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1권 : 황제 사냥꾼 [제3장] – 기적을 감상하는 태도 3
시구리아트 산맥을 향해 동으로 달리던 지러쿼터 산맥이 기력 을 잃고 대지의 등뼈에 대한 집념처럼 던져둔 조그마한 산들. 토박이들에게만 의미가 있는 이름이 붙어 있을 터였지만, 그중 한 산의 등성이에 선 레콘은 자신이 딛고 선 산의 이름을 궁금해 하지 않았다. 레콘의 기준으로는 산이라 부르기 어려운 수준이었 다. 따라서 지멘이 걸음을 멈춘 것은 자신의 진로에 산이 끼치는 영향을 고려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지멘은 그보다 더 멀리 있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지멘이 몸을 돌렸고, 그래서 그의 등 뒤에 있던 아실은 지멘이 보고 있던 것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넓은 강이 산 아래의 평지를 가로질러 조용히 흘렀다. 강 저편 은 발케네지만, 당장은 닿을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강폭을 가늠 해본 아실은 지멘이 뛰어넘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아실 은 왜 이런 길로 왔는지 지멘에게 묻지 않았다. 이 근방의 지리 를 아는 지멘이 아무 생각 없이 오진 않았을 테니까.
지멘은 지금까지 걷던 길 비슷한 지형을 벗어났다.
그가 택한 것은 옆 산으로 이어지는 산마룻길이었다. 주위를 살피며 산마루를 따라 걷던 지멘은 곧 계곡 하나를 택해 그 안으 로 접어들었다. 의외로 깊은 계곡 내에는 나무들이 가득했다. 지 멘은 밀생한 자작나무들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훤칠한 자작나무는 지멘의 머리보다 훨씬 높은 곳에서 가지를 퍼뜨리고 있었다. 숲 아래를 뒤덮은 관목들도 와삭거리는 기분 좋 은 소리를 낼 뿐 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주렴처럼 늘어선 자작나 무들의 보얀 목피에서 흘러나온 흰 빛이 숲 가득히 는지럭댄다. 고요함이 맵싸하게 자리한 숲을 둘러보던 아실은 물소리를 들 었다.
아실은 놀랐다. 지멘은 그 물소리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 것은 보편적인 레콘의 행동이 아니다. 물보다 무거워서 수영이라 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한 몸을 가진 이 최강 종족은 날카로운 검 이나 예리한 창, 흉포한 악의보다 물을 더 두려워한다. 결코 반 추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지만 아실은 물에 빠진 레콘을 본적 이 있었다. 쇳덩이처럼 그저 물 아래로 끝없이 가라앉는 모습은 레콘이 아닌 그녀에게도 소름 끼치도록 무서운 광경이었다.
물소리가 본격적으로 커지자 아실은 손을 뻗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지멘의 벼슬을 꼬집으며 말했다.
“지멘, 저 소리 안 들려요?”
지멘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잠깐 멈춰 섰다가 다시 걸어갔 다. 아실은 그 몸짓을 지멘이 제정신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호기심이 동한 아실은 배낭 끈을 붙잡았다.
등반과 비슷한 일이 지멘의 등 뒤에서 벌어졌다. 아실은 지멘 의 어깨 위로 자신의 몸을 끌어올렸다. 지멘은 목과 얼굴 옆 부 분의 깃털들이 차례로 당겨지는 것을 느꼈지만 옆을 훔쳐보지는 않았다. 지멘의 어깨에 엉덩이를 얹고 왼손으로는 배낭 끈을, 오 른손으로는 지멘의 깃털을 붙잡은 아실은 그 불안한 자세로 전방 을 바라보았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자작나무들 때문에 아직 시계는 짧았다. 하지만 지형을 살피고 세찬 물소리를 들어 본 아실은 상황을 짐 작할 수 있었다. 지멘은 평야에 있던 강의 상류 지점으로 다가가 고 있는 것이다. 물론 상류 지점은 물 위에서 도약력이 형편없어 지는 레콘도 뛰어넘을 수 있는 너비일 것이다. 아실이 배낭 속으 로 다시 들어가려 했을 때 그 강물이 나타났다.
그리고 아실은 배낭 속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 렸다.
황제 사냥꾼 지멘이 제국 일등공신이자 금군인 즈라더를 살해 했다는 소식과 함께 발케네 이남 지역의 제국군 전체에 경계령이 내려졌을 때, 그 의미를 지멘에게 애먼 제국병을 잃거나 기습당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경고로 받아들인 지휘관들과 달리, 니어엘 헨로 수교위는 지멘을 붙잡으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고지식하거나 만용을 즐기는 성벽 때문은 아니다. 그 결정을 내 렸을 때 니어엘은 잠을 자기로 결정하는 것만큼의 결단력도 필요 없었다. 니어엘에겐 이유도 있고 자신도 있었다. 따라서 뭄토의 협조는 니어엘에게 곤란한 상황을 해결할 타개책이 아니라 말 그 대로 협조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는 술이 깬 상태에서 세찬 강물 속에 다리를 담근 채 활을 들어 올리며 니어엘은 무척이나 담담 했다.
니어엘은 강의 중심부에 서 있었지만 강물의 깊이는 고작 그녀 의 무릎 위를 적실 정도였다. 상류라서 물이 세찼지만 니어엘이 중심을 잡기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빈 활을 몇 번 퉁겨 본 니어 엘은 활을 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활을 내리 고 오른손 엄지에 낀 깍지를 만지작거리며 흰 자작나무 사이에 서 있는 검은 레콘을 바라보았다.
지멘은 잠깐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갈과 바위가 깔린 강변에 도, 그 너머 두껍게 자리한 숲에서도 시선을 끄는 것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주위에 병사들이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지멘은 그들 중에 레콘이 섞여 있을지 궁금했다. 하지만 레콘 부하가 있다면 굳이 그들이 활약하기 힘든 강변으로 끌고 오진 않았을 것이다.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었기에 지멘은 일단 부딪혀 보기로 했다. 지멘은 어깨를 꿈틀했다. 신호를 알아차린 아실이 다시 배낭 속으 로 몸을 숨겼다. 작은 동반자가 배낭 속에 자리한 것을 느낀 지멘 은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자갈이 깔린 강변으로 내려섰다.
거대한 레콘의 발아래 자갈들이 신음했다.
검은 산사태처럼 거침없이 내려서는 지멘을 보며 니어엘은 감명을 느꼈다. 하지만 니어엘은 그 산사태가 강물에서 20미터쯤 떨어진 거리에 멈춰 설 것이라 예상했다. 지멘은 그녀가 예상한 지점에 멈춰 섰다. 니어엘은 곧 입을 열었다.
“저는 제국군 수교위 니어엘 헨로입니다. 당신은 지멘입니까?”
질문이 아니라 확인을 요구하는 말투였다. 지멘은 확인해 주었다.
“그렇다.”
니어엘은 하늘을 잠깐 올려다보았다. 강물 위의 하늘은 넓게 열려 있었고 파랗게 반짝였다. 자작나무의 잎사귀들이 비비적거 리는 소리가 졸졸거리는 물소리와 어우러졌다. 니어엘은 산마루 에 걸린 하얀 구름을 보며 말했다.
“폐하께서 제게 주신 권한에 의하여 살인, 강도, 방화 등의 죄 목으로 당신을 체포하겠습니다. 무기를 내려놓고 체포에 응하십시오.”
지멘은 자신의 죄목들 중 하나에 의문을 느꼈다.
“방화는 무슨 말이지?”
“메헴 태수관에 불을 지른 것을 말합니다. 자보로 사람들은 정말 좋아했다지만, 그래도 그건 범죄지요.”
“그건 내가 떠난 후 메헴 태수가 놓은 불이다. 비밀 창고가 있었다는 증거를 없애기 위해서지.”
니어엘은 눈을 내려 지멘을 쳐다보았다.
“그렇습니까? 물론 당신은 폐하의 법정에서 그렇게 주장할 수 있습니다.”
“내가 여기로 올 것을 알고 있었나?”
“이 근방을 지나는 레콘들 중 많은 이들이 여기서 도강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준비하고 왔다는 것인데, 무슨 준비가 되어 있는지 말해 봐.”
니어엘은 허리로 손을 뻗었다.
그곳에는 보통의 전통보다 훨씬 짧은 전통과 긴 대롱 같은 것 이 꽂혀 있었다. 니어엘은 대롱 끝에 달린 고리에 오른쪽 손목을 끼워 잡아당겼다. 그러자 대롱은 니어엘의 팔목에 매달려 대롱거 렸다. 대롱은 완전한 원통이 아니라 한쪽이 열린 반원통이었다. 지멘은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았고 그 순간 짧은 전통이 무엇인지 도 이해했다.
오묘한 궁술의 세계에서도 가장 경이적인 기술 중 하나를 접하 게 되었음을 안 지멘은 벼슬을 약간 곤두세웠다.
지멘의 예상대로 니어엘이 꺼낸 것은 인간의 손으로도 채 두 뼘이 되지 않을 짧은 화살이었다. 니어엘은 그 짧은 화살을 보통 화살처럼 활에 먹였다. 그대로 시위를 당긴다면 짧은 화살은 활 몸에서 벗어날 것이다. 하지만 니어엘은 시위를 당기는 대신 오 른쪽 손목에 걸고 있던 대롱을 짧은 화살에 씌웠다. 그런 후에야 그녀는 시위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활몸을 벗어나 얼굴을 때려야 할 화살은 대롱의 품에 안긴 채 고정되었다. 지멘은 희미한 미소 를 지으며 무릎을 조금 굽혔다.
니어엘이 시위를 놓은 순간 지멘은 몸을 세차게 뒤틀었다. 굉음이 숲을 뒤흔들었다.
상체를 뒤로 젖혀 쓰러질 것 같은 자세로 선 지멘은 뒤쪽을 바 라보았다. 자작나무에 깊숙이 박힌 짧은 화살이 깃을 흔들고 있 었다. 지멘은 고개를 당겨 가슴을 내려다보았고 선혈에 젖어 있는 깃털을 발견하곤 더 큰 미소를 지었다. 지멘의 부리가 니어엘을 향하여 다시 움직였다.
“아기살이라도 피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긁혔는걸.”
활개를 좍 펼치고 있던 니어엘 또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활을 내리고 말했다.
“보였습니까?”
“몇 번 더 보면 볼 수 있을 것 같지만, 이번엔 못 봤어.”
“못 봤다면 어떻게 피했죠?”
“감이지.”
“그렇게 말하는 레콘이 솔직히 부러울 때가 있죠.”
“한 번 더 쏴 봐.”
니어엘은 그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니어엘은 대롱을 손목 에서 풀어 다시 허리춤에 끼워 넣었다. 지멘은 기억을 더듬어 그 대롱의 이름을 떠올렸다.
“덧살을 왜 집어넣는 거야?”
“제 비장의 기술이니까요. 당신에게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지 는 확인했으니 더 쏴서 당신이 아기살에 익숙해지게 하고 싶진 않습니다.”
지멘은 아쉬움을 느꼈다. 화살을 감싸는 긴 덧살을 이용하여 활몸에 걸리지도 않는 짧은 아기살을 날려 보내는 전설적인 기술 은 지멘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인상적이었다. 같은 힘으로 발사 되지만 화살의 무게가 반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속도가 훨씬 빨 랐고, 그 속도에 길이까지 짧아 도저히 볼 수가 없었다. 깊은 인 상을 받은 지멘은 니어엘의 다음 시도를 기대감 속에서 기다렸다. 니어엘은 활을 어깨에 걸며 말했다.
“대신 이걸 보여 드리죠.”
그리고 니어엘은 허리를 숙여 강물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녀가 다시 허리를 폈을 때 지멘의 몸은 세 배로 부풀었다. 아기살의 위협에도 맨몸으로 맞섰지만, 지멘은 니어엘이 똑바 로 선 순간 본능적으로 즈라더의 도끼를 잡아당겨 자신의 가슴을 가렸다. 니어엘은 그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지멘은 그 웃음을 보지 않았다. 대신 눈이 튀어나올 듯 긴장하여 그 녀의 손을 바라보았다. 니어엘은 손을 앞뒤로 천천히 흔들었다. 진폭을 서서히 증가시키며 팔을 흔들던 니어엘은 어느 순간 팔을 힘껏 잡아당겼다. 그녀의 팔이 완전히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니어엘의 손에 쥐어진 물통 또한 한 바퀴 돌았다. 원심력에 관한 실험이라도 하듯 니어엘은 경쾌하게 물통을 회 전시켰다. 같은 일을 시도하는 사내아이는 그 행동에 아무 의미 가 없는데도 자주 황홀경에 빠진다. 니어엘도 그런 것 같았다. 점점 커지는 웃음을 얼굴에서 뚝뚝 흘리며 니어엘은 물통을 세차 게 회전시켰다. 그 회전을 보며 지멘은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자신의 내면을 향해서는 그것이 철퇴도 아니고 공성도 아닌, 그저 어느 집 부엌에서나 볼 수 있는 나무통일 뿐이라고 외쳤다. 그것이 날아와 부딪힌다 해도 큰 해가 되진 않는다. 빳빳하게 일 어선 그의 깃털이 충분한 완충 작용을 해 줄 테고 레콘이 같은 부피의 물보다 더 무거운 몸을 가지게 되는 이유인 튼튼한 뼈대 는 그 정도의 충격을 아무렇지도 않게 버텨 낼 것이다. 그저 깃 털들이 조금 젖을 뿐인…………….
니어엘이 물통을 놓은 순간 지멘의 모습이 사라졌다.
맹렬하게 날아오르는 자갈들 위를 통과한 물통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자작나무에 부딪혔다. 물이 사방으로 튀었고 물통은 한 쪽이 부서진 채 바닥에 떨어져 다시 튕겼다. 니어엘은 고개를 왼 쪽으로 돌렸다. 바닥에 자갈 팬 자국을 따라가니 원래 위치에서 5미터는 떨어진 곳에서 지멘이 벼슬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서 있 었다.
니어엘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을 뿐 지멘을 조롱하지는 않았 다. 통제할 수 없는 심리적 거부감 때문에 어떤 이를 비난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니어엘은 지멘을 이해했다. 그리고 그런 이 해 속에서 다시 허리를 숙였다. 그녀의 손이 강물 속에서 또 하 나의 물통을 꺼냈다.
지멘은 신음을 흘리며 허리를 숙였다. 계속된 급격한 이동 때 문에 정신이 없었던 아실은 하마터면 배낭 밖으로 튕겨 나올 뻔 했다. 다행히 지멘이 재빨리 허리를 폈기 때문에 아실은 그런 낭 패를 겪지 않았다. 니어엘의 머리통만 한 돌멩이를 주워 든 지멘 은 팔을 뒤로 힘껏 끌어당겼다. 꼿꼿이 세운 벼슬 아래에서 지멘 의 눈이 사납게 빛났다.
“하지 마.”
니어엘은 지멘의 손에 쥐어진 돌멩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것이 지멘의 힘으로 던져진다면 니어엘의 몸을 부수고 말 것이 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어느새 회전하고 있었다. 지멘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회전하는 물통을 바라보았다. 지멘이 다시 경고의 말을 하려 할 때 니어엘이 말했다.
“싫어.”
니어엘의 손이 물통을 놓았다.
절망적인 신음과 함께 지멘은 옆으로 몸을 날려 물통을 피했다. 그리고 돌을 집어던졌다. 어차피 물속에서 몸을 빠르게 놀릴 수도 없었지만, 니어엘은 날아오는 돌을 피하려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돌은 어이없을 정도로 높이 날아갔다.
니어엘의 머리보다 한참 높은 곳을 지난 돌은 강 건너편의 숲 으로 날아들었다. 관목 부서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지멘 은 격분하여 벼슬을 꿈틀거렸다. 고개를 돌려 그 모습을 본 니어 엘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다시 허리를 구부리며 말했다.
“물이 튈까 봐 겁나지?”
벼슬 찢어지는 지적이었다. 니어엘의 손이 세 번째 물통을 꺼 냈지만 지멘은 두 번째 돌을 집어 들지 않았다. 니어엘은 지멘보 다 훨씬 작았고 게다가 강물 속에 서 있었다. 니어엘을 맞추기 위해선 낮게 던져야 하지만 지멘은 그럴 수 없었다. 니어엘을 맞 추지 못할 경우 그의 힘이 담긴 큼직한 돌은 굉장한 물보라를 일 으킬 것이다.
지멘은 이 강의 상류가 건너뛰기 불편할 만큼 급격한 계곡으로 이어진다는 사실과 하류는 지나치게 넓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니 어엘은 정상적인 레콘이 뛰어넘는 것을 감수할 수 있는 유일한 위치에 서 있었다. 물론 지멘은 니어엘의 머리 위를 건너뛰는 것 을 고려할 수도 없었다. 뛰는 동안에는 물통을 피할 수 없고 혹 균형을 잃으면 곧장 물속으로 곤두박질칠 것이다. 지멘은 비통함 마저 느끼며 물이 튀지 않을 거리까지 물러나 돌을 던지는 것을 고려해 보았다. 무의미했다. 빽빽한 자작나무들 사이로 돌을 던 지는 것은 불가능했다.
더 이상 고려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인지, 그렇지 않으면 니어엘이 물통을 회전시키기 시작했기 때문인지는 불확실했 지만 지멘은 튀는 동작으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니어엘은 팔의 회전을 유지하며 지멘을 응시했다. 지멘은 그보다 더할 수 없는 미움을 담은 채 니어엘을 쏘아보았다.
“니어엘 헨로?”
“수교위.”
“니어엘 헨로 수교위. 기억했다.”
지멘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거대하게 부풀어 오르는 지멘을 보던 니어엘은 황급히 한쪽 귀를 틀어막았다. 두 귀를 모두 막아 야겠지만 물통 때문에 한쪽 귀는 지멘의 폭발적인 함성을 고스란 히 받아들여야 했다.
“편하게 죽지는 못할 것이다-!”
니어엘은 막지 못한 귀 쪽에서 통증을 느꼈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 재빨리 손을 흔들며 균형을 잡아야 했다. 그녀가 쓰러지기 라도 한다면 지멘은 강을 뛰어넘을 것이고 니어엘은 절대로 그것 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녀가 정신을 추스르고 다시 바라보았을 때 지멘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다만 자작나무들 사이에 서 엄청난 소음이 들렸다.
지멘이 떠났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린 다음, 니어엘은 회전시키던 물통을 다시 강물 속에 내려놓았다. 물을 뚝 뚝 떨어뜨리며 강 밖으로 걸어 나온 니어엘은 숲을 향해 말했다.
“모존 상전사.”
숲 여기저기에서 해쓱하게 질린 상전사 한 명과 몇 명의 하전 사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할 말을 잃고 그저 감탄에 찬 눈으로 그들의 지휘관을 바라보았다.
“그럼 작전대로 이곳을 지켜라. 지멘은 너를 향해 돌을 던지지 못한다. 지멘을 통과시키지 마라.”
모존 상전사는 굳은 얼굴로 명령을 받았다. 상전사와 나머지 하전사들의 경례를 받은 다음 니어엘은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거기엔 말 한 필과 뭄토가 있었다.
뭄토는 물을 떨어뜨리며 다가오는 니어엘을 보며 깃털을 부풀렸다.
자존심과 힘겹게 싸우던 뭄토는 결국 마지막 순간에 옆으로 두 어 걸음 물러났다. 니어엘은 뭄토에게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게끔 조심하며 말고삐를 끌어당겼다. 니어엘이 말에 오르는 모습을 바 라보던 뭄토가 부리를 열었다.
“야, 수교위. 넌 죽었어.”
니어엘은 손을 들어 자신의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손가락이 잘 움직이는 것을 확인한 니어엘은 뭄토를 돌아보며 의심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확실한 정보입니까?”
“농담할 때가 아니야. 말투는 왜 그 모양이었어?”
니어엘은 빙긋 웃으며 활을 쏘는 시늉을 해 보였다.
“이런 짓을 한 판국에 경어 써 주는 것이 더 우습지 않습니까?”
“맞아. 그래. 레콘에게 그런 짓을 하면 죽는다는 거 몰라?”
“그 전에 제가 체포할 겁니다.”
“허! 그 배짱 마음에 든다. 어, 혹시 그 때문에 여기 왔나?”
“네?”
뭄토는 얼마나 기다려야 니어엘의 바지가 마를지 궁금해하며 말했다.
“여기를 지키는 건 아까 그 상전사랑 몇 명이면 되잖아. 네 계 획도 그런 것이고. 그런데 다른 부하들을 내버려두고 일부러 여 기까지 함께 온 것은 활 쏘는 일을 네가 하려고 한 거 아냐?”
“제 생각엔 그것이 지휘관의 도리인 것 같습니다.”
“착하군. 하지만 그 때문에 다른 부하들이 제때 준비하지 못하는 거 아냐?”
“제 휘하에 그런 부하는 없습니다. 다만 더 지체할 경우엔 약 간 곤란해질 수도 있습니다. 질문할 것이 더 있다면 달리면서 하 면 안 되겠습니까?”
“내가 먼저 가겠어! 그거 뿌리며 달리는 놈 뒤를 따라가고 싶진 않아!”
“좋을 대로 하십시오.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알지요?”
뭄토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앞장서서 달렸다. 니어엘은 물 을 묻힌 채 추적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까지 기다린 다음 말을 출발시켰다.
지멘은 몸을 세 배로 부풀린 채 내려왔던 계곡을 몇 배의 속도 로 올라갔다. 무참하게 꺾인 관목들이 좌우로 쪼개져 길을 만들 었다. 산마루로 다시 접어들었을 때 지멘은 잠시 멈춰 섰다. 숨 이 차거나 힘들었기 때문은 아니다. 견디기 힘들 정도의 흥분을 다스려야겠다는 희미한 자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상해요. 지멘.”
하마터면 지멘은 그 말에 대답할 뻔했다. 자신이 얼마나 흐트 러져 있는지 깨닫고 그는 부리를 꽉 다문 채 아실의 말을 기다렸 다. 숨이 찼던 아실은 조금 후에야 말을 이었다.
“아까 그 방법으로는 당신을 잡을 수 없어요. 그곳으로 지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고작이지요.”
지멘은 그걸로 부족하냐고 외치고 싶었다. 그런 끔찍한 수모에 대해 어떻게 ‘고작’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냐고 다그치고도 싶었다. 그러나 지멘은 아실에게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격노 속에서 아실의 말을 생각해 보았다.
흥분이 가라앉았다. 지멘은 아실의 지적이 정확하다는 것을 깨 달았다. 상대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길은 상대에게 말을 하지 않 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지멘은 부풀어 올랐던 깃털들을 누그러뜨렸다. 그의 부리에서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그 수교위는 함정을 만든 것일까?”
다르게 생각할 수 없었다. 지멘은 자신의 가설을 확신했다. 그 래서 온 길을 되짚어 가다가 소화차와 맞닥뜨렸을 때 지멘은 분 노했지만 당황하지는 않았다.
소화차에는 말이 매어져 있지 않았다. 지멘이 말을 겁줘서 도 망치게 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말들을 어딘가에 풀어 둔 모양 이다. 제국병들이 두꺼워 보이는 방패를 든 채 소화차 주위를 둘 러싸고 있었다. 그들 스스로도 방패를 신뢰하지는 않겠지만 어쨌 든 그런 것이라도 들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소화차 위에는 힘 세어 보이는 제국병들이 양수 손잡이를 붙잡은 채 서 있었다. 소화차 앞쪽에 굳은 표정의 상전사 한 명이 들고 있는 것은 살수관 이었다. 상전사는 창처럼 움켜쥔 살수관으로 지멘을 겨냥하며 말 했다.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시오.”
지멘은 상대방이 상당히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인정해 야 했다. 소화차는 그보다 높은 곳에 있었다. 그 위치는 물줄기를 상당히 멀리까지 쏘아 보낼 수 있다는 장점 이외에 지멘에게 공격당하지 않는다는 장점도 있었다. 접근할 수 없는 지멘이 선 택할 수 있는 공격 수단은 조금 전 강가에서와 마찬가지로 돌을 집어던지는 것뿐이지만 돌에 명중당한 소화차가 파괴된다면 지멘 은 곧 쏟아져 내려오는 물줄기에 직면할 것이다.
소화차가 있는 곳을 제외하면 갈 길은 둘이었다. 반대쪽 산등 성이로 올라가는 길과 강이 있는 평야 쪽으로 내려가는 길이었 다. 지멘은 고민에게 시간을 나눠 주진 않았다. 두려움보다 시간 낭비를 피하기 위해 지멘은 곧장 몸을 돌렸다. 그가 향한 곳은 평야 쪽이었다. 산등성이를 박찬 지멘은 한동안 공중을 날았다. 몇 십 미터는 떨어진 곳에서 다시 땅에 발을 디딘 지멘은 그대로 산 아래를 향해 달음박질쳤다.
상전사는 한숨을 내쉬고는 살수관을 다시 소화차 옆의 고리에 걸었다. 그의 짧은 명령이 떨어지자 방패를 들고 있던 하전사들 이 달려갔다. 조금 후 하전사들은 말들을 끌고 돌아와서 소화차 에 연결했다.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된 소화차는 지멘의 뒤를 따 라 천천히 움직였다. 따라잡기엔 형편없이 느렸지만 상전사는 걱 정하지 않았다. 지멘이 달아날 길은 없었다. 그래서, 그토록 위 험한 인물에게 가까이 접근하고 싶지 않다는 거부감도 함께 작용 하여, 상전사가 이끄는 소화차는 꽤 느긋한 속도로 지멘을 추적 했다.
산 아래로 내려서던 지멘은 다시 한번 높이 도약했다. 앞쪽의 나무들을 피하고 지형을 살펴 두기 위해서였다. 곧장 달리면 강 과 맞닥뜨릴 터였으므로 지멘은 어느 쪽으로든 방향을 바꿔야 했 다. 강의 상류로 이어지는 서쪽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곳으로 가는 길도 나빴거니와 상류로 계속 올라가다간 니어엘이 활을 들고 기다리고 있는 장소에 도달할지도 몰랐다. 도약을 끝내고 지 상에 도달했을 때 지멘의 몸은 동쪽을 향해 있었다.
하지만 지멘은 달리지 않았다.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산을 따라 동쪽으로 가는 길과 강을 따라 동북쪽으로 가는 길 두 가지가 있 었다. 어차피 강을 건너야 한다면 강을 따라가는 편이 좋을 것이 다. 하지만 지멘은 이 강의 하류 쪽에 레콘이 건널 만한 장소가 있는지 알지 못했다. 강을 따라가지 않는다면 산을 따라 동쪽으 로 간 다음 산 남쪽으로 크게 돌아가는 길이 있었다. 그것은 왔 던 길을 엄청나게 돌아가는 길이었다. 어느 쪽도 선택하기 쉽지 않았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대신, 지멘은 망치와 도끼 끝으로 땅바 닥을 짚은 채 자신이 곤란한 처지에 빠졌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노력했다. 상황을 타개하려면 먼저 상황을 인정해야 한다. 당연 한 일이지만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쉽게 행하지 못하는 일이 며, 지멘 또한 분노의 표출 쪽에 더 매력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애써 자신을 달랬다.
노력의 결실이 있었다. 지멘은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난감한데.”
자신이 미력한 인간에 의해 난관에 봉착했음을 인정하는, 참으 로 극기의 결과라 할 수 있는 아름다운 토로에 대해 별로 아름답지 않은 대답이 들려왔다.
“토할 것 같아요.”
지멘은 황급히 배낭을 벗어 땅에 내려놓았다. 아실은 감사의 의미로 목례하고는 배낭에서 기어나왔다. 두 무릎과 두 손으로 땅을 짚은 채 아실은 한동안 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구토하지 는 않았다. 그녀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내둘렀다.
“다른 사람이라면 기절했을 거예요. 당신 등에 오래 탄 저니까 버텼지.”
지멘은 아실의 투덜거림을 못 들은 체하며 주위를 살폈다. 그 리고 지멘은 조금 전에 찾지 못했던 뾰족한 수가 새로 등장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강을 따라가거나 산을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배낭을 붙잡으며 일어난 아실도 같은 결론을 내렸다.
“산을 따라가도록 해요. 굉장히 많이 돌아가야겠지만 그래도 그쪽이 확실한 길이군요. 수교위라면 중대를 지휘하고 있을 테니 까 소화차는 한 대뿐일 테고, 그러니 그쪽을 또 막지는 못할 거에요.”
지멘 또한 그 의견에 동의했다. 하지만 그 계획에는 그들이 알 지 못하는 한 가지 판단 착오가 내포되어 있었다. 동쪽을 향해 한 시간쯤 달렸을 때 지멘은 급하게 멈춰 섰다. 아실은 의아해하 며 지멘의 어깨 너머로 앞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판단 착 오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보며 숨소리를 낮췄다.
그들 앞의 언덕 위로 소화차가 나타났다. 소화차를 따르던 제 국병들은 아실과 지멘의 모습을 확인하자 즉각 소화차를 멈추고 말을 풀었다. 그리고 소화차 주위를 둘러쌌다. 그들이 공격 태세 를 갖추는 것은 분명했지만 지멘은 그 사실에 반응할 수 없었다. 그가 인지할 수 있는 사실은 그 소화차가 한 시간 전에 본 것과 다른 것이라는 사실뿐이었다. 그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분명했다. 지멘의 곁에 서서 언덕 위를 바라보던 아실도 약간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화차를 두 대 가지고 있었군요. 그렇다면 세대나 네 대일 수도 있겠는데요.”