랑스럽게 말하기는 힘든 체험 때문에 의자에 앉기 힘들어진 두 형제는 그날의 남은 업무를 서서 처리했다. 그리고 그들의 책 상은 서서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집중력을 저하 시키는 그런 조건들에 시시때때로 머리끝을 쭈뼛하게 만드는 신 체 어느 곳의 불쾌한 감각까지 더해지자 그들의 귀가는 꽤 늦어 졌다.

다시 걸음을 떼려던 산공부사 파라말은 형이 움직이지 않는 것 을 깨달았다. 파라말은 묻는 표정으로 사라말을 바라보았다. 그 러자 사라말이 손을 들어 하늘 한 곳을 가리켰다.

달이 밝았고 밤하늘은 푸르렀다. 형이 가리킨 곳을 보니 딱정 벌레 한 마리가 하늘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몽화각의 도깨비들 중 한 명이 야간 비행에 나서는가 보다 생각한 파라말은 형을 다 시 쳐다보았다. 그러자 사라말은 딱정벌레의 움직임이 범상치 않 다는 것을 지적했다. 다시 딱정벌레를 돌아본 파라말은 그 상승 속도가 굉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율형부사와 산공부사가 몸의 고통도 잊은 채 난생처음 보는 딱 정벌레의 속도에 감탄하고 있을 때 그들의 발아래 수백 길을 내려 간 곳에서는 제국군 부위 틸러 달비가 성벽을 걷고 있었다.

틸러 달비 부위의 원래 임무는 가시나무 군단 3대대 1중대 2소 대를 지휘하는 것이었다. 제국군 편제에서 인간 보병을 기준으로 할 때 소대는 200명으로 구성되며, 그것은 4개 분대, 20개 반에 해당한다. 따라서 틸러 달비 소대장의 휘하엔 네 명의 수전사와 스무 명의 상전사가 있다. 이 인원은 교위급까지 올라갈 필요가 없는 사소한 업무들을 충분히 처리할 만한 인력이다. 따라서 다른 제국군의 부위들과 마찬가지로, 전투 상황에서 최일선의 돌격 대장인 틸러 달비는 비전투 상황에선 가용 시간이 많은 편이다. 물론 군대는 조직원들을 절대로 무위도식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노는 부위를 돌려라.’라는 은어로 표현되는 제국군의 전통 적인 불문율에 따라 틸러 달비는 원래 임무 이외의 다른 임무를 맡고 있었다. 틸러의 현재 임무는 스스로 체포한 중요 포로인 비 셀스 규리하를 보좌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규리하 성이 상냥한 달빛과 부드러운 고요 속에 잠든 시각, 틸러는 제국군의 또 다른 불문율인 ‘열심히 도는 놈이 바 보’에 따라 농땡이를 부리기로 결정했다. 물론 틸러는 누군가에 게 들려줄 일이 없길 바라는 이유 하나쯤은 가지고 있었다. 틸러 의 소대는 그날 밤 성벽의 경계 근무를 서고 있었다. 틸러는 소 대장으로서 소대의 근무 태도를 점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말로 하면 야식거리 징발이 아니냐는 지적이 틸러를 많이 당황하 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도 올 리 없는 성벽 위에서 한가롭게 야참을 먹으려 했던 하전사들에겐 봉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먹고 돌아서면 배가 고파지는 병사들의 생리를 잘 알고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성벽 위에 서 있어야 하는 고충도 짐작하기에 틸러는 일부러 수색을 대충 했다. 하전사들이 자신을 욕하며 씹을 것을 남겨 두기 위해 서였다. 그런데도 틸러는 성벽을 반도 돌지 않은 시점에 상당량 의 군것질거리를 획득했다. 틸러는 걸음을 멈추고 즐거운 마음으 로 그것들을 먹기 시작했다.

구운 옥수수를 입 안 가득히 집어넣고 우물거리던 틸러는 묘한 소리를 들었다.

그는 씹던 동작을 멈추고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조금 후 그 소 리가 누군가가 시험 삼아 부는 대금 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기 묘한 일이었다. 제국군은 취침 시간에 소음을 내도록 허락하지 않 는다. 소리가 들려오던 곳을 가늠하던 틸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다음 순간 틸러는 계단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갔다. 소리가 들 려온 곳은 정우의 방이었다. 그리고 틸러가 알기로 정우에겐 분 명히 대금이 없었다.

틸러 달비가 제국군 정규 훈련 과정에 없는 ‘옥수수알 뿜으며 달리기’ 라는 기술을 연마하던 시각, 정우는 입에서 대금을 떼어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시험 삼아 불어 본 대금의 음색은 훌륭했다. 사실인즉 잠이 오 지 않았던 정우는 마음을 달랠 만한 물건이 있나 찾아보려고 라 수의 방으로 갔고, 그곳에서 유래를 알 수 없는 대금 한 자루를 발견했다. 좋은 악기였지만 보물이라고 할 만한 물건 같지는 않 았기에 정우는 선조들 중 누군가가 쓰던 악기일 거라 짐작했다. 정우의 손은 대금 연주에 유리할 만큼 크지 않았지만 손가락들 은 대단히 유연했다. 체구가 훨씬 큰 도깨비들의 도구에 적응했 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이 어렵잖게 그 대금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았던 탓인지 갈대청의 성능이 좋지 않았다. 제대로 쓰려면 청을 갈아 줘야 할 것 같았 다. 청가리개를 이리저리 움직여 보던 정우는 달빛이 새어 들어 오는 창문으로 다가갔다.

창문은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이 안심할 만큼 좁았지만 세로 방 향으로는 충분히 길었다. 창문을 열고 얼굴을 바짝 붙이면 바깥 의 풍경을 상당히 넓게 볼 수 있었다. 정우는 푸른 달빛이 쏟아지는 규리하 성과 성벽을 바라보았다.

희푸른 달빛 속에 성벽은 커다란 얼음덩이처럼 보였다. 성벽 너머에 산재한 농토들은 전쟁 때문에 관리가 되지 않아 황무지로 바뀌고 있었다. 새파란 달빛 아래 황무지는 아름다워 보였지만 정우는 규리하령의 주민들에게 이번 겨울이 꽤 가혹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들을 보살펴 줄 아버지가 도주해 버린 지금 누가 그 들을 보살필 것인지 궁금해하던 그녀는 아마도 엘시 대장군과 제 국군이 그 일을 맡으리라고 추측했다.

그리고 정우는 흠칫 놀랐다. 자기도 모르게 그녀는 규리하를 다스릴 책임이 있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책임이라는 단어는 정우를 혼란스럽게 했다. 그녀는 자신이 이 전쟁에 대해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가 아는 것은 황제가 거부한 충성서약을 그녀의 아버지인 아이저 규리하가 고집스럽게 지지했다는 사실, 그 때문에 황제와 아이저 규리하의 사이가 전쟁을 통해 견해차를 조절해야 할 정도로 악화 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황제 측의 견해를 대변하기 위해 규리하 로 온 대장군 엘시 에더리 백작이 무향이라고까지 불리는 이 땅 의 견해를 간단히 묵살해 버렸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실들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정우는 아 이저 규리하의 장녀가 이토록이나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에 놀랐 다. 자신이 모르는 일에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정우는 아이저 규리하의 장녀에게 규리하령의 사정이 몰 라도 되는 일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정우는 손에 쥔 대금이 그런 혼란을 야기하고 있음을 서서히 인지했다.

그녀의 선조 중 한 명이며 그녀와 마찬가지로 과텔 규리하와 케나린 규리하의 후예였을 누군가가 썼을 대금, 정우는 케나린에 대해 생각했다. 물론 자신과 케나린을 동일시하기 힘들었다. 케 나린은 태어나자마자 이 땅을 떠나 도깨비들 사이에서 자라지 않 았다. 하지만 케나린 규리하 또한 아버지가 없는 상태에서 결혼 에 직면했다. 케나린의 선택은 아버지의 심복 중 한 명과 결혼하 여 직접 이 땅을 다스리는 것이었다.

심회가 번잡했다. 정우는 대금을 움켜쥐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정우는 하늘누리의 율형부사와 산공부사를 감탄케 했 던 것을 보았다.

딱정벌레는 세차게 움직이는 속날개와 반들거리는 외피로 달 빛을 조각내어 흩뿌리고 있었다.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정우는 그것이 번뜩이임을 확신했다. 기수까지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정우의 편지를 가진 탈해가 그 위에 타고 있으리라는 것은 분명 했다.

정우는 뜨거운 그리움을 느꼈다. 소리쳐 부르고 싶었지만 그런 충동을 억눌렀다. 계명성을 내뿜는 레콘이라 하더라도 저 고도에 서 딱정벌레 날갯소리에 감싸인 기수를 불러 내리는 일은 만만치 않을 것이다. 애틋하고 서럽기까지 한 감정 속에서 정우는 번뜩 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볼 수 없을 테지만 그녀는 손을 흔들 어야 했다.

그러나 번뜩이는 곧장 즈믄누리로 날아가지 않았다. 번뜩이가 크게 선회하는 것을 본 정우는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나 곧 그녀 는 탈해의 마음을 깨달았다. 탈해 또한 정우를 볼 수 없다. 하지만 탈해는 정우가 있는 규리하 성의 상공을 한 바퀴 돌지 않고서는 떠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정우가 볼 수 없는 탈해에게 손을 흔든 것처럼.

정우는 기쁨의 신음을 흘렸다. 탈해가 그녀를 잊을 리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런데도 정우는 그런 행동이 고마웠다. 북받치는 고마움과 그리움 속에서 그녀는 대금을 들어 올렸다. 서로 볼 수 없어도 보여 줄 수 있다면 들을 수 없어도 들려줄 수 있다. 정우는 탈해가 잘 있으라는 안부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 화답을 보내야 했다. 정우는 취구에 입술을 대고 잠시 호흡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입김을 불어넣었다. 입김에 자극받은 갈대청이 몸을 떨었다.

고대를 꿈꾸는 규리하의 돌들 위로 대금의 징철한 소리가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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